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착한남자 2 >
칼컴과 ARM을 대상으로 하는 인수협상은 많은 시일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돌아가는 모양새가 최소 1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될 것 같았다.
인수협상을 도맡고 있는 코플랜드 로펌의 견해였다.
전문가 집단이 그리 말할 정도면 기본적으로 2년은 깔고 간다는 얘기였다.
별 볼 일 없는 기업 인수에도 수년이 걸리는 것을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일이었다.
내 목표는 2006년 이전에 칼컴과 ARM을 인수하는 것이었다.
아직도 3년이란 시간이 남아 있었다.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내가 원하는 가격으로 칼컴과 ARM을 인수할 계획이었다.
어차피 시간은 내 편이었다.
***
럿데 시네마에서 드림 박스로 간판을 교체한 부산 지역 멀티플렉스 점에 장준기 전무가 나타났다.
그는 지지부진한 정리해고 작업에 불만이 한가득이었다.
그런 탓인지 면전에 나타난 최규선 점장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두 달이 지나도록 겨우 5명만 정리해고를 하셨다는 게, 말이나 될법한 얘깁니까! 이딴 식으로 일을 처리하실 거면 회사에 사표를 내던지세요. 안 말리니까!”
최규선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이었다.
장준기의 말대로 정리해고 작업은 진도를 나가지 못하는 형국이었다.
“대체 이유가 뭐요? 왜, 이리 정리해고 작업이 지체되는 겁니까? 제발 좀 속 시원히 말씀을 해보라고요!”
“죄송합니다. 전무님. 모두 제 불찰입니다.”
“변명은 듣고 싶지 않으니까 복안이나 말씀해 보세요.”
“음······.”
규선은 깊은 한숨을 흘려보낸 뒤 심중의 말을 입 밖에 꺼냈다.
“럿데 시네마 출신 임직원들이 정부 당국에 암암리에 민원을 넣은 모양입니다. 그런 이유로 그들을 함부로 해고조치 하는 게 쉽지가 않습니다.”
“거참······ 말귀가 너무 어두우시네. 해고를 거부하는 사원들을 한직으로 보내면 될 거 아니요! 매표소에 보내거나, 그것도 아니면 아예 일거리를 주지 말라고요.”
“그건 너무 비인간적인 대우를 하는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한솥밥을 먹은 처지에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내몰 수는 없습니다.”
장준기의 미간에 깊은 내천자가 그려졌다.
그는 최규선이 정리해고 작업에 부적합한 인물임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 개자식은 인정미가 너무 많아. 진작에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장준기의 심중에 이태수의 냉정한 얼굴이 떠올랐다.
‘이 회장의 불호령이 떨어질텐데,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이냐?’
그가 마음속으로 나 홀로 끙끙 앓을 무렵,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 벨이 요란한 울음을 토해냈다.
발신 번호를 확인한 장준기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하필 이런 때, 이 회장이 전화를 하다니······!.’
***
상암동 드림 케이블 본사 회장실.
장준기 전무가 면전에 나타났다.
그는 송구한 얼굴로 보고를 올렸다.
“최규선 부산 점장은 인정이 과하게 넘치는 인물입니다. 한마디로 정리해고 작업에 부적합한 거 같습니다.”
“정리해고는 시간을 두고 서서히 합시다. 지금은 그보다 영화제작 시장을 장악하는 게 급선무에요.”
태수의 의외의 반응에, 장준기가 반색하는 얼굴로 화답했다.
“저 역시 그리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회장님. 헤헤헤······.”
“바보처럼 웃지 말고, 각 영화사의 점유율을 구두로 보고하세요. 지금 당장.”
그가 즉답했다.
“헐리웃 영화의 초강세로 인해 월트디즈니, 워너브러더스, 20세기 폭스, 유니버셜, 소니 등의 점유율이 거의 60프로에 육박할 지경입니다.”
“그 외의 나머지 40프로 남짓한 파이를 저희 히말라야 프러덕션과 중소 제작사가 나눠 먹는 형편입니다.”
헐리웃 영화는 전 세계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나마 한국은 양호한 형편이었다.
유럽과 중남미, 동남아 등은 헐리웃 영화가 거의 90퍼센트 이상의 압도적인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헐리웃 영화들에게 상영관을 단 하나도 배정하고 싶지 않았다.
허나, 결코 그럴 수가 없었다.
헐리웃 영화는 미국 정부의 국책 산업이었다.
그들을 건드린다는 건 미국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이나 매한가지였다.
미국에게 국방과 경제 등의 거의 모든 걸 의존하는 한국이 헐리웃 영화에 제재를 가한다는 건 섶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드는 것과 진배없는 일이었다.
“일단 40프로 남짓한 시장이라도 착실히 장악합시다.”
“흥행 배우와 감독 등을 줄기차게 섭외하세요. 드림박스의 막강한 복합상영관을 들이대면 우리 요구에 어렵지 않게 응할 겁니다.”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
김병연은 자타가 공인하는 흥행 배우였다.
드라마와 영화 양쪽에서 사랑받는 탑스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김병연이 최근 고민에 빠졌다.
쇼필름 영화제작사와 히말라야 프러덕션에서 같은 시기에 개봉하는 차기작 주연으로 섭외를 받은 탓이었다.
그는 내심 영화제작에 일가견이 있는 쇼필름과 계약을 체결하고 싶었으나, 상황이 생각 외로 녹록치 않았다.
히말라야 프러덕션의 모회사가 전국 영화관을 장악한 드림박스라는 소문이 영화판에 파다하게 나돌았기 때문이다.
그는 사실 확인 차, 히말라야 대표이사인 김명우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시내 모처.
김병연은 김명우 사장과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병연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시중에 나도는 소문대로 히말라야 프로덕션의 모회사가 드림 엔터테인먼트인가요?”
명우가 흔쾌히 즉답했다.
“사실입니다. 그래서 자신 있게 병연 씨를 섭외하려고 한 겁니다.”
“음······.”
병연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히말라야 프러덕션은 영화 제작 경험이 일천한 제작사였다.
허나, 히말라야의 모회사는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케이블 방송은 물론이고, 국내 복합상영관 대다수를 점유한 탓이었다.
영화가 흥행하기 위해서는 상영관 확보가 최우선이었다.
아무리 좋은 영화를 만들어도 상영관에 내걸리지 못한다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병연 씨가 저희와 손을 잡는다면 상영관을 최우선적으로 배정받으실 겁니다. 영화 흥행에 청신호가 켜지는 거죠.”
“흠······.”
병연의 한숨 소리가 더욱 깊어졌다.
그러기를 얼마 후, 그가 결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장님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명우가 반색하는 얼굴로 화답했다.
“마음이 결정되시면 부담 갖지 마시고 저에게 연락을 주십시오.”
“네. 사장님.”
***
상암동 드림 케이블 본사 24층 대회의실로 들어서자 드림 박스의 고위 간부들이 경건한 자세로 나를 맞이했다.
그들은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깊숙이 허리를 조아린 채 내가 상석에 앉을 때까지 결코 허리를 펴지 않았다.
허리를 구부린 채 내 눈치를 살피는 그들에게 지엄한 명을 내렸다.
“이제 그만 자리에 앉으세요.”
직후 간부들이 안도의 한숨을 저마다 길게 내쉬며 제 자리에 조심스럽게 착석했다.
곧바로 작심 발언을 내뱉었다.
“이제 영화관의 상영료를 이전 수준으로 환원할 싯점입니다. 그러니 다음 주 월요일부터 관람료를 7천 원으로 인상하세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재무실장이 환한 얼굴로 화답했다.
“참으로 올바른 판단이십니다. 회장님.”
장준기 전무도 그에 질세라 나를 칭송하는 언사를 쏟아냈다.
“회장님의 탁월한 혜안 덕분에, 단 1년 6개월 만에 국내 영화시장을 완벽하게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회장님에게 열광적인 박수갈채를 보냅시다.”
장 전무가 그리 제창하자 간부들이 나를 향해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를 미친 듯이 보내왔다.
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
싫지 않은 기분이었다.
이 맛에 회사를 운영하는 거 같았다.
내 입가에 절로 흡족한 미소가 내걸렸다.
박수갈채를 오롯이 만끽한 후 25층 회장실로 걸어 올라갔다.
드림 케이블의 뮤직 채널인 드림 넷에서 절찬리에 방영 중인 슈퍼스타 드림의 결선 방송을 시청하기 위함이었다.
사무실의 푹신한 가죽 소파에 온몸을 깊숙이 파묻은 채 벽면에 내걸린 대화면 TV에 이목을 집중했다.
오프닝 카메라가 O2 아레나의 내외관을 세세히 비추고 있었다.
그러기를 잠시 후, 카메라가 관객석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러자 오투 아레나를 가득 메운 팬들이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내는 광경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결선에 오른 건 달랑 4명이 전부였다.
일명 파이널 포였다.
남자 3명과 여자 한 명이었다.
보컬 역량이 가장 빼어난 이각이 우승 후보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런 탓인지 나머지 세 명의 결선 참가자들은 이각을 목표로 1대 1일 보컬 배틀을 신청했다.
이각은 그중에서 유일한 홍일점인 조재희를 배틀 파트너로 선정했다.
그녀는 청아한 음색과 빼어난 자작곡 실력이 장점이었다.
허나, 적은 성량을 타고난 탓에 완곡을 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한 처지였다.
이각은 안전하게 결승에 오르기 위해 가장 만만한 조재희를 선택했다.
충분히 납득 가능한 일이었다.
잠시 뒤, 이각과 조재희의 보컬 배틀이 펼쳐졌다.
제작 PD는 그들에게 이승천의 출세곡인 라스트 콘스트를 배틀 곡으로 부여했다.
웬간한 보컬 역량으로는 완곡을 소화하기가 벅찬 곡이었다.
그런 탓일까? 배틀이 시작되자마자 이각이 압도적인 성량을 바탕으로 청중들을 삽시간에 사로잡았다.
반면 조재희는 부족한 성량 탓에 곡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했다.
배틀이 끝나자마자 시청자 문자투표가 시작됐다.
예상대로 이각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결선은 시청자 문자투표로 결정됐다.
심사위원들의 사사로운 편애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곧바로 비서실에서 콜을 넣었다.
인터폰에서 이미경 대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커피를 갖다 드릴까요?
-그건 됐고, 슈퍼스타 드림의 실시간 시청률을 파악해 봐.
-네. 회장님.
10분 뒤, 정장룩 차림의 이미경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아쉽게도 최근에 결혼을 한 처지였다.
그런 탓인지 그녀가 평소보다 더 이쁘게 보였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플라시보 효과인 거 같았다.
그녀의 손에는 서류 한 장이 들려 있었다.
“구두로 보고해 봐.”
“네. 회장님.”
“시청률 조사업체인 날슨에 문의한 결과 슈퍼스타 드림의 평균 시청률이 5.7프로에 육박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최고 시청률은?”
“이각이 라스트 콘서트를 열창하는 장면이라고 하더군요. 거의 10프로 가까이 시청률이 치솟았다는 후문입니다.”
슈퍼스타 드림은 소기의 성과를 200프로 이상 달성했다.
그런 탓일까? 내 입가에 절로 흐뭇한 미소가 내걸렸다.
이미경을 내보낸 뒤 김재연 국장을 면전에 불러들였다.
“우승자가 결정되면 대박 엔터와 게약을 시켜. 그리고 시청자와 약속한 만큼 최단 시일 안에 음반과 음원을 내주도록.”
“안 그래도 대박 엔터 측과 물밑 교감을 하고 있습니다.”
“교감을 나누는 대박 엔터의 담당자가 누구지?”
“방기훈 실장입니다.”
방기훈은 믿을 만한 친구였다.
“쓸만한 친구니까 알아서 잘해봐.”
“넵. 회장님.”
재연이 군기가 바짝 든 얼굴로 복명했다.
올바른 자세였다.
***
청와대 집무실.
노무연 대통령의 면전에 김태동 경제수석이 나타났다.
“카이닉스 전자의 매각 문제에 대해서 긴히 보고드릴 사안이 있습니다. 대통령님.”
“말씀해 보세요.”
“카이닉스 전자의 인수를 희망하는 히말라야 투자 그룹 측에서 5조 4천억 대의 부채를 전액 탕감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너무 과다한 요구를 하는 거 아닌가요?”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전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끝 모를 불황과 치킨 게임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카이닉스 전자는 작년에 3600억 원에 육박하는 대규모 적자를 봤습니다.”
“그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뭡니까?”
“히말라야 투자그룹은 부채를 전액 탕감해 준다면, 카이닉스 임직원들의 고용을 5년 이상 보장하겠다고 확답했습니다.”
“으음······.”
노무연의 입에서 침음성이 절로 흘러나왔다.
카이닉스 전자는 정부의 골칫덩어리였다.
수조 원 대의 공적자금을 투입했음에도 여전히 생사가 불투명했다.
더구나 카이닉스 전자는 2만여 명에 육박하는 임직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유관 기업체들을 포함할 경우 거의 20만 명에 달하는 직간접 고용인원을 유발하는 반도체 기업이었다.
최선은 제값을 받고 국내외 자본에게 매각하는 것이었지만, 반도체 업황이 너무 저조한 탓에 결코 그럴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수년 동안 국내외 자본과 매각 협상을 벌였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보지 못한 게 그 증거였다.
노무연은 정부의 골칫덩어리인 카이닉스 전자를 자기 임기 내에 무조건 매각할 계획이었다.
차기 정부의 부담으로 떠넘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히말라야 투자그룹에 대해서 보고를 해보세요.”
“겉으로는 외국인이 대표로 있는 다국적 사모펀드의 외형을 갖추고 있지만, 실상은 드림 케이블의 이태수 회장이 운용하는 사모펀드라는 게 증권가의 대체적인 평판입니다.”
“외국계 자본의 탈을 뒤집어쓴 건가요?”
“그런 것으로 사료되고 있습니다.”
“당연히 법적으론 아무런 문제가 없겠군요.”
김태동 경제수석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무연이 결심을 굳힌 얼굴로 입을 열었다.
“유관 단체와 긴밀한 협의에 돌입하세요.”
“히말라야 투자그룹의 제안을 받아들일 계획이십니까?”
“그럴 생각입니다.”
노무연은 그리 말하며 김태동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 착한남자 2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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