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쾌도난마 1 >
청와대 집무실에 김태동 경제수석이 나타났다.
김태동은 노무연 대통령에게 긴급 현안을 보고했다.
“히말라야 투자그룹이 시티은행 강남 본점과 국면은행 강남점에 총액 5조 4천억 상당의 현금을 예치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노무연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들이 확언대로 자금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습니다.”
“관계부처와 협의해서 카이닉스 전자의 매각 절차를 최단 시일 내에 마무리 지으세요. 그리고 반도체 공장 증설 문제도 편의를 봐주세요.”
“말씀대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
서울 모처.
지상파 3사의 수장들이 머리를 맞댄 채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KBC 방송국의 이문길 사장이 격한 어조를 내뱉었다.
“드림 케이블의 영향력이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특히 드라마 부문에서 우리 지상파 3사에 맞먹을 정도로 영향력을 급속도로 확대하고 있어요!”
nbs 방송사의 신임사장인 오충환이 말을 덧붙였다.
“특히 그들은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히말라야 프러덕션을 설립한 이후, 영화시장을 순식간에 석권했습니다. 이제 조만간 드라마 시장마저 드림 케이블이 장악할 거라고 업계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할 지경이에요.”
SBC 방송국의 양기찬 대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이 상태로 시간이 지난다면 대한민국의 영화와 드라마 시장을 드림 케이블이 모조리 먹어치울 것이 불 보듯 훤합니다. 특단의 대책이 절실해요.”
“그래서 제가 나름 묘안을 짜봤습니다.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KBC의 이문길 사장이 운을 떼자 nbs의 오충환과 SBC 방송국의 양기찬 대표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직후 이문길의 입에서 시원시원한 언변이 튀어나왔다.
“우리 지상파도 드림 케이블처럼 중간 광고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광고의 효율성을 제고할 수 있어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지상파를 턱밑까지 쫒아온 드림 케이블의 주요 이유 중의 하나가 중간 광고 허용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더 이상 케이블 방송에 중간 광고를 양보해서는 아니 됩니다.”
오충환이 화답하자 그에 질세라 양기찬도 말을 거들었다.
“중간광고도 반드시 해야 하고, 드림 케이블처럼 자체적인 케이블 드라마 채널을 확보해야 합니다.”
그날, 지상파 3사 대표는 정부 측에 중간 광고를 허용해 달라는 요구사항을 전달하기로 의견일치를 보았다.
또한 케이블 채널에 동시다발적으로 진출하기로 결의했다.
날이 갈수록 영향력을 확대해가는 드림 케이블을 나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24층 회의실로 직행했다.
장내에 운집한 고위 간부들의 정중한 인사를 본체만체하며 상석에 자리를 잡았다.
직후 김용대 국장이 모두발언을 시작했다.
“지상파 3사의 대표들이 정부 측에 중간광고를 허용해 달라는 요구사항을 전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케이블 채널에도 진출을 허용해 달라는 의중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김용대의 모두발언이 떨어지자 좌중이 들썩거렸다.
나름 쇼킹한 뉴스였기 때문이다.
중간광고는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지만, 케이블 채널에 지상파가 진출할 거라고는 미처 생각치 못한 탓이었다.
용대의 모두발언이 다시 이어졌다.
“중간 광고 허용은 지상파의 오래된 숙원인 관계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문제는 지상파의 케이블 채널 진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여러분들의 허심탄회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그의 모두발언이 끝나자마자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허나, 이렇다 할 결론을 도출해내지는 못했다.
회의를 끝마친 뒤 25층 회장실로 올라가자마자 주한수 실장에게 명을 내렸다.
“김민용 회장에게 연락을 넣어.”
“뭐라고 말할까요?”
“오늘 밤 9시경에 만나자고 전해.”
“알겠습니다. 회장님.”
김민용과 담판을 지을 생각이었다.
그날 밤.
한남동 인근의 라운지 바로 들어서자 김민용이 나를 반겼다.
우리는 길다란 테이블에서 칵테일을 음미하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민용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반도체 부문을 매각할 생각이 없냐?”
녀석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오래전부터 너희 회사 반도체 부문을 인수하고 싶었다.”
“흠······.”
민용이 깊은 침음성을 토해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그의 입에서 진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카이닉스 전자도 인수할 예정이라면서?”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이 걱정이 그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도 알다시피 반도체 업황이 너무 안 좋아. 니 전 재산을 말아먹을 가능성이 있다고.”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높은 가격에 반도체 부문을 매각할 생각이나 해라. 니가 원하는 가격으로 인수해 줄 테니까.”
녀석이 두 눈을 빛내며 넌지시 물었다.
“정말 내가 원하는 가격대에 인수할 의향이 있는 거냐?”
“그래. 그러니까 내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해 보라고. 그럼 나중에 보자.”
그 말을 끝으로 라운지 바를 유유히 빠져나왔다.
***
명우는 김솔미와 김우철의 관계를 의심했다.
여름 향기를 촬영하는 내내 촬영장에서 거의 붙어 있다시피 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숱하게 연출한 탓이었다.
그러나 이렇다 할 증거가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명우를 극진히 대했다.
단지 촬영장에서만 우철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허나, 그는 안심할 수 없었다.
전처와 이혼한 후유증 탓인지 여자를 믿지 않는 성격으로 변한 것이다.
결국 명우는 사람을 시켜 김솔미의 뒤를 밟았다.
편집증적인 집착심의 발로였다.
오늘도 명우는 여름 향기의 촬영을 끝마친 김솔미를 집에 바래다준 후 수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솔미의 뒤를 밟아.
-알겠습니다. 사장님.
-특이 사항을 발견하면 바로 전화를 때려.
-명심하겠습니다.
명우는 통화를 끝마친 뒤 르네상스 빌딩으로 차를 몰았다.
그는 펜트하우스가 조성된 14층에 도착한 뒤 복도 맨 끝에 위치한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무실에는 펜트하우스의 내부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폐쇄회로 TV가 설치된 상태였다.
그는 펜트하우스의 거실과 룸 등을 차례로 주시한 뒤 입가에 담배를 베어 물었다.
명우가 자욱한 담배 연기를 말아 올릴 무렵, 책상 위에 놓여진 대포폰이 요란한 울음을 토했다.
폰을 귓가로 가져가자 남자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솔미 씨가 자차를 이용해 집을 나섰습니다.
-행선지는?
-지금 추적 중에 있습니다.
-누굴 만나는지 실시간으로 보고해.
-넵. 사장님.
40분 뒤, 명우의 대포폰에 남자의 전화가 또다시 걸려왔다.
-신사동 인근의 비밀 클럽으로 솔미 씨가 들어갔습니다.
-너도 따라서 그곳으로 들어가.
-그게 좀 힘들 거 같습니다. 출입구를 지키는 기도들이 외부인들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습니다.
명우는 김솔미가 바람을 핀다고 확신했다.
그런 탓일까? 성난 얼굴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씹어뱉듯이 말을 내뱉었다.
-내가 갈 테니까 주소를 문자로 찍어.
그는 전화를 끊자마자 명철에게 콜을 넣었다.
-펜트하우스 사무실로 튀어 와!
-어제도 내가 사무실을 지켰잖아. 오늘은 형이 좀 책임져라.
-개자식아. 잔말 하지 말고 지금 당장 튀어오라고!
명우는 날 선 목소리를 토해낸 뒤 초조한 얼굴로 줄담배를 말아 올렸다.
30분 후, 사무실에 명철이 나타났다.
“내일은 형이 맡을 테니까, 오늘은 니가 사무실을 지키고 있어.”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서두르는 거야?”
“너는 몰라도 된다. 신경 꺼.”
명우는 그리 말하며 사무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명우의 벤츠 차량이 신사동 인근에 모습을 드러냈다.
직후 그의 곁으로 30대 남자가 접근했다.
명우는 운전석의 차창을 내린 뒤 눈앞에 나타난 남자에게 입을 열었다.
“저 건물이냐?”
“네. 사장님.”
명우는 질투에 사로잡힌 눈빛을 적나라하게 내비치며 운전대를 연거푸 내려쳤다.
쿵쿵쿵······!
‘개 같은 년이 감히 나를 두고, 엄한 놈들이랑 파람을 피다니······!.’
그때, 장내에 람보르기니 차량이 나타났다.
순간 명우의 두 눈에 격렬한 분노가 치솟았다.
그의 시선은 차에서 내린 뒤 클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남자에게 모아졌다.
남자의 정체는 김우철이었다.
‘내 직감대로 저 개자식과 놀아나고 있었구나! 좋아. 감히 나를 갖고 놀았겠다. 오늘 너희 년놈들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마!.’
명우는 곧바로 강태호에게 전화를 넣었다.
-지금 당장 쓸만한 애들을 신사동으로 보내세요.
-사장님.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러시는 겁니까?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더 이상 묻지 마십시오.
-원하시는 대로 쓸만한 애들을 신사동으로 보내드리죠.
-주소를 문자로 보낼 테니 그곳으로 사람을 보내 주십시오.
-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강대호는 태수의 최측근인 명우의 부탁을 감히 경시할 수 없었다.
1시간이 지났을 무렵 명우의 눈앞에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이 나타났다.
거의 열 명에 달하는 수효였다.
“전면에 보이는 클럽으로 들어갑시다. 반항하는 놈들은 알아서 제압하세요.”
“넵. 사장님.”
남자들은 일사불란하게 복명한 뒤 클럽을 목표로 벌떼처럼 몰려갔다.
그들은 클럽의 기도들을 삽시간에 제압한 후 명우에게 길을 터줬다.
명우는 주먹들을 앞세운 채 클럽의 밀실을 차례로 급습했다.
그러기를 얼마 후, 구석방에서 못 볼 꼴을 보고야 말했다.
약에 잔뜩 취한 솔미를 대상으로 몹쓸 짓을 일삼는 김우철과 젊은 남자를 목격한 것이다.
그는 진정으로 분노했다.
그런 탓인지 솔미를 짐승처럼 범한 우철과 남자를 손가락질하며 준엄한 언사를 내뱉었다.
“죽지 않을 정도로 손을 봐주세요.”
주먹들이 우철과 남자를 손과 발을 이용해 무자비하게 짓이겼다.
퍼어억······! 퍼억······! 퍼퍼퍽······.! 퍽퍽퍽퍽······!!
-으아아악······그만 제발······.!
-쿠아악······.잘못······했습······우아악······!
우철과 남자는 얼굴에 피칠갑을 둘러쓴 채 맨바닥에 처량하게 나뒹굴었다.
허나, 명우의 화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그는 구둣발로 우철의 얼굴을 잘근잘근 짓밟으며 살벌한 어조를 내뱉었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니놈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테다!”
명우는 그 말을 끝으로 소파 위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솔미를 안아 든 채 장내에서 쓸쓸히 사라졌다.
***
월요일 오전 회의를 끝마친 후, 구내식당에서 얼큰한 육개장으로 주린 배를 채울 무렵 강태호의 전화가 걸려왔다.
-용건이 뭐죠?
-김명우 사장의 일로 알려드릴 일이 있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허심탄회하게 말해 보세요.
-어젯밤에 김 사장이 애들이 필요하다고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사유가 뭐죠?
-애들한테 듣기로는 김우철과 일반인 남자가 김솔미를 욕보였다고 하더군요.
경을 칠 노릇이었다.
김솔미가 명우의 애첩이라는 사실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었다.
더구나 우철은 명우가 직접 스카웃한 놈이었다.
-소문 안 나게 아랫사람들 입단속에 신경을 써주세요.
-명심하겠습니다.
-명우를 통해서 수고비를 챙겨드릴 테니 보안에 각별히 유념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회장님.
통화를 끊은 뒤 장내에 공손히 서 있는 주한수에게 명을 내렸다.
“김명우의 동태를 파악하세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회장실에서 줄담배를 태울 무렵 주한수가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김명우 사장은 자택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습니다.”
“전화는?”
“통 안 되고 있습니다.”
“그곳으로 갈 테니까 차를 준비해 놔.”
“네. 회장님.”
명우는 압구정 현도 아파트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내가 쓰라고 내준 집이었다.
초인종을 눌러봤지만 아무런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곧바로 마스터키로 집문을 열었다.
명우는 거실 소파에 멍한 얼굴로 드러누운 채 천정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맛이 심하게 간 모양새였다.
주방 의자에 걸터앉은 채 녀석에게 입을 열었다.
“자초지종을 자세히 말해 봐.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명우는 처량한 표정을 지으며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모든 사실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김우철이 솔미에게 약을 먹인 후에 몹쓸 짓을 했어.”
“김우철 혼자가 아니었다면서?”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은 누구냐?”
“대신 그룹 장인철 회장의 셋째 아들인, 장영호라고 하더라.”
공교로운 일이었다.
대신 그룹은 정민기의 사돈집안이었다.
명우는 자리에서 일어난 뒤 거실 책상으로 걸어갔다.
녀석은 서랍장에서 캠코더를 꺼내더니 내 쪽으로 걸어왔다.
명우가 건넨 캠코더에는 몹쓸 짓을 하는 현장이 생생히 담겨 있었다.
솔미의 얼굴은 적나라하게 드러난 반면 우철과 장영호는 가면을 쓴 채로 일을 벌인 탓에 정체가 노출될 가능성이 전무했다.
야비한 개자식들이었다.
특히 김우철은 후배 와이프를 범한 문제로 내 도움을 받은 놈이었다.
그런 자식이 이런 일을 벌였다는 사실에 명우 못지않게 분노했다.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허나, 여름 향기가 마음에 걸렸다.
히말라야 프러덕션은 여름 향기 제작에 60억 안팎을 투자한 상태였다.
그렇지만 김우철을 수수방관한다면 명우가 가만히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일단 드라마 촬영을 중단한 뒤 남주와 여주를 모두 교체하는 게 최선이었다.
김솔미 역시 나름의 잘못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을 스타로 만들어준 명우를 배신하고 우철 패거리와 놀아났다.
제 발로 클럽을 찾은 게 그 증거였다.
< 쾌도난마 1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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