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7 「4-6 : 여행길(6)」 =========================
몸은 튼튼한데 피로는 쌓였다. 누가 이 말을 듣는다면 ‘너님 국어 공부 안 함? 한국어 쓸 줄 모름?’이라고 하겠지. 사실, 그게 맞다.
피로가 쌓일 정도로 몸을 움직였으니 피곤해야 하는데, 몸은 튼튼한데 피로만 쌓였다고? 그건 마치 ‘이런 시발놈! 내가 너의 영혼을 때려주마! 물론 니 영혼을 때리기 위해서는 몸도 같이 때리겠지만, 영혼만 아프게 때려줄게!’라는 말과 같다. 헛소리라고.
지방이긴 하지만 그래도 지방에서는 두 번째로 알아주는 대학 나왔고 학점까지 잘 받았다. 비싼 쌀밥 먹고 열심히 잘 살아왔는데 왜 계속 헛소리가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걸까? 참으로 알 수가 없었다. 자세히 생각해보니 이 ‘하렘 어드벤처’ 세상에 온 후부터 진짜 온갖 미친 말이 다 튀어나왔다.
그걸 기반으로 생각하자면……좀. 충격적인 결론이긴 한데. 난 원래부터 미쳐 있었지만 그 광기(狂氣)를 드러내기에는 내가 살던 세상이 너무 틀에 박혔기에 아무것도 못한 게 아니었을까 싶었다.
내가 하는 미친 말을 들어도 가끔 ‘이딴 게 나라니, 진짜 싫다 시발……’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다고. 그런 내가 거리낌 없이 미친 짓 했다간 정신병원이나 감옥에서 평생을 썩혀야 했겠지.
이 상황과 더불어 ‘감옥’이라는 말이 나오니 생각나는 영화가 있었다. 그 유명한 명작, 쇼생크 탈출. 쇼생크 탈출에서는 다양한 인물이 나오지만 그 중 인상 깊었던 것은 레드와 브룩스였다.
거의 평생을 쇼생크 교도소에서 보낸 브룩스는 가석방이 되어 세상으로 나간다. 하지만 완전히 달라진 세상에 괴리감을 느꼈고, 쇼생크에 있었던 때와는 달리 주변에 아무도 자기 마음을 공감해줄 사람이 없음에 대해서도 괴로워한다.
오랫동안 감옥에 있던 그가 가석방을 한다니 동료들은 축하해주러 가지만 정작 본인은 칼을 든 채 친구의 목을 베려 하고 있었다. 현실로 나가고 싶어 했지만 정작 밖에 나가게 되니 그 불안함과 앞으로의 막막한 미래. 그리고 무얼 하면 좋을지 모르는 마음이 그를 흥분케 만든 것이리라.
인간이란 참으로 웃긴 것이다. 자유를 포함해 많은 것. 자기가 현재 가지고 있지 않은 걸 그토록 원하면서도 정작 ‘야, 이거 원했지? 옛다, 가져라!’라며 자기 손에 들어오면 뭘 해야 할지조차 모른다. 원하기만 할 뿐, 정작 얻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니. 참으로 미련하고 어리석은 존재가 아니겠는가?
감옥의 동료들은 교도소의 담벼락을 바라보며 ‘저 담벼락은 존나 씨발 신기한 거야. 여기에 있을 때는 누구나 넘어가고 싶어 하지만 오래 있으면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게 돼’라는 식의 말을 한다. 부자유로운 인생과 생활에 적응이 된 나머지, 자기한테 주어질 자유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게 됐다는 의미겠지.
약간 다르긴 하지만 지금 있는 ‘현재(現在)’에 안주하고 싶다는 의미에서 보자면, 이 ‘하렘 어드벤처’라는 세상은 확실히 안주하고 싶은 곳에 속했다. 처음에는 돌아가고 싶었던 마음으로 간절했지만……지금은?
돌아가긴 커녕 계속 여기에 있고 싶었다. 내가 지금 돌아가고 싶은 곳은 집이 아니라 프레그넌트였고, 그곳에서 날 반길 아이나와 마을 사람들. 그리고 내 아내들과 함께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마저 간절히 들었다.
일이 있고 문제가 있어 이 여행길에 올랐지만 그 목적은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시금 프레그넌트에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다시 돌아가기 위해 보금자리를 떠난다니. 아이러니하군.
여행을 떠난 목적은 내 네 번째 아내이자 프레그넌트의 촌장(村長), 아이나의 동생을 데려 오기 위함이었다. 아이나와 아이라, 두 명의 딸을 낳은 아이나의 어머니는 머지않아 유명(幽明)을 달리했다. 어머니의 뒤를 이어 촌장을 맡은 건 좋았지만 동생인 아이라한테 신경을 쓰지 못했기에 그녀는 프레그넌트를 나갔다.
그런 그녀한테 마력을 5배나 증폭시켜주는 마력증폭기. 구슬의 형체를 띤 증폭기를 내가 전해주게 됐다. 난 아이나와 결혼을 하며 그너의 동생인 아이나를 데려오겠다고 했다. 전해주는 김에 데려오다니. 나도 참 웃긴 놈이다. 데려올 수 있다는 확신도 없는 주제에 뭐 하러 그런 약속을 했을까?
아! 물론 ‘억지로 데려올 수는 없다’라는 말은 이미 했다. 정말로 남고 싶은 게 아이라의 자유 의지라면, 그것 또한 존중해줘야 하니까. 누군가 지금까지 내가 겪은 일을 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거 같았다.
[야, 넌 억울하지도 않냐? 넌 원래 세상에서도 원하지 않는 일에 말려들었었잖아. 니가 이 세상이 예전에 있던 곳보다 좋다지만, 결국 여기든 저기든 간에 좋아하지도 않는 일에 휘말린다는 건 공통된 점 아냐?]
맞는 말이다. 단지 그 빈도(頻度)와 정도(程度)가 좀 달라진 거뿐이지.
[그뿐이냐? 생각해 보라고. 원래 있던 세상은 니 목숨을 담보로 싸워야 할 정도로 각박한 곳은 아니었어. 웃기잖아? 여자랑 섹스하는 거 외에는 아무런 이득도 없고 좋은 점도 없는 이 세상에서는 어찌 됐든 기본적인 담보가 목숨이야. 원래 세상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곳이라고!]
이것도 맞는 말이다. 보통은 ‘아냐! 그렇지 않아!’라며 이 ‘하렘 어드벤처’의 좋은 점을 설명해야겠지만……저 말을 들으니 반박할 수가 없었다. 섹스 외에 별 좋은 점은 없군. 컴퓨터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고. 음악도 없다.
아, 그렇다고 싫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여성과의 섹스가 너무 즐거울 정도로 이 세상이 마음에 들긴 했으니까. 그것마저 없었다면 아마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려고 여행길에 올라 있었겠지. 나도 진짜 속물이다.
헌데 어쩌겠냐? 이 세상은 그야말로 인간의 욕구를 매우 잘 표현해주는 곳이었다. 인간한테는 3대 욕구가 있으며, 이는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을 정도로 절실한 본능이다. 식욕(食慾), 성욕(性慾), 수면욕(睡眠慾)이 바로 그 세 개다.
이거 외에도 다양한 욕구가 있다만, 사람들한테 물으면 대부분 저 세 개를 대답한다. 그 정도로 중요한 거지.
식욕? 좋다. 여기 있는 먹을 건 내가 살던 곳과 아주 다르지는 않으니까. 찾아보면 쌀밥도 있다. 된장이나 우리 민족 고유의 김치 따윈, 난 안 먹는다. 시발 내가 왜 고기를 놔두고 민족 전통의 음식만 처먹어야 하냐? 애국심 마케팅 작작 해라. 그 빌어먹을 애국심 마케팅 또한 내가 한국을 싫어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였다.
웃기는 건……수면욕 또한 내가 한국을 싫어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는 사실이지. 수면욕이 대체 뭘 잘못했길래 한국을 싫어하냐고? 아니, 어……. 뭐라고 해야 하지?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자랑하면서도 야근, 군대식 문화, 좆같은 대한민국을 계속 유지하려 드는 멍청한 윗대가리들. 그놈들 덕분에 잠시 들어갔던 회사에서도 잠 같은 건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비단 회사에서만 그랬을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수능을 위해 12년을 뼈 빠지게 공부해야 했다. 그 와중에도 잠은 조금밖에 잘 수 없었으며 늘 출세와 수능 대박, 좋은 대학과 멋진 미래만을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나중에서야 금수저가 살기 좋고 나 같은 흙수저는 죽어 마땅한 세상이었다는 걸 알았기에 거의 쓸모없는 노력이긴 했다만…….
노력해도 금수저, 선택받은 자, 대기업 부자나 아들 같은 사람들한테는 결코……아니. 절대로 도달할 수 없다. 그런 걸 가르쳐 주지는 못할망정 ‘노력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 같은 병신 헛소리나 지껄여대는 사회 & 윗대가리 + 꼰대들 덕분에 제대로 잠도 못 잤었지. 그렇기에 수면욕 또한 생각하면 욕이 저절로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성욕. 지금까지 여성과 사귀긴 커녕, 여자와 함께 어떤 행동을 한다는 경험 자체가 거의 전무(全無)했던 나한테 있어서 이 ‘성욕’만큼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식욕과 수면욕이 안 좋다 쳐도 성욕으로 그 두 개를 커버할 수 있을 정도라니……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이곳에서는 원래 나나 혜린이 살던 세상의 상식 따위는 병신이나 다름없었다. 오직 남자는 나 하나뿐. 벌건 대낮에 여성과 야외 섹스를 벌이더라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간주되었고, 모두의 응원과 축복 아래서 강간 & 질내사정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혁신이자 이 ‘하렘 어드벤처’의 세상에 남아있는 원인이 아니겠는가?
300명 이상이나 되는 여자들과 동시에 섹스를 해도.
3~4명이나 되는 여자들과 혼인 관계를 맺어도.
보지나 엉덩이에 내 좆을 박은 채 마을을 돌아다녀도.
그 누구 하나 날 비난하는 이도, 매도하는 자도 없었다.
그저 누군가와 함께 있고, 그녀들과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돈이나 명예, 지위가 아니라 정말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있을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고, 즐거웠고, 감동스러웠다.
그것뿐이랴? 성욕을 위해 특별한 마법까지 쓸 수 있었다. 내 좆에 입을 맞추면 나한테 몸과 마음을 지배당하는 ‘자지의 맹세’라는 마법이. 처음에는 웃겼고 병신 같았다. 솔직히……웃기잖아? 누가 그딴 걸 믿겠냐고.
하지만 실제로 효과가 있었고 덕분에 이혜린이라는 대한민국 섹시 가수를 내 아내로 삼을 수 있었다. 뭐……그거로 이런 저런 일이 있었다만. 그뿐만 아니라 민간인으로서는 거의 절대로 얻을 수 없는 소총까지 마력으로 된 탄알을 쓰며 괴물과 싸울 수 있었다.
마치 나만을 위해……남자만을 위해 준비된 RPG를 플레이하는 느낌이었다. 솔직히 가끔은 이 세상에서 난 용사나 주인공 같은 포지션이 아닐까 싶었다. 그게 나쁜 일은 아니잖아. 지금까지 난 내가 원하지 않는 일에 휘말려 제대로 된 행복 따위를 누려본 적이 없었다. 특별한 재능이나 능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
그런 내가 무기로 괴물과 싸우며 레벨 업을 하고, 돈을 얻었다. 사냥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었고 ‘좋은 사람’으로 대우받다니!
그게 얼마나 멋지고 대단한 일인지는, 겪어보지 못한 자들만! 이해할 수 있는 자들만 이해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난 그 모든 상황에 해당됐기에 더욱 이 세상을 좋아하게 됐다.
이곳에 남고 싶다. 더 이상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긴 싫었다. 난 원래 세상에서 27년 정도를 살았고, 이곳에서는 3개월 남짓 살았다. 웃겼다. 27년의 1/10. 2년 7개월은커녕 그 반의 반도 되지 않는 시간밖에 안 살았는데 난 이곳을 원래 있던 세상보다 더욱 좋아하고 사랑하게 됐다.
“그래……넌 여기 남아야 해.”
“……!?”
뒤를 돌았다. 이상하다? 난 시커먼 어딘가에 서있었다. 위도, 아래도. 옆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내가 왜 이런 시커먼 곳에 있지? 난 잠들었던 것 아니었나? 그런데 내가 왜 여기 서있는 거지? 혜린이는? 로라는? 메이는? 다 어디 갔지?
“이 세상이 마음에 들지……? 그렇지?”
백발……? 하얀 머리카락을 본 순간 깜짝 놀랐다. 이상하다……? 이 ‘하렘 어드벤처’에서는 노화(老化)가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머리카락이 하얀 색이지?
“흐, 흐흐……그래. 좋지? 원래 세상에서는 겪을 수 없었던 핑크빛 이벤트로 가득하니까?”
“……어, 어?”
“어떻게 그런 걸 아냐고? 후후, 알지! 당연히 알지……모를 리가 있겠어? 주인공만 13번째인 병신 삼류 RPG 스토리 라인도 몰라서야……으, 으흐흣!!”
위험하다. 아무런 증거도 없고 근거도 없었지만 내가 가진 본능(本能)은 이 여자가 위험하다고……이 상황 자체가 너무나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즐겁지? 즐거웠을 거야! 그럼, 즐겁고말고! 니 자지를 받으며 열락(悅樂)에 겨워 신음과 침, 보짓물을 질질 싸는 여자들이 듬뿍 있으니까! 넘쳐나니까! 죽여도 대신할 년들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뭐야……뭐냐고 이 여자……!? 생긴 건 20대에 가까운 여성이지만 하얀 백발이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게다가 저 말투. 그야말로 내 모든 걸 꿰뚫어보는 듯했기에 뭐라고 대답할 수조차 없었다.
“오래 기다렸고……이제야 내 오랜 노력도 결실을 맺을 거야……! 그럼, 13번째인데! 지금까지 오지 못했던 곳까지 단숨에 와버린 용사이자 주인공인데! 암, 그렇고말고!”
“무, 무슨 말씀이세요……? 13번째라뇨?”
겨우 입을 열어 궁금한 것 중 하나를 묻자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마저 흘러내린다. 무섭다. 웃으면서 우는 사람이라니. 웃긴데 무섭다. 웃겨서 웃는 건지, 울 수가 없어서 웃는 건지.
“여행의 시작은 어디가 되든 상관없지만 그 끝은 분명해……후후, 꼭 와! 알겠지? 꼭 와야 해! 그럼, 와야지! 이곳은 결국 ‘하렘 어드벤처’니까……!!”
다른 사람은 결코 알 수 없는 그 단어. ‘하렘 어드벤처’라는 단어를 읊자 더욱 소름이 돋았다.
“서, 설마……당신은……!?”
“아, 아하하하! 온다! 드디어 온다! 이제야 내 바람이 이루어진다! 꿈이! 내 갈망(渴望)이 채워진다! 으, 으하하! 아하하하핫!”
그녀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는다.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지만 난 깨달았다. 저 눈물은 ‘기쁨의 눈물’이다. 오랫동안 바라던 소망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과 근거. 그 믿음과 근거가 그녀를 저렇게 만드는 거다. 나는 알 수 없지만, 그녀한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무언가’가.
안 그래도 시커먼 색이었던 세상이 점점 사라져간다. 검은색이 검은색을 흡수했고, 어둠이 어둠을 침식했다. 그녀는 웃으며 침식됐고, 구해야 하는지 도망쳐야 하는지 우물쭈물하던 나는 잠시간의 유예(猶豫)도 없이 그 어둠에 침식됐다.
† † † † † † † † † †
“으, 으윽……하악!!”
괴로워하던 육체를 작동시켜 겨우 숨을 뱉었다. 몸 안에 맴도는 더러운 기분과 공기가 빠져나가는 듯했고, 오랜만에 마신 공기에는 나무 향기와 고요함이 섞여 있었다. 손바닥에서 부드러운 무언가가 느껴졌고 그게 침대라는 걸 알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내가 깨어난 곳은 어느 방이었다. 적어도 조금까지 내가 있던 그 꿈. 시커먼 공간은 아니었다. 대체 뭐였지? 방금 꿈은? 그 여자는 뭐였지? 어떻게 ‘하렘 어드벤처’에 대해 알고 있는 거지? 그리고 대체 무슨 뜻이야? 13번째라니?
왼손으로 이마를 닦으니 땀으로 흥건했다. 내 몸이긴 했지만 이렇게 땀을 흘리다니. 감기라도 들었나? 왼쪽에 위치한 창문을 보니 해가 지는 게 보인다.
해가 져? 응? 어? 나, 싸울 때 밤 아니었나? 근데 해가 진다는 건……적어도 몇 시간 이상이 지났다는 의미인데?
“아빠……?”
힘겹게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메이가 손에 빵이나 과일 같은 간단한 먹을 걸 쟁반에 놓은 채 서있었다. 검은색의 탄력 있는 배리어 재킷이 메이의 몸이 가진 굴곡을 그대로 보여주는 건 역시 좋았다. 비싸게 돈 주고 산 보람이 있다니까 저 옷…….
“아빠……!!”
“그거 떨어뜨리면 안 된다!”
“어, 어?”
메이는 나한테 달려오려는 순간, 내가 갑자기 영문 모를 소리를 지껄이자 바로 움직임이 멎었다. 하지만 난 꼭 말해야 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미친놈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내 불안함은 늘 현실이 되었기에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말해야만 해!
“메이야, 그. 아빠 일어난 거 좋은데. 그 쟁반에 있는 거 막 던지면 안 된다……?”
보통 쓰러진 사람이 깨어나면 쟁반이나 손에 들고 있는 걸 던진 후 달려가서 껴안기 마련이다. 그런 이벤트 한두 번 본 줄 아냐? 하지만 실상 이런 상황에 직면하니 저 쟁반 위의 먹을 것들이 바닥에 떨어질 거라 상상해봤다. 더럽게 아깝잖아! 그건 또 누가 먹냐?
메이는 내 말에 황당한 거 같기도 했지만, 쟁반을 던지고 나한테 달려올 마음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던 모양인지 조심스럽게 쟁반을 옆에 있는 테이블에 놓았다.
으음, 내가 만약 감동적인 말을 하며 두 손을 벌렸다간 진짜 던지지 않았을까? 역시 사고는 무사고(無事故)가 최고다!
하핫! 보았느냐, 빌어먹을 운명아! 난 쟁반과 먹을 것이 바닥에 나뒹구는 운명을 바꾼 거다! 음홧홧!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메이는 날 꼭 껴안았다. 오랜만에 딸을 안으니 기분이 좋군. 어……물론 내 자지도 기쁜지 벌떡거린다. 이 새끼는 원래 일어났을 때부터 이 지랄이었다만, 감동적인 장면에서는 좀 조용히 있어주면 좋겠는데…….
“아빠, 괜찮아……? 이제 괜찮아?”
“난 원래 괜찮았단다.”
내 쿨하고 시크한 대답에 메이는 그녀답지 않게 표정을 찡그렸다.
“우쒸!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아빠, 밤에 상태가 어땠는지 알아? 피가 났고 몸도 많이 아팠어! 또 이상한 소리나 했었고! 정말 기억 안 나?”
“어, 베여서 피가 나고. 미친짓하고 그랬긴 한 거 같은데……정확히 기억은 못 하겠네.”
술을 마셔서 기억이 날아가는 사람도 존재하지만, 감정이 격앙(激昻)해서 기억이 날아가는 사람도 다수 존재한다. 난 후자(後者)에 속하는 사람이지. 눈물을 글썽거리는 메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아, 부드럽다. 진짜 부드럽다.
“걱정 마. 아빠 이렇게 무사하잖냐. 어……다른 사람들은?”
“크흥. 엄마랑 혜린 언니는 조금 전에 잠들었어. 둘 다 아빠가 걱정돼서 계속 여기에 있다가……미카 언니가 안 자면 쓰러질 거라 해서 겨우 잠든 거야…….”
머리를 쓰다듬어서 그런 걸까? 결국 울며 말하는 메이한테 ‘울지 마. 아빠 괜찮잖아’라며 어떻게든 진정시키려 했다. 그렇군. 두 명 다 조금 전까지 여기 있었다는 거구나.
미안함과 고마움이 동시에 날 감쌌다. 하아……혜린이한테는 옷도 사줘야 하는데. 일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 건 여기나 저기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그나저나, 미카라고……?
“미카는 무사해?”
“으응. 상처는 마법으로 치료했지만 독은 시간이 좀 지나야 해. 해독(解毒)마법은 써도 완치(完治)되는 데에 시간이 많이 걸리거든.”
역시 그렇군. 상처야 치료하면 말끔해지지만 원래 겪었던 고통이나 피로를 없앨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독 성분을 없앨 수는 있지만 그로 인한 체력 감소나 독에 의한 증상을 완전 제거할 수는 없군. 시간을 들여 회복을 기다리는 게 최고겠네.
오래 머리를 쓰다듬으니 이젠 기분이 좋아진 건지 메이는 웃고 있었다. 그래 임마. 웃어야지. 아무렴,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내 딸이자 아내인데. 일어나자마자 뭔가를 묻는다는 게 좀 그랬다만, 궁금한 거보다야 묻는 게 낫지 않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다치거나……그, 죽은 사람은 없어?”
“응! 이 부카케란 마을에는 괴물이 자주 어슬렁거리기 때문에 자주 피난 훈련 같은 걸 했대. 엄마도 그걸 보며 ‘사람들이 피난(避難)하는 게 정말 익숙하다’라고 했어. 우리 마을도 피난 훈련 같은 걸 해야 하나 하고 고민했대.”
으음……그럴 필요 있을까? 성벽에 의해 보호 받으니 그럴 필요까진 없을 거 같은데. 그래도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듯이, 어쩌면 피난 훈련도 필요할 거 같은데. 그 와중에도 경비대장으로서의 사명감을 잊지 않는 로라를 보니 로라답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워커 홀릭이라 해야 할지…….
“지금 몇 시야?”
“다섯 시. 아빠가 혹시나 일어나면 배고플까봐 먹을 걸 가져 왔는데……정말 일어나 있을 줄은 몰랐어.”
그야 그렇겠죠. 나도 내가 몇 시에 일어날지 모르는데 니가 예상하면 여기 있겠니? 돗자리 피고 점쟁이를 했겠지. 그나저나 배가 고프긴 고프네. 메이가 가져온 빵을 먹으니 배는 불렀지만 좀 더 본격적인 걸 먹고 싶었다. 아무리 못해도 12시간 이상을 잤는데 이걸로 배가 부를 리가 없잖아.
스스로 일어서려 하니 역시 데미지가 남아 있는 거 같았다. 후들거리던 다리는 결국 몇 발짝 가다 무릎을 꿇었고, 급히 메이가 지탱을 해줘서 바닥이랑 키스하지는 않았다.
부축을 받으며 화장실에 갔다 오니 더 배가 고팠다. 메이한테 부탁해 좀 더 먹을 것과 스프 등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먹은 후에야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혜린과 로라는 밥을 다 먹고 얼마 안 돼 방에 찾아왔다. 로라는 들어오자마자 내 입에 키스를 하며 날 끌어안았다. 혜린이는 ‘정말 괜찮아?’라며 몇 번이나 물으며 내 몸 걱정을 했다.
듣자 하니 괴물한테 베인 상처에서 피가 많이 난 걸 포함해 나도 독에 약간 중독됐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테이크 다운!’이라는 헛소리나 지껄이며 다이빙을 하질 않나, 총으로 괴물을 쳐죽이려고 하질 않나. 나도 어떤 의미로는 괴물이랑 동급으로 미쳤었던 거 같다.
두 명의 머리와 등을 쓰다듬으며 이젠 괜찮다고 했지만 바로 일어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적어도 오늘 밤은 지나야 원래대로 돌아온다나? 난 ‘에이, 내 몸 안에 독이 퍼졌었다고? 그래봤자 별 거 있겠어?’라고 생각했었는데……정말 별 거 있었다.
미카보다 덜 베였으니 독의 주입량도 미카보다 적은데 이 지경이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제대로 걷기도 어려울 정도라니. 남자 체면이 멋지게 박살나는 순간이다.
앞으로는 독성(毒性)에 대해 얕보면 안 되겠다는 교훈과 함께 미카에 대한 경외심(敬畏心) 또한 들었다. 미카는 독에 당하는 것뿐만 아니라 상처까지 입으면서도 이 마을을 지키려 했다.
눈물과 침을 질질 흘리면서까지 마을을 걱정하던 그녀를 생각하니 나보다 몇 배나 강하구나 싶었다. 난 지금 그녀보다 약한 독에 걸려서 이 지랄을 떨고 있는데, 그녀는 그걸 이겨내며 싸웠으니까 말이다.
독에 대한 내성(耐性)을 생각하면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건 요인(要因)이나 원인(原因)이 아니라 결과다. 그녀는 이겨내며 싸웠고, 난 중독된 것도 모른채 다이빙에 격투전까지 벌였다. 무지하게 쪽팔린다.
저녁은 먹었지만 간식까지 몇 개 먹은 후 혜린을 포함해 아내들은 다른 방으로 갔다. 내가 무사한 걸 보니 안심도 되고……또 같이 몸을 섞고 싶어 하기도 했지만 독으로 인한 데미지와 피로를 완전히 풀기 위해서는 푹 자는 게 낫다고 생각한 거 같다. 아쉽지만 고마운 배려에 만족하며 침대에 누웠다.
모두가 무사한 건 좋다. 죽은 사람도 없고, 미카도 무사하다. 나도. 그럼 남은 건 꿈에서 봤던 그 이상한 여자인데. 대체 무슨 말을 했지? 왜? 아무리 생각해도 단서가 없었다. 13번째란 대체 무얼 뜻하는 걸까. 답이 없는 생각과 고민을 끊은 건 해답이 아니라 난데없는 노크소리였다.
“예. 그, 움직이기 어려워서 그러니 들어오셔도 괜찮아요.”
내가 생각해도 참 병신 같은 대답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비웃지는 않았다. 이 야심한 밤에 누구지? 아내들이라면 자기들이라는 걸 알리고 들어올 텐데. 나무로 된 문을 열자 눈에 들어온 건 오렌지색의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경비대장, 미카였다.
============================ 작품 후기 ============================
다음 주부터는 다시 자정 후 업로드 방식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출근 시간대가 아니니 8시 이후에 올려도 큰 효과가 없고, 아침부터 이것 저것 준비하는 데에도 시간이 많이 걸려서요. 이번 주는 8시 이후 업로드로 진행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