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왕지도(覇王之道) 1 >
타워필리스 펜트하우스.
김태섭이 내 집에 나타났다.
녀석은 공손히 인사한 뒤 곧바로 보고를 올렸다.
"제가 따끔하게 손을 봤으니, 앞으로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겁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넌지시 물었다.
"장동철에 대해서 말해봐."
"흔해빠진 향검(鄕檢)입니다."
"향검이 뭐지?"
"지역에서 이권을 취득하는데 혈안이 된 양아치 검사라는 뜻입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해봐."
태섭이 말을 길게 이었다.
"장동철은 자기 스스로 유성지검으로 내려간 케이습니다. 집안에서 하는 건설업체의 뒤를 봐주기 위해서라고 하더군요."
"그놈 집안은 충청지역에서 여러개의 건설업체를 운영하면서 관급공사 입찰비리를 공공연히 저지르고 있습니다."
"장동철은 그걸 커버해주는 역할인가?"
"그렇습니다. 회장님."
"그런 썩어빠진 향검이 왜 나에게 들이댄거지?"
"자기딴에는 회장님을 들쑤시면 돈푼깨나 만질 것으로 지레짐작했나 봅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놈의 주변을 잘 살펴봐."
"안그래도 한상욱 차장에게 놈의 비위자료를 수집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럼 장동철 문제는 당신이 알아서 처리해."
"염려마십시오 회장님."
***
장동철은 분하고 원통해서 미질지경이었다.
그는 7살 이후 부모는 물론이고 남들에게 단 한차례도 맞아본 적이 없었다.
그 정도로 귀하게 자란 남자였다.
동철은 자신에게 가혹한 손찌검을 자행한 김태섭과 오더를 내린 이태수를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런 탓인지 평소의 명석한 두뇌회전 대신 동물적인 복수심이 그의 영육을 송두리째 지배했다.
동철은 이른 아침부터 유성지법을 찾았다.
그는 영장 담당 판사인 이영도에게 단도직입적인 언사를 내뱉었다.
"히말라야 투자그룹의 이태수 회장에 대해서 체포영장을 발부해 주십시오."
그러자 이영도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인가요?"
"그는 변사체로 발견된 히말라야전자 김동진 대표이사의 유력한 살해 용의잡니다."
이영도가 못미더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경찰에서는 자살이라고 하던데요?"
"그렇지만 국과수 조사결과 수면제를 투약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또한 김동진의 처인 유난숙이 이태수 회장을 살해범으로 지목하고 있습니다."
"그런건 증거가 될수 없어요. 확실한 물증 없이는 체포영장을 발부 할 수 없습니다."
이영도는 그리 말하며 얼굴 가득 냉랭한 표정을 떠올렸다.
"원래 이 정도 요건이면 충분히 체포영장을 발부해 주셨지 않습니까?"
"그건 상대 나름이지요. 이태수 회장은 전 세계 최고 재벌이에요. 그런 사람에게 확실한 물증 없이 체포영장을 발부한다면 내 모가지가 날아간다고요!"
영도는 말귀가 통하지 않는 장동철을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알만한 분께서 왜 이렇게 사리분간을 못하시는 겁니까! 더 이상 장 검사와 할 말이 없으니 이만 나가세요!"
결국 동철은 별다른 소득 없이 법원을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그날밤.
유성 시내 모처.
이영도 부장 판사와 한상욱 차장 검사가 머리를 맞댄 채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장동철 부장 검사가 체포영장을 발부해 달라고 난리를 치더군요."
한상욱이 넌지시 물었다.
"대상이 누구죠?"
"히말라야 투자그룹의 이태수 회장입니다."
순간 상욱의 두눈에 스산한 한기가 스쳤다.
"사리분별을 못하는거 같더라고요. 그러니 한 차장께서 따끔하게 충고를 해주세요."
"제가 장 부장에게 알아듣게 말을 하겠습니다."
상욱은 그리 화답하며 이영도의 술잔에 정종을 넘치도록 따라부었다.
다음날.
르네상스 펜트하우스에 한상욱 차장 검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매니저의 안내를 받으며 VIP 룸으로 들어갔다.
상욱은 VIP 룸 상석에 앉아 있는 김태섭에게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태섭은 글라스에 발렌타인을 가득 따라서 상욱에게 건넸다.
"한잔 해."
"넵. 검사장님."
상욱은 발렌타인을 원샷하자마자 곧바로 보고를 올렸다.
"장동철이 미친놈처럼 날뛰고 있습니다. 유성지법에 독단적으로 체포영장을 신청했다고 하더군요."
"영장은?"
"당연히 반려됐습니다."
태섭의 입에서 날 서린 어조가 흘러나왔다.
"개자식이 자기 무덤을 파는구나."
"죽고 싶어서 환장한 놈에겐 매가 약입니다. 검사장님."
"그놈의 비위자료를 갖고 왔나?"
상욱은 고개를 끄덕인 뒤 가방에서 서류철을 꺼내 태섭에게 건넸다.
태섭은 동철의 비위자료를 대충 훑은 뒤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장동철 집안이 경영하는 건설업체들의 입찰담합 비리를 전방위적으로 수사해."
"장동철의 비위혐의만 조사하는 게 어떨까요?"
"왜?"
"정치인들도 다수 연루된 정황이 드러났습니다. 일이 복잡해질 우려가 있습니다. 검사장님."
"으음..."
태섭의 입에서 침중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 장동철이 연루된 비위혐의를 중심으로 수사를 집중해!"
"알겠습니다. 검사장님."
태섭은 한상욱을 내보낸 뒤 대검 감찰반의 오정록 차장 검사를 면전에 불러들였다.
그 역시 르네상스 펜트하우스의 단골 멤버였다.
태섭은 면전에 나타난 오정록에게 장동철의 비위자료를 건넸다.
그러자 정록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이게 뭡니까?"
"유성지검에서 일하는 장동철의 비위자료."
순간 정록의 얼굴에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정말 장동철의 비위자료란 말입니까?"
"그래. 아는 놈인가?"
"조금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아는거지?"
"실은 장동철과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후밴가?"
"1년 후뱁니다."
정록의 입가에 씁쓸한 표정이 내걸렸다.
"고교 동문이라고 절대 봐줄 생각하지 마라."
정록이 쓴웃음을 지으며 팔을 저었다.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아주 재수가 없는 자식이거든요."
"구원(舊怨)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그러자 정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길게 이었다.
"부모가 지역 유지랍시고 학창 시절에 온갖 나쁜짓을 저지른 놈입니다. 공부는 엄청 잘했지만 인간성은 밑바닥인 놈이었죠."
"그럼 잘됐군. 이번 기회에 그 개자식에게 정의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라고."
"안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후후..."
정록은 그리 답하며 입꼬리를 비릿하게 말아올렸다.
***
상암동 드림 케이블 본사 회장실.
푹신한 소파에 온몸을 깊숙이 파묻은 채 벽면을 장식한 대화면 TV에 이목을 집중했다.
-충청과 대전, 유성 지역에서 입찰비리를 저지른 건설업자들을 비호한 혐의로 유성지검의 장동철 부장 검사가 법정구속됐습니다.
-대검 감찰부는 장동철 검사의 유죄를 밝히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기자들에게 밝혔습니다. 중략...
검사의 탈을 뒤집어쓴 양아치가 법의 심판을 받는 순간이었다.
그런 탓인지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날에는 김소민, 이민정 등과 더불 데이트를 즐기는 게 최고였다.
곧바로 비서실에 콜을 넣었다.
잠시 뒤, 주한수 실장이 면전에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고개를 끄덕인 뒤 한수에게 지시를 내렸다.
"김소민과 이민정을 호출해."
"두명 모두 부르실 생각입니까?"
"그래. 한명 보다는 두명이 좋잖아."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한수는 그말을 끝으로 장내에서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그날 밤, 타워필리스 펜트하우스.
소민과 민정은 나를 극진히 모셨다.
그녀들은 내 품에 안긴 채 고혹스러운 미소와 사랑스러운 애교를 쉴새없이 과시했다.
언제봐도 정겨운 광경이었다.
그녀들은 내 삶의 커다란 활력소였다.
***
대검찰청 감찰반 취조실.
푸른 수의 차림의 장동철이 담당 검사에게 입을 열었다.
"제 변호인과 만나고 싶습니다."
"범죄 혐의를 인정하시는 겁니까?"
"그건 변호인과 상의후에 말씀드리죠."
"좋습니다. 2시간의 여유를 드릴테니 변호인과 대화를 나눠보십시오."
담당 검사는 같은 검찰 출신인 동철에게 나름 편의를 봐주고 있었다.
30분 뒤, 취조실에 양복 차림의 남자가 등장했다.
그는 장동철의 사시동기인 차성국 변호사였다.
동철은 입으로는 의례적인 말들을 쏟아내는 한편, 손으로는 메모지에 뭔가를 바삐 적어내려갔다.
그는 메모지를 은밀히 차성국에게 전달했다.
메모지를 살핀 차성국의 얼굴에 곤혹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자 동철이 애절한 얼굴로 메모지에 추가로 글씨를 써내려갔다.
<내가 말한대로 언론사에 알리라고! 제발! 부탁이다. 친구야!>
결국 차성국은 마지못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서울 시내 모처에 차성국 변호사와 조일신문의 정치부 기자인 박성용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차성국은 대학 동기인 박성용에게 넌지시 입을 열었다.
"히말라야 투자그룹의 이태수 회장이 김동진 대표이사를 살해교사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거든."
"증거가 있나?"
"김동진의 처인 유난숙을 만나봐. 그러면 내 말을 이해할거다."
"그 여자를 한번 만나볼테니까 입 조심해라. 이태수 회장은 대한민국을 들었다 놨다하는 초거물이니까."
"당연하지. 그럼 나중에 보자."
차성국은 그말을 끝으로 장내에서 재빨리 몸을 숨겼다.
박성용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내걸렸다.
그는 유난숙을 만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성용은 신문사로 들어가자마자 편집장에게 차성국이 한 말을 한자도 빼놓지 않고 고스란히 보고했다.
그날 밤.
서울 시내 일식당에 조일신문 안성훈 편집장과 드림박스 장준기 대표가 차례로 나타났다.
안성훈은 술자리가 무르익자 본론을 꺼냈다.
"장동철이 언론사에 회장님을 비방하는 투서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성훈은 그리 말하며 테이블 위에 장동철이 작성한 메모지를 올려놓았다.
메모지의 내용을 확인한 장준기의 두눈에 살벌한 한기가 솟구쳤다.
"이 개자식이 죽고 싶어서 환장한 모양이군요."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장동철의 입을 막으셔야 할 겁니다."
"그 문제는 우리가 알아서 할테니 심려치 마십시오. 그리고 4분기 광고비용을 조일신문에 50% 이상 몰아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성훈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짙게 드리워졌다.
"회장님에게 감사하다고 전해주십시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하하하..."
장준기는 히말라야 투자그룹의 대 언론창구 역할을 하고 있었다.
조중동을 비롯한 방송사의 광고물량을 집행한 것이다.
준기는 술자리가 파하자마자 타워필리스 펜트하우스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
소민과 민정을 대동한 채 북해도 온천을 찾았다.
그녀들과 온천을 즐기며 오붓한 시간을 만끽하기 위함이었다.
사랑스러운 그녀들과 유황 온천을 즐길 무렵, 주한수 실장이 눈 앞에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있었다.
-김태섭 검사장이 전화를 하셨습니다.
팔을 뻗자 한수가 내 손에 폰을 올려놓았다.
수화기에서 태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찰에서 취조를 받는 도중,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나머지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는 것으로 시나리오를 작성했습니다.
-취조실에 창문이 있나?
-취조실 옆에 있는 대기실에 창문이 있습니다.
-직접 일을 처리할 사람은?
-검찰 수사관 두명을 섭외했습니다. 그들이 일을 처리할 겁니다.
-믿을 만한 사람이겠지?
-이런 일에 이골이 난 베테랑입니다.
-디데이는?
-오늘 밤, 02시 무렵입니다.
-실수없이 일을 처리하도록.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통화를 끊은 뒤 한수에게 핸드폰을 돌려주며 넌지시 말했다.
"당신도 일본 아가씨랑 오붓한 시간을 보내라고."
그러자 녀석이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업무 중에는 사적인 시간을 가질수 없습니다. 회장님."
"우리 한수는 그래서 문제야. 내가 허락하는 데도 너무 고지식하단 말이지."
"죄송합니다."
"그래. 당신 좋을대로 해라. 이만 가봐."
"네. 회장님."
한수를 보낸 뒤 민정과 소민을 격하게 품에 안았다.
그러자 그녀들의 입에서 사랑스러운 교성이 길게 울려퍼졌다.
***
대검찰청 감찰부.
밤샘 취조를 끝마친 장동철은 옆방의 대기실로 들어갔다.
동철은 양손에 수갑을 찬 채 대기실 의자에 참담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장내에 건장한 체격의 검찰 수사관 두명이 나타났다.
그들은 무표정한 눈빛으로 동철을 주시하며 그의 곁으로 바짝 다가왔다.
동철은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꼈다.
자신을 주시하는 수사관들의 눈빛에서 살기를 느낀 탓이다.
그때, 수사관들이 그의 양옆으로 벼락처럼 접근했다.
동시에 그의 팔다리를 번쩍 든 채 창가쪽으로 맹렬하게 밀었다.
"안돼! 그만!"
그 말을 끝으로 동철의 육신이 지상으로 허무하게 수직낙하했다.
르네상스 빌딩 펜트하우스.
태섭은 VIP 룸에서 술과 여자를 즐기며 벽면을 장식한 TV에 이목을 집중했다.
-방금 들어온 뉴스 속보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대검찰청 감찰반에서 조사를 받던 장동철 부장 검사가 투신자살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대검 감찰반은 투신자살의 원인을 파악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중략...
태섭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내걸렸다.
그는 아가씨들을 뒤로 한 채 룸을 빠져나왔다.
직후 대포폰을 이용해 북해도에 있는 주한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
상암동 드림 케이블 회장실.
사무실에 히말라야전자의 신임 대표이사로 발탁된 박용범이 나타났다.
그는 비 연대 출신으로서 능력과 청렴성을 두루겸비한 인물이었다.
박용범은 나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인 뒤 히말라야전자의 3분기 매출과 영업이익을 보고했다.
"3분기 총매출이 42조원을 돌파했으며 영업이익 역시 16조원대로 급등했습니다. 모바일 D램과 낸드플래쉬의 폭발적인 성장 덕분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보고는 됐고, 이명복 측에서 대선자금을 요구하지 않았나?"
"이명복 후보의 측근들이 여러차례 회사를 방문했지만, 그때마다 모두 빈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잘했어. 앞으로도 그놈들이 나타나면 무조건 내치라고."
그러자 박용범이 걱정이 그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명복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후환이 두렵습니다. 회장님."
"쓸데없이 걱정하지 말고 공장이나 둘러봐."
"넵. 회장님."
용범을 내보낸 뒤 회사 업무에 집중할 찰나, 주한수가 면전에 나타났다.
"이명복 후보의 비서실장인 오기춘 의원이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일 일없으니까 치워버려."
주한수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예의상 대화라도 나눠보시죠. 막무가내로 그들을 대해봤자 좋을 것이 없습니다. 회장님."
"우리 한수가 오늘 따라 말이 많구나."
그러자 녀석이 뜨끔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헛소리는 그만하고 이만 나가봐."
그제서야 한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장내에서 순순히 물러갔다.
< 패왕지도(覇王之道) 1 > 끝
ⓒ 방탄리무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