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킨 게임의 서막 3 >
타워필리스 펜트하우스.
창밖에 드리워진 둥근 만월에 이목을 집중할 무렵, 사람의 인기척 소리가 들려왔다.
직후 명우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강태호가 일거리를 달라고 난리를 치더라.”
명우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입가에 한 담배를 물었다.
녀석은 담배 연기를 모락모락 피워 올리며 말을 이었다.
“강태호에게 일거리를 주는 게 어때?”
“내가 왜?”
“사냥개는 주기적으로 사냥을 시켜줘야 탈이 안 나는 법이라구.”
“일이 없잖아.”
“일거리가 없어도 관리 차원에서 용돈을 던져주는 게 좋아.”
“꼭 그래야 하는 거냐?”
“재수 없으면 그놈이 너를 물 수도 있는 거야. 그 점을 염두에 둬야지.”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강태호는 비밀스런 내 명령을 수차례 이행한 인물이었다.
그놈이 나에게 억하심정을 품기라도 한다면 골치가 아파질 게 자명한 이치였다.
“알았다. 나 대신 그놈을 만나서 용돈이나 집어줘라.”
“잘 생각했다. 그리고 김태섭 있잖아.”
“그놈 얘기는 뭐 하러 하는 거야?”
“김태섭한테 너무 함부로 하지 마라. 그래도 명색이 차장검사다.”
“형이 알아서 하니까 신경 꺼.”
“임마. 너무 세게 나가면 탈이 난다니까. 그러니 쉬엄쉬엄 상대하라고.”
“잔소리는 그만하고 돈이나 챙겨.”
책상 서랍에서 양도성 예금증서 3억 원어치를 꺼내서 명우에게 건넸다.
“1억은 강태호한테 주고, 나머지 2억은 김태섭에게 전달해.”
“그래도 뒤가 좀 켕기는 모양이네. 태섭이 놈한테 돈을 주는 걸 보니까.”
“조금.”
***
김태섭은 어느 정도 마음이 풀렸다.
이태수가 건넨 2억 원에 달하는 돈 때문이었다.
홧김에 그를 들이박을까도 생각해 봤지만, 그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태수에게 받아먹은 돈이 한두 푼이 아닌 탓이었다.
태섭은 이태수와 끝까지 같이하기로 굳게 다짐했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만한 스폰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검사장은 물론이고 국회의원 뱃지까지 달아준다고 했으니까 보채지 말고 얌전히 기다리자.’
그의 두 눈이 뜨거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
김소민은 이태수의 막강한 영향력에 연일 놀라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스폰을 받아들인 이후 어디를 가더라도 왕비나 공주처럼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PD는 물론이고 작가마저 신인배우에 불과한 소민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녀가 이태수의 여자라는 사실을 암암리에 파악한 탓이었다.
소민은 이번 기회에 반드시 탑 여배우가 되기로 굳게 다짐했다.
***
상암동 드림 케이블 본사.
24층 회의실로 들어가자 고위 간부들이 나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그들을 본체만체하며 상석에 자리를 잡았다.
인사실장 이웅진이 모두발언을 시작했다.
“금년 3월경에 PD 직군과 광고 홍보, 미케팅 부문에 종사할 공채 신입사원을 120명가량 선발할 예정입니다.”
나는 드림 케이블 방송사를 명문대 출신자들로 꽉 채울 생각이었다.
“명문대를 졸업한 놈들만 원서를 통과시켜.”
“안 그래도 서울대와 연고대, 서강대, 성균관대, 한양대 출신자들 위주로 공채사원을 선발할 계획입니다.”
IMF가 휩쓸고 지나간 한국은 심각한 취업난을 겪고 있었다.
명문대 출신의 실업자들이 길거리에 널린 상황이었다.
그들 입장에서 드림 케이블은 아주 좋은 직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
꽃피는 춘삼월이 도래했다.
그런 탓인지 드림 케이블은 아주 바쁘게 돌아갔다.
슈퍼스타 드림이 절찬리에 첫방을 시작한 것이다.
또한 신입사원 공채 면접 역시 연일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었다.
상암동 드림 케이블.
지하 3층으로 내려가자 방송에 환상을 품은 명문대 졸업생들이 복도를 점거한 채 잔뜩 긴장한 얼굴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모습이 시야에 포착됐다.
나는 그들을 본체만체하며 면접장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면접장 안에는 인사실장 이웅진과 김용대, 김재연 등이 있었다.
녀석들의 공손한 인사를 뒤로 한 채 정중앙에 마련된 푹신한 의자에 착석했다.
옆자리에 배석한 이웅진에게 명령을 내렸다.
“면접을 진행합시다.”
“네. 회장님.”
이웅진은 그리 화답하며 장내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인사팀 직원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잠시 후, 너덧 명의 신입사원 후보들이 면접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유일한 홍일점인 20대 아가씨에 절로 시선이 향했다.
그녀가 이뻐서가 아니라 칙칙한 남자들 사이에 끼어 있는 탓에 절로 눈길이 간 탓이다.
그녀의 가슴에 내걸린 이름표에는 ‘박수란‘이란 성명이 적혀 있었다.
수북이 쌓인 이력서에서 박수란을 찾아낸 뒤 학벌을 유심히 살폈다.
그녀는 연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내 직속 후배였다.
볼 것도 없었다. 그녀는 무조건 합격이었다.
곧바로 내 의중을 메모지에 적어서 이웅진 인사실장에게 건넸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김용대와 김재연에게 조곤조곤한 귓속말로 내 본심을 전달했다.
이웅진과, 김용대, 김재연은 박수란에게 시종일관 친절한 태도로 면접을 진행했다.
반면 나머지 신입사원 후보들에겐 가시 돋친 언사를 쉴 새 없이 내뱉었다.
“길바닥에 널린 게 고학력 백수에요. 댁들이 아무리 좋은 대학을 나왔다고 해도 방송은 학벌로 하는 게 아닙니다.”
김용대의 말에 김재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이 바닥은 학벌보단 끼가 넘치는 인재가 필요합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의 끼를 지금 이 자리에서 유감없이 펼쳐보세요. 노래나 춤 아무거라도 좋습니다.”
직후 박수란을 필두로 신입사원 후보자들이 저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기나 열정적인 춤사위를 펼치는데 사력을 다했다.
방송사라 그런지 일반회사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면접이 진행됐다.
나름 흥겨운 광경이었다.
면접은 김용대와 김재연이 거의 주관하다시피 했다.
방송사 짬밥이 만만찮은 탓이었다.
나는 그저 의자에 편히 앉은 채 마음에 드는 친구들이 있으면 메모지에 이름을 적어서 돌리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런 탓인지 금세 면접이 지겨워졌다.
이렇다 할 재미를 느끼지 못한 탓이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면접장을 박차고 나왔다.
담배 생각이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주 실장을 대동한 채 옥상 휴게실로 올라가자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담배만 꾸역꾸역 피워대는 임직원들이 시야에 포착됐다.
그중에서도 내 시선은 드림 케이블의 이용섭 편성부장을 향했다.
그 인간은 부하 직원들과 시시껄렁한 농담을 지껄이며 담배와 커피를 즐기고 있었다.
이용섭은 나름 실세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방송 편성을 책임진 탓이었다.
직급은 부장이었지만 실제 영향력은 김용대 국장에 못지않았다.
주 실장에게 내 의중을 전달했다.
“이용섭을 회장실로 호출하세요.”
“네. 회장님.”
주 실장을 남겨둔 채 곧장 25층 회장실로 내려갔다.
몇 분 뒤, 이용섭이 나타났다.
녀석이 쭈뼛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당신 연봉이 얼마지?”
내 물음에 용섭이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대답했다.
“8천만 원 수준입니다.”
“상여금과 판공비, 떡값 등을 포함하면 거의 3억에 달하겠구만.”
그러자 녀석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양팔을 맹렬히 저었다.
“저는 일체의 떡값을 사사로이 챙기지 않았습니다. 믿어주십시오. 회장님!”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이용섭은 편성을 잘 봐준다는 명목으로 드림 케이블 임직원들에게 정기적으로 떡값을 받아 챙기고 있었다.
황금 시간대에 방송편성을 받아야 그나마 시청률을 재고할 수 있는 탓에 임직원들은 그에게 울며 겨자 먹는 심경으로 다달이 소정의 떡값을 상납하고 있었다.
하용수 법무실장이 오래전에 보고한 사항이었다.
“용섭아. 너, 내 손에 죽고 싶냐?”
“네에······?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책상 서랍에서 녀석의 감사 서류를 꺼내서 사무실 바닥에 툭 내던졌다.
그러자 용섭이 놀란 얼굴로 허리를 굽힌 채 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집어 들었다.
“읽어봐라. 니놈과 관련된 비리자료니까.”
서류를 읽어 내려가는 이용섭의 얼굴이 잿빛으로 물들었다.
“네가 그동안 회사 식구들에게 해 처먹은 돈이 억 단위를 넘더라.”
녀석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내 발밑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회장님!”
“용서? 회장님 알기를 길가에 나다니는 똥개 정도로 아는 니놈이 감히 내게 용서를 구하는 거냐!”
녀석이 내 바짓가랭이를 붙잡은 채 애원조의 언사를 토해냈다.
“집에 병든 노모와 몸이 성치 않은 자식 놈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딱 한 번만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회장님.”
용섭은 애절한 사모곡을 읇조리는 효자처럼 구슬픈 눈물을 흘리며 내 눈치를 슬며시 살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가식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모양새였다.
내가 알기로 이 자식은 편성팀의 여직원과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
감사실의 보고가 그랬다.
그런 놈이 엄마와 자식 타령을 하며 면피용 발언을 쉴 새 없이 주워섬기고 있었다.
척 봐도 거짓말을 하는 게 명백했다.
곧바로 인터폰을 눌렀다.
-이용섭을 끌어내.
-네. 회장님.
직후 건장한 경호원들이 장내에 나타났다.
그들은 울며불며 난리 치는 이용섭을 회장실 밖으로 짐짝처럼 끌고 나갔다.
다시 인터폰을 눌렀다.
-하용수 법무실장을 호출해.
-네. 회장님.
하용수가 나타났다.
“이용섭을 경찰에 고발하세요.”
“말씀하신 대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그리고 과장급 이상 임직원들을 전부 회의실로 집합시키세요.”
“넵. 회장님.”
1시간 뒤, 24층 회의실로 내려가자 수십여 명의 회사 간부들이 두려운 얼굴로 나를 반기며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상석에 좌정하자마자 작심 발언을 내뱉었다.
-앞으로 회삿돈을 횡령하거나 회사 식구들에게 떡값을 받아 챙기는 후레자식들은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모조리 경찰에 고발할 생각이니까 그런 줄 아십시오.
순간 좌중이 하나같이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저마다 찔리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 회사는 내 개인 회삽니다. 회사의 모든 건 내 사적인 재산이라 이 말입니다. 그러니 내 돈을 날로 먹을 생각을 절대 하지 마십시오.
-내 성질을 건드리는 인간이 있으면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알아서 잘하세요. 아시겠습니까!
목소리를 높이자 임직원들이 기합이 잔뜩 들어간 얼굴로 일사불란하게 복명했다.
-넵. 회장님!
***
총 자본금 4백억 규모로 대박 필름을 설립한 후 김명우를 대표이사로 선임했다.
대박 필름은 드림 케이블에 드라마를 공급하는 것은 물론이고 영화도 틈날 때마다 제작할 요량으로 만든 회사였다.
당연히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런 면에서 명우는 나름 최적임자였다.
내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늦은 밤, 타워필리스 펜트하우스.
명우를 집에 불러들였다.
녀석과 심도깊은 협의를 나누기 위함이었다.
“막장 드라마를 제작해.”
“원하는 내용이 뭔데?”
“출생의 비밀이 있는 여주가 재벌 그룹 후계자를 유혹해서 결혼하는 걸로 시나리오를 짜 봐.”
“그게 다냐? 좀 심심한데?”
“당연히 아니지. 나중에는 여주가 재벌 그룹을 통째로 꿀꺽하는 걸로 스토리를 이어가야지.”
“여자들이 환장 하겠구만. 돈과 사랑을 모두 쟁취한 여주라······? 캬아······ 스토리 쥑인다. 친구야.”
“호들갑 떨지 말고, 시나리오 작가들한테 내가 말한 내용을 고스란히 전달해.”
“염려 마라. 이미 니 말을 녹음기에 저장해 놨으니까.”
녀석은 그리 말하며 만년필 꼭지를 힘차게 눌렀다.
순간 내 목소리가 만년필에서 앵무새처럼 흘러나왔다.
“좋은 자세다. 앞으로도 형 말을 빼놓지 말고 녹음해라.”
“오케이. 접수.”
우리는 거실 한켠에 마련된 라운지 바로 자리를 옮겼다.
명우와 진토닉을 사이좋게 음미하며 넌지시 운을 뗐다.
“김우철은 좀 어때?”
“여자들한테 반응이 아주 좋아. 푸쉬만 제대로 해주면 한류스타가 될만한 가능성이 있어 보여.”
명우의 말처럼 공중파 미니시리즈에서 비중 있는 조연으로 출연한 김우철은 시청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다.
특히 여성 팬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부담 없는 훈남 스타일의 이목구비와 훤칠한 체격 덕분이었다.
그러나 우철은 공중파 주중 미니시리즈에서 주연을 맡기에는 프로필이 많이 부족했다.
뭔가 그럴듯한 출연작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 치킨 게임의 서막 3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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