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벌백계(一罰百戒) 1 >
강남 인근의 고급 주택가에 김동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동진의 곁에는 양복 차림의 건장한 남자들이 잔뜩 진을 치고 있었다.
그런 탓일까? 그는 당당한 태도로 주변을 휘 둘러본 뒤 남자들과 함께 집안으로 들어갔다.
김동진 일행을 봉고차 안에서 유심히 살피던 강태호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개새끼가 혹을 주렁주렁 매달고 나타났네."
그는 혼잣말을 나직이 내뱉은 후 어딘가로 급히 전화를 걸었다.
***
가평 사격장에서 클레이 사격을 만끽할 즈음 하수용이 면전에 나타났다.
"김동진이 나타났습니다."
"어디에 있지?"
"강남에 있는 자택입니다."
"그럼 지금 당장 잡아들여."
하수용이 곤혹스런 얼굴로 입을 열었다.
"놈의 주변에 병풍들이 한트럭입니다."
"애들을 동원해서 처리하면 되잖아?"
"그게 생각만큼 쉽지가 않습니다."
"이유가 뭔데?"
"김동진 주변에 진을 친 인물들의 면면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명복이 보낸 사람들인가?"
"아무래도 그런거 같습니다."
"무력을 행사하기가 쉽지 않겠군."
수용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알아서 할테니 하 이사는 이번 일에서 빠져."
그러자 녀석이 걱정스런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그만 가봐."
나가라는 손짓을 보내자, 수용이 나를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인 뒤 장내에서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그날 밤.
서초동 인근의 청해 일식당으로 들어서자 매니저가 나를 맞이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회장님."
"김태섭 검사장은?"
"룸에 계십니다."
"그곳으로 안내해."
"예. 회장님."
룸 안으로 들어서자 김태섭이 몸을 벌떡 일으키며 나를 향해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그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보낸 후 상석에 자리를 잡았다.
태섭은 빈잔에 정종을 공손히 따른 후 나에게 건넸다.
정종을 한입 가득 들이킨 뒤 그에게 용건을 꺼냈다.
"김동진의 주변에 있는 놈들이 누구죠?"
"사진을 분석한 결과 대다수 전직 기관원 출신이더군요."
"기관원 출신이라면 총기를 휴대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겠군요."
태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후 걱정스런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무력으로 일을 해결할 시점은 지난거 같습니다. 더군다나 이명복이 당내경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의 입에서 은근한 어조가 길게 흘러나왔다.
"이명복이 당내 경선을 통과한다면 대통령이 될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집니다. 지리멸렬한 여당은 이명복의 적수가 아닙니다. 회장님."
"이명복에게 고개를 숙이라는 말입니까?"
"그게 아니라 협상을 하시라는 말씀입니다."
"그 말이 그말 아닙니까? 이명복은 내 돈을 원하고 있어요."
"별 볼 일 없는 도둑놈을 잡자고 이명복에게 고개를 숙일 수는 없습니다."
태섭이 걱정이 그득한 얼굴로 재차 입을 열었다.
"이명복은 틀림없이 김동진을 이용해서 회장님을 압박할 겁니다."
"나는 꿇릴게 전혀 없어요. 이명복이 대통령이 되든 말든 내 알 바 아닙니다."
"내 목표는 오로지 김동진의 모가지일 뿐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그놈을 반드시 내 앞에 데리고 오세요."
태섭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인상 쓰지 마시고 내 명령을 이행할 방안이나 마련하세요."
그러자 녀석의 입에서 볼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회장님. 상황이 여의치 않습니다. 김동진을 법적으로 처벌하려면 검찰총장의 재가(裁可)가 필요합니다!"
"아직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시는군요. 내가 원하는건 말그대로 김동진의 모가집니다."
태섭이 핼쑥해진 얼굴로 외쳤다.
"정말 그놈을 죽여버릴 작정이십니까?"
"김동진은 내 돈을 수천억이나 해쳐먹었을 뿐만 아니라, 감히 나를 능멸했어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중죄를 범한 겁니다."
"그런 연유로 놈을 일벌백계(一罰百戒)하는 차원에서 저승으로 보내드릴 생각입니다. 그래야 내 위신이 바로 설거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녀석이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완강히 저었다.
"죄송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김동진에게 함부로 손을 대면 이명복의 진노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명복이 그렇게 두렵습니까?"
"솔직히 그렇습니다. 회장님."
"당신 앞에 앉아 있는 나는 별로 무섭지 않은 모양이지요?"
순간 녀석의 얼굴에 어색한 표정이 드리워졌다.
태섭은 그동안 안본새에 간덩이가 많이 부은거 같았다.
나를 별로 무서워하지 않는 모양새였다.
"대한민국 차기 대통령이 유력한 이명복만 눈에 들어오는 모양이군요."
녀석에게 힐난조의 어투를 내뱉자 쓴웃음을 지으며 정종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세간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일평생을 좌우한다'라는 격언이."
태섭의 두눈을 정면으로 직시했다.
그러자 녀석이 움찔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말의 의미를 마음 속 깊이 되새겨 보세요."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옆자리에 동승한 주한수 실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명복에게 만나자는 전언을 넣어."
주한수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뒤 입가에 담배를 물었다.
그러자 한수가 재빨리 라이터불을 붙였다.
자욱한 담배 연기를 훅 내뿜자 녀석이 우려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명복과 담판을 지을 생각이십니까?"
"당신은 신경쓰지마라."
그리 말하며 두눈을 지그시 내리감았다.
***
힐튼호텔 스위트룸으로 들어서자 경호원들이 나를 막아섰다.
그들은 금속탐지기를 이용해 내 전신을 스캔한 뒤 룸 안으로 안내했다.
이명복은 가죽 의자에 거만한 자세로 앉은 채 나에게 입을 열었다.
"소문대로 엄청난 동안이시군요. 하하..."
그리 말하며 담배 연기를 내 쪽으로 훅 내뿜었다.
녀석은 나를 아랫사람 정도로 취급하고 있었다.
맞은편 의자에 앉은 뒤 단도직입적인 언사를 내뱉었다.
"김동진에게 파견한 경호원들을 거둬 주십시오."
그러자 명복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이 회장."
"김동진은 회삿돈을 2천억이나 횡령한 도둑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말이 사실이라면 검찰에 고발하면 그만 아닙니까?"
"저는 한국의 사법제도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놀랍군요. 전 세계 최고의 재벌이신 회장님께서 대한민국의 법치주의를 부정하는 말씀을 하시다니."
이명복은 두눈 가득 끈적한 탐욕을 내비치며 속옛말을 꺼냈다.
"아시다시피 대선은 막대한 선거자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회장님이 나를 좀 도와주십시오."
"미안하지만 저는 이 후보님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할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습니다."
이명복이 진노한 얼굴로 나를 맹렬히 노려봤다.
직후 그의 입에서 성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말씀을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얼마든지 책임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김동진의 주변에서 경호원들을 물려 주십시오."
순간 이명복이 분노한 얼굴로 책상 위에 놓여진 유리 재떨이를 내 뒤편에 위치한 문가로 거칠게 내던졌다.
쨍그렁!
"그런 개소리를 할거면 지금 당장 내 앞에서 사라지라고!"
명복은 이성을 상실한 얼굴로 나를 손가락질하며 노발대발했다.
이제 내가 놈에게 선전포고를 가할 시점이었다.
"내 앞에서 주제파악 못하고 함부로 나대시면 대통령이고 나발이고, 그날부로 끝장나는 겁니다. 이 후보님."
"뭐,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거냐? 이 개자식아!"
명복은 온몸을 부들거리며 나를 매섭게 노려봤다.
"당신이 거액의 회사자금을 횡령한 범죄자를 보호하고 있다고 언론에 제보하면 어떻게 될까요?"
"조중동은 내 말이라면 껌벅 죽습니다. 연간 수천억대의 광고를 집행하기 때문이죠. 더구나 그들에겐 박선미라는 대안이 있어요."
녀석의 얼굴에 사색이 맴돌았다.
말귀를 알아먹는 모양새였다.
"긴말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당장 김동진 주변에서 사람을 물리세요. 이건 부탁이 아니고 명령입니다."
명복이 온몸을 들썩였다.
조중동을 무서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만약 내 요구를 끝내 거부한다면 조중동을 움직여서 당신을 정치판에서 영원히 매장해 버릴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스위트룸을 박차고 나왔다.
다음날.
상암동 드림 케이블 본사 회장실.
회사에서 업무에 매진할 무렵 주한수가 면전에 나타났다.
"강태호 사장의 연락입니다."
고개를 끄덕이자 한수가 내 손에 핸드폰을 올려놓았다.
폰을 귓가에 가져가자 태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동진을 가드하던 병풍들이 썰물처럼 사라졌습니다. 회장님.
-지금 당장 놈을 제압해.
-놈들이 갑자기 사라진게 너무 이상합니다. 혹시 함정이 아닐까요?
-신경쓰지말고 김동진을 잡아서 인천 창고로 끌고와.
-넵. 회장님.
***
김동진의 자택에 강태호 일행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곤한 잠에 취한 동진을 손쉽게 제압한 뒤 봉고차에 짐짝처럼 밀어넣었다.
강태호는 인천 항만에 위치한 컨테이너 박스에 동진을 밀어넣었다.
직후 수하들에게 매서운 일갈을 내뱉었다.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패!"
"넵. 형님!"
잠시 후, 장내에 애절한 곡소리가 쉼없이 울려퍼졌다.
-크아아아아아악...!!
***
가평 인근의 클레이 사격장으로 강태호를 불러들였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고개를 끄덕인 뒤 허공에 솟구친 원반을 목표로 6연발 라이플의 방아쇠를 힘차게 잡아당겼다.
탕탕탕탕탕탕!
사격을 끝마친 뒤 주한수에게 라이플을 건넸다.
직후 면전에 공손히 시립한 태호에게 넌지시 운을 뗐다.
"김태섭 검사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군."
그러자 녀석이 은근한 얼굴로 물었다.
"이유를 알수 있을까요?"
"별 볼 일 없는 양아치 주제에 너무 몸을 사린단 말이지."
태호는 눈치가 빨랐다.
그런 탓인지 내 말의 진의를 200% 알아 들었다.
"이번 기회에 김태섭의 손에 직접 피를 묻히게, 하는게 어떻겠습니까?"
녀석은 이 방면의 전문가답게 시의적절한 답안을 제시했다.
"어떤 방법으로?"
"김태섭이 살해교사 명령을 내리는 걸 동영상으로 녹화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놈의 눈 앞에서 김동진이 죽어가는 광경도 촬영하는 거죠."
쓸만한 방법이었다.
"몸을 사리는 조직원들을 그런 식으로 곧잘 단도리 칩니다. 조직과 보스에 대한 충성심을 배가시키는 일석이조의 방법이거든요."
"자살을 가장해서 김동진을 처리해. 그리고 김태섭도 현장에 데려오고."
"넵. 회장님."
***
수도권 인근의 야산으로 들어서자 강태호가 나를 맞이했다.
녀석은 주변에 정차한 승용차로 나를 안내했다.
차량 안을 살피자 운전석에서 죽은 듯이 잠에 취한 김동진이 보였다.
"수면제를 복용시킨 건가?"
"그렇습니다. 회장님."
"사체를 검시하면 수면제 성분이 검출될텐데?"
"번개탄의 이산화가스가 수면제 성분을 거의 모두 없앨 겁니다."
"확실한가?"
"이 방법으로 여러건의 사건을 처리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니 심려치 마십시오. 회장님."
"좋아. 그건 그렇고, 김태섭이 보이지 않는군."
그러자 태호가 뒤편의 창고를 손짓하며 입을 열었다.
"창고에 있습니다."
"그곳으로 가지."
"네. 회장님."
창고 안에 들어가자 초조한 얼굴의 김태섭이 보였다.
녀석은 나를 보자 정중히 인사를 해왔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내가 주는 메모지에 써있는 대로 강태호에게 지시를 내리세요."
그리 말하며 메모지 한장을 그에게 내밀었다.
메모지를 살핀 태섭이 경악한 얼굴로 외쳤다.
"죄송하지만 회장님의 명을 받들수 없습니다!"
예상한 답변이었다.
곧바로 강태호에게 지시를 내렸다.
"녀석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주도록!"
내 말이 끝나자마자 태호의 묵직한 주먹이 태섭의 전신에 우박처럼 떨어져내렸다.
퍼어억! 퍼억! 퍽퍽퍽퍽...!!
태섭의 입에서 요란한 비명이 쏟아져 나왔다.
-으아악...! 그만...제발....크아악...!
태호의 매서운 주먹을 온몸으로 영접한 태섭이 맨바닥을 엉금엉금 기어다니며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죄송합...니다...회...장님....그러니...제발....한번만...저를...용서...해...주십...시오...."
녀석은 피거품을 게워내며 나를 애처롭게 올려다봤다.
태섭의 얼굴을 구둣발로 잘근잘근 짓이기며 나직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당신을 검사장으로 만드려고 들인 돈이 백억이 넘어요. 그런데 왜, 내 명령을 순순히 이행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녀석이 내 발밑에서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김태섭씨는 내가 기라면 기고, 짖으라면 짖어야 하는 강아지에 지나지 않아요. 그러라고 당신에게 검사장 타이틀을 달아준 거에요."
놈의 몸부림이 더욱 격렬해졌다.
"태섭씨는 간과 쓸개를 모두 내던지세요. 오로지 내 명령을 순순히 이행하겠다는 자세를 보이시라고요."
"그렇게만 하시면 국회의원 배지도 달아드릴테니까."
그제서야 태섭의 격한 몸부림이 진정됐다.
이제 내 요구를 전달할 차례였다.
"메모지에 적힌대로 강 사장에게 명령을 내리세요. 그러시면 됩니다."
그 말을 끝으로 장내를 유유히 빠져나왔다.
그날 밤.
르네상스 빌딩의 펜트하우스로 들어서자 김명철이 내 앞에 나타났다.
"오셨습니까. 형님."
"검사들을 전부 내보내."
"안그래도 이미 출입을 금지했습니다."
"강태호가 나타나면 룸으로 데리고 와."
"네. 형님."
룸 안에서 발렌타인을 물처럼 들이킬 무렵, 태호가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은 나를 향해 허리를 반으로 접으며 입을 열었다.
"김태섭이 살인교사를 사주하는 장면을 녹화했습니다."
태호는 그리 말하며 USB 메모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김동진은?"
"하늘나라에 편히 보내드렸습니다."
"수고했어. 내 잔이나 한잔 받아."
"넵. 회장님."
얼음이 들어찬 글라스에 발렌타인을 듬뿍 따른 뒤 태호에게 건넸다.
녀석은 내가 따라준 발렌타인을 시원하게 원샷한 뒤 면전에 공손히 시립했다.
"히말라야전자 감사실장 타이틀을 달아줄테니까 회삿돈을 축내는 도둑놈들을 당신이 처리해."
태호가 감격한 얼굴로 화답했다.
"고맙습니다. 회장님."
녀석은 그동안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서 해결했다.
나름 믿을만한 놈이었다.
< 일벌백계(一罰百戒) 1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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