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명준 1 >
상암동 드림 케이블 본사.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벽면에 디스플레이 된 십수 대의 대화면 TV를 일제히 켰다.
드림 케이블의 방송은 물론이고 지상파와 CNN, 타 케이블 채널을 매의 시선으로 모니터링 하기 위함이었다.
나름의 직업병이었다.
푹신한 가죽 의자에 좌정한 채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진 닐슨의 시청률 기록지에 시선을 고정했다.
드림 케이블 방송사의 프로그램 중에서 시청률 1백 위권 안에 들어간 프로는 단 두 작품에 불과했다.
인어 아기씨와 슈퍼스타 드림 이렇게 2개였다.
나머지는 2.3백 위권에 포진하고 있었다.
애국가 시청률보다도 못한 수준이었다.
내심 기대했던 장르물 컨택은 1프로 내외의 저조한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었다.
아직 한국의 대중들은 장르물을 받아들이기에 미성숙한 모양새였다.
솔직히 제작비가 아까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드라마 방영을 중단한다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어찌 됐든 완결을 지어야 했다.
성에 안 차는 시청률 때문에 내심 노심초사할 무렵 주 실장이 면전에 나타났다.
“강성진이란 사람이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그 인간이 누군데?”
주 실장이 은근한 어조로 대답했다.
“이해창 한국당 대표의 사조직인 해사랑을 관리하는 인물입니다.”
갑자기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나를 왜, 만나려고 하는 거야?”
“아무래도 정치자금 때문인 거 같습니다.”
주 실장의 말대로 십중팔구 돈 달라고 나를 찾아온 거 같았다.
“이해창의 측근 인물들이 대기업 중견기업 할 거 없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닌다는 소문이 재계에 파다합니다.”
주 실장은 그리 말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내 대답은 ‘노우‘ 였다.
“일 없으니까 그냥 돌려보내.”
“회장님. 이해창은 대선에서 승리할 것이 확실시되는 인물입니다. 그런 사람의 측근 인맥을 빈손으로 돌려보낸다면 후환이 따를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차피 나랑 이해창은 같이할 수 없는 사이야. 그 인간의 종놈을 묵사발을 냈는데 정치자금을 준다고, 나를 이뻐할 거 같아?”
“그래도 다소간의 성의를 보인다면 이해창의 마음을 풀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결국 못 이기는 척 주 실장의 충언을 받아들였다.
“알았으니까 그 인간을 사무실로 들여보내.”
“잘 생각하셨습니다. 회장님.”
주 실장의 자기주장이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었다.
나름 비서실장 태가 나고 있었다.
잠시 후, 면전에 야비하게 생긴 50대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향해 목례를 취한 후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대표님의 사조직을 관리하는 강성진이라고 합니다.”
녀석은 말로써 자신을 소개한 뒤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자신을 소개할 변변한 명함조차 없는 정치 모리배였다.
아니나 다를까, 놈의 입에서 생뚱맞은 언사가 쏟아져 나왔다.
“과거의 불미스러운 일도 있고 하니, 이번 기회에 선거자금을 제대로 지원해 주십시오. 그리 해주신다면 대표님의 마음이 너그러이 풀리실 겁니다.”
떡 줄 놈은 생각도 안 하고 있는데, 제 혼자 김칫국물을 한 사발이나 들이키는 모양새였다.
“긴말 하지 않겠습니다. 선거자금으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700억만 지원해 주십시오.”
점입가경이었다.
한두 푼도 아니고 무려 700억을 요구하고 있었다.
성질 같아서는 녀석의 간사한 면상을 묵사발을 내고 싶었지만 뒤에 도사린 이해창 때문에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놈에게 나름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저에게는 그만한 돈이 없습니다.”
“해외에 꿍쳐둔 돈이 어마어마하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런 분이 7백억이 없다고 쩔쩔매시다니······ 후후······.”
강성진은 면전에서 나를 대놓고 비웃고 있었다.
순간 내면에서 욱하는 성깔머리가 활화산처럼 폭발했다.
위기 신호였다.
나는 ‘참을 인’자를 마음속 깊숙이 아로새기며 어금니를 피가 날 정도로 거세게 앙다물었다.
입안에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어금니를 너무 세게 앙다문 탓이었다.
그런 탓으로 금세 제정신이 돌아왔다.
하마터면 대형사고를 칠 뻔했다.
심호흡을 깊이 한 뒤 나를 조소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강성진에게 정중히 답했다.
“곰곰이 생각한 연후에 따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일주일 안으로 결판을 지어주십시오. 그럼 이만.”
놈은 그 말을 끝으로 내 사무실에서 유유히 사라졌다.
***
한남동 인근의 라운지 바에서 민용을 만났다.
녀석에게 조언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이해창이 보낸 종놈이 돈을 달라고 찾아왔더라.”
민용이 예상했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뿐만 아니라 돈 좀 있다는 기업인들은 전부 다 찾아가는 모양이더만.”
“삼송그룹은 얼마나 갖다 바친 거냐?”
민용이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
“1천억?”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선에서 이해창이 승리할 확률이 몇 프로냐?”
“지금 현재론 99프로 정도겠지.”
“변수는 없냐?”
“노무연이랑 정명준 주변에서 후보 단일화 얘기가 나오고는 있는데 성사 여부는 미지수야.”
내 귀가 번쩍 뜨이는 빅뉴스였다.
“어디에서 구한 첩보냐?”
“당연히 대 삼송그룹 비서실이지.”
녀석이 자부심 그득한 얼굴로 두 어깨를 으쓱였다.
“만약에 말이다. 노무연이랑 정명준이 후보 단일화에 성공하면 이해창을 이길 수 있는 거냐?”
“후보 단일화가 된다면 얼마든지 이해창을 이길 수 있을 거다. 그런데 문제는 후보 단일화가 말처럼 쉬운 게 아니야. 변수가 너무 많아.”
민용은 칵테일을 입안에 한 모금 들이킨 뒤 다시 말을 이었다.
“노무연이랑 정명준은 성향이 너무 판이해. 한 명은 상고 출신의 정치인이고, 다른 한 명은 현도 그룹 막내아들 출신이지. 그래서 쉬이 섞일 가능성이 별로 없어.”
그의 말대로 그들의 성향은 정반대였다.
한 명은 개천의 용이었고, 다른 한 명은 태어날 때부터 재벌가의 귀한 아들이었다.
“아무래도 당분간 미국으로 가 있는 게 좋을 거 같다.”
민용의 진솔한 충고였다.
허나, 나는 한국에서 벌여놓은 사업이 너무 많았다.
이해창이 두렵다고 미국으로 훌쩍 떠난다면 만사 도로아미타불이었다.
절대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날 밤, 타워필리스 펜트하우스.
창가를 서성이며 이해창에 대해서 심사숙고했다.
도플갱어의 예언과 달리 노무연은 대통령이 될 가망성이 거의 없었다.
지지율이 10프로 대를 전전한 탓이었다.
그렇다고, 바보처럼 이해창에게 7백억이란 거금을 선뜻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막말로 그까짓 7백억은 내 입장에서 그리 큰돈이 아니었다.
마음만 맞으면 얼마든지 줄 수 있는 돈이었다.
허나, 상대가 이해창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태생적으로 그 인간이 싫었다.
마음에 전혀 들지 않는 사람에게 7백억을 헌납하고 싶지 않았다.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최선은 선거자금을 1백억 수준으로 절충하는 것이다.
마음을 정한 뒤 명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당장 내 집으로 와라. 할 말이 있으니까.
-무슨 일인데?
-그냥 와! 끊는다.
명우는 내 앞에 나타나자마자 볼멘 목소리를 쏟아냈다.
“오밤중에 바쁜 사람을 뭐하러 부른 거야?”
“일단 자리에 앉아.”
녀석이 심드렁한 얼굴로 맞은편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곧바로 용건을 꺼냈다.
“명우야. 이제 너도 밥값 좀 해라.”
“대박 엔터랑 히말라야 프러덕션 맡아서 나름 잘하고 있잖아.”
“그건 다른 사람이 해도, 그 정도는 해.”
녀석이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뻔히 쳐다봤다.
“그런 얼굴로 쳐다보지 말라니까.”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요즘 이해창이 선거자금 갖다 바치라고 난리를 치고 있거든.”
명우가 한껏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이 사실이냐?”
“예전에 이해창 측근을 묵사발을 냈거든. 그 일 때문에 나한테 감정이 많은 모양이야.”
“아휴······ 너도 욱하는 못되처먹은 성깔머리 좀 제발 고쳐라.”
“그건 형이 알아서 하니까 신경 쓰지 말고, 일단 강성진이란 사람을 만나봐.”
“강성진이 누군데?”
“이해창의 사조직을 관리하는 놈이다.”
“만나서 뭐를 하면 하는데?”
“선거자금을 1백억 이내로 낮춰. 그러면 된다.”
“합의가 안 되면?”
“그럼 할 수 없고.”
***
주말을 이용해 소민과 일본 북해도로 여행을 갔다.
간만에 스키와 온천을 즐기기 위함이었다.
북해도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온천장에서 심신의 피로를 해소할 무렵, 주 실장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김명우 사장의 연락입니다.”
“줘 봐.”
주 실장이 내 손에 폰을 공손히 건넸다.
수화기에서 명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성진이란 놈이 선거자금으로 무조건 7백억을 내놓으라고 난리를 치더라. 협상이고 나발이고 물 건너 간 거 같다.
-수고했다. 신경 꺼라.
-이해창이 대통령이 되면 골치 아파지니까 당분간 미국에 가 있는 게 어떠냐?
명우도 민용처럼 미국으로 도피할 것을 권유했다.
나름 일리가 있는 충고였다.
-알아서 할 테니까 일이나 봐라.
통화를 끝낸 뒤 뜨거운 온천물에 온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백억으로 쇼부를 치려 했지만 이해창은 더 많은 돈을 원하고 있었다.
당분간 미국에서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는 게 최선이었다.
다음날.
한국에 입국하자마자 타워필리스로 직행했다.
집에 도착한 뒤 미국으로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여권과 신분증, 옷가지 등을 여행 캐리어에 대충 챙긴 뒤 거실 소파에 온몸을 파묻었다.
뿌연 담배 연기를 모락모락 피워 올릴 무렵 주 실장이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은 내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제멋대로 벽면에 내걸린 대화면 TV를 켰다.
직후 뉴스 앵커의 경쾌한 목소리가 내 귓전을 강타했다.
-노무연 후보와 정명준 후보가 후보 단일화에 전격적으로 합의했습니다. 양측은 1주일 동안 시민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진행한 뒤 높은 지지율을 기록한 후보에게 대선 후보직을 양보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중략······.
놀랄 노자였다.
불가능할 거 같았던 후보단일화가 하루아침에 전격적으로 성사된 것이다.
그런 탓일까? 내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휴우······.”
곧바로 김민용에게 전화를 걸었다.
-후보 단일화 뉴스 봤냐?
-당연히 봤지.
-후보 단일화가 되면 이해창을 무조건 이길 수 있는 거지?
-거의 백프로다. 서민과 재벌의 결합이라 시너지 효과가 장난이 아닐 거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여론조사를 해봐야겠지.
-너희 비서실 자체적으로 돌리는 거냐?
-대선후보 여론조사를 실시하고 있으니까 결과가 나오면 알려줄게.
민용은 그리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삼송그룹 비서실은 대한민국 최강의 정보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자체적으로 대선후보 여론조사를 주기적으로 실시하는 중이었다.
며칠 후.
민용이 내 집에 나타났다.
녀석의 손에는 여론조사 결과지가 들려 있었다.
“노무연, 정명준 누가 나와도 이해창을 15프로 차이로 이긴다고 결과가 나오더라.”
민용은 그리 말하며 여론조사 서류를 내 손에 건넸다.
그의 말대로 이해창은 단일후보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이해창이 대통령이 된다면 골치가 아파지는 탓이었다.
나는 노무연과 정명준이 하루빨리 이해창을 물리쳐 주기를 학수고대했다.
며칠 후, 노무연이 단일후보로 선출되었다.
도플갱어의 예언이 현실화되는 순간이었다.
***
북경 중관촌.
중국식 전통 찻집에 중년의 남성 두 명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들어섰다.
그들은 구석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뒤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휴전선 부근에서 총격 사건을 일으켜 주신다면 미화로 2천만 달러를 제공할 용의가 있습니다.”
강퍅한 인상의 남자가 고개를 저으며 불만스런 언사를 내뱉었다.
“최소 5천만 달러로 가격을 맞춰주시라요, 그 이하로는 받아들일 수 없으니끼니.”
“그까짓 총질 한번 해주는 댓가로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거 아닙니까?”
“야! 이 종간나 새끼야! 그럼 니들이 휴전선에서 총질을 하면 될 거 아니니? 개호랑말코같은 헛소리를 씨부릴거면 나를 찾지 말라!”
남자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한국 측 인사가 낭패한 몰골로 어단가로 급히 전화를 걸었다.
-남극성입니다. 상대방이 미화로 5천만 달러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달라는 대로 돈을 줘. 대신 총격 사건의 규모를 키우고 시간을 앞당겨.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겁니까?
-니놈은 명령에 복종하면 그만이다. 이의 제기 따위를 하지 말라고!
-죄송합니다.
-이번 일이 밖으로 새어나가면 너나 나나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니까 비밀을 끝까지 엄수해!
-알겠습니다. 국장님.
남자는 전화를 끊은 뒤 북한 측 인사가 사라져간 방향으로 급하게 달려나갔다.
< 정명준 1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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