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세계 최고 재벌 2 >
주한수 비서실장은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예전보다 업무량이 열배 이상 폭증한 까닭이었다.
포브스지가 이태수 회장을 전 세계 최고 재벌로 공인한 이후 대학교와 관공서 등에서 날마다 강연 요청이 물밀 듯이 쇄도한 탓이었다.
솔직히 그 정도면 주한수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옥석을 가려서 이태수에게 보고를 올리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허나, 대한민국 시민들은 태수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관변단체를 비롯한 수많은 복지 기관 종사자들이 날마다 상암동으로 벌떼처럼 몰려든 채 '이태수 회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생떼를 부린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전 세계의 내노라하는 사모펀드 관계자들도 틈만나면 상암동 드림 케이블 본사를 드나들며 주한수를 미치도록 피곤하게 만들었다.
도저히 그 혼자서 감당 못할 지경이었다.
결국 그는 비서실 인원 확충 방안을 이태수에게 보고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
회사 업무를 종료한 뒤 양재천변을 여유로이 산책할 즈음, 지근거리에서 나를 보필하던 주한수가 은근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회장님에게 긴히 청할 일이 있습니다."
"할 말이 뭐지?"
"비서실 확충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해봐."
"감사합니다."
녀석은 그리 화답한 뒤 심중의 속내를 차분히 밝혔다.
"최근 들어 국내외의 수많은 단체에서 회장님에게 면담을 신청하고 있습니다."
익히 아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대다수 회장님에게 기부금을 요청하거나 아니면 투자를 제안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런 이유로 저를 비롯한 비서실 직원들이 자기 할 일을 제대로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상대하느라 중요한 회사 업무가 뒷전으로 밀려나는 거죠."
"비서실 직원들이 그리 부족한가?"
"솔직히 그렇습니다. 회장님."
"총 몇명이지?"
"경호팀 요원들을 포함해서 15명입니다."
"경호원들의 숫자를 차감하면 주 실장을 포함해서 5명이라는 말이군."
"맞습니다. 회장님."
생각해보니 비서실의 규모가 너무 작았다.
예전에는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전혀 달랐다.
포브스지가 전 세계 최고의 억만장자라고 나를 대서특필했기 때문이다.
"확충 규모를 말해봐."
"최소 7명 이상의 비서들이 필요합니다."
나는 조직의 슬림화를 추구했다.
내 돈을 날로먹는 월급 루팡들을 지극히 경계한 탓이었다.
"너무 많은 인원 아닌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회장님."
한수가 당치도 않다는 얼굴로 고개를 격하게 저었다.
"두세명 정도만 확충해도 되잖아?"
"관변단체와 복지기관, 해외 사모펀드 관계자들을 상대하려면 7명도 부족한 형편입니다. 회장님."
"그냥 싸그리 돌려보내!"
"매정하게 그들을 돌려보내면 회장님의 평판에 악영향을 끼칠 겁니다."
한수는 내 심모원려를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1년 365일을 나와 함께한 탓이다.
"그들을 정중히 상대할 비서실 요원들의 확충이 절실합니다. 그러니 7명 안팎을 비서실에 보강해 주십시오."
녀석은 마음을 단단히 먹은 모양새였다.
얼굴 가득 결연한 표정을 지은 채 나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한수의 청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나름 이유가 타당했기 때문이다.
"이번 기회에 주말 동안 나를 전담할 수행비서도 같이 뽑아."
순간 녀석의 얼굴 가득 숨길수 없는 기쁨이 격하게 드러났다.
"이제 당신도 주말 동안 가족들과 휴일을 즐기라고. 그런 차원에서 배려해 준 거야."
"고맙습니다. 회장님."
한수가 감격한 얼굴로 나를 향해 허리를 깊숙이 조아렸다.
***
상암동 드림 케이블 본사 회장실로 들어서자 주한수와 20대 중후반의 젊은 남자가 나를 맞이했다.
한수는 옆에 서 있는 젊은 친구를 손짓하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 주말 동안 회장님을 전담할 민용철 수행비섭니다."
민용철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비서실에서 몇년 동안 근무했지?"
녀석이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햇수로 3년찹니다. 회장님!"
군기가 바짝 든 모양새였다.
"마음에 든다. 악수나 하자."
"감사합니다. 회장님."
녀석은 허리를 반으로 접으며 내 오른손을 두손으로 공손히 마주잡았다.
용철을 내보낸 뒤 주한수에게 넌지시 말했다.
"입단속을 철저히 시켜."
"염려마십시오. 이미 단단히 주의를 주었습니다."
"민용철의 출신성분을 말해봐."
"학교는 연대 국문과를 졸업했고 미국 조지타운대에서 3년 동안 유학한 경험이 있습니다."
"내 대학 후배군. 일부러 저 친구를 낙점한 건가?"
한수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뒤 넌지시 입을 열었다.
"연대 관계자들이 요즘 거의 날마다 회사에 찾아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연대에 어느 정도 성의를 보이시죠?"
연대 재단 측은 내가 하버드 대학에 6천억 상당을 기부했다는 소식을 접한 이후 기부금을 요구하고 있었다.
학을 뗄 정도였다. 그렇다고, 연대를 매정하게 모른척 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누가 뭐래도 연대는 내 모교였기 때문이다.
"연대 총장과 약속을 잡아."
"잘 생각하셨습니다. 회장님."
다음날.
수행원들을 대동한 채 신촌 인근의 일식당에 도착하자 연대 관계자들이 나를 맞이했다.
그들은 나를 뒷편의 룸으로 안내했다.
룸으로 들어서자 나이지긋한 연대 총장이 나를 반겼다.
그는 친근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소문대로 엄청난 동안이십니다. 회장님."
그의 말대로 내 외모는 30대를 연상시킬 정도였다.
몸관리에 만전을 다한 탓이었다.
"과찬이십니다. 총장님. 하하..."
환한 웃음을 내비치며 자리에 착석하자 총장도 뒤따라 제 자리에 앉았다.
우리는 회와 튀김을 안주삼아 정종을 물처럼 들이켰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태진우 총장이 은근한 얼굴로 넌지시 운을 뗐다.
"아시다시피 재단 형편이 많이 어렵습니다. 학생들에게 디지털 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인텔리전스 환경을 제공하고 싶어도 그럴수가 없는 거죠."
"인텔리전스 설비가 완비된 건물을 준공하려는 건가요?"
태진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우리 연대가 21세기 디지털 문화를 선도하기 위해서는 인텔리전스 환경이 구축된 강의실이 필수적입니다."
인텔리전스 건물은 최첨단 기술이 집약된 탓에 돈을 억수로 많이 잡아먹었다.
일반 빌딩 보다 평당 건축비가 두세배 이상 더 많이 소요된 것이다.
연대는 돈잡아먹는 건축물을 세우기 위해 혈안이 된 상황이었다.
"차라리 그거 보다는 학생들의 장학금을 확충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그러자 태진우가 격하게 고개를 저으며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이미 장학금 제도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학교에 가장 급한 건 장학금 보다는 최첨단 디지털 환경을 완비한 강의실 건물입니다."
그는 완강한 태도를 노골적으로 내비쳤다.
말이 안통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동문 선배로서 학교 측에 기부금을 전달해 주십시오. 하버드 대학처럼!"
태 총장은 '하버드 대학'이란 단어에 특히 힘을 줬다.
그들처럼 연대에도 거액의 기부금을 배려해 달라는 무언의 요구였다.
나는 하버드에서 만난 인연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반면 연대는 나에게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소액을 연대에 기부하고 싶었지만, 보는 눈들이 너무 많았다.
결국 천억 정도를 연대에 기부하기로 마음먹었다.
"연대 측에 1천억 정도를 기부해 드리죠. 대신 이같은 사실을 언론사에 대대적으로 발표해 주십시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동문 후배들을 위해 이렇게 좋은 일을 하시는데, 당연히 언론사에 대대적으로 알려야지요. 우하하하...!"
태 총장의 입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
외자은행 을지로 본사 컨퍼런스홀.
칼라일 투자그룹의 체이스 회장이 당당한 걸음걸이로 연단에 올라섰다.
그는 장내에 운집한 외자은행 주주들을 향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열변을 토했다.
"그동안 외자은행은 주주들에게 제대로 된 주식배당액을 지불하지 않았습니다."
순간 장내에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짝짝짝짝짝짝짝...!!
그는 박수소리가 잦아들자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이제 외자은행은 주주들에게 정당한 주식배당액을 지불해야 합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장내에 격렬한 박수가 터져나왔다.
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
체이스는 박수갈채를 온몸으로 만끽한 뒤 재차 말을 이었다.
"오늘 저는 칼라일 투자그룹 명의로 외자은행의 주식배당액을 기존보다 300%인상하는 안건을 주총에 제출했습니다. 그러니 주주 여러분들은 한분도 빠짐없이 안건을 찬성해 주십시오!"
순간 장내에 떠나갈듯한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길게 메아리쳤다.
***
회사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뒤 회장실로 들어서자마자 잠이 비오듯 쏟아졌다.
춘삼월의 봄날이라 그런지 춘곤증이 기승을 부리는 모양이었다.
회장실 뒤편의 휴게실에서 2시간 정도 낮잠을 청하자 그제서야 춘곤증을 이겨낼수 있었다.
나름 말짱해진 정신으로 책상에 앉을 찰나 7명에 달하는 비서실 신입들이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거의 대다수 20대 초중반의 남자들이었다.
여자는 한 명도 없었다.
녀석들은 군기가 바짝 든 얼굴로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그들에게 목례를 취하며 나직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만나서 반갑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
그리 화답하며 녀석들과 일일이 악수를 교환했다.
그러자 하나같이 감격한 얼굴로 나를 향해 재차 허리를 깊숙이 조아렸다.
주한수가 나름 교육을 잘 시킨 모양이었다.
녀석들을 내보낸 뒤 한수에게 천만원권 수표 다섯장을 전달했다.
"그 돈으로 비서실 애들 회식이나 시켜주라고."
"고맙습니다. 회장님."
한수를 내보낸 뒤 김앤박 로펌의 김성우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간만에 그와 클레이 사격을 즐기기 위함이었다.
***
히말라야전자의 김동진 대표이사는 수원과 평택, 천안 등지의 반도체 공장을 두루 시찰한 뒤 상암동 드림 케이블 본사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언제 어느때, 이태수가 그를 호출할지 알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23층에 위치한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수행비서에게 지시를 내렸다.
"주한수 실장에게 회장님의 동정을 물어봐."
"알겠습니다. 대표님."
김동진은 수행비서를 내보낸 뒤 10여평 내외의 사무실 건물을 휘 둘러보았다.
대 히말라야전자 CEO의 사무실 치고는 무척 초라한 규모였다.
허나, 동진은 감히 불만을 제기할 수 없었다.
이태수의 불같은 성미를 잘 아는 탓이었다.
'이 회장은 남들한테는 돈을 잘 쓰면서 부하 직원들에겐 짠돌이처럼 군단 말이지. 그 점만 고치면 참 좋을텐데.'
그는 불만스런 얼굴로 속옛말을 토해낸 뒤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종합 일간지들을 차분히 읽어내려갔다.
동진은 사회면 일면을 장식한 이태수의 기사에 시선을 고정했다.
<히말라야 투자그룹의 이태수 회장! 모교인 연대에 1천억 기부!>
그의 입가에 씁쓸한 고소가 내걸렸다.
동진 역시 연대 출신이었다.
그런 탓으로 히말라야전자의 대표이사로 낙점을 받았다.
허나, 그는 감히 태수한테 선배 노릇을 할 수 없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그런 티를 냈다간 그날부로 해고를 당할 것임을 잘 아는 탓이었다.
'며칠 뒤면 연대 총동문회가 열릴텐데... 거기에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동진은 그 점이 고민이었다.
이태수를 그 곳에서 마주치는 게 꺼려졌기 때문이다.
그때, 수행비서가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동진이 반색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회장님의 동정을 파악했나?"
"네. 대표님."
"이번주 연대 총동문회에 회장님이 가시는 건가?"
"주 실장님의 말씀으로는 총동문회에 참석하실 가능성이 높다고 하더군요."
순간 동진의 얼굴이 보기좋게 일그러졌다.
그는 태수가 총동문회에 참석하지 않기를 남모르게 기원했다.
동문회에서 그를 만나면 어색한 광경을 연출할 것이 불보듯 훤한 탓이었다.
후배로 대하자니 후환이 두려웠고, 그렇다고 동문들이 다 보는 앞에서 학교 후배에게 굽신대는 장면을 연출하는 것도 무척 꺼려졌다.
결국 답은 하나였다.
'에라이 모르겠다. 이번 동문회는 무조건 빠지자. 그 길이 최선이야.'
그제서야 동진은 속이 편해졌다.
***
김문정은 외식 프랜차이즈 업체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고시 낭인으로 거의 10년 동안 인생을 허비한 탓에 변변한 일자리를 잡을 기회 자체를 오래전에 상실한 탓이다.
그는 프랜차이즈 업체에도 지인 소개로 가까스로 입사한 케이스였다.
그런 연유로 남들보다 더욱 열심히 영업을 뛰고 있었다.
문정은 고단한 하루일과를 끝마친 뒤 허름한 연립주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와이프의 잔소리를 귓등으로 흘리며 늦은 저녁 식사를 하는 한편 9시 TV 뉴스에 이목을 집중했다.
-히말라야 투자그룹의 이태수 회장이 모교인 연대에 1천억대의 기부금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중략...
TV에서 이태수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문정의 얼굴에 참담한 표정이 그려졌다.
'이럴줄 알았다면 그 인간의 바짓가랭이를 물고 늘어지는 거였는데...!'
문정은 태수가 두번 다시 만나기 힘든 어마어마한 귀인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허나, 그는 자신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될수 있는 인연을 제 발로 걷어찼다.
태수를 별 볼 일 없는 나이 많은 동기형 정도로 취급한 것이다.
'시발. 미친척하고 이태수에게 연락을 해볼까?'
그러나 문정의 얼굴에 금세 부정적인 기류가 형성됐다.
'전 세계 최고의 재벌에게 무슨 재주로 연락을 한단 말인가? 버스는 이미 오래전에 떠나 버렸다구!'
그는 회한에 깃든 눈빛을 내비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전 세계 최고 재벌 2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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