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핵재벌 개망나니-93화 (18/200)

< 신탁의 재림 2 >

영국 캠브리지 ARM 본사 희의실.

코플랜드 로펌의 하비 코프만과 ARM사의 재무담당 이사인 크라우스가 머리를 맞댄 채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하비가 넌지시 운을 뗐다.

“저희 측 클라이언트는 귀사를 50억 달러 내외의 가격으로 인수할 의향을 갖고 계십니다.”

“죄송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가격과 갭 차이가 너무 큰 거 같습니다.”

“원하시는 매각가를 말씀해 주십시오.”

크라우스가 시원하게 즉답했다.

“최소 65억 달러 이상을 원합니다.”

하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귀사의 의중을 클라이언트에게 전달하겠습니다.”

***

오랜만에 버진아일랜드를 내방했다.

예전과 달라진 점이라면, 전용기를 이용해서 버진아일랜드를 방문했다는 사실 정도였다.

다운타운에 위치한 HBC 은행으로 들어가자 나이 지긋한 백인 점장이 나를 정중히 맞이했다.

그는 나를 귀빈실로 안내했다.

여비서가 내온 정갈한 다과를 음미하며 점장에게 넌지시 말했다.

“히말라야 투자그룹을 설립할 생각입니다. 그러니 제반 서류를 준비해 주십시오.”

“원하시는 대로 서류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회사 설립이 완료되는 즉시 나에게 연락을 주십시오.”

“네. 회장님.”

HBC 은행을 빠져나오자마자 인근에 위치한 하얏트 호텔로 발길을 옮겼다.

하얏트 호텔 펜트하우스에 여장을 푼 뒤 하비 코프만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ARM 사와 접촉을 하셨습니까?

-방금 전에 의견을 교환했습니다.

-결과를 말해 보세요.

-ARM사는 매각 희망가로 최소 65억 달러 이상을 원하고 있습니다.

내 예상을 한참이나 초과한 결과였다.

-왜 그렇게 가격을 높이 부르는 겁니까?

-ARM사는 매년 특허료로 수억 달러를 챙기고 있습니다. 아마 그런 점 때문에 자신들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거 같습니다.

-그래도 반드시 가격을 다운시키세요. 그러라고 당신들에게 일을 맡긴 거니까.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칼컴은 어떻습니까?

-그들 역시 자신들이 희망하는 가격을 완강히 고수하는 중입니다.

칼컴과 ARM은 가격을 낮출 생각을 거의 하지 않고 있었다.

허나, 나는 50억 달러 수준으로 양사를 인수하고 싶었다.

한 푼이 아쉬운 형편이었다.

돈 들어갈 곳이 천지였다.

굵직굵직한 IT 기업 인수는 물론이고, 럿데 시네마도 조만간 합병해야 했다.

물론 구글과 아마존, 애플, MS 등의 주식을 처분하면 자금에 숨통이 트이겠지만, 그들의 주식을 섣불리 매도하고 싶지 않았다.

꾸준한 우상향이 기대됐기 때문이다.

급한 대로 충남 연기군의 토지를 팔아서라도 돈을 만들어야 할 거 같았다.

마음을 정리하자마자 한국에 있는 명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충남 연기군의 분위기를 살펴봐.

-생뚱맞게 그게 무슨 말이야?

-그 동네 땅을 갖고 있어서 그러니까, 땅값이 어느 정도로 뛰었는지를 알아보라구.

-그 말이 사실이냐?

-내가 할 짓 없이 너한테 거짓말이나 할 위인으로 보이냐? 여튼 형이 시킨 대로 주변 분위기를 살펴보라고.

-알았다. 내가 한번 알아볼게.

통화를 끊자마자 조용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에게 부탁할 일이 있었다.

-부총리님에게 긴히 의논드릴 일이 있습니다.

-허심탄회하게 말씀해 보십시오. 회장님.

-제가 카이닉스 전자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니 부총리님이 제반 상황을 자세히 알아봐 주십시오.

-회장님. 카이닉스는 적자에 허덕이는 법정관리 기업입니다. 부채만도 5조 원이 넘습니다.

-그래서 부총리님에게 부탁을 드리는 거 아니겠습니까?

-제 말은 카이닉스는 아무런 실익이 없는 기업이란 뜻입니다. 반도체 치킨게임의 여파로 적자 폭이 날이 갈수록 커져가는 상황입니다.

-다 아니까, 부총리님이 주채권 은행인 산자은행 측과 접촉을 해보십시오.

-정 그러시다면, 말씀대로 산자은행 측에 딜을 넣어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외자은행 인수 건은 어찌 돼가고 있는 겁니까?

-금년 안에 인수를 마무리 지을 생각입니다. 자기자본비율을 7프로 미만으로 다운시켰으니 정부 당국자들도 매각 외에는 방법이 없을 겁니다.

-그럼 부총리님이 힘을 좀 써주세요.

-염려 마십시오. 회장님.

***

강남 인근의 일식당에 조용현 전 부총리와 산자은행장인 배학수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조용현은 술자리가 무르익자 고등학교 후배인 배학수에게 넌지시 입을 열었다.

“카이닉스를 어떻게 처리할 생각인가?”

배학수가 즉답했다.

“국내외 자본에게 최단기간 내에 매각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카이닉스의 적자가 얼마지?”

“5조 4천억 정돕니다.”

“적자가 너무 많아서 매각이 힘들겠군.”

“그래서 여러 가지 방안을 생각 중에 있습니다.”

“그게 뭐지?”

“5조 4천억 중에서 대략 4조 원 정도의 부채를 탕감하는 방안을 전향적으로 고려하고 있습니다.”

“실 매각가를 1조 4천억 수준으로 맞추려는 건가?”

“그렇습니다. 대신 고용보장을 확실히 요구할 생각입니다.”

조용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뒤 정종을 입안 가득 들이켰다.

그는 술자리가 파하자마자 이태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

버진아일랜드에서 히말라야 투자그룹을 설립한 후 한국으로 급거 귀국했다.

한국에 벌여논 사업들이 한두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ARM과 칼컴 인수는 코플랜드 로펌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내가 신경 쓸 일은 카이닉스 전자와 럿데 시네마의 인수였다.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르네상스 빌딩으로 직행했다.

명우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히말라야 프러덕션의 대표 사무실로 들어가자 영화 관계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명우의 모습이 보였다.

녀석은 나름 바쁜 모양새였다.

그런 탓인지 나에게 한쪽 눈을 찡긋하며 소파에 앉으라는 손짓을 보냈다.

푹신한 소파에 온몸을 깊숙이 파묻은 채 줄담배를 꾸역꾸역 말아 올릴 무렵 이쁘장한 여비서가 달달한 커피를 내왔다.

그녀에게 목례를 취한 후 입안으로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켰다.

그때, 명우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녀석은 맞은편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

“한국에는 언제 온 거야?”

“방금 전에.”

“이거 많이 고마운데. 전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시는 분이 한국에 오자마자 나를 가장 먼저 찾아주시다니······.”

“지금 나를 비웃는 거냐?”

“고깝게 듣지 말고, 나를 찾은 용건이나 말해 보라구.”

“충남 연기군의 분위기를 알아봤냐?”

“뻔하지 뭐. 노무연이 수도 이전지로 확정했다는 뉴스 때문에, 날마다 땅값이 미친년 널뛰듯 뛰고 있더라.”

“지금 평당 가격이 얼마지?”

“1300만 원 안팎.”

“50만 평 곱하기 1300만 원이면 총 얼마냐?”

녀석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나를 빤히 쳐다봤다.

“정말 그 동네 토지를 50만 평이나 갖고 있는 거야?”

“돈 계산이나 해봐.”

“잠깐 기다려봐라.”

명우는 그리 말하며 책상으로 급히 뛰어갔다.

녀석은 서랍에서 계산기를 꺼내서 부지런히 돈 계산을 했다.

명우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무려 6조 5천억이라구!”

내 입가에 절로 흐뭇한 미소가 내걸렸다.

그런 탓인지 녀석이 볼멘 목소리를 쏟아냈다.

“세상 참 불공평하구만. 되는 놈은 뭘해도 돈벼락이 떨어지는구나.”

“그러니까 형처럼 전생에 공덕을 많이 쌓았어야지. 후후······.”

“잘난 척은 그만하고 세금이 엄청 나올텐데, 그건 어떻게 감당할 생각이냐?”

“당연히 세금을 물 필요가 없지. TS 인베스트먼트 명의거든.”

“외국계 자본으로 위장한 거야?”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럼 나중에 보자.”

르네상스 빌딩을 나오자마자 길가를 오가는 택시에 몸을 실었다.

“상암동 드림 케이블 방송국으로 가주세요.”

“네. 손님.”

회장실이 있는 25층 탑층으로 올라가자 주 실장과 비서실 요원들이 피자 파티를 만끽하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회장님이 부재중인 틈을 타서 자기들 나름대로 휴식을 즐기는 모양새였다.

비서실 요원들과 주한수 실장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경호성을 내지르며, 입가에 머금은 먹음직스런 피자를 책상 위에 분분히 토해낸 뒤 나를 향해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오셨습니까. 회장님.”

주 실장이 일행을 대표해 입을 열었다.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이며 나답지 않게 친근한 어조를 흘려보냈다.

“편하게 간식을 즐기세요.”

그리 말하며 회장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육중한 마호가니 책상에 좌정한 채 창밖에 드리워진 빌딩 숲에 시선을 고정했다.

꿈나라

여행의 노독이 풀리지 않았는지 잠이 비 오듯 쏟아졌다.

곧장 뒤편의 휴게실로 걸어갔다.

휴게실의 푹신한 침대에 드러눕자마자 깊은 로 빠져들었다.

눈을 뜨자마자 벽면에 내걸린 디지털 시계를 쳐다봤다.

<21:46>

밤 9시 46분이었다.

낮에 잠이 들었으니까 대략 9시간 정도 취침을 즐긴 거 같았다.

휴게실의 문을 열자 문가에 우두커니 서 있는 주 실장이 보였다.

“퇴근 안 하고 뭐 해?”

“회장님도 퇴근을 안 하셨는데, 제가 먼저 퇴근을 하는 건 말이 안 되죠.”

녀석의 그럴듯한 대답이었다.

“비서실 요원들은?”

“전부 대기 중입니다.”

“경호원들만 제외하고 나머지 인원들을 모두 퇴근시켜.”

“넵. 회장님.”

주 실장은 공손히 허리를 숙인 뒤 장내에서 바람처럼 몸을 숨겼다.

잠시 후, 주 실장이 면전에 다시 나타났다.

“럿데 시네마의 차필수 회장이 근간에 만나자는 전언을 보내왔습니다.”

“언제 연락이 온 거지?”

“어제 온 연락입니다.”

“그럼 차 회장에게 전화를 넣어봐. 지금 만나도 되는지 알아보라구.”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내일 연락을 하심이 어떠신지요?”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연로한 차 회장에게 밤늦은 시간에 만나자고 하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그럼 내일 오전 시간대에 당신이 알아서 연락을 넣어.”

“네. 회장님.”

***

가회동.

차필수는 휠체어에 좌정한 채 자택의 너른 정원을 차분히 둘러보고 있었다.

그때, 그의 면전에 차민우 럿데 시네마 사장이 나타났다.

“무슨 일로 내 앞에 나타난 게냐?”

“이태수 회장이 만나자는 전언을 보내왔습니다.”

차 회장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뒤 민우에게 냉랭한 어조를 내뱉었다.

“이 애비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니놈은 이번 일에서 빠지거라.”

“정말 럿데 시네마를 이태수에게 매각할 생각입니까?”

“가격만 맞는다면 못할 이유도 없지.”

민우의 얼굴이 사색으로 물들었다.

“그럼 저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겁니까?”

“럿데 유통에서 다시 일을 배우거라.”

“평직원으로 백의종군하라는 말씀입니까?”

“잘 아는구나. 그러니 이만 가보거라.”

차 회장은 그리 답하며 뒤에 우두커니 서 있는 집사에게 명을 내렸다.

“거실로 들어가자.”

“네. 회장님.”

집사는 차 회장의 휠체어를 내실로 몰아갔다.

민우는 자신에게, 매정하게 등을 돌린 부친의 뒷모습을 서글픈 얼굴로 한참 동안 쳐다본 뒤 장내에서 쓸쓸히 사라졌다.

***

수행원들을 대동한 채 럿데 호텔 강남 본점에 들어가자 차 회장이 보낸 인물이 내 앞에 나타났다.

“회장님을 펜트하우스로 모시겠습니다.”

“그럽시다.”

주 실장과 경호원들을 문밖에 대기시킨 채 펜트하우스로 들어서자 휠체어에 앉아 있는 차 회장이 보였다.

그는 예전 보다 더욱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허나, 눈빛만큼은 여전히 형형했다.

가죽 소파에 앉자 차 회장이 단도직입적인 언사를 내뱉었다.

“얼마를 쳐줄 생각인가?”

“럿데 시네마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두말하면 잔소리 아닌가?”

“그럼 솔직하게 답하겠습니다. 저는 럿데 시네마의 인수가격으로 1조 원 남짓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직후 차 회장의 입에서 격한 언성이 쏟아져 나왔다.

“럿데 시네마를 날로 먹을 심산인가! 부동산 가치만 해도 1조 원이 넘는 회사란 말일세!”

“그건 회장님의 내 멋대로 계산법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거의 모두 땅값이 저렴한 강북과 수도권, 지방 도시에 지점이 몰려 있는 럿데 시네마의 실 가치는 채 1조 원이 되지 않습니다.”

“끄응······.”

그의 입에서 앓는 듯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제 요구 조건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럼 마음의 결정을 하신 뒤에 저에게 연락을 주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펜트하우스를 박차고 나왔다.

***

가회동.

차필수는 이태수의 제안을 심사숙고했다.

‘그놈의 말대로 럿데 시네마의 부동산 가치는 아무리 많이 쳐봤자 7천억 내외다. 더군다나 극장이 거의 모두 파리만 날리는 형국이니 제값을 받는 게 거의 불가능해.’

그는 국내외 자본에게 럿데 시네마 인수를 여러 차례 타진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같이 거부의 변이었다.

차 회장의 얼굴에 고뇌하는 표정이 한가득 드리워졌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결심한 얼굴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 신탁의 재림 2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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