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착한남자 3 >
이영선 차장 검사는 남들보다 일찍 여름 휴가를 떠났다.
그녀의 행선지는 영국 런던이었다.
이영선은 2명의 아들을 모두 런던 인근에 소재한 전 세계 최고의 사립명문인, 이튼 스쿨에 유학시키고 있었다.
이튼 스쿨은 1년 학비만 해도 5억 원이 넘는 어마어마한 귀족학교였다.
더구나 그녀는 한 명도 아닌 2명이나 유학을 시킨 탓에 등골이 휠 지경이었다.
영선은 원래 검사장 타이틀을 단 이후, 전관예우를 받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여성이라는 태생적인 한계 때문에 전관을 받기가 거의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전관을 받기 위해서는 후배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어야 하지만, 자기밖에 모르는 영선은 후배 관리에 철저히 실패한 케이스였다.
그렇다고 윗사람들의 눈에 든 것도 아니었다.
상관들은 되바라진 그녀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집안 빽으로 승승장구하는 영선을 경원시한 탓이었다.
런던 인근의 한적한 주택가.
영선은 영국으로 이민을 떠난 사촌 언니 이미선에게 두 아들을 맡긴 상태였다.
물론 달마다 이미선에게 수백만 원에 달하는 생활비를 보내고 있었다.
허나, 그녀의 지극정성에도 불구하고 미선은 사촌 조카들에게 무관심했다.
날마다 남자들을 갈아치우며 문란한 사생활을 즐긴 까닭이다.
집안에 들어선 영선은 까무라칠 정도로 놀라 버렸다.
거실 옆에 붙어 있는 방에서, 털북숭이 백인 남자와 대낮부터 잠자리를 즐기는 미선을 목격한 것이다.
그런 탓일까? 영선의 입에서 본능적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아아악······!”
격렬한 비명 소리에 미선과 영국 남자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영선을 멀뚱히 쳐다봤다.
미선은 재빨리 가운을 걸친 뒤 영선의 면전으로 다가왔다.
“왜 쓸데없이 소란을 떨고 난리니?”
“지금 그런 헛소리가 나오는 거야! 애들이 드나드는 거실 방에서 이게 무슨 짓이냐구!”
“내 사생활에 대해서 신경 꺼!”
“언니는 수치심도 없는 거야. 더럽다고!”
순간 미선이 영선의 볼에 매서운 손찌검을 연거푸 퍼부었다.
딱딱딱······!
영선의 왼쪽 뺨이 벌겋게 부어올랐다.
직후 그녀가 경악한 얼굴로 부르짖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니! 너 미쳤어!”
“이곳은 영국이야. 한국이 아니라고! 내가 마음에 안 들면 니년 아들을 다른 집으로 보내버려!”
미선이 발악하듯 외치자 영선의 기가 금세 팍 꺾였다.
그녀 말대로 이곳은 영국이었다.
차장 검사 타이틀이 통하지 않는 곳이었다.
더구나 런던에서 그녀의 아들을 돌보아줄 사람은 미선이 유일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 하겠는데, 니년 아들놈들이 한 달에 쓰는 돈이 얼만지나 알아.”
“두 명 합해서 한화로 무려 700만 원이 넘어! 그래도 내가 사촌 조카라 암말 안 할려고 했는데, 나도 더 이상 못 참겠다. 그러니 앞으로 매달 7백만 원씩 내 계좌에 입금해!”
영선은 혹 떼려다, 오히려 혹만 붙인 꼴이 되었다.
그녀는 곧장 미선의 집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영선은 이튼 스쿨로 직행했다.
그곳에서 두 아들을 픽업한 그녀는 인근의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아들들을 고이 잠재운 영선은 호텔 방의 창가를 서성이며 깊은 고민을 거듭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미선은 남의 자식들을 돌보아줄 겨를이 없는 여자였다.
사생활이 지저분한 탓이었다.
최선은 그녀가 직접 영국 런던에서 두 아들의 육아를 케어하는 것이었다.
그러자면 검찰을 퇴직하는 게 급선무였다.
허나, 그녀의 수중에는 수억 원 대의 현금이 전부였다.
아파트를 포함한 부동산은 은행에 담보를 잡힌 지 오래였다.
남편인 김민배가 그녀 몰래 부동산을 담보로 은행에서 거액의 대출을 받은 탓이었다.
그녀는 김민배를 생각하자 속에서 천불이 일어났다.
전도유망한 의학도였던 남편이, 병원을 말아먹은 뒤 거의 폐인처럼 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은행에서 융자받은 돈으로 주식투자에 나섰다가 대출금을 홀라당 말아먹은 처지였다.
그런 연유로 영선은 김민배와 별거에 돌입한 상황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에라도 갈라서고 싶었지만, 주변의 눈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편이었다.
영선에게 남편이란 존재는 자신의 앞길을 막는 장애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 그녀의 심중에 이태수의 오만한 얼굴이 떠올랐다.
더불어 그가 지닌 막대한 재력에 생각이 미쳤다.
잠시 후, 그녀는 결심한 얼굴로 어딘가로 급히 전화를 걸었다.
***
르네상스 빌딩 펜트하우스.
명우와 태섭은 대낮부터 질펀한 술판을 즐기고 있었다.
그들은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이런저런 대화를 길게 늘어놓았다.
그러기를 문득 태섭의 입에서 이영선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이영선이 회장님에게 드릴 말씀이 있다고, 나에게 면담 일정을 잡아달라고 애걸복걸하더군요.”
“자존심이 드센 여자가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돈이 필요해서 그런 거 같더라고요.”
명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태수한테 말을 전할 테니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고맙습니다. 선배님.”
“당연히 내가 할 일이니까 쓸데없는 공치사는 하지 마라.”
“내가 이래서 선배님을 좋아하는 거예요.”
“엉겨 붙지 마라. 징그러우니까.”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헤헤헤······.”
명우는 발렌타인을 벌컥벌컥 들이킨 뒤 냉랭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가씨한테 손찌검을 한 그 개자식은 앞으로 펜트하우스 출입금지니까 그런 줄 알아라.”
“죄송합니다. 선배님. 안 그래도 제가 따끔하게 손을 봤습니다.”
“수석검사 나부랭이가 술 처먹고 주사를 부린다는 게 말이나 될법한 얘기냐?”
“제가 단단히 주의를 주겠습니다.”
“주의고 나발이고 출입금지라고. 알겠어?”
“넵. 선배님.”
“그리고 그 개자식한테 치료비 조로 5백만 원을 내라고 전해.”
태섭이 놀란 얼굴로 반문했다.
“정말 돈까지 요구하실 생각입니까?”
“아가씨 콧뼈랑 이빨이 작살이 났다고. 5백도 나름 깎아준 거야.”
명우는 그 말을 끝으로 장내에서 유유히 사라졌다.
***
일요일, 상암동 드림 케이블 본사 회장실.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회사에 출근한 상태였다.
집구석에서 할 일 없이 소일하는 게 지긋지긋했기 때문이다.
다른 재벌 회장님처럼 질펀한 파티를 즐기거나 너른 골프장에서 라운딩을 즐기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나에게 가장 좋은 휴식은 일에 몰두하는 거다.
그 정도로 일에 푹 파묻히는 게 좋았다.
물론 주한수 실장과 경호 요원들은 죽을 맛이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내 덕분에 연간 1억 원에 육박하는 고액연봉을 받고 있었다.
이 정도는 충분히 감수해야 한다.
그러라고 돈을 챙겨주는 거다.
육중한 마호가니 책상에 좌정한 채 줄담배를 말아 올릴 무렵, 장내에 주 실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은 나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인 후 용건을 꺼냈다.
“와이프의 산달이 코앞입니다. 송구하지만 저 먼저 퇴근을 해도 되겠습니까?”
믿어지지 않았지만 주 실장의 와이프는 임신 10개월 차였다.
결혼한 지 14년 만에 늦둥이를 보는 케이스였다.
그 정도로 부부금슬이 좋다는 방증이었다.
핸드폰 폴더를 열자 오후 5시 20분 무렵이었다.
결국 주 실장을 마누라 곁으로 돌려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와이프의 산달이 목전에 당도한 그를 내 곁에 잡아둔다는 게 조금 마음에 걸렸다.
“퇴근해.”
녀석이 반색한 얼굴로 화답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주 실장은 그리 답하며 재빨리 문가로 걸어갔다.
“잠깐만 기다려봐.”
내 명령이 떨어지자 그의 발걸음이 갑자기 뚝 멈췄다.
의자에서 일어선 뒤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주 실장이 떨떠름한 얼굴로 반문했다.
“저에게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지갑에서 백만 원권 수표 다섯 장을 꺼내서 녀석의 손에 쥐여주었다.
“와이프가 좋아하는 음식이나 선물이라도 사 들고 가라.”
순간 녀석이 감격한 얼굴로 나를 향해 목놓아 부르짖었다.
“고맙습니다. 회장님!”
주 실장을 내보낸 뒤 창가로 걸어갔다.
일요일 오후라 그런지 창밖은 무척 한산했다.
그때, 바지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핸드폰이 요란한 울음을 토했다.
폰을 귓전에 가져가자 명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영선이 너를 만나고 싶다고 하더라.
-그 여자가 왜?
-돈 달라고 그러는 거겠지. 뻔한 거 아니냐?
-하긴, 그 여자가 나를 만날 이유는 돈밖에 없겠지.
-언제 약속을 잡을래?
-어차피 지금 시간도 비었으니까, 상암동 드림 케이블로 오라고 전해.
1시간 후.
내 면전에 정장룩 차림의 이영선이 나타났다.
그녀는 나를 향해 다소곳이 허리를 숙인 뒤 가죽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영선의 맞은편 소파에 착석한 뒤 묵직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나를 청한 용건이 뭡니까?”
그녀가 솔직히 답했다.
“돈이 필요해요. 아주 많은 돈이.”
“그런 얘기를 나에게 하는 이유가 뭐죠?”
“당연히 회장님에게 스폰을 받고 싶어서 그런 거죠.”
영선은 그리 답하며 내 두 눈을 빤히 쳐다봤다.
돈독이 단단히 오른 모양새였다.
“저번에 회장님이 그러셨잖아요. 내가 검찰에서 퇴직하면 김앤박 로펌에 자리를 만들어 주겠다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영선이 말을 계속 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부탁을 드리는 거예요.”
“김앤박 로펌에서 일하고 싶은 겁니까?”
“그것보단 김앤박에서 수십억 대의 연봉을 받고 싶어요. 당분간 영국에서 애들을 돌봐야 할 처지거든요.”
“일도 안 하고 고액 연봉을 날로 받아 챙기고 싶다라······? 솔직히 말이 안 되는 제안 아닙니까?”
“그래서 회장님에게 힘을 써주십사 요청하는 거예요. 그만한 능력이 있으시잖아요.”
그녀 말대로 나는, 김앤박 로펌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더구나 카이닉스 전자의 인수협상 작업 역시 김앤박에 의뢰할 생각이었다.
김앤박의 김성우 대표는 내 요구를 거부할 수 없는 처지였다.
내가 원한다면 이영선을 그날부로 영입할 것이 확실시되었다.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아빠랑 김앤박의 김성우 대표는 사이가 좋지 못했지만, 그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얘기에요.”
“무슨 말인지 대충 알아들었습니다. 그럼 이제 당신이 나에게 뭘 줄 수 있는지 그것을 말해 보십시오.”
영선이 입술을 질끈 깨물며 결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앞으로 회장님이 시키시는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앞장설 생각이에요.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요?”
그녀는 법조인 집안 출신이었다.
나중에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여성이었다.
투자 대비 효율이 나름 괜찮았다.
“김성우 대표에게 언질을 넣어볼 테니 자택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세요.”
순간 영선이 격동한 얼굴로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감사해요. 회장님.”
“죽을 때까지 내 은덕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명심할게요.”
***
김앤박의 김성우 대표와 나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우리 둘 모두 클레이 사격을 미친 듯이 좋아한 것이다.
김성우는 나를 클레이 사격의 세계로 이끈 장본인이었다.
그런 탓으로 우리는 틈날 때마다 가평 사격장에서 자주 어울렸다.
오늘도 회사에서 업무를 끝마치자마자 가평 사격장으로 직행했다.
사격장 안으로 들어가자 요란한 총격음이 귓전을 강타했다.
탕탕탕탕탕탕!
김성우는 6연발 라이플을 이용해 공중에 떠오른 원반을 차례로 격파하고 있었다.
백발백중의 신기였다.
클레이 사격의 고수다운 면모였다.
그의 옆자리를 차지한 채 나 역시 허공에 떠오른 원반을 목표로 라이플의 방아쇠를 격렬히 잡아당겼다.
탕탕탕탕탕탕!
아쉽게도 절반 정도만 적중했다.
김성우를 따라갈려면 아직 멀었다.
그 후로도 우리는 클레이 사격을 한참 동안 만끽했다.
3시간 동안 이어진 클레이 사격을 끝마친 뒤 김성우에게 용건을 꺼냈다.
“조만간 카이닉스 전자의 인수협상에 돌입할 예정입니다. 그러니 김 대표님이 신경을 좀 써주세요.”
“인수합병 전문 변호사인 김기범에게 회장님의 의중을 전달하겠습니다.”
“수임료를 책정해서 저에게 알려 주십시오.”
“적당한 가격으로 수임료를 산정해 드리겠습니다.”
김성우는 그리 화답하며 나를 인근의 일식당으로 이끌었다.
우리는 싱싱한 회와 정종을 폭풍흡입한 뒤 진지한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주채권 은행인 산자은행은 1조 4천억 내외의 매각가를 책정한 상태에요. 카이닉스 전자의 총부채 중에서 4조 원가량을 탕감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김성우는 두 눈을 빛내며 내 말을 세이경청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과 생각이 많이 달라요. 내가 원하는 인수 희망가는 제로거든요.”
“카이닉스 전자가 지고 있는 부채의 전액 탕감을 원하시는 겁니까?”
“카이닉스 전자는 연간 수천억 대의 적자를 보고 있어요. 그런 판국에 부채까지 떠안는다면 사람들이 나를 바보라고 손가락질할 겁니다.”
김성우는 연신 고개를 끄덕거린 뒤 환한 얼굴로 화답했다.
“회장님이 원하시는 대로 정부 측과 의견을 조율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더 있습니다.”
김성우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이영선 차장 검사를 알고 계십니까?”
그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에 듣자 하니 그녀의 작고한 부친과 김 대표님이 앙숙지간이라고 하던데······?”
김성우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앙숙이라기보단, 그자가 사석에서 종종 저를 비난한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알아도 되는 일인가요?”
은근히 호기심을 내비치자 성우가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속 시원히 털어놓았다.
“그 사람은 툭하면 저를 법을 이용해서 사리사욕을 채우는 법비(法匪)라고 매도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엄청 화가 났지만, 지나고 보니 그자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성우는 보기보다 배포가 너른 남자였다.
< 착한남자 3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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