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자은행 3 >
맨해튼 모처의 업무용 빌딩으로 들어가자 칼라일 그룹의 관계자들이 나를 영접했다.
그들은 나를 탑층에 위치한 사무실로 안내했다.
사무실 소파에는 체이스 회장과 낯익은 동양 남자가 앉아 있었다.
웃는 낯으로 체이스와 악수를 교환한 뒤 동양인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러자 그의 입에서 익숙한 한국말이 흘러나왔다.
“조용현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태수 회장님.”
그는 내 정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조용현이란 이름과 그의 얼굴을 방송에서 접한 기억이 떠올랐다.
조용현은 김대주 정부 초기 경제 현안을 진두진휘한 총책임자였다.
그런 인물이 이런 자리에 있다는 게 쉬이 믿기지 않았다.
“미스터 조는 외자은행 인수합병에 없어서는 안 될 주요 인물입니다. 그러니 이 회장도 그와 주기적으로 의견을 교환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하하하······.”
체이스는 그리 말하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미 그들은 모종의 합의를 본 모양이었다.
“아시다시피 미스터 조는 한국 경제를 움직이는 경제부처의 고위 관료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분입니다. 정권이 바뀌더라도 그같은 점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체이스의 말대로 한국은 고위 관료들이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새로운 대통령이 청와대에 입성한다 해도, 주요 정책을 입안 하고 실행하는 관료들은 결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외자은행 인수를 1년 안에 완료할 생각입니다.”
조용현의 믿음직한 확언이었다.
나는 그날, 칼라일 사모펀드에 총 19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자금을 고스란히 이체했다.
***
트램프 타워.
로열 스위트룸에 들어가자 을씨년스런 한기가 느껴졌다.
1년 이상 집을 비운 탓이었다.
차라리 호텔이 나을 정도였다.
그런 탓인지 이 집을 팔고 싶은 욕구가 내면에서 활화산처럼 터져 나왔다.
마음을 먹자마자 루카스 부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트램프 타워 로열 스위트룸을 시장에 매물로 내놓을 생각입니다.
-요즘 뉴욕 부동산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습니다. 좀 더 묵히시는 게 어떠신지요?
-됐습니다. 그냥 팔고 싶으니까 최단 시일 내에 거래를 완료해 주십시오.
-정 그러시다면, 말씀대로 시장에 매물로 내놓겠습니다.
-매각 대금은 TS 인베스트먼트 계좌로 이체해 주세요.
-네. 회장님.
***
서울 시내 한적한 주택가에 김용댓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각오로 오성미 작가의 집 대문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초인종을 누르자 오성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시죠?
-드림 케이블의 김용대 국장입니다.
-약속도 없이, 왜 저를 찾아오신 거죠?
-꼭 전할 말이 있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그러니 문을 좀 열어 주십시오.
-알겠어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몇 분 뒤, 대문가에 오성미가 나타났다.
“집에서 얘기하는 건 좀 그러니까 요 앞에 있는 카페로 가시죠.”
성미의 말에 용댓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곧장 카페로 들어갔다.
창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자마자 용댓가 용건을 꺼냈다.
“SBC 방송과 드라마 계약을 체결할 생각인가요?”
“아무리 봐도 그래야 할 거 같아요. 시청률이 좋아야 이 바닥에서 살아남잖아요.”
“1화당 얼마를 받기로 하셨습니까?”
“그런 것까지 꼭 말해야 하나요?”
“일단 말씀해 주십시오. 그래야 저희 쪽도 제안할 거리가 생기는 거 아니겠습니까?”
“좋아요. 어차피 알려질 일, 제 입으로 직접 말씀드리죠. 편당 9백만 원을 받기로 했어요. 이제 됐나요?”
용대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그려졌다.
“우리 방송국과 계약을 하신다면 편당 최소 1천 8백만 원을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성미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입에서 심드렁한 답변이 흘러나왔다.
“미안하지만 제 결심은 변함이 없어요. 그러니 이만 물러가 주세요.”
“두 배 이상의 원고료도 성에 차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제야 성미가 본심을 드러냈다.
“편당 최소 2300만 원 이상을 약속해 주세요.”
용대의 얼굴에 똥 씹은 표정이 떠올랐다.
“너무 욕심을 부리시는 거 아닙니까? 일일 드라마는 초장편이라 편당 2천만 원 이상을 지불한 전례가 없습니다.”
“시청자를 확보하는 게 여의치 않은 케이블 방송에, 피 같은 제 작품을 헐값에 넘길 수는 없어요.”
그녀의 입에서 완강한 언사가 쏟아져 나왔다.
“더 이상 국장님께 드릴 말씀이 없어요. 그럼 이만 실례할게요.”
성미는 쌀쌀맞은 태도를 끝까지 견지하며 카페에서 유유히 몸을 감췄다.
***
상암동 드림 케이블 본사.
사무실에서 결재서류에 회장 직인을 날인할 무렵, 김용대 국장이 나타났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회장님.”
“할 말이 뭐죠?”
“오성미 작가 건입니다.”
“본론만 말하세요.”
“오 작가가 원고료로 편당 2300만 원을 원하고 있습니다.”
“일일 드라마 원고 시세가 어느 정도죠?”
“오 작가의 경우 1류에 살짝 못 미치는 케이스라 편당 1천만 원 내외가 적정선입니다.”
오성미는 시세보다 높은 고료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 이하의 가격으로는 우리 방송사와 계약할 의사가 없음을 확실히 밝혔습니다.”
“1백 편 곱하기 2300만 원이라······.”
“총합 23억 안팎입니다.”
용대는 내가 묻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답변을 해왔다.
나를 셈도 제대로 못하는 팔불출로 아는 모양이었다.
살짝 기분이 언짢아졌다.
“당신이 답하지 않아도 잘 아니까 너무 앞서 나가지 마십시오.”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내비치자 용댓가 송구한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시면 됐어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소녀팬들이 구름떼처럼 운집한 채 음악방송에 출연하는 아이돌 그룹을 뜨겁게 환영하는 광경이 시야에 포착됐다.
그녀들의 열광적인 기운 탓인지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보였다.
더불어 23억이 그리 큰돈이 아님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드림 케이블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대박 드라마가 절실했다.
인어 아기씨는 드림 케이블 역사에 한 획을 긋는 대박 드라마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성미의 요구를 수용하기로 결심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대박 드라마가 그 정도로 절박했던 탓이었다.
“오성미에게 편당 2300만 원에 달하는 고료를 지급하겠다는 내 의중을 전달하세요.”
“너무 과한 액숩니다. 회장님.”
“돈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당신은 오 작가와 하루빨리 계약을 체결하세요.”
용댓가 체념한 얼굴로 복명했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하용수 법무실장을 붙여드릴 내일 당장 계약서를 작성하세요.”
“넵. 회장님.”
***
타워필리스 펜트하우스로 거처를 이전했다.
나머지 3채의 펜트하우스는 당분간 빈집으로 놔둘 생각이었다.
전세 따위를 들이는 일은 내 관심 밖이었다.
서민 나부랭이들과 엮여봤자 좋을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
주말 무렵.
장준기 전무가 급한 일이 있다며 면담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결국 그를 타워필리스 펜트하우스로 불러들였다.
장준기는 휘황찬란한 펜트하우스의 전경에 입을 떠억 벌린 채 연신 찬사를 쏟아냈다.
“정말 집이 좋으십니다. 고풍스러운 인테리어와 탁월한 조망을 두루 겸비한 최고급 아파트 같습니다.”
녀석의 입에 발린 찬양은 계속 이어졌다.
“회장님의 고매한 인품과 잘 어울리는 매우 훌륭한 펜트하우스라고 생각합니다. 헤헤······.”
싫지 않은 기분이었다.
아부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탓이었다.
“라운지 바에서 술이나 한잔합시다.”
준기가 반색하는 얼굴로 화답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우리는 거실 한켠에 마련된 라운지에서 진토닉을 음미하며 본격적인 담론에 접어들었다.
“정필름의 정해민 대표가 말을 갈아탔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다른 창업투자사에서 거액의 영화제작비를 지원받은 모양입니다.”
“내 제안을 뿌리친 이유가 뭡니까?”
“정 대표는 대박 엔터 소속 배우들에게 배역을 주는 걸 무척 꺼려했습니다. 이미 조연 자리가 전부 꽉 찼다면서 볼멘소리를 자주 한 전력이 있습니다.”
“내가 누군지 알면서 그런 개짓거리를 한 겁니까?”
“일단 정필름에 투자한 창업투자사가 어딘지 알아봐야 할 거 같습니다. 아무래도 낌새가 요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상영관 점유율이 60프로에 달하는 우리 드림박스를 본체만체 한다는 게 이성적으로 말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화 사업은 상영관 확보가 우선이었다.
상영관을 확보하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영화를 만들어도 흥행에 성공하지 못한다.
그런 사실을 잘 아는 정해민 대표가 내 투자 제안을 뿌리쳤다는 건 나에 맞먹는 거물이 중간에 끼어들었다는 의미였다.
장준기는 바로 그 점을 말하고 있었다.
“창업투자사가 어딘지 최단 시일 안에 알아내세요.”
“넵. 회장님.”
장준기를 내보낸 뒤 김용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에게 긴히 전할 말이 있었다.
-드라마와 영화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프로덕션을 설립하세요.
-영화까지 직접 제작하실 생각입니까?
-기회가 되면 그래야 할 거 같습니다. 투자가 여의치 않을 때는 우리가 직접 영화를 제작하는 게 좋을 거 같더라고요.
-일리가 있는 말씀이지만 프로덕션을 만든다면 고정 인력이 필요합니다.
-돈 걱정은 마시고 시나리오 작가와 촬영인력을 끌어모으세요.
-말씀대로 일을 추진하겠습니다.
통화를 끝마친 후 명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타워필리스로 와라. 할 말이 있으니까.
-집들이라도 할 생각이냐?
-그냥 어여 와라. 술이나 한잔하자.
-오케이. 조금만 기다려.
40분 뒤, 명우가 펜트하우스에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은 재벌 후계자 출신답게 펜트하우스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인테리어가 너무 싸구려틱 한데. 삼송건설도 맛탱이가 갔구만. 이런 걸 펜트하우스라고 떠억하니 팔아먹다니.”
“그래도 한국에서는 나름 제일 좋은 곳이니까, 헛소리는 그만하고 술이나 빨자.”
우리는 라운지 테이블에 나란히 앉은 채 양주를 물처럼 들이키며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문득 명우의 입에서 거북스런 질문이 흘러나왔다.
“제수씨랑 민준이 보러 뉴욕에 안 가냐?”
녀석은 내가 그들을 내친 사실을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에게 솔직히 털어놓을 시점이었다.
“오래전에 친정으로 돌려보냈다.”
명우가 놀란 얼굴로 반문했다.
“헤어진 거야?”
“친자검사를 해보니까 민준이가 내 아들이 아니더라. 그래서 깔끔하게 갈라섰다.”
녀석의 얼굴에 나를 안쓰러워하는 표정이 번져갔다.
“미안. 쓸데없는 걸 물어본 모양이네.”
“됐다. 나중에 기회 되면 너에게 말할 생각이었으니까 마음 쓰지 마라.”
“그래도 괜히 미안하다. 이해해라. 친구야.”
“신경 쓰지 말라니까. 그건 그렇고, 요즘 장서연이랑 살림을 차렸다면서?”
“눈치챘냐?”
“방기훈이 언질을 하더라. 너랑 장서연이 좋아죽는 사이라고.”
“그놈은 입이 드럽게 싸서 탈이라니까.”
“내가 박아놓은 친구니까 해고할 생각은 절대 하지 마라.”
“안다. 알아. 자식아. 에휴······.”
명우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입가에 한 담배를 물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사이좋게 줄담배를 태우며 이런저런 얘기를 길게 늘어놓았다.
자연스럽게 우리 관심은 인어 아기씨로 향했다.
“촬영은 어때?”
“대본도 다 나온 상황이라 그런지, 별다른 잡음 없이 촬영이 진행되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
“걱정은 안 해. 단지 니놈이 땡깡을 부릴까 봐 그게 우려될 뿐이지.”
“자식아. 형이 세 살 먹은 애냐. 어련히 알아서 잘하고 있다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그러라고 연봉이랑 판공비를 3억씩이나 챙겨주는 거잖아.”
“치사하게 또 돈 타령이냐?”
“치사고 나발이고 돈을 받아먹었으면 그에 걸맞게 일을 하는 게 인지상정이야. 새겨들어라.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금과옥조니까.”
“알았다니까. 오늘따라 잔소리가 왜 그리 많은 거야?”
명우가 뿔난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눈에 힘 풀어. 지금부터 중요한 말이 나갈 타임이니까.”
내 말이 떨어지자 녀석이 언제 그랬냐는 듯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할 말이 뭔데?”
“조만간 드라마와 영화를 제작하는 프로덕션을 만들 생각이거든. 그래서 말인데 네가 프로덕션도 책임지는 게 어때?”
명우의 두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그 일을 맡으면 연봉이랑 판공비도 올려주는 거냐?”
“연봉이랑 판공비 합해서 연간 4억씩 챙겨줄게.”
“쓰는 김에 좀 더 써라. 돈도 억수로 많은 놈이 왜 그리 쩨쩨하게 노는 거냐?”
“하기 싫음 말아라. 다른 사람을 알아볼 수 밖에.”
그리 말하자 녀석이 애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임마. 너는 농담도 이해 못 하냐? 헤헤헤······.”
“진작 그럴 것이지. 술이나 한잔 따라봐라.”
명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빈 술잔에 진토닉을 한가득 따라 부었다.
진토닉을 원샷한 뒤 지갑에서 장준기 전무의 명함을 꺼내서 녀석에게 건네주었다.
“이 사람이 누구냐?”
“드림 박스의 장준기 전무다. 프로덕션 설립을 준비 중인 실무자니까 앞으로 그 인간이랑 자주 만나서 의견을 교환해.”
“그냥 나 혼자서 일을 추진하면 안 될까?”
“장 전무는 이 바닥에 발이 넓은 사람이야. 그러니 잔말 말고 그의 도움을 받아.”
그 말을 끝으로 명우를 집 밖으로 내보냈다.
< 외자은행 3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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