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혈경쟁 3 >
양재천변을 거닐며 드림 케이블의 조직 개편에 대해서 심사숙고했다.
드림 케이블은 자잘한 조직들이 여기저기 지저분하게 널린 형국이었다.
편성팀과 광고판매팀, 홍보팀, 총무팀 등의 잡다한 조직들을 일원화할 필요성이 있었다.
업무가 중복됐을 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인력과 재원을 낭비했기 때문이다.
또한 재무팀과 드라마국, 예능국, 드림 박스 등을 통합해서 관리할 컨트롤 타워의 필요성이 최근 들어 급격히 대두됐다.
삼송 그룹처럼 미래전략 본부장직을 신설하는 게 최선의 방책이었다.
허나, 본부장으로 임명할 만한 인재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주변에 보이지 않았다.
장준기 전무와 김용대 국장은 딱 그 수준의 사람들이었다.
비즈니스 마인드가 태부족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맡은 바 영역에서 활동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 이상의 요구에 부응할 만한 역량이 없었다.
그나마 법무와 감사업무를 도맡고 있는 하수용 법무실장이 가장 나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하 실장에게 미래전략 본부장이란 중책을 맡기기에는 여러모로 꺼려지는 바가 많았다.
그는 김태섭이 추천한 인물이었다.
회사의 비밀스런 정보를 태섭에게 누출할 위험성이 있었다.
그런 탓으로 하 실장을 금세 마음에서 지워 버렸다.
본부장을 맡기기에는 배경이 좋지 못했다.
그때, 명우의 해맑은 얼굴이 심중에 떠올랐다.
녀석은 재벌그룹 후계자 출신이었다.
당연히 보고 들은 게 나보다 훨씬 많은 친구였다.
그에게 자문을 구하는 게 최선이었다.
곧바로 명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뭐 해?
-투자 문제로 영화사 관계자와 미팅 중이다.
-어떤 영환데?
-한석기가 주연으로 참가하는 파란 물고기란 작품인데 제작비도 저렴한 편이라 투자를 긍정적으로 고려하는 중이야.
-총제작비가 얼마야?
-60억 남짓이라고 하더라.
-그중에서 얼마를 부담할 생각이냐?
-40억 정도를 예상하고 있다.
-그건 그렇고, 한 가지 부탁할 게 있거든.
-무슨 부탁?
-드림 엔터테인먼트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맡을 조직이 필요하단 말이지.
-기획조정실 같은 걸 만들려고 그러는 거야?
-기조실이 한물간 지가 언젠데.
-그럼 미래전략 본부라도 신설할 생각이냐?
-그래서 말인데 쓸 만한 인물을 천거해 봐라.
-원하는 인재상이 뭔데?
-당연히 내 말을 잘 듣고 뒤통수 절대 안치는,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하는 비즈니스 마인드가 좋은 남자.
-바라는 것도 많다. 그런 잘난 인간이 흔한 줄 아냐?
녀석이 힐난조의 어투로 쏘아붙였다.
-암튼 쓸 만한 사람을 알아봐. 그래도 너는 전직 재벌 후계자 아니냐.
-알아볼게. 이만 끊는다.
명우는 그 말을 끝으로 통화를 끊었다.
***
고급 레스토랑에 정장룩 차림의 이영선 차장 검사와 그녀의 외삼촌인 고성진 변호사가 차례로 나타났다.
그들은 식사를 끝낸 뒤 본격적인 담론에 접어들었다.
고성진이 은근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유성원이 자기를 교도소에서 빼내 주면 수임료로 70억을 준다고 하더라.”
“그래서 뭐라고 답했죠?”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지.”
“그런 말을 나에게 하는 이유가 뭐예요?”
“네가 잘나가는 차장 검사니까 그렇지. 이번 일만 잘 처리되면 너한테 10억을 줄게. 어때?”
이영선의 두 눈에 짙은 탐욕이 들끓었다.
“그리고 내가 책임지고 김앤박 로펌에 들여 보내줄게.”
그녀가 반색하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 말이 정말인가요?”
“내가 조카님한테 헛소리나 지껄이는 삼촌으로 보이냐? 그러니까 사건을 맡고 있는 김태섭을 잘 구슬려 보라고. 그 인간을 포섭해야 일이 해결될 거다.”
“알았어요. 내가 한번 힘을 써볼게요. 호호······.”
영선은 외삼촌과 식사를 끝낸 뒤 강남 인근의 호스트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젊은 남자들과 오붓한 시간을 즐기는 걸 이 세상에서 최고로 좋아했다.
더군다나 그녀는 언제나 무료로 호스트들에게 극진한 서비스를 받았다.
차장 검사 타이틀 덕분이었다.
***
중부지검 차장실에 이영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소파에 자리를 잡자마자 김태섭에게 용건을 꺼냈다.
“유성원을 불구속기소 하는 게 어때?”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냐!”
태섭이 목소리를 높이자 영선이 입가에 한줄기 비웃음을 떠올리며 손에 든 서류철을 책상 위로 툭 내던졌다.
“일단 감사 서류부터 먼저 읽어보셔.”
서류를 읽어내려가는 태섭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그녀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말려 올라갔다.
직후 영선의 입에서 조소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개천의 용 출신인 김태섭 차장 검사님이, 친인척 명의로 거의 백억 대의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더라. 자금 출처가 어디니?”
그는 가타부타 말없이 영선을 매섭게 노려봤다.
“처갓집도 그저 그런 중산층 수준이던데, 대체 무슨 재주로 그 많은 재산을 축적했을까? 내가 자세히 파줄까?”
“유성원한테 얼마를 받아 처먹었냐? 그거부터 먼저 말해 봐.”
“네가 아직 사태파악을 전혀 못했구나. 내가 책임지고 탈탈 털어줘?”
“뚫린 입이라고 아가리를 함부로 놀리는구나. 네년 집안 빽을 믿고 천방지축으로 설치나 본데, 그러다가 정말 큰코다친다.”
“이 개자식이 누구더러 년 저년 하는 거야! 너야말로 정말 죽어볼래!”
그녀도 지지 않았다.
“1주일 줄 테니까 그 안에 유성원을 불구속 기소로 처리해. 만약 내 요구를 끝까지 거부한다면 감찰부를 총동원해서라도 네놈의 구린 뒤를 철저하게 팔 테니까.”
영선은 그 말을 끝으로 장내에서 유유히 사라졌다.
잠시 후, 태섭이 다급한 얼굴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강태호에게 밀명을 내렸다.
-중부지검 감찰부 차장검사인 이영선의 뒤를 캐보세요.
-일이 잘못되면 경을 칠 겁니다.
-뒤는 내가 봐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회장님만 믿고 일을 진행하겠습니다.
-그러세요. 그럼 나중에 봅시다.
-넵. 회장님.
***
중부지검 인근에 검은색 세단 차량이 나타났다.
차 안에는 강태호와 그의 심복이 탑승하고 있었다.
태호는 수하에게 중년 여성의 사진을 건넨 뒤 나직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이년의 동선을 빠짐없이 확인해. 차장 검사니까 조심해라. 들키지 않게.”
“염려 붙들어 매십시오.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럼 특이 사항이 발견되면 나한테 즉시 연락하고.”
“넵. 큰형님.”
***
서울 시내 모처.
강태호는 장내에 나타난 김태섭에게 정중히 인사한 뒤 노란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이영선의 비밀스러운 사생활이 담긴 사진집입니다.”
순간 태호의 얼굴에 득의만면한 표정이 한가득 그려졌다.
“우하하하······! 수고하셨습니다. 강 사장.”
“별말씀을. 제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럼 저 먼저 가겠습니다.”
태섭은 그가 장내에서 사라지자마자 노란 서류 봉투를 테이블 위에 거침없이 쏟아부었다.
사진 속에는 호스트바를 은밀히 방문하는 이영선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의 입가에 희미가 미소가 떠올랐다.
직후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
타워필리스 펜트하우스.
거실 소파에 온몸을 깊숙이 파묻은 채 9시 뉴스에 이목을 집중했다.
-영화시장 업계 1위인 럿데 시네마와 2위인 드림 박스의 출혈경쟁이 점입가경으로 연일 치닫고 있습니다.
-파격적인 영화 관람료 인하로 포문을 연 럿데 시네마 측을 대상으로 드림 박스 역시 연일 대대적인 반격을 가하는 형국입니다.
-드림 박스가 관람료를 2천 원 수준으로 대폭 인하하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럿데 시네마 측도 1900원으로 관람료를 인하할 에정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업계 관계자들은 무의미한 출혈경쟁을 펼치는 양사를 비난하는 한편 하루속히 출혈 경쟁을 종식하라고 두 회사를 연일 압박하고 있습니다.
-그럼 두 회사의 영화 관람료 인하에 대해서 시민들의 의견을 들어보겠습니다.
앵커의 말이 끝나자마자 화면이 서울 시내의 길거리로 넘어갔다.
직후 여대생의 인터뷰가 시작됐다.
-저희 입장에서는 극장 요금이 싸지니까 아주 좋죠. 두 회사가 출혈경쟁을 한다는 걸 잘 알지만 일반 시민들 입장에서는 좋은 거 아닌가요?
여대생의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영화 관계자의 인터뷰 장면이 화면에 나왔다.
-이런 식으로 치킨 게임을 계속한다면 종국에는 영화판의 독과점 업체가 출현할 공산이 큽니다. 둘 중에 끝까지 살아남는 업체가 영화 시장 전체를 지배하게 되는 거죠.
-결국에는 시장을 장악한 업체의 입맛대로 영화 관람료가 올라갈 겁니다. 그리고 영화 배급과 제작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 명약관화합니다.
업게 관계자라 그런지 사태를 어느 정도 파악하는 모양새였다.
그의 말대로 나는 럿데 시네마를 무너뜨리자마자 영화 관람료를 대폭 인상할 계획이었다.
그동안 본 적자분을 단시간에 만회하기 위함이었다.
TV를 끈 뒤 2층에 마련된 트레이닝 룸으로 올라갔다.
중량 스쿼트로 몸을 푼 후, 곧바로 쉐도우 복싱과 펀치볼에 매진했다.
그런 탓인지 이마에서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2시간가량 이어진 체력단련을 끝마친 뒤 1층 거실로 내려오자 현관문 밖에서 경호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태섭 차장님이 회장님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들여보내세요.”
“넵. 회장님.”
김태섭이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긴히 올릴 말씀이 있습니다.”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꺼내서 태섭에게 건네며 은근히 물었다.
“나한테 할 말이 뭐죠?”
“이영선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이 말을 이었다.
“그년은 뒷배경이 보통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전직 검찰 총장이고, 친가와 외가에 법조계 인맥이 수두룩하게 널린 상황입니다.”
“그래서요?”
“한마디로 제가 상대하는 게 많이 버겁습니다.”
“그래서 나더러 도와달라는 말인가요?”
“솔직히 그렇습니다. 회장님.”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 거죠?”
“회유와 협박을 두루 구사하시면 될 거 같습니다.”
“회유는 알겠는데, 협박은 뭐죠?”
“강 사장이 구해온 사진을 이용하면 말이 통할 거 같습니다.”
“호스트바를 드나드는 정도로 말빨이 통할까요?”
“그녀는 태생이 도도한 상류층 딸내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호스트바를 드나드는 사진을 남편과 검찰에 공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 어느 정도 말이 통할 겁니다. 더불어서 달콤한 회유책을 구사한다면 틀림없이 회장님의 말을 들을 겁니다.”
“돈질을 하라는 말인가요?”
“돈도 돈이지만 그년은 김앤박 로펌에 들어가고 싶어서 환장한 처집니다.”
“언뜻 이해가 안 가는군요. 빵빵한 법조계 집안 출신이면 김앤박 로펌에 들어가는 건 누워서 식은 죽 먹기 아닙니까?”
녀석이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이유가 뭐죠?”
“그년의 부친과 김앤박 로펌의 김 대표가 사적으로 감정이 좋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김 차장이 이영선과 자리를 만들어 보세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태섭은 그리 화답하며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깊숙이 허리를 조아렸다.
***
금요일 밤, 서초동 인근의 일식당.
룸에서 기다린 지 20분 만에 중년 여성이 면전에 나타났다.
그녀는 도도한 태도로 나에게 목례를 취한 뒤 맞은편에 차분히 앉았다.
“방송사 회장님이 왜 저를 찾으신 거죠?”
이영선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내 사람이 되십시오.”
그녀가 비웃듯 대꾸했다.
“검사 알기를 개똥으로 아시는군요.”
“솔직히 그렇습니다.”
순간 그녀가 성난 얼굴로 바락 외쳤다.
“당신 정체가 뭐야! 감히 누구 앞에서 개소리를 하는 거야!”
그녀의 눈앞으로 노란 봉투를 내밀었다.
“호스트바를 주기적으로 방문하시더군요. 일단 사진 먼저 보십시오.”
이영선이 움찔한 얼굴로 봉투 안에서 여러 장의 사진을 꺼내 들었다.
사진을 목도한 그녀의 얼굴이 삽시간에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잘나신 부군과 검찰에 이 사진을 돌리면 어떻게 될까요?”
“이 개자식아! 감히 차장 검사를 공갈협박 하고도 무사할 거 같아!”
그녀는 여전히 사태파악을 못 하고 있었다.
< 출혈경쟁 3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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