< 외자은행 1 >
차무연은 경남 출신의 여당 정치인이었다.
그는 4년 전에 열린 부산시장 선거에서 낙마한 전력이 있었다.
그러나 도리어 그 점이 높은 점수를 부여받는데 한몫했다.
민진당의 영향력이 전무한 부산 시장 선거에 사비를 들여 자발적으로 참가한 덕분이었다.
그런 탓일까? 김대중 대통령은 박노갑의 거듭된 주장에 점차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람도 쓸 만하고, 경남 출신이니 이해창을 충분히 상대할 가능성이 있기는 한데······.’
김대주는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널 만큼 신중한 성격이었다.
‘좀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그는 박노갑에게 가타부타 말없이 돌아가라는 손짓을 해 보인 뒤 관저 안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
사무실에 들어가자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보고서가 보였다.
의자에 좌정한 뒤 보고서를 펼쳤다.
보고서 안에는 슈퍼스타 드림이란 가제가 붙은 오디션 프로그램의 개요가 대략적으로 적혀 있었다.
특히 내 이목은 국내 최고의 보컬로 이름 높은 이승천에로 향했다.
이승천은 대한민국 최강의 감성보컬이었다.
그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감탄스러울 지경이었다.
김재연은 이승천을 오디션 프로의 얼굴마담으로 내세울 계획이었다.
그리고 윤종선을 보조 진행자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
윤종선은 자타가 공인하는 싱어송 라이터였다.
이승천과 잘 어울리는 심사위원이었다.
모두 마음에 드는 인물이었다.
다음 장을 넘기자 전국 각지에서 예선을 진행한 후 서울에서 결선리그를 펼치는 내용이 일목요연하게 쓰여 있었다.
보고서는 나름 괜찮았다.
마음에 들었다.
곧바로 김재연을 회장실로 호출했다.
재연이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이 녀석은 나보다 나이가 어렸다.
그런 탓으로 속 편하게 말을 놓아도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없었다.
“슈퍼스타 드림의 총예산이 어느 정도지?”
“우승상금과 부상, 앨범 제작비, 예선과 결선 비용, 심사위원 출연료, 공연 대관료를 총합할 경우 대략 60억 원 안팎의 자금이 소요될 것으로 사료되고 있습니다.”
“공연 대관료가 왜, 필요하지? 오투 아레나가 있잖아.”
“아직 막바지 공사가 한창이라 공연장으로 활용하기에는 시일이 촉박합니다.”
“어차피 공연장은 결선 무대에서나 필요한 거 아닌가?”
“그야 그렇지만······.”
“당신은 이래서 문제야. 한 푼이라도 예산을 아낄 생각을 해야지. 자기 돈이 아니라고 회삿돈을 막 쓸 생각인가?”
내 입에서 엄한 질책이 쏟아지자 재연이 겁먹은 얼굴로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재무실장이 뭐라는지 알아. 드라마국과 예능국 인간들이 회삿돈을 물처럼 펑펑 쓴다고 난리를 치고 있다고. 그러니까 알아서 잘해. 이 개자식들아!”
성난 목소리를 토해내자 재연이 허리를 더욱 숙였다.
“송구합니다. 회장님.”
“죄송합니다. 송구합니다. 등의 입에 발린 말을 하기 전에, 회삿돈을 아낄 생각을 하라고. 내 돈을 타 먹으면 그에 합당한 돈값을 하라고!”
격한 언성을 쏟아낸 뒤 김재연을 회장실에서 내보냈다.
직후 주 실장을 호출했다.
“오늘 일정을 말해 봐.”
“칼라일 사모펀드의 체이스 회장님과 힐튼 호텔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겸한 오찬회동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 인간이 나를 만나려는 이유가 뭐야?”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긴, 주 실장이 알만한 일이 아니지. 물어본 내가 바보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당신이 미안해할 필요는 없는 거야. 그건 그렇고, 다음 일정이나 말해 봐.”
“오후 5시경에 가평 사격장에서 김앤박 로펌의 김성우 대표와 클레이 사격을 즐길 예정입니다.”
“그다음 일정은 뭐지?”
“저녁 8시에 주한미국 대사관에서 열리는 신년 파티에 참석하시면 됩니다.”
“지금 몇 시지?”
“오전 11시 10분입니다.”
“슬슬 레스토랑으로 갈 시간이군.”
“그렇습니다. 회장님.”
“차를 준비시켜.”
주 실장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뒤 장내에서 재빨리 사라졌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자 주 실장과 경호원들이 보였다.
일반 회사였다면 1층 정문에서 위풍당당한 모습을 연출해도 상관없었지만 드림 케이블은 만인의 귀감이 되는 방송국이었다.
일반 사기업처럼 회장이라고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대중들에게 드러내 보였다간 인터넷에서 온갖 쌍욕을 처먹을 것이 불 보듯 훤했다.
그런 탓으로 아쉽지만 언제나 지하 주차장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습관이 된 탓에 별다른 불만은 없었다.
롤스로이스 뒷자리에 몸을 싣자 주 실장이 내 옆자리에 재빨리 올라탔다.
언제 어디를 가든 주 실장은 나를 바짝 따라붙었다.
바늘과 실처럼.
힐튼 호텔 강남지점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주 실장에게 넌지시 물었다.
“비서 노릇 하는 게 힘들지 않아?”
그러자 그가 별일 아니라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회장님.”
“휴일에도 일이 있으면 나를 수행하는 관계로 나름 고충이 많을 거 같은데?”
“이미 적응된 탓에 별다른 문제는 없습니다. 그리고 큰일을 하시는 회장님을 모시는 일인지라 저 나름대로 자부심도 갖고 있습니다.”
주 실장은 안 그런 척하면서 은근히 아부가 백단이었다.
내 마음에 쏙 드는 말만 골라 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녀석의 연봉을 대폭 올려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 정도로 주 실장은 아첨의 달인이었다.
어느덧 차가 힐튼호텔에 도착했다.
우리 일행은 약속 장소인 2층 레스토랑으로 올라갔다.
수행원들을 뒤로 물린 채 창가 테이블에 앉아 있는 백인 남자에게 다가갔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체이스 회장님.”
의례적인 인사말을 던지자 체이스가 나에게 악수를 청해왔다.
“저 역시 마찬가집니다. 이 회장님.”
우리는 악수를 교환한 뒤 스테이크와 깊은 맛이 일품인 칠레산 포도주를 곁들이며 본격적인 담론에 접어들었다.
체이스의 입에서 뜻밖의 언사가 흘러나왔다.
“외자은행을 인수할 생각입니다. 그런 이유로 회장님을 뵙자고 청을 넣은 겁니다.”
외자은행은 국책 은행이었다.
그럼에도 체이스는 인수를 자신하는 태도였다.
“쉬운 일이 아닐 텐데요?”
“이미 사전에 충분히 교감이 오간 상황입니다. 그러니 회장님께서도 저희 펀드에 돈을 태우시죠.”
칼라일 그룹은 대규모의 사모펀드를 운용하는 월가 굴지의 투자집단이었다.
그들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인수합병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당연히 칼라일 그룹의 배후에는 미국 정가의 실력자들이 두루 포진한 상태였다.
체이스 회장이 이리 말할 정도면 외자은행 인수는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한국 정부는 미국의 힘을 등에 업은 칼라일 그룹을 결코 당해낼 수 없었다.
“인수 예상 금액을 알려주십시오.”
“미화로 20억 달러 안팎을 투자할 생각입니다.”
“지금 현재 어느 정도의 투자금을 모집한 상황인가요?”
“애석하게도 벌려놓은 인수합병이 너무 많은 탓에 투자금이 태부족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회장님에게 투자를 해주십사 요청하는 겁니다.”
“정확한 수치를 알려주십시오. 그래야 저도 올바른 판단을 할 거 아닙니까?”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지금 현재 2억 달러 정도의 투자금을 모은 상황입니다.”
“18억 달러가 부족하다는 얘긴가요?”
“그렇습니다.”
중요한 건 에상 수익이었다.
“외자은행을 인수한다면 어느 정도의 투자수익을 얻을 수 있죠?”
“대규모의 주식배당과 재매각 대금을 총합할 경우 최소 40억 달러 이상의 시세차익을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체이스는 한화로 5조 원이 넘는 어마어마한 투자수익을 확언했다.
그런 탓인지 절로 구미가 동했다.
“내가 18억 달러를 투자한다면 수익배당을 얼마나 해주시겠습니까?”
“최소 30억 달러 내외의 수익을 회장님에게 안겨 드리겠습니다.”
양놈의 말이 사실이라면 더 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회장님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그럼 마음이 결정되시면 저에게 즉시 연락을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가평 사격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체이스의 제안을 심사숙고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칼라일 사모펀드에 돈을 태우는 게 올바른 투자라고 생각됐다.
칼라일 그룹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본가 집단이었다.
그들이 마음먹는다면 외자 은행 인수는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단 외자은행에 대해서 나름대로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이런 일은 김앤박 로펌이 전문이었다.
사격장에 도착한 뒤 김앤박의 김성우 대표에게 내 의중을 전달했다.
“외자은행의 재무회계에 대해서 조사를 진행해 주십시오.”
김성우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그럴 만한 사유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유는 묻지 말아 주십시오.”
김성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뒤 ‘스타트‘라는 단어를 힘차게 토해냈다.
순간 서너 개의 원반들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탕탕탕탕······!
***
김성우 대표는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세무회계 전문 변호사인 박영곤을 호출했다.
“외자은행의 재무 상태를 면밀히 조사해 봐.”
“외자은행을 말입니까?”
박영곤이 되묻자 김성우가 짜증이 묻어나는 얼굴로 신경질적인 어조를 내뱉었다.
“이유는 묻지 말고 지금 당장 외자은행을 머리끝 부터 발끝까지 탈탈 털어!”
성우가 성질을 내자 영곤이 군기가 바짝 든 얼굴로 복명했다.
“넵. 대표님.”
***
상암동 드림 케이블 본사.
육중한 마호가니 책상에 좌정한 채 산더미처럼 쌓인 결재서류에 미친 듯이 회장 직인을 찍을 무렵, 주 실장이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명함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주 실장이 건넨 명함을 살피자 절로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연대 관계자의 명함이었다.
기부금을 강요하기 위해 나를 찾은 모양이었다.
“일 없으니까, 그냥 내보내.”
“회장님의 모교 아닙니까? 나중에 뒷말이라도 나오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당신은 신경 쓰지 마라. 내가 알아서 하니까.”
주 실장은 내보내자마자 수북이 쌓인 결재서류에 차례로 회장 직인을 기입했다.
결재서류를 모두 처리한 후 한 잔의 커피를 차분히 음미할 즈음 인터폰에서 이미경 대리의 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앤박 로펌의 박영곤 변호사가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들여보내세요.
-네. 회장님.
30대 중반의 남자가 내 앞에 나타났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정중히 인사를 해왔다.
“김앤박 로펌의 박영곤 변호삽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단 자리에 앉으시죠.”
“네. 회장님.”
영곤은 소파에 앉자마자 서류 가방에서 두툼한 서류철을 꺼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게 뭐죠?”
“외자은행의 재무 상태를 기록한 서륩니다.”
“조사 결과를 말해 보십시오.”
“국책은행이라 그런지 나름 견실한 자기자본비율(BIS을 유지하고 있더군요.”
IMF는 자기자본비율이 일정 수준 이하의 은행들에 대해서 폐업 혹은 매각할 것을 한국 정부에 강요하고 있었다.
그러나 외자은행은 여전히 견실한 자기자본비율을 유지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칼라일 그룹이 외자은행을 인수하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허나, 체이스 회장은 외자은행 인수를 확신하고 있었다.
뭔가 단단히 믿는 구석이 있는 눈치였다.
박변을 내보낸 후 신은서의 폰에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에서 은서의 귀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지금 뭐 해?
-학교에서 연기 수업 중이에요.
그녀는 대학교에서 연극영화과를 전공하고 있었다.
-밥 사줄 테니까 지금 당장 상암동으로 와라.
당연히 은서는 내 명령을 거부하지 못했다.
-네. 회장님.
사무실 밖으로 나가자 주 실장이 내 앞에 나타났다.
“차를 준비시킬까요?”
“오늘은 나 혼자 움직일 테니까 당신도 시간 되면 퇴근해.”
주 실장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퇴근 본능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고맙습니다. 회장님.”
“지하 주차장에 내가 탈 만한 차가 있나?”
“회장님 자택에서 가져온 벤틀리 차량이 있습니다.”
“차키를 갖고 와.”
“네.”
주 실장이 가져온 차키를 챙기자마자 지하 주차장으로 곧장 내려갔다.
벤틀리를 상암동 인근의 DMC역으로 몰아갔다.
그러기를 얼마 후, 지하철 역사에서 은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몸에 달라붙는 스키니 진과 가죽점퍼를 입고 있었다.
은서의 탐스러운 애플힙 과 육감적인 각선미가 망막가득 스며들었다.
그녀는 내가 좋아라하는 타고난 베이글이었다.
< 외자은행 1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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