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핵재벌 개망나니-91화 (16/200)

< 정명준 3 >

2002년 12월 18일 오전 무렵.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TV를 켰다.

오늘은 대통령 선거 당일이었다.

TV 뉴스에 이목을 집중했다.

-오늘 새벽 02시경, 노무연 선대위원장인 정명준 의원이 노무연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다는 깜짝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지금 이 시각 현재 노무연 후보는 성북동 자택에서 칩거 중인 정명준 의원에게 면담을 요청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중략······.

아닌 밤중에 날벼락이 떨어진 형국이었다.

이해창을 여유 있게 따돌리던 노무연이 하루아침에 급전직하한 탓이었다.

더불어 나 역시 극심한 위기감에 휩싸였다.

이해창이 대통령이 될 경우 나를 목표로 서슬 퍼런 권력의 칼날을 휘두를 것이 볼보 듯 뻔했기 때문이다.

TV를 끄자마자 주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용기를 대기시켜! 지금 당장!

-알겠습니다. 회장님.

대충 옷을 걸친 뒤 책상 서랍에서 여권과 지갑을 챙겼다.

직후 경호원을 대동한 채 지하 주차장으로 재빨리 내려갔다.

김포국제공항 전용기 계류장에 도착하자 주 실장이 나를 맞이했다.

“조종사는?”

“이미 대기 중입니다.”

“그럼 나 혼자서 미국으로 갈 테니까, 누가 물어보면 급한 용무 때문에 출장 갔다고 대충 둘러대.”

주 실장은 내 속내를 빤히 알고 있었다.

이해창과 내가 견원지간임을 잘 아는 탓이다.

***

푸른 창공을 가르는 전용기 안에서 한국으로 쉴 새 없이 국제전화를 넣었다.

선거 상황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아직 선거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개표가 시작조차 하지 않은 탓이었다.

최소 다섯시간 이상 기다려야 할 거 같았다.

결국 무료한 시간을 빠르게 극복하기 위해 낮잠을 때리기로 작심했다.

전용기 내실의 푹신한 침대에 드러눕자마자 잠이 비 오듯 쏟아졌다.

기다리던 바였다.

눈을 뜨자 푸른 창공이 검은 하늘로 뒤바뀐 상태였다.

곧바로 한국에 전화를 넣었다.

수화기에서 주 실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거 결과를 말해 봐.

-노무연이 이해창을 6프로 차이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놀랄 노자였다.

정명준의 깽판에도 불구하고 노무연이 선거에서 승리한 것이다.

이번에도 역시 도플갱어의 신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승리할 가망성이 없어 보였던 노무연이 도플갱어의 예언대로 대통령에 당선 된 탓이었다.

7시간 뒤.

LA 국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공항 주변을 배회하는 노란색 택시에 몸을 실었다.

“다운타운에 위치한 유니버셜 힐튼 호텔로 갑시다.”

“네. 손님.”

유니버셜 힐튼 호텔 로비로 들어가자 백인 아가씨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반가이 맞이했다.

“룸을 예악 하셨나요?”

“펜트하우스를 예약했습니다.”

순간 그녀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져갔다.

일행도 없이 단출하게 방문한 내가 하룻밤 숙박료만 수천만 원에 달하는 펜트하우스를 예약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내 위아래를 자세히 살피며 은근한 얼굴로 물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이태수라고 합니다.”

그녀는 숙박 명부에서 내 이름을 발견한 후 다소곳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펜트하우스로 안내해 드릴게요.”

“고맙습니다.”

펜트하우스는 탑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여행용 캐리어를 수발한 벨보이에게 백 달러 지폐를 건네자 나를 향해 정중히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고객님.”

벨보이를 내보낸 후 호텔우먼에게 내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이 호텔에서 가장 잘하는 요리와 샴페인을 가져다주세요.”

“네. 고객님.”

그녀가 고혹적인 눈웃음을 내비치며 내 손에 들린 지갑을 은근히 쳐다봤다.

팁을 갈구하는 애처로운 눈빛이었다.

결국 못 이기는 척 그녀의 손에 백 달러 지폐 다섯 장을 쥐여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감격한 얼굴로 화답했다.

“감사합니다. 고객님.”

그녀는 동양식 예절을 어느 정도 아는 모양인지, 나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그 바람에 그녀의 뽀얀 목덜미가 내 망막 가득 아리도록 파고들었다.

호텔우먼은 아찔한 뒷태를 과시하며 펜트하우스에서 조신하게 물러났다.

나름 매혹적인 아가씨였다.

대략 3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무렵, 동서양의 산해진미와 샴페인 등이 장내에 반입했다.

푸아그라, 캐비어, 불도장, 제비집 등의 진미를 맛본 뒤 달달한 샴페인으로 목을 축였다.

어느 정도 포식을 한 뒤 테라스로 걸어 나갔다.

눈 앞에 펼쳐진 고층 빌딩 숲을 조망하자 담배 생각이 절실했다.

허나, 내 수중에는 담배가 없었다.

곧바로 룸서비스에 콜을 넣었다.

-던힐 담배를 가져다주십시오.

-네. 고객님.

룸서비스맨이 금세 내 앞에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던힐 담배가 들려 있었다.

백 달러 지폐를 팁으로 건네자 그가 좋아죽는 얼굴로 화답했다.

“고맙습니다. 고객님.”

룸서비스맨이 나가자마자 줄담배를 말아 올렸다.

흡연욕구를 충족하자 잠이 비 오듯 쏟아졌다.

결국 그 자리에서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시차 적응이 아직 완전치 않은 탓이었다.

다음 날 아침.

찬란한 아침 햇살이 통유리창을 통해 펜트하우스 실내로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소파에서 잠을 자서 그런지 온몸이 찌뿌둥했다.

그때, 고픙스런 마호가니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진 핸드폰이 요란한 울음을 토했다.

소파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킨 후 책상으로 다가갔다.

폰을 귓전에 가져가자 명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미국이냐?

-알면서 뭐하러 물어?

-이해창이 대통령에 당선될까 봐 도피성 외유를 나간 거야?

-쓸데없는 질문은 하지 말고, 요점만 간단히 말해 봐.

-오케이. 그럼 니가 원하는 대로 요점만 말할게.

-여배우 이지연이 대박 엔터에 제 발로 찾아왔다.

이지연은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 최고 여배우였다.

미모와 연기력을 두루 겸비한 탓이었다.

-이유가 뭔데?

-당연히 대박 엔터로 이적하고 싶어서 그런 거지.

-기존의 소속사는 어쩌고?

-계약 기간이 종료됐다고 하더라.

-그 여자가 원하는 계약금이 얼마냐?

-계약금 7억에 품위 유지비 연간 3억, 그리고 개인 매니저랑 코디의 월급 보조를 원하더라.

-분배비율도 말해 봐.

-당연히 9대 1이다.

이지연다운 요구 조건이었다.

그녀는 분배비율마저 9할을 원하고 있었다.

이지연은 안방 드라마, 시청률 보증수표였다.

그녀가 출연하는 작품마다 시청률 대박을 쳤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로 고정 팬층이 아주 많았다.

그렇지만 이지연이 별로 내키지 않았다.

회사가 너무 손해 보는 계약이었기 때문이다.

실익이 거의 없었다.

-없던 일로 해. 요구 조건이 너무 과해.

-그럴 줄 알았다. 그래서 너한테 혹시나 하고 연락해 본 거야.

-잘 아는 놈이 뭐하러 전화질이야. 니 선에서 짜르지않고.

-말을 말자. 이만 끊는다.

***

가회동 서재.

럿데 그룹 차필수 회장은 면전에 우두커니 서 있는 차민우를 싸늘히 노려봤다.

차 회장의 입에서 서릿발 같은 언사가 흘러나왔다.

“한 달 안에 치킨 게임을 끝내! 만약 일을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한다면 니놈을 그룹에서 쫓아낼 테다!”

민우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니놈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다. 이만 나가봐!”

가회동을 도망치듯 빠져나온 민우는 김민용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

그들은 로열패밀리답게 나름의 친분이 있었다.

-이태수 회장과 친하다면서?

민우의 물음에 민용이 화답했다.

-친한 편이지. 그런데 그건 왜 묻냐?

-이 회장한테 연락할 일이 있는데 국내에 없다고 하더라.

-지금 미국에 있을 거다.

-그래서 말인데, 이 회장에게 나 대신 말 좀 전해 줄래?

-무슨 용건인데?

-출혈경쟁을 중단하자는 제안을 하려고 그래.

-영화판 이전투구를 끝낼 생각이냐?

-그러니까 니가 나 대신 말 좀 전해 줘.

-알았다. 내가 연락을 해볼게.

-고맙다. 나중에 시간 되면 술이나 한잔하자.

-그러자. 이만 끊는다.

***

아름다운 산타모니카 비치에서 해수욕을 즐길 무렵 민용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럿데 시네마의 차민우가 한번 보자고 하더라.

-일 없다.

-대체 언제까지 치킨 게임을 할 생각이냐?

-당연히 럿데 시네마가 무너질 때까지 해야지.

-아휴······ 너도 참 답도 없다. 파이가 얼마나 된다고 그 난리를 치는 거야.

-영화판을 먹으면 연간 수천 억대의 이득을 볼 수 있다구. 그러니까 너는 신경 쓰지 마라.

-정말 차민우를 만날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는 거야?

-없어. 그러니 전화 끊어라.

***

가회동.

차필수 회장은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럿데 시네마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럿데 시네마의 부실이 그룹의 전 계열사로 퍼져나간 탓이었다.

그는 하루빨리 드림박스와 신사협정을 체결하고 싶었다.

허나, 이태수는 만남 자체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는 무능한 차민우를 제쳐두고 자신이 직접 전면에 나서기로 작심했다.

그 길이 최선이었다.

며칠 후.

LA 국제공항에 팔순의 차필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노구를 이끌고 미국 땅에 도착했다.

LA 지역에서 휴가를 즐기는 이태수를 직접 만나기 위함이었다.

차 회장은 수행원들과 함께 유니버셜 힐튼 호텔로 직행했다.

***

펜트하우스에서 여유로이 낮잠을 즐길 무렵, 인터폰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낯을 찡그리며 인터폰을 받자 호텔우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럿데그룹의 차필수 회장이란 사람이 면담을 요청하셨습니다.

일이 귀찮게 됐다.

나를 만나기 위해 노인네가 미국에 직접 온 모양이었다.

결국 그의 성의를 봐서 한번 만나주기로 마음먹었다.

-펜트하우스로 안내하세요.

-네. 고객님.

의관을 정제한 후 거실로 나가자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차필수 회장 일행이 보였다.

차 회장은 피골이 상접한 노인이었다.

뼈만 남은 앙상한 몸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임을 짐작케 했다.

차 회장을 거실 소파로 안내한 뒤 본격적인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는 입을 열자마자 본론을 내뱉었다.

“긴말하지 않겠네. 무의미한 출혈경쟁을 이쯤에서 중단하는 게 어떻겠나?”

“죄송하지만, 싸움은 럿데 시네마가 먼저 걸어왔습니다.”

“그래서 자네가 원하는 게 대체 뭔가?”

차 회장이 형형한 눈빛을 과시하며 나를 매섭게 쳐다봤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한국의 영화시장을 독점할 생각입니다. 당연히 신사협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가 분노한 얼굴로 버럭 소리쳤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네. 제 본심입니다. 그러니 럿데 시네마를 저에게 파십시오. 1조 3천억 정도에 인수할 의향이 있습니다.”

차 회장이 온몸을 부르르 떨며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그러기를 얼마 후 수행원들을 대동한 채 장내에서 도망치듯 사라졌다.

곧바로 한국에 있는 장준기 전무에게 전화를 걸었다.

-럿데 시네마와 그 어떤 협상도 절대 불가입니다. 명심하십시오.

-대체 언제까지 출혈경쟁을 하실 생각입니까? 회장님.

-누차 말했지 않습니까? 럿데 시네마가 무너질 때까지 하겠다고.

-적자 폭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습니다. 도저히 감당 못 할 수준이라고요!

-장 전무는 아무 말 하지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십시오.

전화를 끊은 뒤 욕실로 들어갔다.

낮잠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 탓에 온몸이 찌뿌둥했다.

이럴 때는 뜨거운 욕조에 온몸을 푹 담그는 게 최고였다.

***

한국에 도착한 차필수는 이태수의 제안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봤다.

처음에는 그의 말을 허투루 넘겼지만 한국에 도착하자 럿데 시네마를 매각하는 것도 괜찮다는 판단이 들었다.

럿데 시네마는 빈껍데기에 지나지 않았다.

영업점마다 상영관이 텅 빈 상황이었다.

드림박스의 파격적인 할인 공세에 변변한 대항 자체를 못 한 탓이었다.

그 정도로 이태수의 자금력은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럿데그룹을 능가할 정도였다.

더구나 럿데그룹은 돈 들어갈 구멍이 천지였다.

차 회장은 잠실 지역에 초고층 빌딩을 건설할 계획이었다.

그런 판국에 럿데 시네마가 말썽을 피운 것이다.

그는 럿데 시네마 매각을 전향적으로 검토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그룹 전체에 엄청난 해를 끼친 탓이다.

차 회장은 가회동 자택으로 럿데그룹의 이치성 본부장을 호출했다.

그는 면전에 나타난 이치성에게 지엄한 명을 내렸다.

“태스크포스 팀을 꾸려서 럿데 시네마 매각 절차에 돌입해!”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차 회장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인수자를 찾아. 정 안 되면 이태수에게 팔아치우든가.”

이 본부장이 해연히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정말 이태수에게 매각할 작정이십니까?”

“마땅한 임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놈에게라도 팔아야 할 게 아닌가?”

차 회장은 그리 답하며 이 본부장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

LA 유니버셜 호텔 펜트하우스.

고풍스런 책상에 좌정한 채 모니터 화면에 이목을 집중했다.

나는 한국 포털 사이트의 뉴스란을 매의 시선으로 훑고 있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공식 출범!>

헤드라인 뉴스 하단을 재빨리 훑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노무연 당선자의 수도 이전 공약을 주요 아젠다로 설정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중략······.

내 입가에 절로 흡족한 미소가 내걸렸다.

이제 충남 연기군의 땅값은 폭등할 일만 남았다.

그 땅을 처분한 돈으로 럿데 시네마를 인수하면 게임 끝이었다.

< 정명준 3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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