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모리 반도체 통합 1 >
늦은 밤, 타워필리스 펜트하우스.
민용의 대포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 역시 보안을 중요시 여긴 탓에 사적인 통화는 주로 대포폰을 이용했다.
-매각 금액을 16조에서 19조로 갑자기 증액한 이유가 뭐냐?
따지듯 묻자 수화기에서 녀석의 미덥지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임원들이 이왕 매각 할거면 가격을 제대로 받아야 한다고, 하도 난리를 치는 바람에...
민용은 구질구질한 변명으로 일관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루아침에 매각 대금을 3조나 증액한다는 게 말이나 될법한 얘기냐!
-미안. 그렇지만 나도 어쩔수 없었다고. 제발 내 말 좀 믿어주라.
녀석은 끝까지 임원들을 들먹이며 책임 회피에 급급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럼 앞으로도 19조를 고수할 생각이냐?
-아무래도 그래야 할거 같다. 매각의 전권을 임원들이 쥐고 있거든. 미안하다.
말도 안돼는 궤변이었다.
민용은 삼송그룹의 총수였다.
아무리 전대 가신그룹의 입김이 강하다 해도 총수를 넘어선다는 건 말이 안돼는 일이었다.
녀석은 임원들과 한통속이었다.
삼송 반도체 부문을 19조에 매각할 생각이었다.
더 이상의 통화는 무의미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월가의 주식 중개인에게 국제전화를 걸었다.
-주식 매각 작업을 신속히 진행해 주십시오.
-원하시는 기간을 말씀해 주시죠.
-5개월 안에 작업을 종료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5개월 이내에 매도 작업을 끝마치겠습니다.
***
상암동 드림 케이블 본사 회장실.
사무실에 출근하자마자 벽면의 대화면 TV들에 이목을 집중했다.
내 시선은 드림 케이블의 음악채널에 모아졌다.
슈퍼스타 드림의 시즌 2가 방송을 시작한 탓이었다.
시즌 2 첫 방송이라 그런지 제주도 지역과 북미 지역의 오디션 장면이 교차편집으로 절찬리에 방영되고 있었다.
귀여운 소녀소녀 부터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 할머니 까지 각약각색의 참가자들이 시청자들에게 커다란 웃음을 주고 있었다.
예능국 소속의 피디들이 제 역할을 십분 발휘하는 모양새였다.
그런 탓인지 내 입가에 절로 흐뭇한 미소가 그려졌다.
곧바로 인터폰에 콜을 넣었다.
-김재연 예능 국장을 사무실로 들여보내.
-네. 회장님.
잠시 뒤, 김재연이 내 앞에 나타났다.
녀석의 눈밑에는 다크서클이 한가득이었다.
"잠을 제대로 못잔 모양이지?"
"예. 오디션 교차편집 문제로 편집실에서 날밤을 새는 바람에..."
김재연이 교차편집을 직접 한 모양이었다.
"수고했어. 방송을 봤는데 나름 재밌더군."
그러자 녀석이 감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시청률이 제대로 상승하면 예능국 전체에 특별 포상휴가를 줄테니까 알아서 잘해 봐."
그리 말하며 지갑에서 천만원권 수표 석장을 꺼내서 재연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 돈으로 예능국 식구들 데리고, 회식이나 해."
"고맙습니다. 회장님."
녀석은 그리 화답하며 나를 향해 깊숙이 허리를 조아렸다.
***
2004년의 희망찬 새해가 밝았다.
나는 신년 새해를 기념하기 위해 타워필리스 펜트하우스로 측근 그룹을 거의 모두 불러들였다.
김명우를 필두로 김태섭, 우명석, 장준기, 김용대, 김재연, 주한수, 유한성, 하수용, 김동진이 내 앞에 모여들었다.
우리는 호텔에서 공수해온 고급스런 출장 부페를 만끽하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김태섭을 위시한 장내의 인사들이 나를 향해 넙죽 큰 절을 올렸다.
"만수무강 하십시오. 회장님."
김태섭이 일행을 대표해 낯간지러운 언사를 쏟아냈다.
솔직히 싫지않은 기분이었다.
이들은 내가 신임하는 가신 그룹이었다.
나는 외로운 어린시절을 보낸 탓인지 언제나 사람들이 그리웠다.
특히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인맥을 미치도록 갖고 싶었다.
그런 탓으로 여간해서는 사람을 내치지 않았다.
사람들 간의 인연을 무겁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발밑에 무릎끓은 인사들의 면면을 세세히 살핀 뒤 내 진솔한 포부를 그들에게 솔직히 밝혔다.
"우리 모두 저 높은 곳을 향해 함께 달려갑시다. 물론 여러분들 모두 내가 그 곳으로 데리고 가겠습니다. 그러니 지금 처럼 나를 믿고 따라와 주십시오.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순간 장내에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짝짝짝짝짝짝...!!
그날 우리는 밤늦도록 질펀한 술판을 즐기며 돈독한 우의를 다졌다.
***
가평 인근의 사격장으로 들어가자 김성우 대표가 클레이 사격을 즐기는 광경이 보였다.
탕탕탕탕탕탕!
김성우는 백발백중의 신기를 한껏 과시한 뒤 수행비서에게 라이플을 건넸다.
직후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회장님에게 소개할 인사가 있습니다."
"그가 누굽니까?"
"경찰청 정보과장 이성훈입니다."
"정보과장을 만날 필요가 있을까요?"
"직급은 과장이지만 이성훈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고급 정보를 취급하는 인물입니다."
생각 외로 쓸만한 남자 같았다.
"좋습니다. 한번 만나봅시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저를 따라오시죠."
김성우는 그리 말하며 인근의 밥집으로 나를 이끌었다.
성우와 정갈한 한정식을 즐기며 반주로 나온 소주를 물처럼 들이킬 무렵, 주한수의 목소리가 룸 밖에서 들려왔다.
"이성훈 과장이라는 남자가 나타났습니다. 들여보낼까요?"
성우를 홀낏 쳐다보자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들여보내."
"네. 회장님."
잠시 후, 40대 초반의 남자가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성훈은 깔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공손히 허리를 숙인 뒤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회장님을 만나뵙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앞으로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예의를 아는 남자였다.
"술 한잔 받으시죠."
"주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회장님."
성훈은 그리 화답하며 유리 글라스를 두손으로 공손히 들어올렸다.
글라스에 소주를 넘치도록 따르자 그가 시원하게 원샷으로 마무리했다.
그때, 김성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과장은 이만 나가지."
그러자 성훈이 우리에게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공손히 대답했다.
"제가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불러 주십시오."
녀석은 그말을 끝으로 장내에서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김성우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내가 뒤를 봐주는 친굽니다. 고급 정보를 많이 알고 있으니 필요하시면 가져다 쓰십시오."
"제가 그래도 될까요?"
"어차피 돈만 주면 정보를 파는 친구니, 별다른 부담을 갖지 마십시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김성우가 메모지 한장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메모지에는 폰 번호가 적혀있었다.
"이성훈이 사용하는 대포폰 번호니까 부담없이 연락을 하십시오."
"알겠습니다."
***
타워필리스 펜트하우스.
거실의 창가를 거닐며 월가의 주식 중개인과 국제전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폰에서 중개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존과 구글의 매도 작업을 거의 끝마쳤습니다.
-매각 대금을 TS 인베스트먼트의 계좌로 이체해 주십시오.
-이체작업을 종료하는 즉시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1시간 뒤, 월가 중개인의 메시지가 폰 화면에 떠올랐다.
곧바로 데스크탑을 켰다.
버진 아일랜드에 소재한 HBC 은행의 계좌에는 220억 달러에 육박하는 예치금액이 있었다.
한화로 26조원에 상당하는 천문학적인 자금이었다.
허나, 나는 그 돈이 많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돈 들어갈 구석이 천지였기 때문이다.
삼송의 반도체 부문과 카이닉스, ARM 등을 인수해야 하는 탓이었다.
삼송 반도체 부문만 19조원을 상회하고 있었다. 그리고 ARM 인수자금도 거의 7조원에 육박할 지경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카이닉스 전자를 인수하는 조건으로 대략 2조원 내외의 투자금을 1년 이내에 집행해야 하는 의무조항도 있었다.
당장 필요한 자금만 28조원에 달할 지경이었다.
시중은행에 예치 중인 5조원과 주식을 처분한 26조원을 합할 경우 31조원에 상당하는 가용현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3개 업체를 인수해도 3조원 가량의 여유자금이 있었지만, 그 정도 자금으로는 칼컴을 인수하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칼컴의 경영진들이 거의 8조원 가량의 매각 대금을 원한 탓이었다.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 주식 중에서 한가지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반드시 저들 기업을 모조리 인수할 계획이었다.
나에게 부여된 신성한 사명이었기 때문이다.
***
주말을 이용해 ARM 본사가 있는 영국 런던을 방문했다.
코플랜드 로펌의 마이어 대표를 대동한 채 인수협약식이 열리는 지하 컨퍼런스홀로 내려갔다.
나는 그날, ARM의 현 경영진과 기술진을 유임시키는 조건으로 총액 56억 달러, 일시불 현금 지급 조건으로 ARM사를 전격적으로 인수했다.
***
한남동.
김민용과 심재철 미래전략 본부장이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태수 회장이 보유한 히말라야 투자그룹이 모바일 CPU의 핵심 특허를 대다수 보유 중인 ARM사를 인수한 모양입니다."
심 본부장의 보고에 민용의 얼굴에 경악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 말이 사실인가요?"
"블룸버그 통신에서 특종으로 방금전에 타전한 뉴스 속봅니다."
"흠..."
민용의 입에서 깊은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는 이태수의 속셈을 당최 알수 없었다.
"메모리 반도체는 물론이고 모바일 CPU 분야까지 진출하려는 그의 진정한 의도가 뭘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반도체 사업을 인수해봤자 상당기간 대규모 적자를 볼게 뻔한 마당에, 또 다시 ARM 사를 인수한다는 게, 내 머리론 당최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저 역시 마찬가집니다. 회장님."
민용은 알수없는 수수께끼에 직면한 사람처럼 미간을 모은 채 고개를 여러차례 좌우로 흔들었다.
허나, 끝내 태수의 속내를 파악하는 데 실패했다.
그의 복잡다단한 야심을 짐작하는 것이 애시당초 불가능한 탓이었다.
***
런던을 출발한 전용기가 뉴욕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뉴욕에서 이방카 트램프를 만날 생각이었다.
공항 출구로 나가자 하얀색 리무진 차량이 우리 일행 앞으로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리무진 기사의 안내를 받으며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주한수 실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옆자리에 동승한 주 실장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대체 어디를 가실 생각입니까?"
"뉴욕에 있는 친구가 패션쇼에 초대했으니까 얌전히 따라와."
그 말을 끝으로 두눈을 지그시 내리감았다.
얼마 뒤, 리무진 차량이 패션쇼가 화려하게 펼쳐지는 초고층 빌딩 앞에 멈춰섰다.
주 실장을 대동한 채 패션쇼장으로 들어서자 이브닝 드레스 차림의 이방카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따스하게 포옹했다.
"오랜만이야. 태수."
"너는 예전 보다 더 아름다워진거 같은데. 하하..."
덕담을 건네자 이방카가 싫지않은 표정을 지으며 고혹스런 눈길로 나를 은근히 쳐다봤다.
"오늘 밤에 시간 있니?"
"얼마든지."
그리 화답하며 이방카의 허리춤에 팔을 둘렀다.
우리는 패션쇼장의 VIP 좌석에서 모델들의 화려한 워킹과 세련된 옷차림을 홀린듯이 감상한 후 인근의 호텔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다음날.
나를 태운 전용기가 광활한 태평양 상공을 한마리 새처럼 여유로이 가르고 있었다.
전용기 안에는 주 실장과 서너명의 경호원, 조종사, 승무원 등이 전부였다.
우리 일행은 무료한 시간을 카드게임을 즐기며 나름 슬기롭게 극복했다.
물론 내 지엄한 명령으로 기내에서는 일체의 음주가 금지된 상황이었다.
술주사를 극도로 경계한 탓이었다.
25시간 가까이 이어진 비행 끝에 드디어 영종도 국제공항에 순조롭게 착륙했다.
우리 일행은 공항을 나서자마자 타워필리스로 직행했다.
여행의 노독을 한시바삐 풀기 위함이었다.
***
일본의 민영방송인 TBS에서 방영을 시작한 여름향기가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남주로 출연한 이창용의 인기가 범상치 않았다.
드라마 속에서 지고지순한 순정남 캐릭터를 연기한 탓이지, 사랑에 목마른 일본의 중년 여성들 사이에서 가히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한 것이다.
그런 탓으로 대박엔터 사무실에는 일본의 여성팬들이 보낸 팬레터와 각종 선물이 날마다 쏟아져 들어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수천여 명의 일본 팬들이 이창용을 직접 만나기 위해 대박 엔터 사무실이 있는 르네상스 빌딩에 진을 치는 진풍경마저 펼쳐질 정도였다.
이창용은 한국과 일본에서 가장 인기 높은 탑스타로 자타의 공인을 받기에 이르렀다.
***
상암동 드림 케이블 본사 회장실.
결재서류에 회장 직인을 날인할 무렵, 명우가 슬그머니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냐?"
"긴히 상의할 문제가 있다."
"그게 뭔데?"
"일본 측 행사업체에서 이창용의 팬싸인회와 콘서트를 기획했거든."
"그래서 할 말이 뭔데?"
"알아보니까 일본은 배우들도 인기가 있으면 유료 싸인회를 하고 콘서트도 한다는 거야. 나름 돈이 되나 보더라고."
"창용이를 데리고 일본에서 돈벌이를 하자는 말이냐?"
"그렇지. 일본 측 담당자의 말로는 최소 백억원 이상의 수익을 기대할수 있데. 창용의 일본 현지 인기가 그 정도로 엄청나다는 반증이지."
약간 놀란 심경이었다.
한두푼도 아니고 백억이었다.
일개 배우가 유료 싸인회와 콘서트로 그렇게 많은 돈을 벌어 들인다는 사실이 쉬이 믿기지 않았다.
"정말 그렇게 많은 돈을 벌수 있는거냐?"
"그렇다니까. 그래서 말인데, 창용이를 한달 일정으로 일본 투어에 돌리는게 어때?"
"자신있냐?"
"현지 사정에 밝은 재일교포도 이미 섭외한 상태야. 그러니 나를 한번 믿어봐라. 이번 기회에 돈벌이를 제대로 해야지."
명우는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알아서 잘 해봐라. 일본에 가는 김에 엔화를 뭉테기로 긁어오라고."
"염려 붙들어 매라. 안그래도 그럴 생각이니까. 하하..."
녀석은 밝은 웃음을 내비치며 장내에서 유유히 사라졌다.
회사 업무를 끝마친 뒤 타워필리스로 김소민을 불러들였다.
그녀와 간만에 오붓한 시간을 만끽한 뒤 진지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니가 원하면 스폰 계약을 종료해 줄게."
그러자 소민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완강히 저었다.
"저는 앞으로도 상당 기간 회장님의 그늘에 있고 싶어요."
"진심이냐?"
그녀가 사슴 같은 눈망울로 나를 그윽하게 쳐다봤다.
그런 탓인지 오늘 따라 소민이 무척 아름답게 느껴졌다.
< 메모리 반도체 통합 1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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