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핵재벌 개망나니-152화 (77/200)

< 경단련 >

청와대를 나서는 이효상 국정원장의 얼굴에 뜻모를 표정이 그려졌다.

그는 자신이 호랑이 등에 올라탄 형국임을 뼈저리게 자각했다.

이태수 회장과 이명복 대통령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해야 하는 탓이었다.

물론 그는 이명복 보다는 이태수를 더 무서워했다.

이명복의 권력은 길어봤자 5년이지만, 이태수의 막대한 금력은 최소 수십년 이상 지속될 운명이었다.

더구나 태수는 그의 비리 혐의를 확실히 틀어쥐고 있었다.

그런 사실을 잘 아는 이효상은 감히 태수에게 반항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더불어 그가 건넨 30억대의 금품도 결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효상은 자택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심복인 조철산 국장에게 은근한 어조를 흘려보냈다.

"이명복 대통령의 비리혐의를 수집해 봐."

그러자 조철산이 경악한 얼굴로 되물었다.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이유는 묻지말고 내가 시킨대로 해."

철산은 이효상의 전속부관 출신이었다.

그런 탓인지 그의 명령에 순순히 복종했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

김태섭은 이태수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는 금력과 권력을 모두 갖고 싶어한다. 그래서 일심회를 만드려는거야.'

그런 사실을 간파하자 태섭은 자신 역시 나름의 목표를 설정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을 추구하자. 그게 최선이야.'

그는 두눈을 별처럼 반짝이며 향후 계획을 면밀히 설계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이 되기 위해선 일심회의 2인자로 자리를 굳혀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어중이 떠중이들 보다는 확실한 멤버들로 일심회를 추려야 한다.'

태섭은 아리아호텔 펜트하우스에 몰려온 법조인과 정치인, 언론인 중에서 나름의 영향력을 과시하는 인사들을 심중에 차례로 떠올렸다.

'법조인은 차장검사와 부장판사 이상만 회원으로 받아들이고, 언론인은 중앙 일간지 편집장과 지상파 방송사 국장 이상, 그리고 정치인은 휘하 계보 의원을 최소 5명 이상 거느린 자들만 일심회원으로 포섭하자.'

그는 마음을 정한 뒤 한국에 있는 주한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

상암동 인근의 밥집에서 점심 식사를 할 무렵, 한수의 핸드폰에 전화가 걸려왔다.

한수는 간략한 대화를 나눈 뒤 나에게 폰을 건넸다.

"김태섭 검사장입니다."

수화기에서 태섭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20명 정도의 인원을 일심회원으로 받아들일 생각입니다.

-그들을 어떤 식으로 포섭할 계획이지?

-전가의 보도인 당근과 채찍으로 그들을 회유할 생각입니다.

-당근은 돈일테고, 채찍은 뭔가?

-입회 후보자들의 비위자룝니다.

-시간이 필요하겠군.

-최소 석달 정도의 조사 기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추가로 영입할 회원들에 대해서도 조사를 병행할 계획입니다.

-누굴 염두에 두고 있지?

-재계의 유력자들도 포섭할 생각입니다.

-재벌들을 말하는건가?

-재벌 회장과 후계자들을 동시에 입회시킬 계획입니다.

-쉽지 않겠군.

-그래서 말인데, 그들에게 회장님의 이름을 팔아야 할 거 같습니다.

-내가 일심회장이란 사실을 공개적으로 오픈하라는 말인가?

-자존심 강한 재벌들을 회유하려면 회장님의 존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재벌들은 자신보다 돈이 많은 존재에게만 고개를 숙인다.

돈벌레들의 숙명이었다.

-당신이 알아서 일을 추진해. 해외 페이퍼 계좌를 열어줄테니까 그 돈으로 유력인사들을 입회시켜.

-페이퍼 계좌에 2천만 달러를 넣어줄테니 알아서 해.

-감사합니다. 회장님.

***

회사업무를 종료한 뒤 상암동 인근의 공원을 거닐며 루반과 진솔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히말라야 투자그룹 산하에 넷플렉서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말을 계속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유툽을 인수하는 즉시 넷플렉서와 합병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왜 그래야 하죠?"

"넷플렉서와 유툽은 온라인 스트리밍을 기반으로 사업을 구현하고 있습니다."

"넷플렉서는 드라마 중심이고, 유툽은 1인 개인 방송에 역점을 두는 탓에 서로 겹치지 않고 막대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럴듯한 제안이었다.

"그리고 따로따로 서버를 구축하는 것도 돈과 인력을 낭비할 뿐입니다."

"이사님의 조언을 귀담아 듣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히말라야 플레이 스토어는 언제 오픈되는 겁니까?"

"북미와 유럽, 싱가포르 등지에 서버구축 작업이 완료되는 즉시 사이트를 오픈할 예정입니다."

"돈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고맙습니다. 회장님."

루반은 그리 화답한 뒤 얼굴 가득 은근한 표정을 지으며 재차 입을 열었다.

"유툽의 오너인 메튜 벤자민이 회장님을 뵙고 싶어 하더군요."

"유툽을 매각할 의향이 있는 건가요?"

"그런거 같습니다."

"그럼 이사님이 중간에서 매각 액수를 조정해 보십시오."

"알겠습니다. 회장님."

***

영국 런던 이튼스쿨.

재단 이사장인 세바스찬 카터의 두눈에 끈적한 탐욕이 파도처럼 물결쳤다.

그는 히말라야 투자그룹이 발송한 공문서를 책상 서랍 안에 조심스럽게 집어넣은 뒤 재단의 재정을 책임지는 경영 실장을 면전에 호출했다.

"히말라야 투자그룹이 아주 좋은 조건을 제시했네."

"어떤 조건입니까?"

"재단의 이름과 교사들을 제공하는 댓가로 연간 1천만불에 달하는 후원금을 재단 측에 약속하더군."

"교사들의 연봉도 그들이 책임지는 건가요?"

카터 이사장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뭘 망설이십니까? 히말라야 투자그룹 측에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공문서를 발송하시죠."

"제안을 받은지 겨우 3일이 지났을 뿐이야. 조금 더 시간을 끈 연후에 공문서를 발송해도 늦지 않아."

"그리고 재단 이사회를 통과하는 절차도 남았고."

"어차피 그건 요식행위에 불과한거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절차는 지켜야지. 그러니 재단 이사회에 참가하는 원로들에게 이같은 사실을 은밀히 전달하게."

"알겠습니다. 이사장님."

***

점심 시간을 이용해 상암동 길거리로 마실을 나갔다.

서울시는 상암동을 방송가 타운으로 조성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 노력 덕분에 공중파와 케이블 방송사 등이 상암동에 속속 둥지를 틀고 있었다.

허나, 아직도 빈 공터가 많았다.

내 시선은 나대지로 남아 있는 공지에 모아졌다.

그 중에서도 DMC 첨단 산업센터 맞은편에 위치한 3천여평 내외의 공지가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국제학교를 설립하기에 더할 수 없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나를 지근거리에서 수행하는 한수에게 넌지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보기에 이 공터가 어떤거 같나?"

내 마음을 헤아린 한수가 정답을 제시했다.

"국제학교를 세우기에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나와 같은 생각이군."

"그렇습니다. 회장님."

"상암동 토지를 취득하려면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지?"

"이곳은 서울시 소유의 토지인 탓에 그들의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서울시에 이곳의 토지를 매입하고 싶다는 공문서를 발송해."

"그리 조치하겠습니다. 회장님."

그날 밤.

미국에서 돌아온 명우가 내 집에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은 나를 보자마자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다.

"이제 너도 단독주택으로 옮겨야 하는거 아니냐?"

"갑자기 무슨 말이야?"

"좁아터진 주상복합 아파트에서 언제까지 살려고 하는거야? 미국 부자들처럼 대저택에서 속편하게 살아야지."

나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오래전부터 거처 이전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던 참이었다.

타워필리스는 나를 담기에는 너무 단촐한 공간이었다.

"이번 기회에 판교에 있는 토지를 사서 그럴듯한 대저택을 짓는게 어때?"

"경호문제는 어쩌고?"

"그거야 머릿수로 밀어부치면 그만이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뒤 진토닉을 명우에게 건넸다.

녀석은 진토닉을 입가에 한모금 들이킨 뒤 걱정스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명복을 어떻게 요리할 생각이냐?"

"그놈 주변에 스파이를 심을 계획이다. 그러니 너는 쓸데없이 걱정하지 말고 계파 보스급 정치인들을 일심회에 끌어들여."

"그건 김태섭이 알아서 하면 되잖아. 나는 그런 골치아픈 일은 딱 질색이라고."

명우는 욕심이 너무 없었다.

일심회가 어떤 조직으로 발전할지 생각조차 안하는 눈치였다.

김태섭과 뚜렷이 대비되는 일면이었다.

"알았다. 니 편한대로 해라."

그러자 녀석이 사람 좋은 미소를 입가에 드리운 채 내 팔을 잡아끌었다.

"룸빵에서 찐하게 회포나 풀자."

고개를 끄덕인 뒤 명우와 함께 인근의 룸살롱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

청와대 집무실.

이명복은 속이 터져 죽을 지경이었다.

국세청장이 그의 속을 뒤집어놓은 탓이었다.

그는 명복이 지시한 사항을 수박 겉핡기 식으로 이행하고 있었다.

"히말라야 투자그룹에 대해서 전방위적인 세무조사를 암중에서 실행한 결과 별다른 세금탈루 정황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명복의 화가 폭발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거요! 털어서 먼지 안나는 회사는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허나, 국세청장은 명복의 호통을 귓등으로 흘리며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명복은 국세청장을 내보낸 뒤 오기춘 비서실장을 면전에 불러들였다.

"국세청장이 일을 시원찮게 하는 이유가 뭔가?"

오기춘이 눈을 번뜩이며 대답했다.

"이태수의 눈치를 보는거 같습니다."

"일국의 대통령보다 그자를 더 어려워 한다는 말인가?"

"솔직한 말로 대통령님의 권력은 5년이 한계지만, 이태수의 천문학적인 재력은 최소 30년 이상 지속 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끄으응..."

명복의 입에서 앓는 듯한 소음이 새어나왔다.

오기춘이 결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이 회장과 화해를 하시죠. 국내외 경제상황이 만만치 않습니다. 대통령님."

그러자 명복이 버럭 역정을 냈다.

"지금 나더러 그놈에게 고개를 숙이라는 말인가!"

"그게 아니라 화해를 하시라는 뜻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 말이 그말 아닌가?"

"그렇게 들으셨다면 죄송합니다. 대통령님."

오기춘은 그리 답하며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그날 밤.

이명복은 청와대 관저를 산책하며 이태수에 대해 심사숙고했다.

'그놈은 미국 대통령과 국내 언론, 고위 관료, 법조인, 정치인 등을 자기 사람으로 포섭한지 오래야.'

그는 상황이 만만치 않음을 뼈저리게 절감했다.

'그자와 끝까지 혈전을 치룬다면 나에게 좋을 것이 없어. 오기춘의 말대로 어느 정도 화해 할 필요성이 절실해.'

그날 명복은 태수에게 화해를 제안하기로 마음먹었다.

***

상암동 드림 케이블 본사 회장실.

결재서류에 회장 직인을 날인할 무렵, 주한수가 눈 앞에 나타났다.

"청와대에서 오기춘 비서실장이 찾아왔습니다."

"들어오라고 전해."

"예. 회장님."

잠시 뒤, 오기춘이 사무실에 나타났다.

그는 나를 향해 정중히 인사한 뒤 이명복의 친서를 내 손에 건넸다.

친서를 대충 훑은 뒤 오기춘에게 입을 열었다.

"나에게 경단련 회장직을 제안하는 이유가 뭡니까?"

오기춘이 두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죠. 대통령님은 회장님과 화해를 하고 싶어하십니다. 그런 의미로 경단련 수장직을 제안하신 겁니다."

나는 이명복을 용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놈 때문에 막대한 손해를 본 탓이었다.

수원 반도체 공장이 1주일 동안 운영이 중지된 탓에 2조원 이상의 피해를 입었다.

한두푼도 아니고 무려 2조원이었다.

허나, 무작정 이명복과 전쟁을 펼치는 것도 많은 부담이 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내 지인들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복수는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았다.

지금은 사업에 전념할 때였다.

결국 이명복의 화친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경단련 회장직은 결코 받아들일수 없었다.

"경단련 회장직에는 아무런 미련이 없습니다."

"대통령님에게 그리 전하겠습니다."

"최단 시일 내에 이 대통령을 만나고 싶습니다."

"제가 책임지고 자리를 만들어보겠습니다."

오기춘은 그 말을 끝으로 사무실에서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

삼청동 안가로 들어서자 오기춘 실장이 나를 맞이했다.

그는 안가의 도감청 방지룸으로 나를 안내했다.

도감청 방지룸으로 들어가자 의자에 앉아 있던 이명복이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나를 청한 연유가 뭡니까?"

"수원 공장이 입은 피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함입니다."

그러자 이명복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그가 결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히말라야전자의 법인세를 4천억 안팎 감면해 드리겠습니다. 대신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당선 축하금 조로 3천억을 기부해 주십시오."

이명복은 얼굴 가득 끈적한 탐욕을 떠올리며 나를 지그시 쳐다봤다.

개자식이 씨알도 안먹히는 헛수작을 하고 있었다.

"끝까지 이렇게 나오신다면 할수 없군요. 로펌을 동원해서 대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하겠습니다."

"저의 제안을 이런식으로 거부하시는 겁니까?"

"그런 쓸모없는 제안은 관심 밖입니다. 법대로 합시다."

그러자 이명복이 유들유들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정부의 행정절차에 따라서 법을 집행한 탓에 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어요. 아실만한 분이 왜 그러시는 겁니까?"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삼청동 안가를 나서자마자 김앤박 로펌의 김성우 대표에게 연락을 취했다.

다음날.

가평 인근의 사격장에서 김성우와 클레이 사격을 즐기며 내 의중을 솔직히 밝혔다.

"환경부를 대상으로 대법원에 소송을 제기할 생각입니다."

"수원 반도체 공장의 운행정지 사건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네. 1주일 동안 발생한 피해액이 2조4천억에 육박할 지경입니다."

김성우가 곤혹스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서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봤자 승리하는 게 거의 불가능해요. 법적으로 문제가 없기 때문이죠."

"잘 알지만 열통이 뻗쳐서 참을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김성우가 내 어깨를 다독이며 입을 열었다.

"이명복이 퇴임한 이후 복수를 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러니 화 푸시고, 사격이나 즐깁시다."

그리 말하며 내 손에 묵직한 라이플을 쥐어줬다.

김성우의 입에서 '스타트'란 단어가 튀어나왔다.

순간 푸른 하늘에 여섯개의 원반이 동시다발적으로 솟구쳤다.

방아쇠를 힘차게 잡아당기자 귓청이 떨어져 나갈 듯한 소음이 장내에 길게 메아리쳤다.

탕탕탕탕탕탕!

< 경단련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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