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폭행보 5 >
상암동 드림 케이블 본사 회장실.
회사 업무를 끝마칠 무렵 주한수 실장이 놀란 얼굴로 내 앞에 나타났다.
“청와대 경제수석이 연락을 주셨습니다.”
주 실장은 그리 말하며 핸드폰을 내 손에 건넸다.
폰을 받자 중년 남자의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제수석 김태동입니다. 제가 연락을 드린 이유는 카이닉스 전자 매각 문제 때문입니다.
-저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뭡니까?
-회장님의 확답을 듣고 싶습니다.
-어떤 확답 말입니까?
-카이닉스의 부채를 전액 탕감하는 조건으로, 최소 2조 원 이상의 투자금을 1년 안에 집행한다는 조항을 계약서에 삽입해 주십시오.
-수석님을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언제 시간이 되십니까?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오늘 밤에 만나는 게 어떻습니까?
-듣던 대로 이 회장님의 성격이 무척 화통하신 거 같습니다. 하하······!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당연히 칭찬으로 하는 말이었습니다. 암튼 좋습니다. 오늘 밤에 삼청동 안가에서 술이나 한잔하시면서 협의를 진행해 봅시다.
-가이드 차량을 보내 드릴 테니 그 차를 따라오시면 될 겁니다.
-그럼 있다 뵙겠습니다, 수석님.
통화를 끝마친 후 비서실에 콜을 넣었다.
-달달한 커피를 내와.
-네, 회장님.
비서가 내온 커피를 음미하며 국내외 계좌를 두루 살폈다.
국내 은행에는 5조 원 내외의 현금이 있었고, 해외 계좌에는 1조 원가량의 자금이 있었다.
총액 6조 원에 상당하는 돈이었다.
일단 그 자금을 활용해서 카이닉스 전자에 대대적인 투자를 단행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최단 시일 내에 삼송전자 반도체 부문도 인수하기로 작심했다.
민용은 매년 2조 원에 육박하는 적자를 보고 있는 반도체 부문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그 점을 이용한다면 어렵지 않게 삼송의 반도체 사업을 인수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물론 십수조 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인수자금을 투입해야 하는 일이었다.
부족한 돈은 구글과 아마존 등의 주식을 처분한 자금으로 충당할 생각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속전속결이 최선이었다.
쓸데없는 좌고우면은 백해무익할 뿐이다.
그날 밤.
김태동 경제수석이 보낸 가이드 차량이 삼청동 인근의 고급 주택가에 정차했다.
가이드 차량에서 내린 수행원이 내가 탑승한 롤스로이스에 접근했다.
옆자리에 동승한 주한수 실장이 차창을 열어서 그와 의견을 교환했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면 되는 건가요?”
“일단 이곳에서 수행원 분들은 모두 대기해 주십시오. 안가에는 회장님 한 분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나름 절차가 까다로운 모양이었다.
주한수에게 내 의중을 전달했다.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어.”
“아무래도 그러셔야 할 거 같습니다. 그럼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한수는 그리 말하며 뒷문을 공손히 열어주었다.
차에서 내리자 정부 측 인사가 나를 안가로 안내했다.
안가는 일반 가정집과 별다른 차이점이 없었다.
허나, 안가를 경비하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생김새였다.
청와대 경호원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안가의 본관 건물로 들어가자 장년의 남자가 내 앞에 나타났다.
“김태동 경제수석입니다. 청와대 춘추관에서 뵌 후로 처음 만나는 거 같습니다. 하하······.”
“그때는 워낙 사람들이 많아서 누가 누군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수석님.”
솔직히 답하자 김태동이 쓴웃음을 지으며 나를 지하실로 안내했다.
지하실로 내려가자 사면이 통유리창으로 구성된 투명 부스가 보였다.
김태동은 투명 부스를 손짓하며 저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미국 CIA가 허구한 날 도감청을 하는 탓에 안가에 도감청 방지룸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안 하면 정부의 기밀 사항을 지킬 수 없거든요.”
“미국과 우리나라는 혈맹인데 왜 그런 짓을 하는 겁니까?”
“미국은 우방이고, 적국이고 없습니다. 언제나 자신들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할 뿐입니다.”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발언이었다.
김태동의 말처럼 미국에겐 우방도 없고, 적국도 없었다.
그들에겐 이 세상 모든 나라가 적성국에 불과했다.
팍스 아메리카나를 구현하기 위함이었다.
도감청 방지룸의 의자에 앉자 김태동이 슬그머니 눈앞에서 사라졌다.
직후 노무연 대통령이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 내 상대는 김태동이 아니라 노무연이었다.
경호원들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던 이유가 그 때문인 모양이었다.
노무연은 도감청 방지룸에 들어오자마자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을 힘차게 마주잡으며 내 소개를 했다.
“드림 케이블 방송과 드림박스의 복합상영관을 운영하는 이태수라고 합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3월 중순 경에 청와대에서 개최한 경제인 연석회의에도 오시지 않았습니까?”
그는 나를 용케 기억하는 모양새였다.
“기억력이 좋으신 거 같습니다, 대통령님.”
“아직 50대 중반인데, 기억력이 가물가물할 정도면 대통령직을 때려치워야죠. 우하하······!”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하······!
우리는 저마다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서로의 두 눈을 정면으로 직시했다.
일종의 기 싸움이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노무연이 넌지시 운을 뗐다.
“대기업들이 투자를 통 안 하고 있어요. 기껏 투자를 해봤자 중국 쪽에 투자를 하는 게 고작이에요.”
“저 역시 대통령님과 생각이 같습니다.”
“특히 삼송전자와 LC전자는 중국에 반도체 공장과 디스플레이 공장을 미친 듯이 때려 박고 있어요. 그 때문에 한국의 첨단 기술이 중국 쪽으로 허무하게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의 말대로 삼송전자와 LC전자는 한국이 힘들여 개발한 첨단기술을 중국 공산당 놈들에게 자발적으로 떠넘기고 있었다.
돈도 안 되는 중국시장을 먹겠다는 허황된 야심에 사로잡힌 탓이었다.
“중국 공산당 놈들은 해외자본의 기술과 돈만 빼먹고, 자국 산업을 육성하는 데 혈안이 된 상황이에요. 그럼에도 국내 대기업들은 자발적으로 중국 정부에 돈과 기술을 갖다 바치는 우를 범하고 있어요.”
“법적으로 중국 지역에 투자를 못하도록 조치를 취할 수는 없는 겁니까?”
“만약 그런 조치를 취했다간 재계와 보수 기득권 언론사들이 나를 잡아먹으려 들 겁니다.”
노무연은 그리 대답하며 얼굴 가득 쓴웃음을 떠올렸다.
이제 본론으로 진입할 차례였다.
“카이닉스 전자의 부채를 전액 탕감해 주신다면 1년 이내에 2조 원 상당의 투자금을 집행할 용의가 있습니다.”
“어디에 투자를 할 것인지, 그 점을 명확히 알려주십시오.”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40나노대 양산시설을 천안 인근에 건설할 예정입니다.”
내 확언에 노무연이 감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연신 끄덕거렸다.
“조만간 투자계획서를 만들어서 관계부처에 제출하겠습니다.”
“정말 소문대로 이 회장님은 화통하신 남자 같습니다. 우하하······!”
“과찬이십니다. 대통령님. 하하······!”
우리는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려보낸 뒤 차후의 만남을 기약했다.
“투자계획서가 통과되는 즉시 카이닉스 전자의 매각 작업을 마무리 지읍시다.”
노무연은 그리 말하며 내 손을 친근하게 마주잡았다.
다음 날, 타워필리스 펜트하우스.
이른 아침부터 카이닉스 전자의 김동진 기술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40나노대 메모리 반도체 설비 투자계획서를 최단 시일 내에 만드세요.
-투자 액수를 어느 정도로 산정할까요?
-2조 원 내외로 설정하십시오.
-원하시는 대로 2조 원 대의 투자계획서를 작성하겠습니다.
-작성을 끝마친 즉시 상암동으로 오십시오.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통화를 끊자마자 명우에게 전화를 돌렸다.
-여름향기의 촬영지가 어디냐?
-강원도 속초.
-오늘 시간 내서 가볼 생각이니까, 니가 내 집으로 와라.
-알았다. 지금 니 집으로 넘어갈게.
1시간 후.
명우가 내 집에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은 청바지에 점퍼 차림이었다.
평소 즐겨 입는 아르마니 수트를 저 멀리 내팽개친 모습이었다.
“너도 형처럼 청바지에 점퍼나 걸쳐라.”
“수트가 편해.”
“촬영장에서는 쓸데없이 양복을 걸치는 게 아니라고.”
명우는 그리 말하며 제멋대로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녀석은 청바지와 티셔츠, 점퍼를 손에 든 채 내 앞에 다시 나타났다.
“이 옷이나 어서 입어라. 쓸데없이 양복 입을 생각하지 말고.”
“아휴······ 오늘따라 왜 이리 극성이냐?”
못 이기는 척 녀석이 내민 청바지와 티셔츠, 점퍼 등을 재빨리 몸에 걸쳤다.
명우와 함께 1층 정문으로 내려가자 주한수 실장이 롤스로이스 팬텀의 뒷문을 공손히 열어주었다.
우리는 뒷자리에 동승한 채 강원도로 향하는 차 안에서 이런저런 잡담을 길게 늘어놓았다.
그런 탓인지 금세 속초에 도착했다.
여름향기는 속초 해안가를 무대로 촬영이 진행 중이었다.
남주는 김우철이었고 여주는 명우의 스폰녀인 김솔미였다.
둘 다 비쥬얼이 좋은 탓에 찐한 로맨스 연기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진실로 사랑하는 남녀가 연기를 하는 거 같았다.
그런 탓일까? 명우는 촬영을 지켜보는 내내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내비쳤다.
솔미는 촬영이 끝났음에도 우철과 화기애애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녀석이 기분이 상한 눈치였다.
“아무래도 촬영장에 좀 더 있어야 할 거 같다. 그러니까 서울에는 너 먼저 올라가라.”
명우는 그리 말하며 촬영장 한켠에서 즐거운 담소를 나누는 솔미와 우철을 매의 시선으로 관찰했다.
“왜 그렇게 눈이 뻘게진 거야. 설마 질투라도 하는 거냐?”
“톤 좀 낮춰. 애들이 듣잖아.”
녀석은 불만이 그득한 얼굴로 연신 팔을 저었다.
“너 먼저 서울로 올라가라고.”
“에휴······ 말을 말자. 쫌생아. 그럼 형 먼저 간다.”
그 말을 끝으로 서울행 롤스로이스에 몸을 실었다.
***
캘리포니아 스코츠 밸리 넷플렉서 본사 회의실.
넷플렉서의 ceo인 란돌프와 코플랜드 로펌의 마이어 대표가 머리를 맞댄 채 진지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마이어 대표의 입에서 진중한 어조가 흘러나왔다.
“히말라야 투자 그룹 측에서 넷플렉서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히말라야 투자 그룹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란돌프의 물음에 마이어가 즉답했다.
“히말라야 투자 그룹은 수백억 불에 육박하는 자산을 대규모로 운용하는, 굴지의 사모펀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란돌프가 두 눈을 빛내며 은근한 어조를 내뱉었다.
“정말 히말라야 투자 그룹 측이 우리 넷플렉서를 인수할 의향이 있는 겁니까?”
“사실입니다. 그러니 히말라야 투자그룹의 인수 제안에 대해서 전향적으로 검토해 주십시오.”
란돌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적인 발언을 내뱉었다.
“경영진들과 협의를 거친 후 대표님에게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
상암동 드림 케이블 본사 회장실.
업무를 끝마친 후 주한수 실장을 호출했다.
“살인의 회상, 촬영지를 알아봐.”
“네. 회장님.”
한수는 그리 답하며 장내에서 재빨리 사라졌다.
잠시 후, 사무실에 주 실장이 다시 나타났다.
“하성시 근처에서 촬영을 진행한다는 후문입니다.”
“그곳으로 안내해.”
“네. 회장님.”
“그 전에 일단, 저녁부터 먹자. 밥 먹었어?”
“아직 식전입니다. 헤헤······.”
“잘됐네. 탕비실 냉장고에 된장이랑 김치, 미원이 있으니까 알아서 된장국을 만들어봐. 그리고 밥도 올려놓고.”
주 실장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허나, 그는 내가 까라면 까야 하는 신분이었다.
결국 녀석은 있는 솜씨, 없는 솜씨를 총동원한 채 나름 그럴싸한 된장찌개를 완성했다.
우리는 된장국에 사이좋게 밥을 말아먹은 뒤, 하성시를 목표로 보무도 당당히 큰 발걸음을 내딛었다.
하성시 근방에 도착하자 촬영 차량과 스텝, 배우들이 보였다.
명우와 유한성의 모습도 시야에 포착됐다.
명우를 손짓하자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내 앞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촬영은 잘돼가냐?”
녀석이 질렸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주민들이 어떻게 알고 왔는지 촬영을 중단하라고 난리를 치더라. 그 문제 때문에 촬영도 제대로 못 했다니까.”
아닌 게 아니라 주변에 진을 친 주민들의 얼굴에 하나같이 흉흉한 기색이 한가득이었다.
영화 촬영에 불만이 많은 눈치였다.
명우를 돌려보낸 뒤 유한성을 면전에 호출했다.
“주민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거 같은데, 어떻게 해결할 생각이지?”
“일단은 주민들과 대화를 해볼 계획입니다. 그럼에도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다면 촬영장을 변경해야겠죠.”
“촬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곧바로 촬영지를 옮겨. 영화 촬영은 일 분 일 초가 돈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
김소민은 최근에 매우 불안한 심경이었다.
태수가 그녀를 찾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의 석 달 동안 그들은 이렇다 할 만남 자체를 갖지 않았다.
그런 탓일까? 소민은 자신이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그녀 아니라도 태수 주변에는 아름다운 여성들이 지천에 널린 상황이었다.
소민은 태수에게 자기가 먼저 연락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태수와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오늘 밤에 만나 뵐 수 있을까요?
허나, 들려오는 대답은 그녀를 무척 실망시켰다.
-미안. 일 때문에 너를 만날 시간이 없을 거 같다. 그러니 나중에 보자.
태수는 그 말을 끝으로 매정하게 전화를 끊었다.
소민은 극심한 자괴감에 휩싸였다.
태수는 그녀보다는 사업이 더 중요한 남자였기 때문이다.
***
주말을 이용해 주 실장과 경호원들을 대동한 채 LA행 전용기에 몸을 실었다.
이번 기회에 넷플렉서를 반드시 수중에 넣을 생각이었다.
< 광폭행보 5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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