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1 >
박형석 국정원 2차장은 전직 차장 검사출신이었다.
그는 당연히 김태섭 인맥으로 분류되는 남자였다.
그런 박형석의 레이더망에 국정원의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됐다.
그는 국내 파트를 책임지는 허정구 국정원 1차장에게 시내 모처에서 은밀한 만남을 요청했다.
저녁 무렵.
서교동에 위치한 아담한 단독주택에 박형석과 허정구가 나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은 국정원에서 안가로 사용하는 주택이었다.
그들은 수하들을 물린 뒤 속 깊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박형석이 넌지시 물었다.
"요즘 분위기가 이상한데, 혹시 짚이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그러자 허정구가 곤혹스런 얼굴로 입을 열었다.
"대법원장이 VIP의 심기를 거스른거 같습니다. 그 문제로 1국에 총비상이 걸렸어요."
"설마...? 대법원장을 사찰하는 겁니까?"
허정구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입안으로 가져갔다.
그는 술을 들이킨 뒤, 다시 말을 이었다.
"대법원장과 그를 따르는 계파 의원들이 종신 통령 개헌작업에 미온적인 자세로 일관하자, VIP께서 고강도 사찰을 하명하셨습니다."
"아마 지금 쯤이면 대법원장이 계파 의원들과 나눈 대화 내용이 청와대로 고스란히 넘어갔을 겁니다."
박형석의 얼굴이 절로 핼쑥해졌다.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허정구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VIP가 극대노한 상태라 대법원장의 명줄을 장담할 수 없을 지경이에요. 쯧쯧쯧..."
허정구는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날 밤.
박형석은 공중전화를 이용해 김태섭이 은밀히 사용하는 대포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VIP가 선배님을 노리는거 같습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사모님과 자녀들이 있는 미국으로 떠나셔야 합니다!
수화기에서 긴 침묵이 흘러나왔다.
몇분 뒤, 김태섭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폰에서 울려퍼졌다.
-상황이 심각한가?
-선배님이 계보 의원들과 나눈 대화 내용을 국정원이 도청한 모양입니다. 청와대에서 그 내용을 확인한다면 선배님의 목숨이 위험하다고요!
박형석은 그 말을 끝으로 통화를 끝마쳤다.
***
가회동.
김태섭은 자택의 서재를 거닐며 향후 행보를 심사숙고했다.
그는 박형석의 제보를 듣자마자 자신의 생명이 백척간두에 내몰렸음을 직감했다.
이태수의 독한 성정을 잘 아는 탓이었다.
그는 자신의 눈 밖에 난 인물들을 절대 용서치 않는 성품이었다.
그런 사실을 잘 아는 김태섭은 마음 속으로 쓸만한 망명지를 추리고 있었다.
'영국이나 독일, 프랑스 등에 망명을 요청할까?'
허나, 이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영국, 독일, 프랑스 정도로는 이태수의 압력을 견디기 힘들거야.'
결국 그는 러시아와 미국을 심중에 떠올렸다.
'러시아는 너무 미개한 국가라, 그런 곳에서 망명생활을 한다는 건 섶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드는 것과 진배 없다고.'
태섭은 다시 한번 고개를 저으며 부강한 미국을 뇌리에 떠올렸다.
'미국으로 망명하기 위해서는, 트램프의 반대파인 민주당 고위층의 비호를 받는 게 급선무야.'
그의 심중에 민주당 하원의장인 베스 로이드의 노회한 얼굴이 짙게 드리워졌다.
그는 민주당의 차기 대선주자였다.
태섭은 신화창조당 대표로 재임할 무렵 그와 여러차례 만남을 가진 전력이 있었다.
'베스 로이드에게 이태수와 트램프의 더러운 뒷거래를 폭로한다면 내 뒷배가 되어줄 가능성이 높아지겠지.'
그의 뇌리에 큰 그림이 그려졌다.
태섭은 트램프와 이태수의 동반 실각을 염원했다.
그는 베스 로이드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더불어 자신이 이태수의 뒤를 이어 청와대 권좌를 얼마든지 독차지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다음날 오전.
인천국제공항에 김태섭이 모습을 드러냈다.
1시간 뒤, 그를 태운 워싱턴행 항공기가 푸른 창공에 휘영청 날아올랐다.
***
청남대.
클레이 사격을 끝마친 뒤, 국정원장에게 명령을 내렸다.
"김태섭을 청와대로 데리고 오세요."
국정원장이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복명했다.
"말씀대로 조치하겠습니다."
국정원장을 내보낸 뒤 지하에 위치한 트레이닝 룸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140KG에 육박하는 중량 스쿼트에 매진한 뒤, 샤워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의관을 정제한 후, 청남대 옥상에 위치한 헬기 계류장으로 올라갔다.
50분 뒤, 청와대에 도착하자마자 집무실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집무실에서 결재서류에 대통령 직인을 기계적으로 날인할 무렵, 국정원장이 놀란 얼굴로 내 앞에 나타났다.
"김태섭 대법원장이 오전 9시 비행기 편으로, 미국으로 떠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골이 지끈지끈 아파왔다.
국정원이 일 처리를 제대로 못한 탓이었다.
"김태섭을 감시하는 요원이 없었던 겁니까?"
"그놈들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그만..."
국정원장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담배 연기를 자욱이 말아올리며 국정원장에게 넌지시 물었다.
"김태섭이 눈치를 챈 건가요?"
국정원장이 내 눈치를 살피며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답변했다.
"대법원에도 아무런 연락을 취하지 않고 출국한걸 보면, 그럴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국정원에서 정보가 누출된 겁니까?"
국정원장이 고개를 푹 숙인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런거... 같습니다..."
한심한 작자였다.
국정원장은 조직원들의 관리도 제대로 못하는 인물이었다.
이런 쓸모없는 인간을 나에게 추천한 이효상 외교부장관에게 절로 화가 치밀었다.
허나, 이제와서 국정원장을 다그쳐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중요한건 김태섭을 한국으로 끌고 오는 것이었다.
"김태섭의 소재지를 하루빨리 파악하십시오."
"알겠습니다. 각하."
국정원장이 나가자마자 김태섭의 대포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에서 무미건조한 디지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방금 거신 전화번호는 없는 국번이거나 이용이 중지된 번호이오니, 다시 확인해 주십시오.
곧바로 트램프 대통령에게 핫라인을 연결했다.
-김태섭 대법원장이 미국 워싱턴행 비행기를 타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자의 신병을 확보해 주십시오.
-이유를 알수 있을까요?
-하여튼 그럴만한 사유가 있습니다. 그러니 제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김태섭의 신병을 확보하는 즉시 각하에게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
워싱턴 국제공항 입국 게이트장에 김태섭이 나타났다.
그와 때를 같이해 민주당의 고위 인사들이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주변을 매의 시선으로 살피며 입국 심사를 끝마친 김태섭을 정중히 에스코트했다.
바로 그때, 연방경찰들이 공항에 나타났다.
그들은 김태섭을 발견하자마자 그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허나, 연방경찰은 면책특권을 부여받은 민주당 의원들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결국 그들은 김태섭의 신병을 확보하는 데 끝내 실패했다.
법적으로 그를 구속할 만한 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워싱턴 모처.
베스 로이드 민주당 하원의장과 김태섭은 늦은 점심을 함께하며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태섭은 식사를 끝마친 뒤 테이블 위에 007가방을 올려놓았다.
"가방 안에 이태수 대통령의 비리자료가 들어있습니다."
그러자 로이드 하원의장이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원하는 건 이태수와 트램프의 비리 커넥션입니다."
태섭의 두눈에 곤혹스런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가 결심한 얼굴로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
"저는 이태수와 트램프의 비리 커넥션 자료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들은 얘기는 많지만."
그러자 로이드의 얼굴에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비리자료가 하나도 없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의장님."
로이드가 한가닥 기대를 품은 얼굴로 은근히 입을 열었다.
"그들의 커넥션에 대해서, 뭔가 아는 게 있으면 허심탄회하게 말씀해 주시죠?"
태섭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변했다.
"이태수 대통령이 트램프에게 건넨 돈이 천문학적인 수준이라는 말을 여러차례 전해 들었습니다."
"어디에서 흘러나온 정보죠?"
"한국 정재계에 그런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고 있습니다."
로이드는 고개를 끄덕인 뒤 태섭에게 정중히 입을 열었다.
"뉴저지 인근에 안전가옥을 마련해 드릴테니, 당분간 그곳에서 가족들과 머무십시오."
"감사합니다. 의장님."
그날밤.
로이드 하원의장은 워싱턴 모처에서 측근 그룹과 열띈 논의를 진행했다.
수석 보좌관이 결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트램프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이태수 대통령이 건넨 검은 자금을 그가 수수했다는 증거자료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자 정치 컨설턴트인 토마스 얀센이 고개를 저으며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어차피 증요한 건 선거에서 승리하는 거에요."
"확실한 증거 없이도 이태수와 트램프가 더러운 뒷거래를 했다는 소문을 대중들에게 널리 퍼트린다면, 11월 대선에서 얼마든지 승리 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로이드는 얀센의 의견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에게 친근한 표정을 지으며 넌지시 질문했다.
"다른 복안도 있나?"
"있습니다."
"그게 뭐지?"
"이태수의 비리 혐의를 공개적으로 발표하는 겁니다."
"미국에서 아무리 그래봤자 별무소용 아닌가?"
얀센이 고개를 완강히 저으며 단호한 어조를 내뱉었다.
"이태수에게 부패독재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덧씌운다면, 그와 돈독한 우정을 나누고 있는 트램프의 지지율이 밑빠진 독처럼 허물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트램프의 이미지 역시 급전직하 한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의장님."
로이드의 만면 가득 흡족한 표정이 길게 번져갔다.
직후 수석 보좌관을 향해 날 선 언사를 내뱉었다.
"이태수 대통령에 관한 긴급 청문회를 준비하도록."
"그리고 김태섭을 주요 증인으로 채택해!"
"그리 조치하겠습니다. 의장님."
***
청와대 집무실.
트램프와 핫라인을 이용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로이드 하원의장이 각하를 대상으로, 하원 청문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미국 대통령 직권으로 막을 수 없는 겁니까?
-저도 그러고 싶지만, 하원 청문회 개최 권한은 하원의장의 전결 사항인 관계로...
트램프가 말끝을 흐렸다.
-김태섭의 종적을 파악하셨습니까?
-지금 찾는 중이니까 은신처를 파악하는 즉시 각하께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저 대신 수고해 주십시오. 그럼 이만.
핫라인을 종료한 뒤 이효상 외교부장관을 면전에 호출했다.
이효상이 심각한 얼굴로 보고를 올렸다.
"하원 청문회에서 김태섭이 각하의 비리를 폭로할 예정인거 같습니다."
내심 우려하던 일이 발생했다.
태섭은 나에 대해서 많은 걸 아는 놈이었다.
녀석이 미국 하원 청문회에서 함부로 입을 나불댄다면 좋을 게 없었다.
내 귀중한 명예가 땅에 떨어질 것이 불보듯 훤한 탓이었다.
이효상을 내보낸 뒤,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김태섭의 증언 내용을 한국 시민들이 접하지 못하게 해!"
"신문과 방송, 인터넷, SNS를 철저하게 검열하라고!"
"명하신 대로 조치하겠습니다. 각하."
문체부장관을 내보낸 후 강태호를 면전에 불러들였다.
"솜씨 좋은 단원들을 미국으로 급파해."
"미국 현지에서 처리할 생각이십니까?"
고개를 저으며 답변했다.
"김태섭의 신병을 확보하는 즉시 한국행 비행기에 놈을 태워."
"넵. 각하."
***
국토안보부에서 근무 중인 찰리 모튼 요원은 트램프의 명령을 완수하기 위해, 로이드 하원의장의 핸드폰을 은밀히 감청하고 있었다.
그는 검은색 벤 차량 안에서 도감청 장비를 조작하는 한편, 헤드폰에서 들려오는 로이드의 목소리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그는 로이드의 목소리를 A4 용지에 빼곡히 채워넣은 뒤, 녹취록을 면밀히 검토했다.
그러기를 문득, 모튼의 두눈에 한가닥 이채가 스쳤다.
그는 녹취록에 자주 등장하는 지명에 시선을 고정했다.
모튼은 빈 수첩에 '뉴저지'와 '린든'이라는 지명을 차분히 적어내려갔다.
그날 밤.
뉴저지 인근의 린든파크에 국토안보부 요원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사복 차림으로 주변의 주택가를 하나씩 훑어갔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로이드 의장의 보좌관들이 자주 애용하는 도요다 프리우스 차량을 어렵지 않게 발견했다.
국토안보부 요원들은 창문에 어렴풋이 비치는 동양인 일가족을 파악하자마자 어딘가로 급히 전화를 걸었다.
<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1 > 끝
ⓒ 방탄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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