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핵재벌 개망나니-80화 (5/200)

< 유고(有故) 1 >

김소민을 벤틀리에 태운 채 상암동 드림 박스를 내방했다.

수행원도 없이 단출하게 방문한 탓에 드림 박스 관계자들은 내 정체를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

우리는 헐리우드 액션영화를 오붓하게 감상한 후 인근의 월드컵 공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여느 연인들이 그러하듯, 소민은 내 품에 안긴 채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조곤조곤한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저도 영화에 출연하고 싶어요. 회장님.”

그녀는 항시 나에게 존댓말을 구사했다.

살을 섞은 사이임에도 여전히 말투가 공손했다.

그래서 더욱 소민이 마음에 들었다.

보기 드물게 예의범절이 투철한 탓이었다.

“정말 영화에 출연하고 싶어?”

“네. 영화에 출연하는 게 일평생 소원이에요.”

“차기작으로 영화 보다는 드라마가 좋지 않을까? 대중에게 겨우 이름을 알린 마당에 영화를 찍는다는 건 조금 무모하거든.”

“그래도 저는 영화가 더 좋아요.”

그녀는 영화에 출연하고 싶어서 환장한 모양새였다.

“염두에 둔 작품이라도 있는 거야?”

소민이 다소곳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결혼은 미친 짓이야‘라는 영화에 꼭 출연하고 싶어요.”

“영화 제목이 영 별론데?”

그녀가 머리를 흔들었다.

“충무로에서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유열 감독님이 준비 중인 작품이에요.”

“유열이 그렇게 잘나가는 감독이냐?”

“네. 연기자들이 꼭 한 번씩은 같이 작업하고 싶어 하는 감독님이라고 할 수 있어요.”

소민은 유 감독과 영화를 같이하고 싶어 했다.

“좋아. 그건 그렇다 치고, 영화 스토리가 뭔데?”

그녀가 수줍은 얼굴로 대답했다.

“내용은 조금 야한 편에 속해요. 물론 에로 영화는 절대 아니죠.”

“제목을 듣자 하니 결혼 적령기의 남녀가 만나서 사랑을 나누는 스토리 같은데······?”

순간 소민이 놀란 얼굴로 감탄사를 쏟아냈다.

“와······! 그걸 어떻게 아세요? 정말 쪽집게 같으세요. 회장님. 호호······.”

“영화 제목이 뻔하잖아. 하하······.”

그리 화답하며 소민을 번쩍 안아 들었다.

순간 그녀의 입에서 기쁨에 겨운 비명이 아름답게 흘러나왔다.

“꺄아아악······!”

***

강남 논현동 인근의 르네상스 빌딩에 김명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14층 높이의 빌딩 외관을 자세히 살핀 후 2층 관리사무소로 올라갔다.

명우는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관리소장을 향해 나직한 어조를 흘려보냈다.

“관리 장부를 갖고 오세요. 임차인들의 목록도 가져오시고.”

“네. 사장님.”

잠시 후, 관리소장이 두툼한 서류철을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관리 장부를 살펴볼 동안 소장님은 잠시 나가주십시오.”

명우는 그 말을 끝으로 관리 장부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그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명우는 고개를 갸웃하며 임차인 명부를 자세히 살폈다.

***

상암동 드림 케이블 본사.

드디어 인어 아기씨가 드림 케이블의 드라마 전문 채널에서 절찬리에 방영되기 시작했다.

비록 시간대는 밤 10시 무렵이었지만 인어 아기씨는 첫방 부터 온갖 막장 요소를 두루 과시하며 안방 시청자들의 눈길을 삽시간에 사로잡았다.

그런 탓으로 인터넷 연예 뉴스는 인어 아기씨를 욕하는 댓글이 수천 개나 내달렸다.

나름 뜨거운 반응이었다.

무관심보단 욕을 먹는 게 백번 나은 탓이었다.

원래 막장 드라마는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다.

나는 시청자들의 격렬한 비난 댓글이 여간 반갑지 않았다.

의도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나름 흡족한 심경에 휩싸일 무렵, 명우가 회장실에 나타났다.

녀석은 사전에 연락도 없이 제멋대로 불쑥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명우는 나를 보자마자 책상 위에 두툼한 서류철을 툭 내던졌다.

“이게 뭐냐?”

“르네상스 빌딩의 임차인 장부다.”

르네상스는 내가 보유한 빌딩 중의 하나였다.

“그걸 뭐하러 갖고 온 거야?”

“장부를 한번 봐라. 아주 골때리는 임차인이 보일 거다.”

임차인 장부를 들추자 2층부터 14층까지 건물을 독차지한 오피와 룸빵의 상호가 시야에 들어왔다.

“원래 그 빌딩은 유흥전문 건물이야. 이상할 것도 없잖아.”

명우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너 바보냐? 척 봐도 업주 한 명이 니 빌딩을 전부 점유한 거잖아!”

“장부에는 사장이 전부 다른 사람인데?”

“당연히 그 인간들은 바지사장이지!”

녀석이 목소리를 높였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

“14층에 있는 오레곤 룸빵은 엄청 유명한 곳이야.”

“오레곤 룸빵이 뭐야?”

“텐프론데, 거기 업주가 유성원이라는 소문이 있어.”

“그놈이 누군데?”

“유흥 황제로 불리는 인간이지. 강남에 있는 룸빵 태반이 그 인간 거라고 하더라. 그리고 굵직한 클럽도 열 개 이상 보유했다고.”

“그 사람이 유명하건 말건,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대료만 제때 받으면 그만이야.”

“대박 필름이 그 빌딩에 입주해야 하니까 그렇지. 아무리 못해도 4개 층 이상이 필요하다고.”

“성심 빌딩에는 자리가 없냐?”

“없어. 장기 임차 사무실이라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명우 말대로 성심빌딩은 전형적인 오피스 빌딩이라 임차계약이 최소 6년 이상이었다.

내 마음대로 임차 회사들을 비우라고 말하기가 뭐 한 곳이었다.

반면 르네상스는 유흥을 주로 하는 빌딩인 탓에 임차 계약이 대다수 2년 내외였다.

“장부상으로는 임차계약이 종료된 업체들이 서너 군데 이상이지만, 쉽게 나가지 않을 거 같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뭐야?”

“유성원, 그 인간이 문제를 일으킬 공산이 커.”

“자세히 말해 봐.”

“르네상스 빌딩을 보니까 장사가 엄청 잘 되더라. 해만 떨어지면 손님들이 벌떼처럼 몰려들더만.”

명우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말을 말이었다.

“너라면 그렇게 장사가 잘되는 가게를 비우겠냐?”

“당연히 뻐팅기겠지.”

“그래서 문제라는 거야. 더군다나 유성원은 유흥가 황제답게 휘하에 주먹이 있을 가능성이 높아.”

“그 문제는 네가 알아서 해결해. 강태호를 써먹으라고.”

“돈은?”

“일단 니 판공비로 지급해. 나중에 형이 어련히 채워줄까.”

“알았다. 그럼 내가 강태호랑 일을 의논해 볼게.”

“형이 요즘 할 일이 태산이다. 골치가 아파 죽을 지경이라고. 그러니까 이런 자잘한 일은 니 선에서 끝내라. 제발.”

명우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을 내보낸 후, 벽면에 내걸린 대화면 TV에 이목을 집중했다.

TV에서는 슈퍼스타 드림의 예고편이 절찬리에 방영 중이었다.

허나, 이 정도로는 많이 부족했다.

좀 더 강력한 푸쉬가 필요했다.

곧바로 인터폰을 눌렀다.

인터폰에서 이미경의 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편성부장을 회장실로 호출하세요.

-죄송하지만 편성부장은 지금 공석인데요.

내 실수다. 그녀 말대로 편성부장은 우리 회사에 없었다.

뇌물수수 혐의로 경찰서 유치장 신세였기 때문이다.

-그럼 편성부장 밑에 있는 인간을 회장실로 불러들이세요.

-네. 회장님.

몇 분 뒤, 40대 초반의 양복 사내가 내 앞에 나타났다.

녀석은 허리를 꾸벅 숙이며 자신을 소개했다.

“편성팀에서 근무 중인 김창섭 과장입니다. 회장님.”

공손히 서 있는 그에게 내 용건을 전했다.

“다음 주 금요일에 방영 예정인 슈퍼스타 드림을 음악, 드라마, 영화, 예능 채널에 동시다발적으로 송출하세요.”

김창섭이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드라마와 영화, 예능 채널에는 이미 다른 프로그램이 편성된 상황입니다. 회장님.”

“모두 캔슬 시키세요. 아시겠습니까?”

엄한 어조를 내뱉자 창섭이 겁먹은 얼굴로 공손히 대답했다.

“명하신 대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이만 나가보세요.”

“네. 회장님.”

***

서울 시내 모처에 김명우와 강태호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태호의 입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르네상스 빌딩에서 성업 중인 오피와 룸빵, 마사지샵 등의 실소유주가 유성원으로 밝혀졌습니다.”

명우의 미간에 깊은 내천자가 그려졌다.

“아무래도 일이 쉽지 않을 거 같습니다.”

태호의 이어지는 말에 명우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최소 5개층 이상을 반드시 확보해야 하니까, 강 사장이 힘을 좀 써보세요.”

“아시다시피 유성원은 인맥이 보통이 아닙니다. 주먹은 물론이고 검경에도 발이 넓습니다.”

“그래서 몸을 사리겠다는 말입니까?”

“그건 아니지만······.”

태호는 말끝을 흐리며 입가에 한 담배를 물었다.

직후 명우를 향해 담배 연기를 훅 내뿜으며 노골적인 언사를 내뱉었다.

“우리 애들이 많이 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위험수당을 짭짤하게 챙겨 주십시오.”

“좋습니다. 돈은 달라는 대로 줄 테니까 일이 뜻대로 안 되면 그놈을 무력으로 제압하세요.”

명우는 그 말을 끝으로 르네상스 빌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르네상스 빌딩에 도착하자마자 관리소장에게 명령을 내렸다.

“임차계약이 종료된 업체들에게 한 달 안에 짐을 빼라고 고지하세요.”

“쉽지 않을 겁니다. 사장님. 워낙에 거친 인간들이라······.”

소장의 얼굴에 곤혹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그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소장님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

신사동 인근의 클럽가에 건장한 양복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40대 중반의 남자를 엄중히 경호하며 클럽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유성곤은 vip룸에 들어가자마자 어딘가로 급히 전화를 걸었다.

30분 뒤, 그의 대여섯 명의 남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유성곤에게 긴급 현안을 보고했다.

“르네상스 빌딩의 관리소장이 임차계약이 끝난 업체들에게 빌딩에서 나가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습니다.”

“갑자기 그러는 이유가 뭐야? 임대료를 꼬박꼬박 잘 냈잖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임대료를 올려준다고 해봐.”

“이미 그리 말했지만, 당최 말이 통하지 않더군요.”

유성원은 바지사장들을 내보낸 후 장내에 우두커니 서 있는 수행비서에게 입을 열었다.

“르네상스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이 얼마지?”

“연간 2백억 대에 육박하는 수준입니다.”

성원의 얼굴에 짙은 탐욕이 번져갔다.

“이번 기회에 르네상스를 헐값에 인수하는 방안을 연구해 봐. 그리고 바지들 입단속도 철저히 시키고.”

“넵. 회장님.”

일주일 후.

유성원은 골프장에서 라운딩을 즐긴 후 애첩을 대동한 채 수도권 인근의 러브호텔을 내방했다.

그는 오붓한 시간을 만끽한 뒤 수행비서를 호출했다.

“쓸 만한 방안을 마련했나?”

수행비서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한 바를 말로 표현해 봐.”

“네. 회장님. 알아보니 르네상스 빌딩의 소유주는 TS 인베스트먼트였습니다.”

“외국계 자본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검은 머리 자금일 가능성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해외로 빼돌린 돈을 외국계 사모펀드로 가장해서 들여온 건가?”

“아직 확실치는 않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거액의 인테리어비용을 반환하라는 소장을 법원에 동시다발적으로 제출하면 빌딩주는 임대 소득을 상당 기간 올릴 수 없습니다.”

“빌딩에 입주한 업체들의 영업을 무기한 정지시키자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회장님.”

“그러면 운영수익에 타격이 올 텐데······?”

“회장님. 르네상스 호텔은 강남 요지에 위치한 빌딩입니다. 층수는 14층에 불과하지만 건물 시세는 최소 2천억 이상입니다. 그 정도로 대지 면적이 넓습니다.”

성원은 수행비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더군다나 건달들을 동원해서 6개월 이상 난장을 친다면 시세의 절반 가격 이하로 얼마든지 빌딩을 인수할 수 있을 겁니다.”

“그건 당신 생각이고. 만약 빌딩주가 끝까지 건물을 안 팔면 어쩔건데?”

“그때는 빌딩주를 납치해서라도 매매계약서에 도장을 찍게 만들어야 합니다. 회장님에겐 그만한 힘이 있지 않습니까?”

수행비서의 말대로 유성원은 다년간 검경을 관리해왔다.

“그렇지만 그 치들을 써먹으려면 돈이 많이 든다고. 그러니까 그전에 일을 마무리 짓는 게 최선이야.”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

상암동 드림 케이블 본사.

회장실 벽면에 내걸린 십수 대의 대화면 TV에서 드림 케이블 방송이 송출하는 프로그램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허나, 내 시선은 CNN이 방송하는 경제뉴스로 향했다.

-구글은 상반기에 기록적인 어닝 서프라이즈를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 덕분에 구글의 주식은 전날 보다 무려 20프로 이상 폭등했습니다.

-월가의 전문가들은 구글의 가치가 날이 갈수록 가파르게 상승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중략······.

밥을 안먹어도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구글 외에도 아마존 MS, 애플 등의 주식 역시 꾸준히 우상향을 기록한 탓이었다.

내 주식가치는 310억 달러에 육박하는 수준이었다.

한화로 37조 원에 달하는 액수였다.

돈이 돈을 버는 미친 세상이었다.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내 재산이 나날이 급증한 탓이었다.

***

타워필리스 펜트하우스.

거실 소파에 온몸을 깊숙이 파묻은 채 TV 뉴스에 이목을 집중할 찰나 놀라운 소식이 귓전을 강타했다.

-삼송그룹의 김건영 회장이 오늘 오전 4시경 자택에서 심근경색으로 돌연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삼송그룹의 관계자는 조만간 장례 일정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취재진에게 전했습니다. 중략······.

앵커의 짤막한 멘트였지만, 이 뉴스가 가지는 의미는 한국 경제에 심대하게 작용할 것이 불 보듯 훤했다.

김건영은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 최고재벌이었다.

더군다나 그가 이끄는 삼송그룹은 한국 경제를 견인하는 역할을 도맡고 있었다.

한국에서 삼송그룹이 차지하는 비중은 필설로 형용이 불가한 수준이었다.

곧바로 김민용에게 전화를 걸었다.

허나, 녀석의 핸드폰은 신호가 가지 않았다.

배터리를 탈착한 모양이었다.

< 유고(有故) 1 > 끝

ⓒ 방탄리무진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