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핵재벌 개망나니-101화 (26/200)

< 광폭행보 1 >

타워필리스로 향하는 차 안에서 옆자리에 동승한 주한수 실장에게 지엄한 명을 내렸다.

“히말라야 프러덕션의 유한성 책임 PD에게 전화를 넣어.”

“네. 회장님.”

주 실장은 유한성에게 전화를 연결한 뒤 내 손에 공손히 폰을 넘겼다.

-살인의 회상을 언제부터 촬영할 생각이지?

-남주는 정했는데, 아직 감독이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뭐야?

-어두운 영화라 그런지 흥행 감독들이 메가폰을 잡는걸 꺼려하는 눈칩니다.

-개런티를 많이 주면 되잖아.

-얼마까지 염두에 두고 계신지 알려주십시오.

-기본 개런티 7억에, 백만 명당 1억 원에 달하는 런닝 개런티를 지급한다고 전해.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리고 남주를 누구로 정한 거야?

-정유성으로 확정했습니다.

-너무 잘생긴 배우잖아. 우리 영화와 어울리지 않는 거 같은데?

-그래도 정유성은 여성 팬이 많습니다. 영화가 어두운 탓에 여성 관객들을 끌어들일 유인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건 당신 생각이고, 살인의 회상은 구수하면서도 무게감 있는 연기파 흥행배우가 필요해.

-그래서 말인데, 송강오한테 딜을 넣어봐. 아무리 봐도 그 사람이 적격이니까.

그 말을 끝으로 통화를 끝마쳤다.

나머지는 유한성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금요일 밤이라 그런지 차창을 스치는 그녀들이 오늘따라 유난히 사랑스러워 보였다.

“차를 세워.”

“네. 회장님.”

나를 태운 롤스로이스가 홍대 인근에 정차했다.

차에서 내리자 조그마한 공원이 보였다.

공원 벤치에 자리를 잡자마자 양복 상의 안주머니에서 영화 시나리오를 꺼냈다.

시나리오는 조폭 세계를 묘사한 작품이었다.

조직 간의 전쟁을 주요 모티브로 삼아서 그런지 내용이 너무 뻔했다.

이런 허접데기 같은 시나리오로 영화를 만든다면 제작비만 홀라당 말아먹을 것이 불 보듯 훤했다.

작가의 이름을 머릿속에 삽입한 뒤 시나리오를 공원 휴지통에 집어 던졌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주 실장과 경호원들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타워필리스로 모실까요?”

“오늘은 그냥 지하철로 집에 갈 거니까 얌전히 나를 따라와.”

그러자 주 실장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체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홍대역에서 강남행 전철에 몸을 실었다.

금요일 저녁 무렵이라 그런지 전철 안은 혼잡하기 그지없었다.

그 덕분에 본의 아니게 어여쁜 그녀들과 부비부비를 만끽하는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졌다.

모두 내가 잘난 탓이었다.

만원 전철에서 몸소 서민들의 삶을 체험한 뒤 강남역에서 우아하게 하차했다.

그러자 주 실장과 경호원들이 나를 재빨리 뒤따랐다.

그들을 대동한 채 강남역 인근의 밥집으로 들어갔다.

오늘따라 얼큰한 육개장이 먹고 싶었다.

육개장을 안주 삼아 소주를 물처럼 들이부을 무렵 명우가 내 앞에 나타났다.

“금요일 밤에 청승맞게 뭐 하는 꼬라지냐?”

녀석은 혀를 끌끌 차며 맞은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직후 빈 잔에 소주를 가득 따라 붓자마자 입안으로 한입 가득 털어 넣었다.

“캬아······! 쥑인다.”

녀석은 소주를 원샷한 뒤 얼큰한 육개장을 물처럼 들이부었다.

우리는 말 없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소주와 육개장에 오롯이 집중했다.

그 덕분에 테이블 위에는 빈 술병이 어느새 여섯 병 남짓 나뒹굴었다.

두 명이서 각자 석 병 내외의 소주를 마셨다.

허나, 우리 둘 다 소문난 주당인 탓에 별다른 취기를 느끼지 못했다.

명우가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넌지시 운을 뗐다.

“간만에 아가씨들이랑 오붓하게 즐겨볼까?”

“별로. 그냥 술이나 빨자.”

“임마. 오늘은 금요일 밤이라고. 제대로 즐겨야지.”

“그건 젊은 애들 얘기고. 우리는 그냥 술이나 쳐 빠는 게 정상이다.”

“헛소리하지 말고, 형이나 따라와라.”

명우는 그리 말하며 식당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결국 못 이기는 척 녀석을 따라나섰다.

명우는 밥집 인근의 룸빵으로 나를 이끌었다.

룸 안에 들어가자마자 주 실장에게 명령을 내렸다.

“출구를 지켜. 엄한 놈들이 들어올 낌새가 보이면 경호원들을 시켜서 작살을 내버려.”

“명심하겠습니다.”

주 실장을 내보낸 뒤 장내에 우두커니 서 있는 관리 실장에게 지엄한 명을 내렸다.

“룸빵에서 제일 잘 나가는 아가씨들을 모조리 불러들여.”

“넵. 사장님.”

녀석은 내가 드림 케이블과 드림 박스의 잘나가는 회장님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솔직히 그편이 속이 편했다.

명우가 관리실장에게 백만 원권 수표 한 장을 건넸다.

“지체 높은 회장님이니까 알아서 잘 모셔라.”

“염려 마십시오. 사장님. 헤헤······.”

잠시 후 고급 양주와 과일 안주, 늘씬한 아가씨들이 룸 안으로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다음날, 타워필리스 펜트하우스.

아침에 눈을 뜨자 골이 지끈지끈 아파왔다.

룸빵에서 날밤을 지새운 후유증이었다.

허나, 나는 타고난 일 중독자인 탓에 샤워를 끝마치자마자 회사로 직행했다.

회사 업무를 끝마친 후 강남 인근의 일식당을 찾았다.

김앤박 로펌의 김성우 대표와 저녁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회와 튀김, 우동으로 배를 채운 뒤 진지한 협의에 돌입했다.

김성우가 넌지시 운을 뗐다.

“메모리 반도체 업계의 전반적인 현황을 파악하려면 카이닉스 전자의 기술 이사인 박동진의 도움이 필수적입니다.”

“박동진 기술 이사가 누구죠?”

“반도체 업계에서 평판이 높은 양반입니다.”

김 대표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나는 반도체 문외한이었다.

업계 전문가의 도움이 절실했다.

“김 대표님이 자리를 만들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회장님.”

***

서울 모처.

김앤박의 김성우 대표와 카이닉스 전자의 박동진 기술 이사가 진지한 자세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조만간 카이닉스 전자의 주인이 새로 바뀔 겁니다.”

박동진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일반인이 그런 얘기를 했다면 콧방귀도 끼지 않았겠지만, 발언의 당사자가 김앤박 로펌의 대표라면 말이 달라진다.

김앤박은 대한민국 최고의 인수합병 전문 로펌이었다.

특히 인수합병 분야에서 그들의 정보력은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김성우 대표가 이리 말할 정도면 이미 인수합병이 마무리 단계에 와 있다는 의미였다.

그런 사실을 단박에 알아챈 박동진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카이닉스를 누가 인수하는 겁니까?”

“히말라야 투자그룹입니다.”

박동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재차 물었다.

“외국계 자본인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암튼 박 이사님을 청한 이유는 히말라야 투자그룹의 고위 인사인 이태수 회장님에게, 메모리 반도체 산업에 대한 개괄적인 보고를 올려주십사 요청하기 위함입니다.”

“이태수 회장님이 누군가요?”

“드림 케이블과 드림 박스를 운영하시는 분입니다.”

박동진은 반도체 사업에만 몰두한 관계로 태수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분이 히말라야 투자그룹의 고위 인물인가요?”

“아주 중요한 분이십니다. 그러니 내일 저녁 8시경에 힐튼 호텔 스위트룸 1709호로 찾아가십시오.”

김성우는 그 말을 끝으로 장내에서 유유히 사라졌다.

***

회사 업무를 종료한 뒤, 힐튼호텔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17층에 있는 스위트룸으로 들어가자 카이닉스 전자의 박동진 기술 이사가 나를 향해 정중히 인사를 해왔다.

“박동진입니다. 회장님.”

그는 내 오른손을 두 손으로 마주 잡으며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김성우 대표가 나에 대해 제대로 귀띔한 모양이었다.

잠시 후, 우리는 소파에 마주한 채 커피를 음미하며 진솔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메모리 반도체 업계의 현황에 대해서 구체적인 전망을 말씀해 주십시오.”

내 물음에 박동진이 시원시원하게 즉답했다.

“지금은 메모리 반도체 치킨 게임의 여파와 수요 부족으로 인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지만, 수년 내에 반드시 수요가 폭발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혹시 PDA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북용도로 주로 사용하는 휴대폰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대다수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PDA는 엄청난 폭발력을 지닌 모바일 기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킨 후 다시 말을 이었다.

“PDA는 손 안의 컴퓨터나 마찬가집니다. 인터넷도 사용이 가능하고 MP3 기기로도 활용이 가능하죠. 물론 지금은 걸음마 단계지만 분명 수년 내에 전 세계 인류는 PDA로 인터넷과 전화 통화 등을 즐기게 될 겁니다.”

박동진은 앤디 루반과 비슷한 류의 예측을 하고 있었다.

“핵심은 손 안의 컴퓨터인 PDA 혹은 스마트폰이 활성화된다면 메모리 수요가 폭발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죠.”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어갔다.

“PDA 폰에는 모바일 메모리와 플래쉬 메모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한마디로 PDA폰의 보급이 늘어날수록 메모리와 플래쉬의 수요도 덩달아 급증할 겁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상용화를 코앞에 둔 낸드 플래쉬가 휴대용 기기에 보급된다면 메모리 반도체 업체의 채산성은 순식간에 흑자로 반전할 겁니다.”

“낸드 플래쉬가 뭐죠?”

“디디알 램 보다는 느리지만 플래터 방식의 하드보다는 수십 배 이상 빠른 속도를 구현할 수 있는 차세대 하드 디스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 룸서비스가 장내에 나타났다.

“일단 저녁이나 먼저 하시죠.”

“감사합니다. 회장님.”

우리는 동서양의 산해진미를 차분히 음미하며 이런저런 대화를 길게 나누었다.

식사를 끝낸 뒤 박동진에게 이별을 고했다.

“박 이사님의 귀한 말씀을 잘 들었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좋은 시간을 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불러만 주신다면 얼마든지 응하겠습니다.”

***

오늘도 회사 업무를 끝마치자마자 박동진 기술 이사를 힐튼 호텔 스위트룸으로 불러들였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곧바로 반도체 강연에 돌입했다.

“전 세계 반도체 업계의 화두는 40나노 미세 공정입니다.”

“미세 공정이 그리 중요한 겁니까?”

박 이사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열변을 길게 쏟아냈다.

-미세 공정을 뜻하는 나노 공정은, 반도체 회로와 회로 사이의 폭이 나노미터급(nm)급인 첨단 반도체 제조공정을 뜻합니다. 1나노미터는 10억분의 1m로 머리카락 굵기의 약 2000분의 1 두께 수준이죠.

-메모리 반도체는 원판 모양의 실리콘 웨이퍼 위에 미세 회로를 그려서 만드는데, 회로와 회로 사이의 폭이 좁을수록 같은 크기의 웨이퍼에서 보다 많은 반도체를 뽑아낼 수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공정이 미세화될수록 성능이 향상되고 전력 소모가 크게 줄어듭니다. 이는 곧 생산 단가의 하락을 의미하며, 메모리의 용량 증대 및 낸드 플래시를 이용하는 차세대 저장 장치 SSD의 보급도 탄력을 받을 것입니다.

-IT시장 조사업체 가트너에 따르면 전 세계 낸드플래시 메모리 시장은 2007년에 240억 달러 규모로 크게 성장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박 이사의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귀한 말씀이었다.

나는 그날, 반도체에서 가장 중요한 건 미세공정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절감했다.

며칠 후.

오늘도 힐튼 호텔 스위트룸에서 박동진 기술 이사의 귀한 조언을 귀담아 듣고 있었다.

박동진은 두 눈을 바짝 빛내며 열변을 토했다.

-40나노 반도체 시설을 증설하려면 최소 2조 원 이상의 천문학적인 자금이 필요합니다.

-40나노 메모리 반도체와 낸드 플래쉬를 경쟁 업체들보다 하루라도 빨리 양산한다면 카이닉스 반도체의 경쟁력이 하루아침에 일신할 겁니다.

문제는 돈이었다.

물론 내가 마음만 먹으면 2조 원을 투입하는 건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허나, 나는 좀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내 1차 목표는 전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 석권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삼송전자 반도체 부문 역시 반드시 인수해야 했다.

“만약에 말입니다. 삼송전자 반도체 부문을 인수한다면 전 세계 메모리 시장을 완벽하게 장악할 수 있는 건가요?”

내 생뚱맞은 물음에 박동진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갑자기 그런 말씀을 왜 하시는지요?”

“호기심 차원으로 질문하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말고 대답해 주십시오. 박 이사님.”

그제서야 박동진이 내 질문에 답변을 해왔다.

“만약 삼송전자의 반도체 부문과 카이닉스 전자가 합병한다면 전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석권하는 건 누워서 식은 죽 먹기가 될 겁니다. 이렇다 할 경쟁 업체가 전무하기 때문이죠.”

그는 목이 탓는지, 생수를 들이킨 후 재차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상식적으로 삼송전자가 메모리 반도체 부문을 매각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인지라······.”

박 이사는 말끝을 흐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그렇지만 이 세상은 여러 가지 변수가 있는 탓에 섣불리 앞날을 예단할 수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삼송전자의 반도체 부문은 워낙에 거대한 규모라······.”

“됐습니다. 오늘 강의는 이쯤에서 끝마치죠. 제가 근사한 술집으로 박 이사님을 모시겠습니다. 하하······!”

그러자 박동진이 좋아죽는 얼굴로 화답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헤헤헤······.”

< 광폭행보 1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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