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업자득 2 >
경선 컨벤션 효과로 지지율 고공행진을 펼치던 노무연의 지지율이 한순간에 푹 꺼졌다.
IMF의 주범으로 평가받는 김영오 전 대통령을 면담한 자리에서 그를 한껏 치켜세운 탓이었다.
그 덕분에 여당의 전통적인 민주개혁 성향 지지자들이 그에게 냉정히 등을 돌렸다.
그런 탓으로 노무연의 지지도는 이해창은 물론이고 무소속으로 대통령 선거 출마가 확실시되는 정명준에게도 뒤지는 3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물론 나는 노무연을 마음속으로 열렬히 지지했다.
그가 대통령에 등극해야 충남 연기군의 땅값이 폭등하기 때문이었다.
허나, 노무연은 대통령이 될 가망성이 거의 없어 보였다.
더구나 여당 일각에서는 한일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은 대한축구 협회장인 정명준으로, 대선 후보를 교체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불처럼 번져가고 있었다.
그는 사면초가의 형국이었다.
허나, 도플갱어는 노무연이 대통령이 될 것임을 예언했다.
아리송한 기분이었다.
현실적으로 그는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이 희박했기 때문이다.
늦은 밤, 타워필리스 펜트하우스.
김민용이 내 집에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공사가 다망하신 대 삼송그룹 부회장님께서, 무슨 바람이 불어서 누추한 곳으로 왕림했을까?”
“말장난은 그만하고 술이나 한잔 주라.’
녀석은 그리 말하며 거실 한켠에 마련된 라운지 테이블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진토닉이 들어찬 술잔을 건네자 민용이 냉큼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직후 나를 향해 은근한 어조를 흘려보냈다.
“이해창한테 보험 안드냐?”
“내가 왜?”
“그 양반은 성질 드럽기로 소문이 자자한 인간이라구. 게다가 너랑 껄끄러운 사이잖아.”
민용의 말대로 이해창과 나는 구원(拘怨)이 있었다.
그 인간이 대통령이 될 경우 나에게 온갖 수작을 부릴 것이 불 보듯 훤한 형국이었다.
허나, 나는 미국 조야에 발이 넓은 트램프 회장을 굳게 믿었다.
이해창이 대통령이 된다 해도, 트램프를 뒷배로 삼은 나를 건드리는 게 쉽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내 뒤에는 트램프 회장이 있다고. 그러니까 너는 신경 쓰지 마라.”
“임마. 그래봤자 트램프는 미국 사람이야. 언제까지 너를 도와줄지 모르는 거잖아.”
“니가 잘 모르는 모양인데 트램프와 내 사이는 보통이 아니라니까.”
“그렇게 트램프만 믿다가는 나중에 큰코다칠 거다. 그러니 나처럼 미리미리 선거자금을 배달하라고. 만사불여튼튼이니까.”
“고작 그런 얘기나 하려고 나를 찾은 거야?”
“겸사겸사지.”
녀석은 그리 말하며 빈 잔에 진토닉을 따라서 연거푸 들이켰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진토닉 두 병을 순식간에 후딱 해치운 뒤 발렌타인으로 넘어갔다.
안주 없이 양주를 먹어서 그런지 금세 술기운이 전신에 팽배해졌다.
그때, 민용의 입에서 내 호기심을 자극하는 언사가 쏟아져 나왔다.
“이명복 시장이 서울 지하철 10호선을 민자 사업으로 전환하는 댓가로 수천억을 받아먹은 모양이더라.”
“누구한테?”
“맥카리 사모펀드.”
“어디에서 입수한 정보냐?”
“그룹 비서실.”
삼송그룹 비서실은 대한민국에서 정보력이 가장 좋은 곳이었다.
국정원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그들이 확인한 첩보라면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명복은 간뎅이가 많이 부은 인물이니까 미리미리 대비를 해두는 게 좋을 거다.”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뭔데?”
“차차기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아서 그러지.”
“이해창 다음에 이명복이란 말이냐?”
민용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만 갈란다. 나중에 보자.”
“알아서 가라.”
녀석이 장내에서 사라지자마자 곧바로 취침에 들었다.
***
단촐하게 주 실장만 대동한 채 드림박스 월드컵 점을 내방했다.
암행순찰이었다.
극장은 평일 오후임에도 관람객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1500원밖에 안 되는 매우 저렴한 관람료 때문이었다.
곧바로 럿데 시네마의 합정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럿데 시네마 합정점은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관람료가 2000원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팝콘과 음료수 가격이 드림 박스보다 50퍼센트 이상 비싼 형편이었다.
그들은 드림 박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예상된 결과였다.
곧장 상암동으로 넘어갔다.
드림 케이블 본사에 도착하자마자 드림 박스 관계자들을 24층 회의실에 불러들였다.
좌중을 향해 내 의중을 밝혔다.
“내 목표는 럿데 시네마 인수합병입니다. 그런 이유로 무한 출혈경쟁에 돌입한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지금 보다 더욱 가열차게 럿데 시네마를 몰아붙이는데 사력을 다하십시오.”
모두 발언을 끝마치자마자 장준기 전무가 볼멘 목소리를 쏟아냈다.
“지금도 적자 폭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형편입니다. 그런 판국에 출혈경쟁을 1년 이상 지속한다면 수천억 대의 적자가 발생한 것이 확실합니다. 회장님.”
재무실장 역시 장 전무를 거들었다.
“적자 폭이 감당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더구나 럿데 시네마는 자금력이 좋은 럿데 그룹의 계열삽니다. 인수합병의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습니다.”
뒤이어 드림 박스의 상무 역시 반대의견을 표명했다.
“회장님의 높으신 뜻은 잘 알겠지만 현실이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재무실장의 말처럼 럿데 시네마를 인수할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습니다. 그러니 출혈경쟁을 이쯤에서 중단하심이 좋을 거 같습니다.”
장준기와 재무실장을 필두로 간부들 거의 모두 럿데 시네마 인수 가능성을 아주 낮게 보고 있었다.
럿데 시네마가 대기업 계열사였기 때문이다.
허나, 내 생각은 달랐다.
럿데 시네마를 얼마든지 인수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전가의 보도를 다시 한번 꺼내 들기로 마음먹었다.
“내일 날짜로 영화 관람료를 1천 원 수준으로 전격적으로 인하하십시오.”
순간 좌중이 폭격을 맞은 듯 소란스러워졌다.
장준기와 재무실장을 필두로 모두 내 명령을 재고해 달라고 쉴 새 없이 읍소를 남발했다.
허나, 나는 그들의 읍소를 귓등으로 흘리며 회의실을 여유로이 빠져나왔다.
***
가회동.
팔순의 차필수 회장은 최근 들어 기력이 급격히 쇠해졌다.
그런 연유로 자택에서 소일하는 시간이 부쩍 늘어났다.
허나, 그는 집 안방에서 그룹의 대소사를 매의 시선으로 살피고 있었다.
계열사 곳곳에 박아놓은 심복들이 매시간 마다 중요 사안을 전화로 보고했기 때문이다.
차 회장은 럿데 시네마의 무한 출혈경쟁에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
치킨 게임을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5백억 대의 적자를 기록한 탓이었다.
결국 그는 큰아들인 럿데 시네마 차민우 사장을 가회동으로 불러들였다.
가회동 서재에 차민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부친인 차 회장에게 고개를 숙인 뒤 면전에 공손히 시립했다.
차 회장의 입에서 창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긴말 안 하마. 내일 시간 부로 출혈 경쟁을 중단해.”
민우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이태수를 만나서 합의를 봐. 그 길이 최선이다.”
“흐음······.”
민우의 입에서 깊은 한숨 소리가 저절로 새어 나왔다.
그는 사면초가의 형국이었다.
부친에게 눈도장을 받을 요량으로 치킨 게임을 시작했지만 드림 박스는 그의 상상외로 자금력이 엄청났다.
도리어 최근에는 드림 박스와의 가격 경쟁에서 완연히 밀리는 형국이었다.
그는 오도가도 못하는 처지였다.
그 역시 이태수를 만나서 신사협정을 체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허나, 그의 오만한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 시기에 부친이 노골적으로 이태수에게 고개를 숙이라고 말하자 그의 자존심이 무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이태수한테 무릎을 꿇으라는 말씀입니까?”
“다른 수가 없지 않느냐? 니놈이 시작한 일이니, 마무리도 니가 지어야 하는 게다.”
차 회장의 냉정한 언사에 민우의 몸이 휘청거렸다.
“니놈의 자존심 따위는 내 알 바 아니니까 내일 당장 이태수를 만나!”
그의 입에서 엄한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
드림 케이블 상암동 본사.
회사에서 결재서류에 회장 직인을 정신없이 날인할 무렵 주 실장이 면전에 나타났다.
“무슨 일이야?”
“럿데 시네마 측에서 회장님에게 협상을 제안했습니다.”
“무슨 협상?”
“신사협정을 체결하자는 제안을 해왔습니다.”
“일 없으니까 연락 자체를 받지 마.”
주 실장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당연히 본심이라구. 그러니까 이만 나가봐. 결재서류가 산더미니까.”
주 실장을 내보낸 후 다시 결재서류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결재서류를 모두 처리한 뒤 벽면에 내걸린 십수 대의 대화면 TV로 시선을 돌렸다.
내 시선은 드림 케이블에서 방영을 시작한 주중 미니 시리즈인 ‘컨택‘에 모아졌다.
컨택은 장르물을 표방한 작품이었다.
당연히 제작비를 아끼는 차원에서 대박 엔터 소속의 유망주들을 대거 출연시켰다.
남주는 김우철이었고, 여주는 신은서와 김소민이었다. 그 외에도 주조연급 배역에 대박 엔터 배우들이 다수 출연하고 있었다.
컨택의 주 내용은 과거의 열혈 형사와 현재의 평범한 경찰이 무전기로 연결된 후 미제 사건을 해결한다는 스토리였다.
과거 형사는 김우철이 맡았고 현재의 경찰은 신은서와 김소민이 맡았다.
남성 시청자들을 사로잡기 위함이었다.
눈요기 거리의 여주 두 명과 과거 형사역을 맡은 남주 조합이라면 나름 쓸 만한 평가를 받을 거라고 확신했다.
***
김앤박 로펌은 조용현 전 경제부총리를 고문으로 영입했다.
그의 이용가치를 높이 평가한 탓이었다.
조용현 전 경제부총리는 모피아로 통칭되는 부패 경제관료의 태산북두였다.
조용현 사단은 경제부처의 요직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정권이 바뀐다 하더라도 실무를 장악한 조용현 사단은 끄떡없었다.
그 정도로 경제부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 같은 사실을 잘 아는 김앤박은 조용현을 연간 수십억 대의 고액연봉으로 영입했다.
클라이언트의 인수합병에 윤활유 역할을 해주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허나, 조용현의 관심은 온통 외자은행의 자기자본비율(BIS)에 모아졌다.
칼라일 사모펀드의 사주를 받은 IMF의 캉드쉬 총재는, 8프로 미안의 자기자본비율을 기록한 시중은행을 국내외 자본에게 매각하라고 권고한 상황이었다.
그 같은 사실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꿰고 있던 조용현은 시내 모처로 재정경제부 차관인 여민철과 박성동 금감원장을 불러들였다.
조용현은 면전에 마주 앉은 여민철 차관에게 메모지 한 장을 내밀었다.
용현이 건넨 메모지를 재빨리 훑은 여민철은 곧바로 박성동 금감원장에게 메모지를 전달했다.
메모지를 살핀 박성동이 놀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외자은행의 BIS 비율은 거의 7프로 대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6프로 미만으로 조작하기에는 갭 차이가 너무 큽니다.”
“그러니까 당신들이 힘을 싸야지. 외자은행장도 우리 사람이니까 당신들이 협의를 잘하라고.”
"어차피 8프로 미만이면 국내외 자본에게 얼마든지 매각할 수 있습니다."
"아니야. 그러면 뒷말이 나올 가능성이 높아. 그러니 뒷말이 나올수 없게 6프로 정도로 각을 잡자고."
조용현은 확실하게 일을 매듭짓고 싶었다.
“대통령이 눈치를 채는 날에는 모가지가 성하지 못할 겁니다.”
“어차피 김대주는 식물 대통령 신세야. 자식들이 부패 혐의로 전부 잡혀들어 갔어. 이런데 신경 쓸 겨를이 없다니까.”
조용현의 확언에 여민철과 박성동이 은근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외자은행장한테 언질을 했으니까 은행의 재무회계 파트를 우리 사람으로 하루빨리 교체해.”
용현의 엄명이 떨어지자 박성동이 은근히 물었다.
“디데이가 언젭니까?”
“금년 12월 18일. 대선 직전!”
“차기 대통령에게 손쓸 겨를을 주면 절대 안 돼!”
성동과 민철이 일사불란하게 복명했다
“명심하겠습니다. 부총리님.”
그들 모두 사익(私益)을 챙기는 데 혈안이 된 전형적인 부패 관료였다.
***
외자은행 강남 본점에 재무회계 실장으로 새로이 임명된 소현일이 나타났다.
그는 전직 재정경제부 3급 공무원이었다.
허나, 요로의 밀명을 받은 이후, 자발적으로 재경부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 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외자은행의 재무회계 실장으로 전직했다.
수상한 냄새를 여기저기 풍기는 인물이었다.
소현일은 재무회계실장으로 임명을 받자마자 기존의 팀원들을 갖가지 비리 혐의로 감사실에 고발했다.
그 덕분에 소현일이 부임한 지 단 한 달 만에 재무회계실 팀원 대다수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은행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러기를 얼마 후 그는 자기 사람들을 동원해서 외자은행의 자기자본비율(BIS)을 6프로 안팎으로 조작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그 같은 사실을 아는 이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대한민국의 국부는 엄한 사람들의 손에 놀아나고 있었다.
< 자업자득 2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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