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업자득 1 >
“당신 집안을 조사해 보니 명예만 있지 실속은 없더군요.”
그녀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나를 향해 삿대질을 해왔다.
“네가 뭔데 우리 집을 조사하는 거야! 정말 내 손에 죽고 싶어!”
이영선의 항변을 모르쇠로 일관한 채 내 할 말에 오롯이 집중했다.
“전직 검찰총장이셨던 부친이 검찰 조직을 물러나자마자 지병인 간암으로 사망한 탓에, 집안 경제에 한동안 어려움을 겪으셨더군요.”
“물론 잘나가는 법조인 친인척들이 십시일반으로 도와준 덕분에 어려움은 모면했지만.”
그녀가 분노한 얼굴로 나를 사납게 노려봤다.
“게다가 부군이 운영하는 산부인과도 폐업 지경에 내몰린 탓에, 영국 대학에 유학하는 자녀들의 학비 마련에도 어려움을 겪는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내 사생활에 대해서 더 이상 입에 올리지 말라고!”
“당신은 내 말을 들으셔야 합니다. 인간말종인 유성원을 구명하느라 사리분간을 못 하시거든요.”
“유성원은 부녀자들을 숱하게 납치 강간했을 뿐만 아니라 건물주들을 공갈협박해서 헐값에 건물을 강탈하는 행위를 밥 먹듯이 자행한 악당입니다.”
이영선의 두 눈을 정면으로 직시하며 재차 입을 열었다.
“유성원의 변호사로 선임 된 외삼촌에게 얼마를 받기로 하신 겁니까?”
그녀가 움찔한 얼굴로 내 시선을 피했다.
서류 가방에서 무기명 양도성 예금증서 10억 원가량을 꺼내서 그녀의 발밑에 툭 내던졌다.
“10억입니다. 그 돈을 받으시면 내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녀의 동공이 태풍에 휘말린 듯 거세게 요동쳤다.
“뿐만 아니라 김앤박 로펌에도 자리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최소 연봉 20억 이상을 보장해 드리죠.”
허나, 이영선은 여전히 결정을 못 하고 있었다.
쐐기를 박을 시점이었다.
“내 돈을 거부하시면 당신의 치부를 정관계는 물론이고 언론에도 모조리 까발리겠습니다. 나는 돈밖에 없는 인간이라 그 정도는 일도 아닙니다. 시험해도 좋습니다.”
그녀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영선은 체념한 얼굴로 발밑에 떨어진 양도성 예금증서를 주섬주섬 챙겨 들었다.
“이제 내 사람이 됐으니, 내가 기라면 기고, 짖으라면 짖는 강아지가 되십시오. 아시겠습니까!”
그녀가 울 듯한 표정을 지으며 다소곳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 그만 나가셔도 좋습니다.”
이영선을 내보낸 뒤 옆방에서 대기 중인 김태섭을 면전에 불러들였다.
태섭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제 그년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겁니다.”
“그러라고 10억을 준 겁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그녀를 예의주시하세요.”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그리고 유성원이 주심 재판관에 손을 쓸지도 모르니까 방심하지 마십시오.”
“그 문제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만간 그 개자식은 맑은 공기를 절대 마시지 못하는 곳으로 이동할 겁니다.”
“그런 얘기는 내 앞에서 꺼내지 마십시오.”
정색하며 말하자 녀석이 송구한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그럼 나 먼저 일어납니다.”
“살펴 가십시오. 회장님.”
일식당을 나선 뒤 주 실장에게 넌지시 말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목요일입니다.”
“신은서랑 만나는 날인가?”
“맞습니다.”
우리는 화요일과 목요일, 토요일 밤에 만나기로 계약된 상태였다.
스폰 계약이 그랬다.
“은서를 펜트하우스로 불러들여.”
“네. 회장님.”
***
프랑스 파리 모처.
IMF 총재 캉드쉬와 칼라일 투자그룹의 체이스 회장이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체이스의 입에서 노골적인 언사가 흘러나왔다.
“한국 정부를 강력하게 압박해 주십시오.”
“원하시는 바를 속 시원히 말해 보십시오.”
“외자은행을 인수합병할 계획입니다. 그러자면 한국 정부를 다각도로 압박해야 합니다.”
“저도 뭔가 수중에 떨어지는 게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캉드쉬의 반문에 체이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직후 메모지에 은행명과 계좌번호, 클라이언트 코드를 적어서 그에게 슬며시 건넸다.
“이게 뭡니까?”
“미화 1천만 불이 은닉된 계좝니다. 수고비로 생각해 주십시오.”
그제서야 캉드쉬의 얼굴에 흡족한 표정이 떠올랐다.
***
IMF 총재 캉드쉬가 청와대를 내방했다.
그는 김대주 대통령에게 강압적인 언사를 내뱉었다.
“BIS 비율(자기자본비율)이 8프로 미만인 한국 시중은행들을 통폐합하거나, 국내외 자본에 즉각 매각하십시오.”
김대주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허나, 캉드쉬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한국이 선진 금융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선 BIS 비율을 반드시 지키셔야 합니다.”
“IMF의 권고사항을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캉드쉬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남 얘기하듯 툭 내뱉었다.
“국제신용평가 기관의 부정적인 평가를 받게 될 겁니다. 국가신인도가 큰 폭으로 하락하겠죠.”
“끄응······.”
김대주의 입에서 앓는 듯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간신히 IMF 구제금융을 졸업한 마당에 국가신인도가 하락한다면, 한국 경제가 심대한 타격을 받을 것이 명약관화한 탓이었다.
“IMF의 권고사항을 하루빨리 이행하십시오. 특히 자기자본비율이 8프로 미만인 외자은행을 조속히 국내외 자본에 매각하십시오.”
캉드쉬는 그 말을 끝으로 청와대 집무실에서 유유히 사라졌다.
그날 이후, 한국 정부는 외자은행을 국내외 자본에 매각할 준비에 돌입했다.
***
서울시장에 취임한 이명복은 취임 일성으로 서울 지하철 10호선을 민자 사업으로 진행하겠다고 공언했다.
서울시청 프레스센터.
이명복은 기자들을 대상으로 서울 지하철 10호선 민자사업 추진 설명회를 가졌다.
-아시다시피 지하철 사업에는 막대한 예산이 소요됩니다. 특히 서울 강서 지역과 강남을 잇는 10호선은 한강을 관통하는 관계로 다른 노선보다 2배 이상의 추가 건설비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서울시는 예산이 빠듯한 형편이에요. 뉴타운 사업도 해야 하고 임대아파트 건설도 추진해야 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독거노인분들과 소년소녀가장, 고아원, 양로원 등지에도 매년 수천억대의 예산을 투입하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저는 서울시민들의 부담을 덜어드리는 차원에서 지하철 10호선을 민자사업으로 추진하기로 방침을 정했습니다.
-물론 서울시 의회 의원 여러분들의 전폭적인 뒷받침 덕분이었습니다. 그러니 기자 여러분들도 서울시의 지하철 10호선 민자사업에 대해서 긍정적인 논조의 기사를 써주시기를 진심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명복은 자기 할 말만 실컷 한 뒤 프레스센터에서 재빨리 몸을 감췄다.
기자들의 질문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기자회견을 끝마친 이명복은 서울시장 관사가 있는 혜화동 공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공관에 도착하자마자 거실 책상에 놓인 데스크탑을 켰다.
모니터 화면을 들여다보는 이명복의 얼굴에 끈적한 탐욕이 넘실거렸다.
그는 페이퍼 컴퍼니 계좌에 입금된 거액의 외화를 목도하자 내심 흡족한 심경이었다.
<32,410,000 USD>
미화 3200만 달러에 육박하는 자금이 계좌에 입금된 상태였다.
입금주는 맥카리 사모펀드였다.
이명복은 서울시민의 혈세를 퍼주는 대가로 자기 잇속을 실컷 챙겼다.
자타가 공인하는 정치 모리배의 진면목이었다.
***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서 성대한 막을 올렸다.
홈팀인 대한민국은 동유럽의 강호 폴란드를 2대 0으로 제압하는 파란을 일으키며 한국인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허나, 나는 당최 월드컵이 못마땅했다.
월드컵 때문에 드림 케이블 방송의 시청률이 밑바닥을 긴 탓이었다.
특히 나름 잘나가던 인어 아기씨의 시청률에 급제동이 걸린 형국이었다.
시민들이 미친 듯이 월드컵에 몰입한 탓이었다.
나는 하루빨리 월드컵이 끝나기만을 학수고대했다.
상암 드림 케이블 본사.
사무실에서 결재서류에 회장 직인을 기계적으로 날인할 무렵, 재무실장이 면전에 나타났다.
재무실장이 심각한 얼굴로 보고를 올렸다.
“지난 석 달 간 이어진 드림박스의 출혈경쟁으로 거의 200억 원 대의 적자를 봤습니다. 이 상태로 시간이 지난다면 누적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겁니다. 회장님.”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죠?”
“지금 당장 치킨게임을 중단하셔야 합니다. 그 길만이 최선의 방책입니다.”
재무실장의 넘치는 충정을 십분 이해했다.
허나, 내 목표는 럿데 시네마를 박살 내는거다.
그러자면 상당 기간 치킨게임을 지속할 필요가 있었다.
“나한테 복안이 있으니까 당신은 이만 돌아가세요.”
그러자 재무실장이 체념한 얼굴로 허리를 굽힌 뒤 장내에서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결재서류에 직인을 날인 한 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김민용과 약속이 있었다.
면전에 나타난 주 실장에게 명을 내렸다.
“한남동에 있는 글램 라운지바로 갈 거니까 차를 준비시켜.”
“네. 회장님.”
수행원들을 대동한 채 라운지 바로 들어가자 기다란 테이블에 나 홀로 앉아 있던 민용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수행원들을 뒤로 물린 채 녀석의 곁으로 다가갔다.
우리는 달달한 칵테일을 음미하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민용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반도체 부문의 적자가 거의 조 단위에 육박할 지경이다.”
“적자가 왜 그리 많은 거야?”
“치킨 게임 때문이지. 미국과 일본, 대만 등지의 반도체 회사들을 모조리 무너뜨리기 전에는 치킨 게임이 끝나지 않을 거다.”
영화판의 치킨 게임과는 차원이 다른 대전쟁이었다.
“원래 우리 예상으로는 자본력이 약한 업체들이 줄도산을 할 것으로 생각했거든. 그런데 막상 전쟁에 돌입하자 예측대로 일이 돌아가지 않더라.”
녀석은 칵테일을 목젖 깊숙이 들이킨 뒤 다시 말을 이었다.
“각국 정부가 반도체 산업을 살리려고 정부 보조금을 미친 듯이 지급하더라. 그래서 일이 꼬인 거야.”
“이쯤에서 치킨 게임을 종식해도 되잖아.”
“나도 그러고 싶은데, 전자 부문의 고위 인사들이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야 한다고 어찌나 난리를 치는지 당최 감당이 안 된다.”
“이제 네가 그룹의 총순데 아직도 전대 가신들한테 말빨이 안 먹히는 거냐?”
“마음 같아서는 그 늙다리들을 모조리 쳐내고 싶은데, 현실적으로 그게 엄청 힘들어. 상속세를 절감하려면 그들의 협조가 필수적이거든.”
“상속세가 얼마길래 그래?”
“적으면 3조 원이고 많으면 7조 원이 넘을 거 같다. 그래서 미칠 지경이야.”
“갭이 왜 그리 큰 거야?”
“아버지가 생전에 차명으로 꿍쳐둔 지분이 엄청 많아서 그래. 그리고 비자금 문제도 있고.”
녀석은 속내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놨다.
나를 많이 믿는 눈치였다.
“오 집사란 놈이 있는데, 그 인간이 아버지가 차명으로 설립한 자원개발회사를 꿀꺽하려고 난리를 치고 있어.”
“자본금이 얼만데?”
“다이아와 금광, 유전 등을 보유한 회사야.”
“가치가 엄청나겠구만.”
“맞아. 아무리 못해도 7조 원이 넘을 거다. 그래서 내가 요즘에, 밤에 잠이 안 온다.”
“오집사의 행방을 모르는 거야?”
“런던에서 자취를 감춘 거 같아.”
민용의 입가에 씁쓸한 고소가 내걸렸다.
“그래도 너에게 이런 말을 속 시원히 털어놓으니까 좀 낫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언제든지 나를 불러라. 다 들어줄 테니까.”
“대신, 오늘 들은 얘기는 무덤에 갈 때까지 절대 비밀이다.”
“염려 마라. 임마. 이제 룸빵에서 술이나 빨자. 따라와라.”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하하······.”
우리는 사이좋게 인근의 룸빵으로 곧장 넘어갔다.
***
SN 엔터의 박수만 회장이 강남 인근의 아세나 클럽으로 나를 초대했다.
아세나 클럽은 박 회장이 사적으로 운영하는 클럽이었다.
수행원들을 뒤로 물린 채 클럽 3층의 vip 룸으로 올라갔다.
룸 안으로 들어가자 박수만이 환한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이렇게 회장님을 뵙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나 역시 마찬가집니다.”
우리는 악수를 교환한 후 푹신한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박 회장이 따라준 양주를 입안으로 들이키자 알싸한 뒷맛이 느껴졌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박 회장이 용건을 말했다.
“월드컵이 끝나자마자 SN 엔터에 소속된 아티스트들의 합동 콘서트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O2 아레나를 대관할 수 없을까요?”
상암동 O2 아레나는 연말까지 국내외의 각종 공연 행사가 예약된 상황이었다.
특히 월드컵이 끝나는 시기에 국내외 가수들의 콘서트가 연이어 펼쳐질 예정이었다.
“사정은 알겠지만 국내외 유명 가수들의 콘서트가 몇 달 전부터 예약된 상황입니다.”
“그래서 회장님에게 부탁을 드리는 거 아니겠습니까? 원하신다면 저희 회사가 위약금을 대납할 용의가 있습니다.”
박수만의 SN 엔터는 국내 최고의 아이돌 기획사였다.
경시할 수 없는 엔터 업체였다.
드림 엔터에 도움이 될 만한 인물이었다.
그의 편의를 봐주는 것이 서로에게 윈윈이었다.
“예약을 취소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박 회장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
늦은 밤.
유성원은 시설 좋은 1인실 독방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가 사용하는 독방에는 TV와 소형 냉장고, 샤워실 등이 완비된 상태였다.
소문난 범털답게 교도소 안에서도 나름 편하게 지내고 있었다.
성원은 밤늦도록 TV를 시청한 뒤 취침에 들었다.
그 무렵, 그의 독방에 건장한 재소자들이 벼락같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성원의 입에 재갈을 물린 뒤 샤워실로 끌고 갔다.
남자들은 샤워실 천장의 쇠파이프 배관에 죄수복으로 만든 다란 노끈을 매단 뒤 성원의 목을 노끈의 둥그런 원안으로 집어넣었다.
성원은 겁에 질린 얼굴로 발버둥 쳤지만 건장한 남자들의 완력을 당해내지 못했다.
결국 그는 샤워실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이승을 쓸쓸히 하직했다.
< 자업자득 1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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