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말라야 투자그룹 1 >
모두의 예상대로 헌법재판소는 노무연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을 일사천리로 기각 처리했다.
열린당의 총선 압승에 부담감을 느낀 탓이었다.
결국 노무연은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통과된지 64일 만에 국정에 순조로이 복귀했다.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 무렵, 청와대 비서실에서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대통령님이, 이 회장님을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그러니 시간이 되시면 내일 점심 무렵에 청와대로 와주시죠.
-알겠습니다. 내일 점심 무렵에 청와대로 들어가겠습니다.
다음날.
청와대로 들어서자 비서실장이 나를 반가이 맞이했다.
그와 악수를 교환한 뒤 춘추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춘추관에 들어가자 노무연 대통령이 환한 얼굴로 내 손을 마주잡았다.
"진작에 만나뵙고 싶었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오늘에서야 회장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대통령님."
정중히 인사를 교환한 뒤 정갈한 한식이 차려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한정식을 음미한 뒤 진지한 자세로 담소를 이어나갔다.
"히말라야 투자그룹이 삼송전자 반도체 부문을 인수할 거라는 시중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만약 시중의 소문이 사실이라면 우리 정부는 반도체 인수합병에 걸림돌이 있는지를 자세히 살필 생각입니다."
노무연이 나를 청한 이유를 대충 알거 같았다.
그는 히말라야 투자그룹의 진정한 오너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메모리 반도체 사업은 대한민국의 첨단 국책산업이었다.
비록 지금은 수조원 대의 적자를 보는 사업이었지만, 먼 미래를 생각한다면 외국 자본에 반도체 기업을 모조리 넘기는 행위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노무연은 그런 의중을 넌지시 전하고 있었다.
"히말라야 투자그룹은 이미 카이닉스 전자를 인수한 상황입니다. 그런 판국에 삼송전자 반도체 부문까지 인수할 경우, 외국자본에 첨단 산업을 모두 매각했다는 비판여론이 비등할 여지가 높습니다."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대통령님."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히말라야 투자그룹의 진정한 주인이 대체 누굽니까? 이 회장입니까? 아니면 겉으로 드러난 대로 월가의 투자그룹이 주인입니까?"
"히말라야 투자그룹이 외국계 자본이라고 대답하면 어쩌실 생각입니까?"
내 반문에 노무연이 결연한 태도로 즉답했다.
"그럴 경우 히말라야 투자그룹의, 삼송전자 반도체 부문의 인수를 정부 차원에서 불허하겠습니다."
솔직히 답하는 게 최선이었다.
"할 수 없군요. 사실대로 답할 수 밖에."
노무연이 두눈을 빛내며 양귀를 쫑긋 세웠다.
"허심탄회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이 회장님."
"좋습니다. 가감없이 팩트만 말하겠습니다. 히말라야 투자그룹은 제가 운용하는 사모펀드 그룹입니다."
"증거가 있습니까?"
노무연이 강렬한 눈빛을 내비치며 내 두눈을 정면으로 직시했다.
"저는 미국 증시에 대규모 투자를 감행한 상황입니다. 물론 그때그때 필요한 인수자금을 뉴욕 증시에서 조달하죠."
"증거가 있냐고 물었습니다."
"죄송하지만 확실한 물증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제 대답이 유일한 증거라고 해두죠."
"흠..."
노무연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언론에 히말라야 투자그룹이 국내 자본이라고 밝힐 수 있습니까?"
"얼마든지 그럴 의향이 있습니다."
"좋아요. 그럼 내일 날이 밝는 즉시 히말라야 투자그룹의 오너가 이 회장이라는 사실을 언론에 공식적으로 밝혀 주십시오."
"인터뷰는 그러니까, 공문서를 각 언론사에 발송하겠습니다. 이 정도면 만족하시겠습니까?"
그제서야 노무연이 수긍하는 얼굴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상암동 드림 케이블 본사 회장실.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주한수 실장을 면전에 불러들였다.
"책상에 앉아서 a4 용지에 내가 구술(口述)하는 내용을 받아적어."
"무슨 일인데 그러시는 겁니까?"
"묻지말고 내가 시키는대로 해."
주 실장이 송구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네. 회장님."
주 실장이 책상에 앉자마자 구술을 시작했다.
-본인 이태수는 드림 케이블 방송과 드림박스의 오너임과 동시에 히말라야 투자그룹의 실질적인 오너임을 각 언론사에 밝히는 바입니다.
-제가 히말라야 투자그룹의 오너임을 밝히는 이유는 삼송전자 반도체 부문이 해외 자본에 넘어갈 것을 우려하는 국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각 언론사는 히말라야 투자그룹이 해외자본이 아닌, 국내자본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려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구술을 받아적은 주 실장이 놀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런 사실을 언론사에 알려도 될까요? 나중에 세금 문제가 대두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건 그때 가서 걱정할 일이야. 그러니 작성한 성명서를 각 언론사의 팩스로 전송해."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날 밤.
타워필리스 자택에서 밤 9시 뉴스에 이목을 집중했다.
-삼송전자와 반도체 부문 인수협상을 벌이고 있는 히말라야 투자그룹의 실제 주인이 밝혀졌습니다.
-놀랍게도 히말라야 투자그룹의 실제 오너는 드림 케이블 방송과 드림 박스의 소유주인 이태수 회장으로 알려졌습니다.
-이태수 회장은 각 언론사에 보낸 성명서에서 자신이 히말라야 투자펀드의 오너임을 확실히 밝힌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는 히말라야 투자펀드가 순수 국내자본임을 누차 강조했습니다. 중략...
뉴스 시청을 끝마친 후 소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분이 싱숭생숭한 탓인지 오늘 따라 그녀와 오붓한 시간을 만끽하고 싶었다.
***
한남동에 삼송그룹 경영진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접견실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김민용은 접견실에 나타난 경영진들에게 원탁 테이블에 앉을 것을 명했다.
직후 모두발언을 내뱉었다.
-이번달 말에 삼송전자 반도체 부문을 히말라야 투자그룹에 매각할 예정입니다. 그 전에 반도체 부문의 부동산 자산을 각 계열사 명의로 이전할 생각입니다.
그의 모두발언이 떨어지자 임원들이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더불어서 HP, 애플, 델 등의 컴퓨터 업체와 지포스, ATI 등의 그래픽 업체, 핸드폰, it 업체에 메모리 반도체와 플래쉬 메모리를 헐값에 덤핑할 계획입니다. 선수금을 듬뿍 받는 조건으로.
그의 폭탄발언이 쏟아지자 좌중이 벌집을 들쑤신 듯 소란스러워졌다.
그때, 김학수 부회장이 결연한 태도로 반대의견을 표명했다.
-덤핑공세로 현금을 단시일 내에 확보한다면 히말라야 측의 격렬한 반발을 살 공산이 높습니다. 상도의상 부도덕한 일입니다.
김학수의 논리정연한 반박을 시작으로 장내에 배석한 임원들이 차례로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회장님. 이 일을 기화로 히말라야 투자그룹이 매각 대금을 대폭 삭감할 가능성마저 상존합니다.
-덤핑공세로 대량의 현금을 확보하는 건 득 보다 실이 더 많을 겁니다.
민용은 원로 가신들의 격렬한 반발에 직면하자 절로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노친네들이 하나부터 열까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구만. 저것들을 반드시 짤라버릴테다!'
허나, 원로 가신들은 대다수 정치권에 든든한 연줄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원로 가신들의 좌장격인 김학수 부회장은 노무연 대통령의 고등학교 선배였다.
김민용이 함부로 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탓일까? 민용은 한발 물러서는 스탠스를 취했다.
김학수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함이었다.
"좋습니다. 그럼 반도체 부문이 보유한 부동산 자산을 삼송그룹 각 계열사 명의로 이전하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읍시다."
그가 휴전안을 내놓자 김학수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화답했다.
"그 정도면 상대방의 반발을 그리 많이 사지 않을 겁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회장님."
김학수가 그리 답하자 좌중의 원로들이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 의견을 표명했다.
김민용은 회의를 끝마친 후 심복인 오재열 비서실장을 서재로 불러들였다.
오재열의 손에는 두툼한 서류가 들려있었다.
"손에 든게 뭐지?"
"반도체 부문이 보유한 부동산 자산 목록입니다."
"골치아프니까 구두로 보고해."
"네. 회장님."
"반도체 부문은 강남 인근의 40층 빌딩과 경기도 지역의 토지를 10만평 가량 보유하고 있습니다."
"시세를 말해봐."
"모두 합해 2조원 내외의 시세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강남 쪽 빌딩은 오라클 인베스트 쪽으로 명의를 이전하고 경기도 토지는 1만평씩 쪼개서 각 계열사 별로 배정해."
"말씀대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
상암동 드림 케이블 본사 회장실.
김앤박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인 박변이 사무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삼송전자 반도체 부문의 인수협상을 총 지휘하는 인물이었다.
박변이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반도체 부문이 보유한 부동산들의 명의가 삼송그룹 각 계열사들과 김민용 회장의 페이퍼 컴퍼니 명의로 속속 이전되고 있습니다."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다.
내가 김민용의 입장이래도 마찬가지로 행동했을 거다.
어차피 그 정도는 감수할 생각이었다.
"그 문제는 신경쓰지 말고, 인수계약 체결에 만전을 기하세요."
그러자 박변이 한결 편해진 얼굴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인수체결 현장에 히말라야 전자의 김동진 사장을 보낼테니까 둘이 사전에 입을 맞추세요."
"김 사장님에게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계약금 조로 2조원, 중도금 조로 8조원, 잔금으로 7조원을 지급하는 인수계약서를 작성하십시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나가보세요."
"네. 회장님."
***
이명복 서울시장은 차기 대권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그는 시민들의 피부에 와닿는 획기적인 교통요금 정책과 청개천 복원, 은평 뉴타운 건설 사업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명복은 지하철 요금과 버스 요금을 따로따로 내는 현실에, 많은 시민들이 불만을 갖고 있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교통요금을 획기적으로 낮출 경우 자신의 지지도가 폭등할 것으로 직감했다.
명복의 동물적인 본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교통요금을 획기적으로 인하하는 방안을 서울시 교통 공무원들에게 날마다 독촉했다.
그러기를 얼마 후, 박모 교통 과장이 제출한 혁신적인 교통요금 인하 방안을 전격적으로 시행했다.
그 유명한 지하철과 버스의 환승인하 요금체계였다.
기존의 따로따로 부과되는 요금체계를 획기적으로 일원화하는 정책이었다.
물론 그 덕분에 지하철과 버스업체의 적자가 심화됐지만 이명복은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가 원하는건 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였다.
버스와 지하철 업체의 적자는 안중에도 없었다.
오로지 표만 얻으면 그만이었다.
환승인하 요금제가 시행된 이후 이명복의 지지도는 수직상승했다.
한국당의 박선미 대표를 턱밑까지 추격하는 수준이었다.
허나, 명복은 이 정도에서 만족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오래전부터 생각한 청계천 복원 공사에 서울시의 재정을 대대적으로 투입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무렵, 한국당의 소장파 리더인 정승하 의원이 서울시장 관사를 방문했다.
명복은 눈 앞에 나타난 정승하에게 자연스런 하대를 내뱉었다.
그들은 대학 선후배 사이였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나를 찾아왔지?"
"선배님에게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게 뭔데?"
정승하가 앓는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실탄이 많이 부족합니다. 선배님."
"저번에 준 50억은 어쩌고?"
"벌써 다 썼죠."
"그 많은 돈을 술값으로 쓴거야?"
"선배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개자식들이 오입질에 환장한거."
"쯧쯧..."
이명복은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돈 없다."
"돈을 풀어야 당내 영향력을 유지하는 겁니다. 박선미 그년한테 줄을 대려는 놈팽이들이 한둘이 아니라고요."
"사이비 교주한테 환장한 미친년이 뭐가 볼게 있다고."
"그래도 그년 이름만 대면 보수적인 시민들이 몰표를 던지는 게 현실입니다."
"이래서 한국의 국민수준이 개나 소, 돼지라고 업신여김을 받는거야."
"여튼 선배님. 돈 보따리 좀 풀어주세요."
"나, 돈 없다. 그러니까 헛소리 그만하고 이만 돌아가."
"선배님이 지하철 10호선을 민자사업으로 돌리는 댓가로, 맥카리 사모펀드에 수천억을 받아먹었다는 소문이 증권가 찌라시에 나돌고 있다고요!"
"목소리 낮춰. 남들이 들으면 어쩌려구 그래."
"암튼 선배님은 무조건 청와대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이 상태로 서울시장직에서 물러나시면 여당, 야당 할거없이 선배님을 잡아먹으려 들거라고요."
명복의 이맛살이 잔뜩 찌푸려졌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결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해외 계좌 하나를 터줄테니까 집에서 얌전히 기다려."
"얼마나 줄겁니까?"
"120억 정도를 줄테니까 그 돈으로 의원들을 섭외하라고."
"당연히 그래야죠. 그럼 저만 믿으십쇼. 선배님. 하하..."
***
차애라는 박선미의 의자매였다.
원래 그녀는 차택수의 막내 딸로서 어린 시절부터 선미와 자매처럼 붙어지낸 여성이었다.
그녀는 선미를 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만들 야심에 불타올랐다.
그러던 어느날 이태수가 히말라야 투자그룹의 실제 오너라는 뉴스를 접하게 되었다.
차애라는 말보다 행동이 빠른 여성이었다.
그런 탓으로 뉴스를 접하자마자 수행비서를 대동한 채 상암동 드림 케이블 방송국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박선미의 이름을 팔기 위함이었다.
그 댓가로 정치자금을 듬뿍 받아낼 속셈이었다.
차애라는 당당한 태도로 비서실로 올라갔다.
그후 자신의 정체를 큰 목소리로 알렸다.
"한국당의 박선미 대표님의 의자매인 차애라에요. 회장님을 만나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주한수 실장은 심드렁한 얼굴로 그녀의 위아래를 살핀 뒤 냉랭한 어조를 토해냈다.
"죄송하지만 회장님은 선약이 없으시면 만나실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시죠."
"지금 감히 박선미 대표님을 무시하는 건가요?"
"그건 내 알 바 아니니까 어서 물러가십시오. 이런 식으로 업무를 방해하시면 경호원들을 부르겠습니다."
순간 차애라가 움찔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불만가득한 언사를 내뱉었다.
"두고봐요. 오늘의 일을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에요!"
그녀는 볼멘 목소리를 토해낸 뒤 장내에서 도망치듯 몸을 숨겼다.
< 히말라야 투자그룹 1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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