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명준 2 >
이해창은 초조한 심경이었다.
정명준과의 후보 단일화에 기적적으로 성공한 노무연의 지지율이 날이 갈수록 가파르게 치솟은 탓이었다.
그 무렵, 한국당 산하의 여의도 연구소가 자체 진행한 여론조사 결과는 그에게 거대한 충격파로 전해졌다.
한국당 당사 대표실.
여의도 연구소장이 침통한 얼굴로 이해창에게 보고를 올렸다.
“이 상태로 대선이 치러진다면 노무연 후보가 최소 15퍼센트 격차로 대표님을 승리하는 것으로 여론 조사 결과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해창의 얼굴이 잿빛으로 물들었다.
“큰 아드님의 병역 비리 루머가 날이 갈수록 고조되는 상황에서 정명준과 노무연의 단일화 효과가 중도층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는 힘 빠진 얼굴로 연구소장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연구소장이 나가자마자 비서실장인 이윤택 의원이 장내에 나타났다.
“북한 측이 미화 5천만 불을 요구했습니다.”
이해창은 벼랑 끝에 내몰린 형국이었다.
“휴전선에서 북풍을 일으킨다면 안정희구세력이 대표님에게 몰표를 던질 겁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어차피 김대주는 식물 대통령 처지라 북한에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자기 아들들 옥바라지하기에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지경이니까요.”
이해창의 입에서 냉정한 어조가 흘러나왔다.
“97년 대선에서도 총풍 사건 때문에 모진 고생을 했어. 그러니 헛짓거리하지 말고 정명준이나 만나봐.”
“네에······?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북풍은 이제 약빨이 다 떨어졌어. 최선의 선택은 정명준의 마음을 되돌리는 길이라고!”
이해창이 언성을 높이자 이윤택이 체념한 얼굴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명하신 대로 정명준 측에 언질을 넣어보겠습니다.”
“반드시 대선 직전까지 정명준의 마음을 되돌려야 한다. 그러니 그자가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줄 의향이 있다고 확실하게 전달해!”
“명심하겠습니다. 대표님.”
***
상암동 드림 케이블 본사.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재무실장이 올린 2002년 결산회계 보고서에 시선을 고정했다.
드림 케이블과 드림 박스는 금년에 각각 600억대와 700억대의 적자를 기록했다.
총합 1300억 원에 육박하는 액수였다.
예전이었다면 드림 박스에서 올린 수익으로 케이블의 적자를 보전했겠지만, 양사 모두 적자투성이인 탓에 TS 인베스트먼트에서 긴급 경영자금을 지원받는 형국이었다.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액수였다.
어느 정도 예상한 적자인 관계로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나는 앞으로도 케이블 방송과 복합상영관에 수천억대의 돈을 쏟아부을 계획이었다.
밑천은 여전히 많았다.
HBC 은행의 계좌에 미화 10억 달러 정도가 있었고, 국내 시중은행에도 1조 원 대의 여유자금이 있었다.
당분간 그 돈으로 버티면 그만이었다.
더불어 노무연이 대통령이 된다면 충남 연기군의 토지가 활화산처럼 불타오를 것이 명약관화했다.
실탄은 충분했다.
일단은 드림 박스가 영화시장을 완전히 장악하는 게 급선무였다.
그러자면 럿데 시네마를 반드시 박살 내야 한다.
그 후 헐값에 인수하면 게임 끝이었다.
시간은 내 편이었다.
롯데 그룹이 아무리 대기업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벌여놓은 사업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돈 들어갈 구멍이 지천에 널린 것이다.
반면 나는 드림박스와 케이블 방송에만 전념하면 그만이었다.
1년 정도 출혈경쟁을 더 지속한다면 럿데 시네마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다고 확신했다.
나름 염두를 굴린 뒤 장준기 전무를 면전에 호출했다.
장 전무는 부동자세로 면전에 시립한 채 내 눈치를 살폈다.
“영화 관람료를 5백 원으로 인하하세요.”
그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회장님. 지금도 살인적인 수준으로 헐값 경쟁을 하는 마당에 관람료를 5백 원으로 내린다면 적자 폭이 천억대를 넘어설 겁니다!”
“돈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하니까 당신은 시키는 일이나 제대로 처리하세요.”
그리 말하며 나가라는 손짓을 하자 장 전무가 곤혹스런 얼굴로 장내에서 조용히 물러났다.
장준기를 내보낸 뒤 김용대를 호출했다.
용대가 내 앞에 나타났다.
“오늘이 별을 쐈다의 막방인가?”
“네. 회장님.”
“시청률이 얼마나 나올 것 같아?”
“아무리 못해도 5프로를 돌파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5프로를 지상파로 환산한다면 몇 프로지?”
“최소 20프로 이상입니다.”
김우철과 김소민이 주연으로 참여한 별을 쐈다가 나름 호기록을 작성했다.
인어 아기씨에 버금가는 시청률을 기록한 것이다.
작가진이 약해서 별다른 기대를 안 한 드라마가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광고 판매 액수를 말해 봐.”
“오늘 막방까지 총 51억에 달하는 광고 판매를 기록했습니다.”
“제작비는 얼마지?”
“35억 안팎입니다.”
16억 원에 달하는 흑자를 봤다.
“드림 케이블의 드라마 판권을 일본과 중국 동남아, 중남미 등지에 적극적으로 세일즈해.”
“그래서 말인데, 이번 기회에 드라마의 해외 판매를 증대하는 차원에서 해외 판촉팀을 새로이 신설하는 게 어떻습니까?”
괜찮은 아이디어였다.
“대신 인원수를 최소화해서 배치해. 영어와 일어, 스페인어에 능한 사람들 위주로.”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곧바로 김재연 에능국장을 면전에 불러들였다.
“SN 엔터의 연말 공연이 언제부터 시작이지?”
“이번 주 금요일 저녁부터 일요일 저녁까지 3일 동안 O2 아레나에서 펼쳐질 예정입니다.”
“나도 관람할 생각이니까 알아서 자리를 빼놔.”
“넵. 회장님.”
***
금요일 저녁.
상암동 O2 아레나 주변은 SN 엔터 소속 아이돌 그룹의 공연을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몰려온 팬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국내 소녀팬은 물론이고, 일본, 중국, 동남아, 미국, 유럽, 중남미 등지의 케이팝 팬들은 O2 아레나에 들어선 임시 가판대에서 시디와 아기자기한 굿즈 상품을 매입하기 위해 부산한 발걸음을 놀리고 있었다.
나 역시 그들 중의 한 명이었다.
나는 걸그룹보다 남돌 그룹인 신와를 좋아했다.
특히 그들의 파워풀한 칼군무와 리듬 앤 블루스가 가미 된 댄스곡을 무척 선호한 탓에 신와의 시디를 여러 장 구입했다.
심심할 때마다 감상할 요량이었다.
주 실장과 함께 오투 아레나로 들어서자 보안 요원들이 우리 앞을 막아섰다.
곧바로 주 실장이 그들에게 VIP 관람 티겟을 내보였다.
보안요원들은 우리를 3층 관객석으로 안내했다.
그 자리는 무대가 한눈에 내려다보는 천혜의 명당이었다.
나름 VIP석에 걸맞는 위치였다.
얼마 후, SN 엔터 소속 아이들 그룹의 열광적인 합동 콘서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공연장은 감동의 도가니였다.
전 세계에서 몰려든 케이팝 팬들은 국내 소녀팬들을 능가하는 수준의 광적인 환호성을 쉴 새 없이 내질렀다.
케이팝의 무한한 가능성을 두 눈으로 생생히 목도했다.
케이팝은 드라마와 영화를 능가하는 강렬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런 탓으로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인들이 미친 듯이 열광한 것이다.
나는 그날, 아이돌 그룹을 론칭하기로 굳게 다짐했다.
케이팝의 마성 적인 매력에 흠뻑 취한 탓이었다.
***
서울 모처.
명우와 김태섭은 술잔을 기울이며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태섭의 입에서 은근한 어조가 흘러나왔다.
“회장님의 검찰 내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고급 룸살롱 서비스를 검찰 간부들에게 주기적으로 제공해야 합니다.”
“뚜쟁이 노릇을 하라는 말이냐?”
“필요하다면.”
태섭이 짤막하게 대꾸하자 명우의 입에서 앓는 듯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끄으응······.”
“이미 회장님도 허락한 사안입니다. 그러니 선배님이 힘을 좀 써주세요.”
“고급 룸빵을 마련하려면 장소와 아가씨, 입이 무거운 놈들이 필요한데, 그게 현실적으로 쉽지 않잖아.”
“르네상스 빌딩이 비었지 않습니까?”
“르네상스에는 대박 엔터랑 히말라야 배급사, 프러덕션이 입주한 상태라고. 그런 곳에 룸살롱을 조성하면 내 입장이 뭐가 되냐?”
“그래도 르네상스 빌딩만 한 장소가 없습니다. 특히 탑층에 있는 펜트하우스는 인테리어 공사 없이 그대로 사용해도 무방할 정도라구요.”
명우는 더 이상 반대의견을 표명하지 않았다.
태수가 이미 허락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웨이터와 아가씨는?”
“그곳에서 일했던 애들을 데려오세요. 물론 입이 무거워야겠죠.”
“좋아. 니 말대로 한다고 치자.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무료로 고급 룸살롱을 운영한다면 경비가 만만찮게 들 거다. 그 많은 돈을 어디에서 구해?”
태섭이 별일 아니라는 얼굴로 두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그건 선배님이 알아서 하셔야죠.”
“자기 일이 아니라고 아주 편하게 말하는구만.”
“뭘 그리 어렵게 생각하세요. 어차피 회장님이 알아서 대주는 돈인데?”
“니가 아직 태수 성격을 몰라서 그래. 그놈은 손이 큰 대신 자기 멋대로 헛돈을 쓰면 불같이 화를 내는 성미라구!”
“대박 엔터랑 히말라야 배급사, 프러덕션의 업무추진비를 활용하면 되잖아요.”
“일단 그 문제는 태수랑 상의를 해본 후에 연락을 줄게.”
“거참······ 왜 그렇게 일 처리를 미적대는 겁니까? 회장님도 허락한 일이라고요!”
“암튼 나중에 보자.”
김명우는 그 말을 끝으로 장내에서 도망치듯 사라졌다.
***
상암동 드림 케이블 본사 회장실.
주 실장이 면전에 나타났다.
“김명우 사장께서 면담을 요청하셨습니다.”
“들여보내.”
“네. 회장님.”
명우가 내 앞에 나타났다.
녀석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서류철을 내 책상 위에 툭 내던졌다.
“그게 뭐야?”
“2003년 개봉 예정 영화 리스트.”
서류철을 훑자 마음에 걸리는 개자식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서울을 지키자’라는 영화는 무조건 배급 중지다.”
“이유가 뭔데?”
“남주인 이상철이 마음에 안 들어.”
“박초원 때문에 그러냐?”
이상철은 박초원과 붙어먹은 미남 배우였다.
“알면서 뭐하러 묻냐?”
“그래도 서울을 지키자는 감독이랑 배우가 빵빵해서 흥행 가능성이 높아.”
“흥행이고 나발이고, 드림 박스에서 안 걸어주면 게임 끝이라고. 상영관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주제에 흥행이 되겠냐?”
“럿데 시네마가 있잖아.”
“걔들은 이미 파산 직전이다. 우리 드림 박스랑 가격 경쟁력이 안 된다고.”
“하긴, 입장료가 5백 원인 드림 박스를 누가 당해내겠냐. 으이구······.”
녀석이 질렸다는 얼굴로 고개를 연신 저었다.
“대체 언제까지 치킨 전쟁을 할 셈이야. 적자가 한두 푼이 아니잖아?”
“돈 걱정은 하지 마라. 실탄은 충분하니까.”
“대체 니 목표가 뭐냐?”
“당연히 영화산업을 독점하는 거지. 그 후에는 방송 산업도 먹을 생각이다.”
“영화야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방송 산업을 독점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지 않냐? 지상파가 있어서.”
“하여튼 내 말대로 이상철이 주연으로 참여한 서울을 지키자를 배급에서 제외해.”
명우가 체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김태섭을 어제 만났는데 이상한 소리를 하더라.”
“무슨 말을 했는데?”
“검찰 고위층의 로비를 전담하는 고급 룸살롱을 만들자고 난리를 치더라니까.”
“그게 뭐가 이상해?”
명우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정말 그놈 말대로 공짜 룸살롱을 운영할 생각이냐?”
“못할 것도 없지. 어차피 이 바닥에서 손쉽게 사업을 하려면 검찰의 뒷배가 필요하니까.”
“그래도 돈이 많이 들잖아.”
“장소는 르네상스 빌딩 탑층에 있는 펜트하우스를 활용하면 될 테고, 웨이터랑 아가씨는 돈만 주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잖아.”
“아무리 못해도 연간 백억 대의 돈이 필요할 거다. 니가 검사들을 잘 몰라서 그러나 본데, 그 치들은 공짜라면 환장하는 족속이라고!”
“그래서 니 역할이 중요한 거야. 룸에 몰카도 설치하고, 검찰이 출입할 때마다 장부를 작성해 둬. 술값과 화대 등을 자세히 적어놔. 나중에 쓸모가 있을 테니.”
명우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짙게 드리워졌다.
“니가 원하는 게 대체 뭐냐?”
“당연히 비지니스지. 검찰은 도구에 불과해. 그러니 형이 말한 대로 해라. 의문 좀 갖지 말고.”
“내 직책이 한두가지가 아니잖아. 엔터 사업도 해야 하고, 프러덕션이랑 배급사도 경영해야 한다구.”
“그렇게 불만이면 프럭덕션이랑 배급사 대표를 다른 사람으로 앉힐게. 이제 됐지?”
당연히 녀석은 화들짝 놀란 얼굴로 양팔을 맹렬히 저었다.
“임마. 말이 그렇다는 거지. 너는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이냐?”
“그러니까 형이 시키는 일이나 고분고분 처리해. 그러라고 너한테 고액 연봉을 주는 거니까.”
“내가 앓느니 죽고 만다. 이 자식아.”
책상 서랍에서 1억 원에 상당하는 양도성 예금증서를 꺼내서 명우에게 건넸다.
녀석이 금세 반색하는 얼굴로 감사의 변을 쏟아냈다.
“고맙다. 친구야. 하하······.”
“위로금 조로 주는 거니까 잘 사용해라. 그리고 형이 때가 되면 너에게 금뱃지도 달아줄게.”
명우가 격동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오래전부터 생각한 거니까 형 밑에서 착실히 일이나 해라. 시기가 무르익으면 국회로 보내줄 테니까.”
명우가 감동한 얼굴로 격하게 외쳤다.
“고맙다. 친구야. 정말 너밖에 없다. 우하하하······!”
녀석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장내에 쩌렁쩌렁 메아리쳤다.
< 정명준 2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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