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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재벌 개망나니-92화 (17/200)

< 신탁의 재림 1 >

볼거리 많은 LA 시내를 발바닥에 땀나도록 종횡무진한 뒤 유니버셜 힐튼 호텔로 무사 귀환했다.

산해진미로 배를 채운 뒤 곧바로 취침에 돌입했다.

하루 종일 LA를 관광하느라 온몸의 진이 빠진 탓이었다.

잠결에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

그런 탓인지 본능적으로 두 눈이 번쩍 뜨여졌다.

나와 똑같이 생긴 도플갱어가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반가움도 잠시, 도플갱어의 입에서 냉정한 어조가 쏟아져 나왔다.

“나는 오래전에 그대에게 삼송 반도체와 카이닉스 전자를 반드시 인수하라 일렀거늘, 그대는 왜, 내 말을 업수이 여기는 것인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이었다.

드림 케이블과 드림 박스를 경영하느라 도플갱어의 명령을 저 멀리 내팽개친 탓이었다.

그저 송구스러울 따름이었다.

도플갱어의 귀한 말씀이 계속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그대에게 이 세상에 다시 없을 예언을 남길 것이니, 귀를 씻고 세이경청하라.”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뒤 품에서 수첩과 볼펜을 꺼내 들었다.

그의 소중한 예언을 받아적기 위함이었다.

“2006년 이전까지 반드시 삼송 반도체와 카이닉스 전자, 칼컴, ARM, 얀드로이드를 인수하라!”

그의 귀한 말씀은 계속 이어졌다.

“2009년 이전까지 유툽과 넷플릭서를 반드시 인수해야 할 것이다!”

“2010년 이전까지 중국의 올리바바 전자상거래 업체에 대규모의 지분 투자를 단행하라!”

도플갱어는 그 말씀을 끝으로 눈앞에서 허깨비처럼 사라졌다.

나는 그의 예언을 수첩에 정확히 받아 적었다.

이해 안 되는 업체들이 몇 개 있었지만, 구글 검색을 이용하면 금세 파악이 가능할 터였다.

책상 의자에 좌정하자마자 데스크탑을 켰다.

윈도우에 진입한 뒤 구글 검색창에 얀드로이드와 ARM, 유툽과 넷플릭서, 올리바바를 차례로 입력했다.

화면에 얀드로이드와 ARM의 검색 결과가 주르륵 떠올랐다.

반면 유툽과 넷플릭서, 올리바바는 검색 자체가 되지 않았다.

현존하지 않는 업체라는 의미였다.

2010년을 전후해 출현할 모양이었다.

얀드로이드는 모바일 운영체제를 개발하는 벤처회사였다.

앤디 루반이라는 남자가 대표이사로 등재되어 있었다.

반면 ARM은 나름 유명한 회사였다.

ARM은 PDA 폰에 들어가는 저전력 모바일 시피유의 아키텍처를 설계하고 라이센스를 판매하는 반도체 특허 기업이었다.

그들은 모바일 시피유를 자체 생산하는 대신 아키텍처만 개발하고 특허권을 연 단위로 각국의 핸드폰 개발 업체에 팔아넘기고 있었다.

그 댓가로 연간 수천억대의 로열티를 챙기는 특허괴물이었다.

그들은 모바일 시피유에 관련된 핵심 특허를 거의 대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얀드로이드와 ARM은 모바일 산업과 관련된 업체였다.

도플갱어는 왜 저 두 업체를 반드시 인수하라고 명령한 걸까?

사뭇 궁금한 심정이었다.

허나, 도플갱어의 예언은 신성불가침한 신탁이나 마찬가지였다.

여지껏 그의 확언이 단 한 차례도 틀린 적이 없었던 탓이다.

그리고 칼컴 역시 모바일 관련 업체였다.

그들은 핸드폰에 들어가는 통신칩을 설계하는 회사였다.

자체 공장은 없었지만, 칩을 설계한 뒤 대만의 반도체 위탁가공 회사에 OEM 방식으로 주문생산하는 반도체 기업이었다.

그리고 삼송 반도체와 카이닉스 전자가 생산하는 메모리 반도체도 엄밀히 말해 모바일의 일종이었다.

휴대성이 간편한 노트북이 존재하는 탓이었다.

큰 틀에서 이 모든 건 IT 산업에 속한다.

그제서야 도플갱어가 내린 신탁의 의미가 분명해졌다.

그는 내가 전 세계 IT 산업을 석권하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그가 인수하라고 명한 업체 전부가 IT 관련 회사였기 때문이다.

곧바로 뉴욕증시에 접속했다.

내가 보유한 주식의 시장가치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애플과 구글, 아마존, MS의 주가는 금년 들어 횡보합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난 수년간 가파르게 상승한 탓에 숨 고르기를 하는 모양새였다.

그런 탓으로 내 주식가치는 360억 달러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한화로 환산한다면 거의 40조 원에 육박하는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허나, 나는 저 돈이 그리 많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도플갱어의 신탁을 이행하려면 상상을 불허하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탓이었다.

삼송 반도체 하나의 가치만 해도 최소 10조 원에 달하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칼컴과 ARM의 가치 역시 어마어마했다.

더구나 저들 3개 업체 외에도 인수할 회사들이 부지기수로 널려 있었다.

40조 원도 빠듯한 형편이었다.

도플갱어의 신탁을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완수하고 싶었다.

내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내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도플갱어의 예언 때문이었다.

나는 그의 귀중한 확언을 감히 허투루 넘길 수 없었다.

***

칼컴의 본사는 캘리포니아주 샌디에고 모어하우스 인근에 위치하고 있었다.

1층 로비로 들어가자 총기로 무장한 보안요원이 내 앞을 막아섰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은 보안에 무척 신경을 썼다.

학교, 관공서, 중소기업, 대기업 할것 없이 어딜 가더라도 무장 보안 요원이 진을 치고 있었다.

“무슨 용무로 오셨습니까?”

“앤드류 코헨 부사장과 약속이 있습니다."

“성함을 알려주시죠?”

“한국에서 온 이태수라고 합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보안요원은 그리 말한 뒤 무전기를 이용해 어딘가로 연락을 취했다.

잠시 후, 보안요원이 나를 12층에 위치한 회의실로 안내했다.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자 50대의 백인 남자가 나를 반가이 맞이했다.

그와 악수를 교환한 뒤 단도직입적인 언사를 내뱉었다.

“귀사를 인수할 의향이 있습니다.”

앤드류 부사장이 반색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인수 희망가를 말씀해 주십시오.”

“그전에 먼저 귀사의 매각 희망가를 말씀해 보십시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은근한 어조로 답했다.

“최소 57억 달러 이상을 원합니다.”

한화로 7조 원 남짓한 돈이었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칼컴은 통신칩에 관해서는 전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한 회사였다.

그들은 통신칩 뿐만 아니라 저전력 모바일 시피유의 설계능력마저 보유하고 있었다.

반드시 인수해야 하는 반도체 회사였다.

“귀사의 인수에 대해서 전향적으로 고려한 후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럼 마음이 결정되시면 언제든지 연락을 주십시오. 회장님.”

“알겠습니다.”

그와 악수를 교환한 뒤 칼컴 본사를 유유히 빠쟈나왔다.

***

앤디 루반은 천재 프로그래머였다.

그는 마이크로 소프트에서 엔지니어 생활을 시작한 이후 동료들과 함께 모바일 운영체제를 개발하는 사내 모임을 결성했다.

그러기를 얼마 후 동료들을 데리고 회사를 퇴사한 이후 캘리포니아주의 팔로알토에 얀드로이드사를 설립했다.

휴대용 기기에 올라갈 모바일 운영체제를 전문적으로 개발하는 회사였다.

이번에도 역시 칼라일 투자그룹의 체이스 회장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의 명성을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체이스 회장 덕분에 앤디 루반과 손쉽게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팔로알토 인근의 레스토랑.

앤디 루반과 점심을 함께하며 이런저런 대화를 길게 나누기 시작했다.

앤디가 확신에 찬 얼굴로 열변을 토했다.

“수년 내에 손안의 컴퓨터가 현실화 될 겁니다.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하고, 음악을 듣고, 사진을 찍으며, 전화통화를 자유롭게 즐기는 거죠.”

“그게 수년 안에 가능하겠습니까? 솔직히 믿기지 않는군요.”

부정적인 반응을 드러내 보이자 앤디가 완강히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애플은 비밀리에 손 안의 컴퓨팅이 가능한 스마트폰을 개발 중에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모바일 운영체제인 아이폰 OS를 완성한 상탭니다.”

“그전에, 아이폰이 대체 뭡니까?”

“애플이 준비 중인 스마트폰의 이름입니다.”

“정말 애플이 핸드폰 사업에 뛰어들 예정인가요?”

앤디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합니다. 실리콘벨리에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고 있습니다.”

“증거가 있나요?”

“애플이 정전식 터치패널의 특허기술을 보유한 사만텍 사를 최근에 인수한 게 그 증겁니다.”

“정전식 터치패널이 뭐죠?”

앤디가 딱하다는 얼굴로 설명을 길게 이었다.

“시중에 나와 있는 감압식 터치패널보다 반응속도와 인식률이 수십 배 이상 탁월한 차세대 터치패널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그의 설명은 계속됐다.

“애플이 정전식 터치패널 방식으로 아이폰이란 스마트폰을 생산한다면, 전 세계 핸드폰 시장은 하루아침에 아이폰이 모조리 장악할 겁니다.”

믿기지 않는 얘기였지만, 천재 프로그래머인 앤디 루반이 말해서 그런지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이제 본론을 꺼낼 차례였다.

“실례지만 귀사에서 개발 중인 모바일 운영체제가 언제쯤 완성되는 겁니까?”

앤디가 솔직히 답했다.

“지금 현재 70프로 수준의 개발을 완료한 상태니까, 앞으로 1년 후쯤이면 개발을 완료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가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하는 일에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도플갱어는 반드시 얀드로이드사를 인수할 것을 신신당부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귀사의 지분을 모조리 인수하고 싶습니다.”

앤디가 두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제가 원하는 가격에 인수하실 의향이 있나요?”

“그렇습니다. 그러니 속 시원히 매각 희망가를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내심 주판알을 열심히 튕긴 후, 은근한 표정을 지으며 속내를 여실히 드러냈다.

“아무리 못해도 최소 5천만 달러 이상은 받고 싶습니다. 죄송하지만 그 이하의 가격으로는 지분을 매각할 생각이 없습니다.”

별로 부담되는 액수도 아니었다.

“좋습니다. 그럼 고문 변호사 입회하에 지분양도 계약서를 조만간 체결합시다.”

그가 놀란 얼굴로 반문했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저는 원래 속전속결을 좋아라 합니다. 시간을 질질 끄는 걸 무척 싫어하는 성미거든요. 하하······.”

그리 답하며 앤디에게 악수를 청했다.

우리는 힘차게 악수를 교환한 후 각자의 갈 길로 뿔뿔이 흩어졌다.

다음날.

LA 다운타운에 위치한 코플랜드 로펌을 내방했다.

코플랜드 로펌은 캘리포니아 지역 최고 최대의 변호사 합동 사무실이었다.

당연히 체이스 회장이 소개해 준 로펌이었다.

보안 요원의 안내를 받으며 탑층에 위치한 대표 변호사 사무실로 들어갔다.

프랭클린 안토니오 대표와 악수를 교환한 뒤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했다.

“칼컴과 ARM, 얀드로이드사를 인수할 생각입니다.”

“협상을 원하시는 건가요”

“칼컴과 ARM은 덩치가 있으니 당연히 인수 협상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얀드로이드사는 그들이 원하는 가격에 인수할 생각입니다.”

“칼컴과 ARM의 인수가액을 말씀해 주십시오.”

“양사 모두 50억 달러 전후로 인수 협상을 타진해 주세요.”

“혹시 칼컴과 ARM 측이 원하는 인수가를 아십니까?”

“칼컴은 57억 달러 내외를 원하고 있습니다.”

“7억 달러 정도의 갭 차이가 있군요.”

“그래서 코플랜드 로펌을 찾아온 거 아니겠습니까?”

“좋습니다. 그럼 일단 수임 계약 먼저 체결하시죠.”

“수임료를 말씀해 주십시오.”

“기본 수임료 3200만 달러와 성공 사례금 5천만 달러를 보장해 주십시오.”

적정한 수준이었다.

“좋습니다.”

코플랜드 로펌에 수임료로 3200만 달러를 지급했다.

이제 나머지는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에 위치한 오피스 빌딩.

코플랜드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인 하비 코프만이 입회한 가운데 앤디 루반과 총 5천만 불에 달하는 지분양도 계약을 체결했다.

우리는 힘찬 악수를 교환한 뒤 차후의 계획에 대해서 심도깊은 협의를 진행했다.

“앞으로도 계속 모바일 운영체제의 개발을 진두지휘해 주십시오. 연봉도 3백만 달러 내외를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회장님.”

앤디가 감격한 얼굴로 화답했다.

지분인수 계약을 일사천리로 끝마친 뒤 파트너 변호사인 하비를 대동한 채 인근의 카페로 발길을 옮겼다.

우리는 커피를 음미하며 향후 계획을 논의했다.

하비가 일의 진행 상황을 알려왔다.

“칼컴 측이 57억 달러를 완강히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들에게 인수 협상을 맡긴 거 아닙니까? 성공사례금을 받고 싶으시면 반드시 50억 달러 수준으로 인수를 마무리 지으십시오.”

녀석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중에 봅시다.”

그 말을 끝으로 카페를 박차고 나왔다.

< 신탁의 재림 1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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