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메라 산
늦지 않은 저녁시간이었기 때문에 공방에서 나온 후에 바로 후작을 찾아갔다.
“그래. 무슨 일이냐?”
후작은 쌓인 일을 처리하느라, 꽤나 바빠 보였다. 책상위엔 책 3권정도 높이의 서류가 쌓여 있었다.
“외출을 좀 다녀오려고 합니다.”
“외출? 뭐, 왕궁에만 박혀 있었으니, 답답했겠지. 그래. 다녀 오거라. 그런데 어디를 가려고 하느냐?”
후작은 나를 보지도 않고, 책상에 고개를 묻은 채로 허락을 해주었다.
“피메라 산에 갑니다.”
“아, 피메라 산. 그래 잘 다녀... 엉?”
전광석화처럼 들어 올린 후작의 얼굴 덕분에 책상에 있던 서류들이 파라락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어, 어딜 간다고?”
“피메라 산입니다.”
후작은 이제야 내가 예상한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다.
“갑자기 거길 왜 가느냐? 그곳엔 볼 것도 없고, 인간도 없어.”
“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가야지 제가 받은 뿔로 무기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 장인이 그러는데 그 뿔이 보통 물건이 아니랍니다.”
“그 요상한 뿔이?”
후작은 아직도 어금니를 별 볼일 없는 물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벙찐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음, 피메라 산에 간다고 쳐도, 드워프들이 널 도와주겠느냐? 그들은 쉽게 움직이지 않아.”
“제 장인인 기라녹스의 고향이 거기랍니다. 그래서 별문제 없을 겁니다.”
“네 장인은 인간이잖아.”
“네. 조금 사연이 있어서, 어찌 됐든, 별일 없을 겁니다. 딱히 그 지역엔 위험한 것도 없잖아요.”
“뭐, 신성 왕국의 땅이니...”
그곳엔 위험한 게 없지만, 외부에서 나타 날거다.
왕궁에서 뿔로 무기를 만든다고 2번이나 말했다. 왕 앞에서 그리고 공작 앞에서.
꽤나 많은 사람들이 들었으니, 분명 베일의 귀에 들어갔을 거다. 베일도 무언가를 준비할게 뻔하니, 놈보다 먼저 움직여야 한다.
“내가 허락해주지 않으면, 또 가출하듯이 나가겠지?”
“하하, 설마요.”
후작은 예전에 근처로 외출하는 척을 하며 아스 성에 갔던 것을 얘기하고 있었다.
“휴, 도망치는 것 보다는 허락을 해주는 게 낫겠지. 대신 아린이랑 같이 가거라.”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조심히 다녀오너라.”
“음...”
“왜?”
“아닙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싱겁긴.”
후작에게 베일을 조심하라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그렇게 되면 여러 가지를 설명해야 되는데, 지금은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베일은 내가 혼자 처리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쉽지는 않겠지만...”
**
모든 것이 어둠에 잠겨 녹아든 방, 오직 한 쌍의 눈동자만 지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퍽!
타오르는 눈동자를 가진 남자 앞에 무릎을 꿇고, 돌바닥에 머리를 내리찍고 있는 자가 있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전 아무 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제발!”
퍽!
피가 터지도록 땅에 머리를 박는 사내는 유렌에게 패배하고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했던 다르였다.
퍽!
다르의 앞, 아무 말도하지 않고, 무서우리만큼 뜨거운 눈빛을 태우고 있는 자는 베일 파비앙이었다.
“보고에서 어금니를 챙기지 못 한 순간, 네 존재가치는 끝났다.”
평소의 다정한 목소리와는 전혀 달리, 베일의 목에선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소리가 나왔다.
“거기다 유렌 록스 그 멍청한 놈이 거저먹으라고 준 기회까지 3초 만에 걷어 차버렸지. 지금 네놈의 목을 뜯어버리는 것이 나은 선택 같은데? 네놈에게 기회를 또 줘야하는 이유가 있나?”
베일의 기괴한 목소리에 다르는 전신에서 식은땀이 미친듯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 그래서입니다. 저는 그놈의 도발에 넘어갔습니다. 한 번 당했으니, 두 번 다시는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원거리에서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서 놈의 숨통을 확실하게 끊어 놓겠습니다. 제발! 한 번만 기회를!”
퍽!
다르는 다시 땅에 이마를 가져다 박았다. 그의 이마는 찢어 질대로 찢어져서 뼈가 보일 지경이 되었다.
“...”
기나긴 침묵의 시간, 다르는 태어난 이후로 이정도로 공포스러운 순간을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극심한 이마의 고통도 베일의 공포 앞에서 사그라지고 있었다.
“피메라 산, 사지마 산, 포른 언덕, 포카테.”
베일의 입에서 나오는 지명에 다르는 홀린 것처럼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것은 시험이었다. 모른다면 이 자리에서 베일에게 목이 뜯겨 나갈 거다.
다르는 자신에게 천천히 뻗어오는 붉은 손을 보며 미친 듯이 머리를 회전시켰다. 네 지역의 공통점과 유렌, 뿔의 관계를 생각하니, 하나의 답이 나왔다.
“드, 드워프입니까?”
다르에게 뻗어오던 피를 머금은 것 같은 붉은 손이 멈췄다.
“유, 유렌이 뿔을 재련하기 위해 갈만한 드워프가 있는 곳입니다!”
정답을 말했는지, 사신 같았던 붉은 손이 다시 베일에게로 되돌아갔다. 잠시간의 침묵 뒤 베일의 입이 열렸다.
“각 지역에 늑대들을 보내놓았다. 유렌이 그곳에 도착한다면 바로 연락이 올 거다.”
베일의 목소리에서 으르렁거림이 사라지고 원래의 평온한 어조로 돌아왔다.
“아. 네!”
“늑대 스물을 주지, 네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퍽!
다르는 이미 찢어질 만큼 찢어진 자신의 이마를 다시 바닥에 박았다.
“나가.”
“정말 감사합니다.”
다르는 연신 고개를 숙인 후에 자신의 목을 쓰다듬으면서 밖으로 나갔다.
“...”
다르가 나가고 나서도 베일은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지? 나와.”
“헤헤헤!”
시꺼먼 어둠에서 십대 초중반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천진난만한 웃음을 흘리며 튀어나왔다.
“에이! 알았으면 알았다고 말을 해야지! 부끄럽게!”
아이의 가벼운 목소리와 웃음소리에 베일이 인상을 찌푸렸다.
“여전히 그 취미는 이해하기 어렵군. 다 늙어서 뭐하는 건지.”
“네가 인간의 척추를 생으로 뽑는 것과 다르지 않아. 그냥 취미니까.”
“그래서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긴, 동업자를 도와주러왔지. 그들이 의심하기 전에 끝내야 할 거 아니야.”
아이의 말에 베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유렌 록스는 현재 왕궁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인데, 행방불명으로 끝내면 안 되지. 문제가 생길 거야.”
베일도 그것에 공감을 하는지 아이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어차피 방금 나간 쓰레기도 죽일 생각이잖아. 내 능력을 사용하면 유렌과 방금 나간 쓰레기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서로 죽이게 만들 수 있어.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딱 좋은 상황을 만들 수 있다고!”
“원하는 것은?”
베일은 눈을 감고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에 다시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섭섭하게 동업자끼리 원하기는 뭘 원하겠어. 네가 오르게 될 위치에 나도 오르게 도와달라는 거지. 상부상조 하자는 거야.”
베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탁월한 선택이야. 이 몸의 능력으로 유렌과 저 쓰레기를 확실하게 동귀어진하게 만들어 주지. 깔끔하게 끝날 거야. 헤헤헤.”
아이가 밖으로 나가면서 흘리는 웃음이 베일의 방을 공허하게 울렸다.
**
다음날 아린, 기라녹스와 함께 후작가를 나와서 바로 마탑으로 이동했다.
“기라녹스, 피메라 산에서 아스성까진 어떻게 간 거야?”
“산을 내려갈 때 사부님이 보석을 쥐어주셨습니다. 그걸로 아스 성까지 이동한 후에 자리를 잡았죠.”
“워프?”
“아뇨. 걸어서요.”
“걸어서? 허, 얼마나 걸렸는데?”
“반년정도 걸렸네요. 일부러 천천히 이동하기도 했고.”
이동하는데 반년, 현대에서 온 내겐 정말 끔찍한 소리였다. 마탑의 워프가 없었다면 정말 피곤한 세상이었을 거다.
기라녹스의 지루한 여행담을 들으면서 우리는 피메라 산과 가장 가까운 마탑이 있는 베하른 성으로 워프했다.
“음...”
베하른 성의 마탑을 나오자, 다른 나라에 들어왔다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무지하게 크네.”
왕국의 왕도나, 제국의 수도보다도 깔끔하고 정돈된 거리에도 인상적이었지만, 마을 중앙에 있는 거대한 여신상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움직였다.
“역시 신성왕국인가.”
이 베하른 성은 신성왕국 이오칼에 속해있기 때문에 종교 국가의 색채가 진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사람들 역시 깔끔한 옷과 단정한 머리를 하고 있었다.
“여긴 와봤어?”
“네. 사실 여기에 정착할까 생각도 해봤는데, 나라가 나라다보니. 피곤한 일이 많아서요.”
기라녹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이오칼은 신성왕국이다 보니, 해서는 안 될 것도 많았고, 해야 하는 것도 많았다.
“저는 딱히 종교가 없다보니, 신성왕국에 있기는 좀 힘들었어요. 이것저것 방해하는 것도 많았고.”
“그렇겠지.”
“그래서 자유로운 크라시스 왕국으로 간 거에요. 전 드워프 마을에서 자라서 소속된 국가가 없었으니까요.”
신성왕국과 크라시스 왕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말을 구입한 후에 바로 피메라 산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이동을 하면서 아직도 아린과 기라녹스를 서로 소개시켜주지 않은 게 생각이 났다.
“아린.”
“네.”
“내가 네게 준 그 세검. 이 친구가 만든 거야.”
“아!”
“기라녹스 너는 아린이 가지고 다니는 검이 네가 만든 검이라는 거 알고 있었지?”
“아, 네. 당연히...”
기라녹스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젊으신데 이런 뛰어난 검을 만드셨다니, 대단한 실력입니다.”
“아, 아니에요. 기사님이 특별하셔서 그런 겁니다. 제가 잘한 게 아니에요.”
“좋은 검을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잘 쓰고 있습니다.”
“하, 하이고!”
아린이 고개를 살짝 숙이자, 기라녹스는 바로 말에서 내려서 아린에게 폴더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어, 언제라도 찾아오시면 완벽하게 수리해드리겠습니다. 제 검을 사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제가 감사합니다.”
둘이 사이좋게 인사를 하는 것을 보니, 자연스럽게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
“드디어 피메라 산인가.”
말을 타고 이동한지 4일이 되어서야 피메라산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안 더우세요? 저야 매일 불과 씨름을 하니 괜찮지만.”
“난 괜찮은데 아린은 조금 힘들어 보이네.”
“저도 괜찮습니다.”
아린의 얼굴엔 땀이 구슬처럼 맺혀있었다. 가볍게 차려입었어도, 기온이 높다보니 상당히 힘든 모양이다.
“위로 가면 갈수록 조금씩 더 더워 질 거예요.”
산의 중턱 쯤 오니, 천무지체의 수화불침 상태에서 약간의 온도변화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기온이 상당히 높아진 상태였다.
“아린, 그 검을 뽑아서 정령...”
아린에게 좋은 방법을 알려주려고 할 때 내 귀에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렸다. 흡사 나뭇가지를 밟아 부러뜨린 것 같은 작은 소리가.
“왜 그러십니까?”
“잠시만 조용히.”
청각에 내공을 최대한 집중한 뒤 온슬론의 감시탑으로 청각을 2배 확장했다.
쿵.
“핵을 노려...”
“보여야 노리지 이 영감탱이야!”
“쓸데없는 소리 말고 집중해!”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 그리고 쇠가 낀 것처럼 걸걸한 목소리가 속삭이듯 들려왔다.
작은 소리였지만,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건 드워프들이 무언가와 싸우고 있는 소리였다.
“기라녹스, 아린.”
“네? 대체 무슨 일이신거에요?”
“먼저 갈 테니, 바로 쫓아와.”
“네? 길을 찾기 힘드실 텐데...”
“뭔지는 모르겠지만, 드워프들이 습격을 당한 것 같아. 최대한 빨리 이동해.”
“네?”
파아앙!
그 말을 남기고 말에서 내려서 소룡지보를 극성으로 운용했다.
“대, 대공자님!”
기라녹스가 불렀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고, 직선으로 소리가 들린 곳을 향했다.
벌써, 베일이 습격을 한 건가? 하지만 내가 갈 곳은 한두 군데가 아닌데 어떻게.
콰앙!
쿠구궁!
위로 다가갈수록 파괴음과 충격음이 거세지고 있었다.
“이놈!”
“쿠어어어!”
쾅!
경사가 높은 언덕을 뛰어넘자, 눈앞에 드워프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골렘...”
전신에 용암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4m 크기의 용암 골렘 3마리와 키가 150cm도 안될 것 같은 드워프들이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미 한 번 밀렸는지, 강철로 만들어진 마을의 입구가 처참하게 파괴 되어 있었다.
“음...”
나는 내 능력에 대해 생각을 하며 내 천적이 누구인지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답은 금방 나왔다.
골렘.
특수 능력에 속하는 독이 전혀 통하지 않고, 외부도 단단해서 암기로 뚫기도 쉽지 않다. 거기다 핵을 파괴하지 않으면 트롤 이상으로 재생이 빠르다.
나중에 나올 다이아몬드 골렘은 어떻게 잡아야 할지 상당히 막막하다고 생각했었다.
“용암 골렘이라. 조금 귀찮겠어.”
용암 골렘도 쉬운 상대가 아니다. 그래도 드워프들을 도와주기 위해, 앞으로 움직일 때 내 눈에 용암 골렘의 몸속에서 약동하는 작은 구슬이 보였다.
“저건...”
골렘의 핵,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무너져 내리는 골렘의 심장이 내 눈에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아, 천적 맞네. 내가 골렘의 천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