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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재벌 개망나니-144화 (69/200)

< 일벌백계(一罰百戒) 2 >

르네상스 빌딩 펜트하우스.

강태호의 입에서 은근한 어조가 흘러나왔다.

"계좌번호와 클라이언트 코드가 저장된 USB 메모리를 국면은행 비밀금고에 은닉한 모양입니다."

"비자금의 총액을 말해봐?"

"대략 1200억 가량입니다."

천억 내외의 자금이 허무하게 증발했다.

"이명복한테 얼마가 갔지?"

"대략 600억 안팎입니다. 나머지 400억은 가족 친지들에게 흘러간거 같습니다."

마음에 들지않는 놈이 내 피같은 돈을 600억이나 날로 먹었다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더러워졌다.

그렇지만 대선자금으로 흘러간 돈을 회수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동진의 가족과 친지들에게 흘러간 돈을 악착같이 회수해!"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그리고 국면은행 비밀 금고에서 USB를 반드시 찾아와."

그러자 태호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본인 확인이 되지 않으면 금고문을 열수 없습니다. 회장님."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그건 아니지만..."

녀석이 말끝을 흐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복안이 있으면 시원하게 말해봐."

그제서야 태호의 말문이 열렸다.

"은행장을 구워삶으면 일말의 가능성이 있을 듯 싶습니다."

"USB가 은닉된 지점이 어디지?"

"서초지점입니다."

이 일은 내가 직접 나서는 게 상책이었다.

태호가 책임지기에는 너무 거액이었다.

녀석이 큰돈을 보고 딴마음을 품지 말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테니 당신은 김동진 가족들에게 집중해."

"넵. 회장님."

태호를 내보낸 뒤 국면은행 행장인 이창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가지 부탁을 좀 합시다.

-말씀하십시오. 회장님.

-히말라야전자 김동진 대표가 회사의 기밀 자료를 국면은행 서초동 지점 금고에 은닉한 모양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그래서 말인데, 김동진의 개인금고를 오픈해 주십시오.

-김동진 대표님이 안계신가요?

-지금 행방불명 중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행장님에게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그 말씀이 정말입니까?

-사실입니다. 그러니 귀 은행측에서 협조를 좀 해주세요.

-죄송하지만 그건 힘들거 같습니다. 법적으로 본인확인이 되지 않으면 금고문을 개방할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하던 답변이었다.

-전화상으로 말을 길게 하는 것도 그러니까, 내일 저녁에 식사나 같이합시다.

그러자 수화기에서 반색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회장님의 존안을 뵐수 있다니 진심으로 영광스러울 따름입니다. 헤헤헤...

국면 은행장은 전 세계 최고 재벌과 식사를 같이한다는 사실에 많이 들뜬 모양새였다.

-그럼 내일 저녁 7시에 서초동에 있는 청해 일식당에서 봅시다.

-네. 회장님. 감사합니다.

다음날, 서초동 청해 일식당.

룸 안으로 들어서자 국면은행장이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키며 나를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그의 어깨를 토닥인 뒤 상석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정종과 회를 즐기며 이런저런 잡담을 길게 늘어놓았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자 이창재 행장에게 넌지시 운을 뗐다.

"우리 히말라야 투자그룹이 귀 은행에 예치한 자금이 총 얼마죠?"

그러자 이창재가 공손한 얼굴로 답변했다.

"모두 합해 14조원 가량입니다. 회장님."

"귀 은행의 예치금 총액도 알려주십시오?"

"대략 87조원 내욉니다."

"일시에 14조원이 빠져나간다면 행장 자리가 위태롭겠군요."

비웃듯 그리 말하자 이창재가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그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를 알려주십시오."

"어제 전화상으로 말씀드렸다시피 국면은행 비밀금고에 김동진이 회사의 기밀자료를 은닉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건 바로 그겁니다."

그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곤혹스런 어조를 흘려보냈다.

"본인확인이 되지 않으면 금고문을 열수 없습니다. 회장님. 현행법이 그렇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죠. 김동진은 중국 정부에 반도체 기술을 유출한 산업 스파이에요. 지금 국정원에서 그놈을 추적 중에 있습니다."

순간 이창재가 경악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 말씀이 사실입니까?"

"틀림없는 진실입니다. 그러니 김동진의 금고를 오픈해 주십시오."

허나, 그는 여전히 미온적인 반응으로 일관했다.

"저도 그러고 싶지만 본인확인 절차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회장님."

뭔가 타협점이 필요했다.

"그럼 이렇게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말씀하십시오."

"행장님이 참관한 자리에서 금고를 오픈하는 겁니다."

그리 말하며 정종을 입안 가득 들이켰다.

직후 재차 말을 이었다.

"우리가 원하는 건 금고 안에 있는 USB 메모립니다. 그거 외에는 일체 손을 댈 생각이 없습니다."

"흠..."

그의 입에서 깊은 침음성이 새어나왔다.

그러기를 얼마 후, 진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정식으로 검찰에서 영장을 발부 받으시죠. 그리하시면 금고를 오픈해 드리겠습니다."

이창재는 말이 안통하는 작자였다.

일식당을 벗어나자마자 주한수에게 명을 내렸다.

"김동진을 산업스파이 혐의로 검찰에 고발해."

"그래도 되겠습니까? 회장님."

"영장을 발부받아야 금고문을 오픈할수 있어. 그래서 그런거야."

"그렇지만 김동진은 이미 죽었지 않습니까?"

한수의 말대로 동진은 저 세상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직 이용가치가 있었다.

"김태섭한테 연락해서 국면은행 서초지점의 압수수색 영장을 받아와!"

"알겠습니다. 회장님."

***

김태섭은 강태호에게 폭행을 당한 후유증으로 자택에서 요양 중이었다.

그런 태섭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통화를 끝마친 후 뭔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이 회장의 명령을 거부했다간 그날부로 죽은 목숨이야.'

태섭은 이태수를 가벼이 여긴 댓가로 혹독한 댓가를 몸소 체험했다.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게 상책이야.'

그는 마음을 정한 뒤 중부지검에 전화를 돌렸다.

테섭은 차장 검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압수수색 영장을 법원에 요청해.

-대상을 말씀해 주십시오.

-국면은행 서초동지점.

-사유가 뭔지요?

-히말라야전자의 김동진 대표이사가 중국 정부에 반도체 기술을 유출한 혐의.

태섭은 통화를 끝마친 뒤 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군 채 자신의 지난 날을 오롯이 반추했다.

태섭은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런 탓일까? 그는 어렸을 때부터 반드시 부자가 되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런 마음가짐이 빛을 발한 덕분인지 태섭은 학창시절 내내 전교 1등을 밥먹듯이 기록했다.

원래 그는 의대를 가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상 의대 진학은 꿈조차 꿀수 없었다.

결국 태섭은 울며겨자먹는 심경으로 법대에 입학한 후 사법고시에 올인했다.

그런 노력 탓에 대학교를 졸업할 무렵 사시에 합격하는 영광을 누렸다.

사법연수원에 입소한 태섭은 뜻 밖의 좌절을 맛봤다.

자신을 능가하는 공부머리를 타고난 괴물들이 지천에 널린 탓이었다.

결국 그는 사법연수원을 중하위권의 성적으로 졸업한 뒤 턱걸이로 검찰에 들어올수 있었다.

태섭은 타고난 물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부잣집 여식과 선을 본 뒤 그녀와 결혼식을 올렸다.

허나, 그의 복은 거기까지였다.

처갓집 덕을 볼 요량으로 외모와 학벌도 별 볼 일 없는 여자와 결혼을 했지만 돌아오는건 아무것도 없었다.

처갓집이 IMF의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결국 그는 아무 것도 가진거없는 박색(薄色)과 결혼을 한 꼴이었다.

그러나 이미 때가 한참 늦은 상황이었다.

박색인 와이프가 떡두꺼비 같은 아들 딸들을 주렁주렁 출산한 탓이었다.

태섭은 절망했다.

이혼을 하고 싶었지만 자식들이 눈에 밟혔다.

더구나 그는 검사였다.

이혼은 공직자에게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날마다 통음을 하며 일을 핑계삼아 집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바로 그 무렵, 이태수가 그의 인생에 나타났다.

그리고 오늘날, 그 덕분에 검사장 타이틀을 쟁취했을 뿐만 아니라 수백억 대의 부마저 손에 쥘수 있었다.

태수는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 동앗줄이었다.

'어차피 이 회장과 죽을 때까지 같이가야 한다. 몇대 맞았다고 계집애처럼 소심하게 행동하면 좋을게 없어.'

그는 마음을 단단히 먹은 뒤 주한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

드림 케이블 상암동 본사 회장실.

사무실 한켠에 놓여진 샌드백을 목표로 쉐도우 복싱에 매진할 무렵 주한수가 면전에 나타났다.

"김태섭 검사장이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왜?"

"회장님에게 사죄를 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개자식이 마음을 고쳐먹은 건가?"

"그런거 같습니다."

"들여보내."

"예. 회장님."

장내에 김태섭이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은 나를 보자마자 사무실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회장님."

녀석은 바닥에 얼굴을 바짝 붙인 채 사죄의 변을 토해냈다.

"당신 죄가 뭔데?"

넌지시 묻자 놈이 즉답했다.

"썩어빠진 정치인 나부랭이를 감히 회장님과 비교한 죕니다."

"지은 죄를 잘 아는구만."

"그러니 제발 저를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당신을 뭘 믿고?"

그리 말하며 창가로 걸어갔다.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O2 아레나의 아름다운 전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앞에는 수천여 명의 팬들이 음악방송을 참관하기 위해 길을 줄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때, 태섭의 피를 토하는 듯한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퍼졌다.

"제발! 저를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회장님!"

갸륵정성이었다.

"좋아. 이번 한번만 용서해주지."

그러자 녀석이 나를 올려다보며 감사의 변을 토해냈다.

"앞으로 회장님을 위해서 분골쇄신의 각오로 열심히 뛰겠습니다."

배운 놈답게 말주변이 화려했다.

"강 사장에게 억하심정을 품지마라. 내가 시킨 일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책상 서랍을 열자 USB 메모리가 보였다.

USB를 태섭의 발밑에 툭 내던졌다.

"당신이 살해교사하는 장면을 녹화한 동영상이 들어있으니까 알아서 폐기해."

그러자 녀석이 감동한 얼굴로 화답했다.

"고맙습니다. 회장님."

"이만 나가봐."

"그럼 나중에 찾아 뵙겠습니다."

태섭은 USB 메모리를 품에 소중히 갈무리한 뒤 장내에서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

칼컴의 코헨 CEO가 한국을 내방했다.

나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상암동 드림 케이블 회장실.

코헨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007 가방이 들려있었다.

007가방을 열자 4.3인치 크기의 스마트폰이 보였다.

아이폰과 마찬가지로 통알류미늄으로 주조된 제품이었다.

그렇지만 내 성에 차지 않았다.

크기가 너무 작았다.

아이폰과 차별성이 부족했다.

"크기를 키우는 게 어떨까요?"

그러자 코헨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다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아이폰과 뭔가 차별점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4.3인치는 너무 작은 사이즈에요."

"그렇지만 한손에 쥐기에 가장 적당한 사이즈는 4.3인치 내욉니다. 회장님."

"그래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요. 무조건 5인치 이상의 사이즈로 스마트폰을 제조합시다."

"으음..."

코헨의 입에서 고민스런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가 결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5인치 이상의 사이즈로 시제품을 만들겠습니다."

"한달 안에 시제품을 만들어서 갖고 오세요."

"네. 회장님."

코헨을 내보낸 뒤 줄담배를 말아올릴 즈음 주한수가 눈 앞에 나타났다.

"유성지검의 장동철 부장검사가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이유가 뭔데?"

"김동진 대표이사의 자살 사건을 조사하는 차원이라고 하더군요."

"하수용 이사를 만나라고 전해."

"그리 말했지만 무조건 회장님을 만나겠다고 아침부터 생떼를 쓰고 있습니다."

"유성지검이 어디에 있는거지?"

"충청도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동진의 사체가 발견된 지역인가?"

"그렇습니다."

"그 자를 내 앞으로 데리고 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자고."

"알겠습니다."

잠시 뒤, 40대 중반의 남자가 사무실에 나타났다.

그는 나를 향해 목례를 취한 뒤 깐깐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산업스파이 혐의를 받고 있던 히말라야전자의 김동진 대표이사가 이틀전에 유성 지역에서 변사체로 발견됐습니다."

"그래서 알고 싶은게 뭐지요?"

"번개탄으로 자살을 한거 같지만, 국과수 조사결과 체내에서 소량의 수면제 성분을 발견했다고 하더군요."

"또한 몸 전체에 타박상도 다수 발견됐습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 유성지검은 김동진씨의 사건을 자살이 아닌 타살로 규정한 상탭니다."

"누구 마음대로 타살이라고 하는 거죠?"

그러자 장동철이 내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우리 유성지검 담당 검사들의 대체적인 의견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이런 얘기를 나에게 하는 의도가 뭡니까?"

"김동진씨의 가족을 탐문한 결과, 부인이신 유난숙씨가 회장님을 부군의 살해범으로 지목하더군요."

지겨운 얘기였다.

"나에게 원하는 게 뭐죠?"

"유성지검을 방문해 주십시오."

"내가 왜 그래야 하죠?"

"거부하시겠다면 법원에 정식으로 체포영장을 신청할 예정입니다."

"우리 장 검사님이 간덩이가 많이 부은 모양이군요."

그러자 녀석이 굵은 눈썹을 꿈틀하며 나를 매섭게 노려봤다.

"검사님. 함부로 나대시면 내 손에 죽습니다. 그러니 좋은 말로 할때 그냥 돌아가세요."

순간 장동철의 입에서 격한 어조가 흘러나왔다.

"감히 대한민국 검사를 면전에서 공갈협박하는 겁니까!"

"시끄럽게 떠들지 말고 어서 나가세요."

그리 말하며 비서실에 콜을 넣었다.

직후 건장한 경호원들이 장내에 벼락처럼 들이닥쳤다.

그들은 장동철을 짐짝처럼 취급하며 사무실에서 말끔히 치워버렸다.

속이 후련해지는 순간이었다.

***

유성 인근의 고급 일식당에 김태섭 검사장과 유성지검의 한상욱 차장검사, 장동철 부장검사가 차례로 나타났다.

김태섭은 한상욱에게 넌지시 말했다.

"시작해."

그러자 한상욱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장동철에게 운을 뗐다.

"이태수 회장님은 전 세계 최고 재벌이니까, 알아서 모시라구."

동철이 뜨악한 얼굴로 반문했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입니까?"

그같은 모습을 묵묵히 주시하던 김태섭이 갑자기 동철의 얼굴에 날 서린 주먹을 날렸다.

퍼억!

-크헉!

불의의 기습을 받은 동철이 뒤로 벌러덩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태섭의 주먹질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퍼어억! 퍼억! 퍽!

동철을 흠씬 두들긴 태섭이 피에 절은 주먹을 물수건으로 닦아내며 씹어뱉듯이 말을 내뱉었다.

"주제 모르고 나대지마라. 정말 죽는 수가 있으니까! 퉷...!"

태섭은 동철의 얼굴에 걸쭉한 가래침을 토해낸 뒤 장내에서 유유히 사라졌다.

< 일벌백계(一罰百戒) 2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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