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혈경쟁 1 >
서울 모처.
이명복의 최측근 인사인 박진수와 맥카리 사모펀드의 한국 지사장인 김용현이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서울시가 지하철 10호선의 적자분을 전액 보전하는 문구를 계약서에 삽입해 주십시오. 그리고 10호선을 운용한 지 5년 후에 서울시가 투자한 금액의 2배의 가격으로 10호선을 인수한다는 보장 문구 역시 넣어 주십시오.”
박진수는 맥카리 사모펀드가 칼만 안 든 강도임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러나 그가 모시는 주군은 맥카리가 제시한 거액의 리베이트에 혼백을 저당 잡힌 지 이미 오래였다.
“너무 과도한 요구를 하시는군요. 이런 비밀스런 조항이 세간에 알려진다면 우리 시장님의 앞날에 커다란 장애 요소로 작용할 겁니다.”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이면계약인 관계로 서로 간에 입만 다물면 아무도 알지 못할 겁니다. 설혹 나중에 사실이 드러난다 해도 잡아떼면 그만입니다.”
“시민들을 개돼지 정도로 취급하시는 겁니까?”
박진수의 날 선 언사에 김용현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한국의 국민 수준은 개돼지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나라 경제를 말아먹은 한국당에서 개가 나와도 무작정 투표하는 저렴한 국민성이 어디 가겠습니까? 낄낄······.”
김용현의 적나라한 조소에 박진수는 할 말을 잃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장님은 한국당이 자랑하는 차차기 대선 후보이십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
차민우는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드림 박스를 상대로 치킨 게임에 돌입하기로 굳게 다짐했다.
그는 차필수 회장이 종국에는 자신의 결단에 지지를 보낼 것으로 확신했다.
한국의 영화시장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나 마찬가지였다.
연평균 1백프로에 육박하는 경이적인 성장을 거듭한 탓이었다.
한국의 청춘남녀들은 극장 외에는 여가시간을 같이 보낼 장소가 태부족했다.
그런 사실을 잘 아는 차민우는 영회사장 석권이라는 야망에 불타올랐다.
더불어 자신을 위협하는 형제들을 저 멀리 따돌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럿데 시네마 소공동 본점에 출근하자마자 고위 간부들을 회의실로 불러들였다.
차민우는 좌중을 휘 둘러본 뒤 모두 발언을 내뱉었다.
“내일부터 럿데 시네마의 입장권을 기존 보다 1천 5백 원 인하된 4천 원으로 전격적으로 인하할 계획입니다.”
그러자 좌중에 격렬한 소용돌이가 번져갔다.
“물론 당분간 적자가 예상됐지만 드림 박스를 무너뜨릴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한 출혈 경쟁도 감수할 생각입니다.”
직후 김용해 전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회장님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출혈경쟁을 펼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 사장님의 계획은 재고해 주십시오.”
그는 차필수 회장이 낙점한 인물이었다.
차민우를 견제하는 용도였다.
“계획을 끝까지 철회하지 않으신다면 회장님에게 이같은 사실을 보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민우의 얼굴에 쓴웃음이 그려졌다.
그는 이런 상황을 진작에 예견했다.
그런 탓인지 별다른 반응 없이 자신의 할 말에 다시 집중했다.
“드림 박스는 우리의 상댓가 되지 못할 겁니다. 대 럿데그룹이 우리의 든든한 자금줄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용해는 자신을 무시하는 차민우를 싸늘한 시선으로 노려본 뒤 회의실을 박차고 나갔다.
민우는 회의를 끝내자마자 김기용 기조실장을 불러들였다.
“김용해의 동선을 파악했나?”
“가회동으로 달려간 거 같습니다.”
“그새를 못 참고 아버지에게 쪼르르 달려가는 꼬락서니라니······ 쯧쯧······.”
민우는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원래 회장님의 충복 아닙니까? 그러니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하긴, 어차피 한번은 치러야 할 일이니······ 당신 말대로 신경 쓸 필요가 없겠지.”
김기용이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드림박스도 자금력이 만만치 않은 탓에 최소 1년 이상 출혈경쟁이 불가피할 거 같습니다.”
“예상 적자가 얼마지?”
“적게는 300억에서 많게는 470억 안팎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가격을 더 내려야 할지도 모르니까 적자를 만회할 만한 방안을 강구해.”
“그래서 말인데, 영화 관람료를 내리는 대신 팝콘과 음료수, 커피 등의 가격을 올리는 게 어떻습니까?”
“너무 티 나게 올리면 손님들이 욕할 거 아닌가?”
“티 안 나게 찔끔찔끔 올리는 식으로 가격을 인상한다면 고객들의 불만을 다소간 피해갈 수 있을 겁니다.”
“정말 그 방법이 최선인가?”
“그 수 외에는 이렇다 할 방안이 전무합니다.”
민우는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단호하게 외쳤다.
“수백, 수천억 대의 적자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드림 박스를 무너뜨려야 한다!”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사장님.”
김기용은 그리 화답하며 민우를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
가회동 서재.
차필수 회장은 우두커니 서 있는 차민우를 향해 고성을 내질렀다.
“니놈이 감히 나를 거역해!”
“거역이 아니라 제 할 도리를 했을 뿐입니다.”
“너는 지금 회삿돈을 축내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는 거야! 누구 좋으라고 니멋대로 출혈경쟁을 하겠다는 건데!”
“드림박스만 무너뜨리면 연간 수천억 대의 영업이익을 볼 수 있다구요. 왜 그렇게 말귀가 어두우신 겁니까!”
차민우 역시 지지 않고 강한 어조로 받아쳤다.
그런 모습에 차 회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큰놈이라고 오냐오냐 키웠더니 내가 이런 몹쓸 꼴을 다 보는구나!”
“암튼 이 모든 건 아버지와 회사를 위한 일이니 제발 저를 믿고 자금을 지원해 주십시오!”
민우는 그 말을 끝으로 서재를 박차고 나갔다.
그날 밤.
차 회장은 가회동 자택으로 미래전략 본부장인 이치성을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이치성은 차 회장에게 정중히 인사한 뒤 공손히 시립했다.
“민우가 드림박스를 대상으로 치킨 게임을 벌이겠다고 난리는 치고 있어.”
“사장님다운 패기 있는 용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치성의 뜻밖의 대답에 차 회장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자네 역시 치킨 게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한국의 영화시장은 아시아에서 중국 다음으로 큰 규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마저 오래전에 앞지른 상황입니다.”
“정말 그런가? 언뜻 이해가 안 되는군. 아무리 일본의 영화산업이 내리막길이라고 하지만 한국보다 작지는 않을 텐데······?”
“엄밀히 말해 일본은 영화시장이 아니라 애니메이션 시장이 클 뿐입니다. 영화시장은 오래전에 고사한 형편입니다.”
차 회장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져갔다.
“한국의 영화시장은 매년 큰 폭으로 파이를 늘려가고 있습니다. 제작과 배급, 상영관 등을 독점한다면 연간 수천억 대의 이익을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드림 박스도 만만한 상댓가 아니지 않은가?”
“상댓가 만만치 않다고 해서 반드시 해야 할 전쟁을 피한다면 이 바닥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겁니다.”
그의 단호한 답변에 차 회장의 마음이 급격히 흔들렸다.
이치성은 차 회장이 가장 신임하는 최측근 인사였다.
컴퓨터처럼 날카로운 사리판단과 예리한 비지니스 감각으로 중무장한 탓이었다.
차 회장은 이치성을 돌려보낸 뒤 자택의 정원을 거닐며 드림박스를 상대로 한 출혈 경쟁을 심사숙고했다.
그러기를 얼마 후 큰아들인 차민우에게 힘을 실어주기로 결심했다.
이치성의 적극적인 찬성 때문이었다.
***
상암동 드림 케이블 본사.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벽면에 내걸린 TV를 켰다.
뉴스에서는 여당의 대선 후보 경선 결과가 절찬리에 방영되고 있었다.
-경남 출신인 차무연 후보가 이연제 후보를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민진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습니다. 중략······.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었다.
차무연은 대선 공약으로, 충남 연기군 인근으로 수도 이전을 발표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에 당선될 확률은 그리 높지 않았다.
이해창이라는 거대한 장애물이 존재한 탓이었다.
나는 차무연이 온갖 난관을 물리친 후, 청와대의 새로운 주인으로 등극하기를 학수고대했다.
수도 이전 후보지로 손꼽히는 충남 연기군 지역의 토지를 50만 평이나 보유했기 때문이다.
그 땅은 나에게 돈을 빌린 조달수 사장에게 담보물건으로 받아둔 곳이었다.
당연히 조 사장은 내 돈을 기한 내에 갚지 못했다.
그 덕분에 연기군의 토지는 내 소유가 된 지 이미 오래였다.
차무연이 대통령이 되는 상상을 마음속으로 뜨겁게 염원할 무렵, 장준기 전무가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장 전무는 할레벌떡한 얼굴로 긴급 현안을 보고했다.
“럿데 시네마 측이 오늘부터 영화 관람 요금을 기존 보다 1천 5백 원 인하된 4천 원 수준으로 인하한다고 전격적으로 발표했습니다.”
럿데가 감히 나에게 싸움을 걸고 있었다.
그들 역시 영화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사활을 거는 분위기였다.
걸어오는 싸움을 피한다면 사람들이 나를 겁쟁이라고 욕할 것이 자명했다.
“드림 박스 관계자들을 지금 당장 회의실로 불러들이세요.”
“넵. 회장님.”
30분 뒤, 24층 회의실로 내려가자 드림 박스 고위 간부들이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상석에 좌정하자마자 모두발언을 내뱉었다.
“본인은 럿데 시네마가 걸어온 싸움에 대해서 더욱 강력하게 응전할 생각입니다. 그들이 관람료를 4천 원 수준으로 인하한다면 우리는 3천 원 내외의 가격으로 관람료를 파격적으로 내려야 합니다.”
순간 장내에 거센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간부들은 하나같이 내 말을 되새기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내일부터 드림 박스의 영화관람료를 3천 원으로 인하하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각 언론사에 이같은 방침을 대대적으로 전달하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회의실을 박차고 나왔다.
***
타워필리스 펜트하우스.
집에 도착하자마자 TV를 켰다.
슈퍼스타 드림을 모니터링하기 위함이었다.
일종의 직업병이었다.
대한민국 최강의 감성보컬인 이승천은 결선 참가자의 보컬 실력을 평가하는 멘트를 날리고 있었다.
-장재희 양은 다 좋은데 두성으로 발성하는 역량이 부족한 거 같아요. 흉성으로만 노래를 부르다 보면 호소력 짙은 울림을 대중들에게 주기가 힘들어요.
이승천은 일반인들의 경탄을 자아내는 전문적인 창법에 대해서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그러자 그를 보조하는 윤경선이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장재희 씨는 타고난 음색이 좋고 자작곡 실력도 뛰어나신 거 같습니다. 저는 장재희 양의 잠재력을 아주 높게 보고 있어요.
둘의 상반된 논평에 장재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갈팔질팡하는 모양새였다.
허나, 시청률 면에서 이승천과 윤종선 조합은 최상의 결과를 이끌어냈다.
그들 덕분에 시청률이 2프로를 돌파한 것이다.
물론 참가자들의 노고도 무시할 수 없었지만.
케이블 방송의 시청률 2프로는 지상파로 환산할 경우 10프로에 맞먹는 수치였다.
곧바로 재무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광고 판매 상황을 체크하기 위함이었다.
-슈퍼스타 드림의 광고 판매액이 어느 정도죠?
재무실장이 즉답했다.
-오늘 6회가 방송된 싯점을 기준으로 대략 30억 수준의 광고가 판매된 상황입니다.
드디어 손익분기점을 돌파했다.
-그렇지만 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오락 프로가 무기한 방송 정지되는 바람에 광고 판매 총액은 오히려 줄어든 상황입니다. 회장님.
빌어먹을 노릇이었다.
케이블 방송의 광고를 책임지는 성인 오락 프로가 여자들의 줄기찬 민원으로 인해 방송금지 처분이 내려진 탓이었다.
유교 탈레반 마인으도 중무장한 그녀들 덕분에 한국의 성인 남성들은 즐길 거리가 점점 줄어드는 형국이었다.
더불어 드림 케이블의 재정에도 심대한 타격이 초래됐다.
한국은 잘못된 길로 가고 있었다.
여성들의 자발적인 이슬람화가 진행되는 모양새였다.
습쓸한 현실이었다.
통화를 끊은 뒤, 소민에게 전화를 돌렸다.
-타워필리스로 와라.
-오늘은 화요일이잖아요?
나는 월수금 3일 동안만 그녀를 즐길 권리가 있었다.
스폰 계약이 그랬다.
-영화 출연 문제로 전할 말이 있다고.
-좋아요. 대신 계약서에 쓰여진 대로 저를 대해주세요.
-알았으니까 어여 와라.
-네. 회장님.
***
드림박스 월드컵 점에 차민우와 김기용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인산인해로 뒤덮인 영화관에 할 말을 잃은 표정이었다.
민우의 얼굴에 침통한 표정이 한가득 드리워졌다.
“관람료를 3천 원 수준으로 인하한 탓인가?”
“그렇습니다. 사장님.”
김기용이 그리 답하자 민우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팝콘과 음료수 가격은?”
“기존과 동일한거 같습니다. 그래서 손님들이 더욱 몰리는 모양입니다.”
“이태수의 자금력이 그리 대단한가?”
“자세히는 모르지만 보통이 아닌 것만큼은 틀림없는 거 같습니다.”
“우리가 3천 원 수준으로 내린다고 해도 음료수와 팝콘 가격이 더 높아서 가격 경쟁력이 되지 않겠군.”
“회장님에게 도움을 청하시는 게 최선 같습니다.”
“4천 원으로 내린 것도 겨우 허락을 받은 마당에, 아버지가 호락호락하게 가격 인하를 용납할 거 같아?”
그의 반문에 기용이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민우는 결단의 순간으로 내몰렸다.
이제 와서 후퇴를 한다는 건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내 직권으로 또 한 번의 가격 인하를 할 밖에.”
“얼마를 생각하시는 겁니까?”
“2천 5백 원. 그 정도는 되야 드림박스를 상대할 수 있다고!”
민우의 만면 가득 결연한 표정이 떠올랐다.
< 출혈경쟁 1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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