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0 「13-9 : 왜 내 인생은 늘 이러냐……? (5)」 =========================
하렘 어드벤처의 세상에 와서 겪은 건 현실에서는 결코 겪을 수 없는 일들이었다. 그 중에는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일’들도 없지 않아 있었다만……그래도 대부분의 일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총부터 시작해 괴물, 마법, 중세시대의 가치관과 사람들, 마법 아이템 등.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이라도 살 수 없고 경험할 수도 없는 것들을 수없이 경험해 온 나한테 있어서는 그것들의 가치가 빛바랠 수밖에 없다. 너무나도 익숙해져서 그런 거겠지.
이곳에 온지 겨우 6개월이 조금 됐을 뿐인데 완전히 이곳의 사상이나 생활에 물들어 버렸다. 이 세상을 싫어할 이유는 없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좋아하는 일만 겪었던 건 절대 아니었다.
일어나자마자 괴물한테 두들겨 맞아 죽을 뻔한 적도 있었고, 납치당한 적도 있었지. 어떻게든 잘 해결됐기에 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당시에는 정말 목숨을 걸고 해결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솔직히……아무리 부자라도 못 사는 경험이라지만 목숨 걸고 싸우거나 납치당하는 것 한 번만 겪어도 족하다. 내 목숨이 죽으면 100원 넣어서 연결할 수 있는 오락실 게임도 아닌데 미쳤다고 목숨 걸고 그런 짓을 하고 싶어 하겠냐? 난 평화와 행복을 사랑하는 평범한 남자라고.
야만족 출신의 ‘안즈’라는 여자가 찾아왔을 때도 원만하게 일을 해결할 수 있어서 기쁘다고 생각했다. 처음 겪는 일이긴 했지만 그녀의 동료들을 캡슐로 임신시킬 수 있었으니 그걸로 일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남은 것은 안즈와의 섹스뿐이라고 생각했었지만…….
“……하아.”
한숨을 쉬며 다시 내 손에 걸린 수갑을 본다. 검은색의 수갑은 예전에 봤을 뿐 아니라 실제로 착용을 ‘당해봤기에’ 효과를 알 수 있었다. 현재진행형으로도 효과를 받고 있는 검은 수갑은 마력을 봉인하는 수갑이었다. 이쯤 되면 모두 다 내 사정을 어렴풋이 눈치 챘을 거라 믿는다.
“……어떻게 이 나이에 또 납치를 당하냐, 시발…….”
남자 신세린. 생애 두 번째로 당해보는 납치였다.
……그것도 마을에서 그녀들의 숲까지.
† † † † † † † † † †
“오케이, 오케이. 진정해. 상황을 다시 떠올려보자.”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건 결코 좋은 것이 아니지만 지금은 그런 거라도 해야만 했다. 내가 처한 상황은 예전에도 접해본 것이었지만 그때는 두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첫 번째. 난 혼자가 아니었다. 혜린이와 로라, 메이. 나까지 합쳐 총 네 명이 납치를 당했었지. 우리를 서로를 보듬어주며 그곳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 혼자.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나 혼자밖에 없는 거 같았다. 내가 일어난 곳은 그리 크지 않은 움막 같은 곳이었고 사람은 나밖에 없었으니까.
사람이 많으면 그만큼 진정도 되고 아이디어도 생각하기 쉽지만 현재 내 상황은 혼자. 아무리 봐도 납치를 당할 사람은 나 외에는 없었기에 이곳에 있는 프레그넌트의 주민은 나 외에는 없다고 생각해야겠지.
두 번째. 납치의 목적이었다. 지금은 그 당시 이야기를 꺼내면 쪽팔린다며 하지 말라고 날 때리는 안나와 니나다만, 그 당시에는 돈에 쪼들리며 목숨을 건 용병 생활을 해야만 했기에 경제적으로 매우 핍박(逼迫)을 당하고 있었다. 그런 삶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정액부터 시작해 좆물 캡슐로 일확천금을 노리고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여기에 납치당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 아니. 왜? 어째서? 서로 웃으며 이야기 끝냈잖아? 좆물 캡슐을 만들어 그녀들을 임신시키면 OK. 더군다나 안즈와 함께 짜릿한 밤을 보내기 위해 침대에까지 같이 들어가던 기억이 있었는데 어째서? 응?
원하는 건 다 얻을 수 있었는데 왜 나를 납치한 것인지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목적을 알 수 없으니 거래를 해서 풀려나고 싶어도 대화조차 할 수가 없었다.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대화를 못 하는 것도 있다만……누군가 오더라도 일단 납치의 목적부터 물어야만 했다.
침대도 없는 땅바닥에서 자는 건 꽤 오랜만의 일이었기에 색다른 느낌이 들었지만, 지금은 색다른 느낌에 감격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어, 내가 맨 처음 여기서 일어난 게 언제더라……? 그래, 한 시간 전쯤이었다. 침대가 아니라 딱딱한 땅바닥에서 일어나니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었지.
주변은 아무리 둘러봐도 경비대의 막사가 아니었고 문은 잠긴 상태. 창문으로 보이는 광경은 딱 봐도 숲이었다.
움막이라고 했지만 오두막이라고 불러도 큰 문제가 없을 공간에는 훈도시나 붕대 같은 것들이 몇 개 있었고, 그걸 보고 이곳이 야만족들의 집이라는 것을 단숨에 눈치 챌 수 있었다. 내가 못 알아볼까봐 이런 걸 놔뒀을 리는 없을 테니 그냥 정리정돈 자체를 별로 못 한다고 봐야겠지.
움막에 있는 건 옷……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하군. 가슴에 붕대 말고 훈도시를 입고 다니는데 그걸 옷이라고 부르긴 차마 뭐하기에 ‘장비’라고 불러야 할까 싶었다.
여하튼 옷(장비)에 관련된 것 외에는 집에 별 다른 물건은 없었다. 이들도 나처럼 홀로그램 윈도우를 통한 아이템 인벤토리를 가지고 있을 테니 집에 물건이 없는 게 그리 신기한 일은 아니었다.
여자들은 일정의 돈을 무료로 지급받고 있었기에 그걸 토대로 생활하고 있었다. 게임으로 치자면 매일 게임에 들어가면 주는 무료 로그인 보너스라 해야 할까? 그런 걸 주니 인플레이션이나 디플레이션 현상이 일어나지도 않았고 생활에 곤란함을 겪을 일도 없었다.
안나와 니나의 경우는 용병 생활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지만 집이나 터전을 마련하는 데에는 상당한 돈이 들었기에 그걸 못 했던 것뿐이지, 자체적으로 받는 돈은 누구든 간에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일종의 메인 서버에서 내려오는 무료 자원이라 칭하는 게 옳겠지.
그치만 집에 안락한 가구나 침대도 없이 휑한 걸 보니 좀 그랬다. 가구나 옷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지만 최근 이 세상을 살아가며 가구나 집을 꾸미는 것 또한 삶을 위해 필요한 것들 중 하나라는 걸 깨달았지. 현실에서는 옷을 산다는 생각조차 못 했던 내가 이렇게 변하다니. 엄마가 알면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겠군.
어, 아니지? 생각해보니 다른 의미로 눈물을 흘리시겠다. 첫 번째로 아무런 생각 없이 2천 명 이상의 여자를 임신시켰지. 그뿐이랴? 납치도 당해보고 괴물한테 살해당할 뻔도 했었고. 아예 임금이 되어 오픈 섹스나 난교 파티 등을 마음껏 즐겼는데 이걸 들었다간 미친놈을 키웠다고 울겠지.
아빠는 어떨까? 아빠 또한 남자니 내가 처한 상황을 부러워할 수도 있긴 하겠지. 하지만……스케일이 워낙 커져서 솔직히 실감을 못 할 거다. 임금이다 왕이다 하는 것도 아주 좋은 것만은 아니니까.
분신술이나 마법 덕분에 이곳까지 올 수 있었지, 내 고유의 능력만으로는 결코 이곳에 도달할 수 없었다. 이런 미친놈을 키웠다며 울 수도 있겠지만 그럴 경우 난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아니, 내가 너님들 자식이거든요? 너님들의 훌륭한 가정교육 때문에 이렇게 됐거든요?]
이걸 들으면 엄마랑 아빠는 펄쩍 뛰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고 화를 내겠지만……사실이었다. 빚 때문에 미래가 막힌 것부터 시작해 그 무엇 하나 자유롭게 할 수 없었던 내가 훼까닥 돌아 온갖 미친 짓을 한 것에 엄마 아빠의 책임이 1%도 없다고는 차마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었다.
물론 일이 이렇게 된 가장 커다란 이유는 바로 나다. 인정한다. 내가 바보 짓, 병신 짓, 머저리 짓을 하도 많이 해서 상황이 이렇게 됐다는 점에 대해 변명할 생각은 없다. 다른 사람한테 책임전가를 하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고. 책임전가를 한다고 한들 달라지는 게 없으니까.
하지만 부모님은 아니다. 힘들고 어려운 삶을 만들어 왔다면 그것을 타파(打破)할 방법을 찾아야 했건만, 그걸 나한테 모두 떠넘기고 해결해주기만을 바랐다. 오직 희생만을 바랐지. 내 인격과 성격, 내면이 뒤틀린 것에 부모님 탓은 단 1%도 없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다니. 나도 참 불쌍한 인간이구만…….
이것 또한 책임전가일 수도 있지만 가족한테만은 그 책임이 있었다. 어린 아이는 부모님을 보며 성장하기 마련인데 우리 부모님은 다른 건 몰라도 책임전가만은 기가 막히게 잘 했으니까. 책임전가도 잘하지만 그 책임을 인정하려고는 하지 않기에 괴로운 건 오직 나뿐이었다.
젠장! 여기 와서도 나 혼자 나쁜 새끼, 못된 놈, 키워준 은혜도 모르는 시발놈이 되어야만 한다니……!!
참으로 슬픈 일이지만 지금은 슬픔에 잠긴 남자 주인공 놀이 할 때가 아니다. 조금이라도 이 상황을 빨리 파악해 탈출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한숨만 쉬어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아. 진취적으로,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행동하는 거야! 밝은 미래를 향해 뛰어가는 거지! 얘들아, 가자! 저 석양을 향해!
“……지랄도 일품이십니다…….”
또 욕이 튀어나온다. 그럴 수밖에 없지. 일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쭉 내 손에 장착된 검은 수갑. 이게 있는 이상 난 아무것도 못 한다. 이곳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법을 못 써서 그런 것뿐만이 아니었다. 마법을 못 써도 문을 열고 도망칠 수는 있겠지.
근데……중요한 거 잊지 않았냐?
그래. 여긴 야만족이 사는 숲이다. 거의 그렇게 봐야겠지. 집 안에 굴러다니는 것부터 시작해 움막의 형태, 밖의 풍경. 내가 이곳에서 눈을 뜬 것 등. 아무리 봐도 난 납치당했다고 봐야 한다. 별로 좋지는 않지만……그래, 좋아. 좋다고 쳐. 여기서 도망친다 치자.
밖에 야만족만 있을 거 같냐?
괴물도 득실거릴 텐데?
야만족은 마력은 약하지만 굉장한 힘을 가졌다고 들은 적이 있다. 그 굉장한 힘에 대해 자세히 들은 적은 없지만, 그런 힘을 가지고도 괴물들과 싸워 죽었다. 그렇기에 100명 남짓한 인구밖에 남지 않았다고 들었으니까. 마법도 못 쓰는 내가 그런 괴물들과 맞닥트린다면?
좆망 ^0^/
지옥 입갤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느낌이다.
날 납치한 것뿐만 아니라 수갑을 채워 내 행동을 제한한 것까지 계산한 거라면……솔직히 칭찬해주고 싶었다. 기분은 매우 더럽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겨우 단 한 개의 도구. 이 마력봉인 수갑으로 다 봉인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나한테 남은 선택지는 그냥 여기서 입 닥치고 기다린다는 것밖에 없었다. 죽기 싫으니까.
한 시간이나 이렇게 혼자 있으니 대부분의 생각은 정리가 됐다. 일단 왜 납치를 했는가, 원하는 게 무엇인가 등을 물으며 이곳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궁리해야겠군. 적어도 나한테 원하는 게 있으니 납치를 한 게 아니겠는가? 그런 면에서 보자면 절대 날 죽이지는 않겠군. 하핫, 여기서도 목숨은 부지할 수 있어서 참 좋네?
……정확히 말하자면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어서 좋지만, 그 외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 불안해 미치겠다. 하아……어쩌다 내가 이런 꼬라지가 된 거지? 아직 평화를 누린지 2주도 채 안 됐는데……. 움막의 천장을 보며 ‘내가 왜 이 꼬라지가 된 걸까?’라는 질문에 대해 생각해본다. 답은 뻔하지.
“시발, 납치당했으니까 이 꼬라지가 됐지! 진짜 삶이 왜 이 모양 요 꼬라지냐!?”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후회는 없었다. 나보고 어쩌라고? 그냥 입 닥치고 오들오들 떨라고? 싫다. 현실 세상에서도 내가 못 했던 일을 여기 와서 했는데 이제 와서 과거로 돌아가긴 싫어.
난 그냥……그냥 평범하고 평화롭게.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고 싶을 뿐인데! 그 백발(白髮) 여자부터 시작해 이젠 야만족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사람들 때문에 여기까지 오다니! 분노가 들끓어 미칠 것만 같았다!
게임이나 만화, 애니메이션이나 소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주인공이 분노하면 적을 개박살낸다. 왜 있잖아. [드래곤볼]의 손오공이나 [원피스]의 몽키·D·루피처럼.
그 외에도 다양한 주인공이 있지만 [적이 용서할 수 없는 짓을 해서 주인공이 분노한다 - 각성한다 - 존나 두들겨팬다 - 승리]라는 공식은 어디에나 나오는 것이었다. 매체에 관계없이.
근데 내 인생은 왜 이럴까? 분노는 끓어오르는데 발산은 할 수가 없었다. 당장 이 수갑을 부술 수도 없고 해제할 수도 없다.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여기에 평생 처박혀 있을 수도 없지. 어떻게 내가 원하지 않는 선택지만 이렇게 쏙쏙 뽑아 줄 수 있을까? 그 머리 하얀 미친년, 다음에 보면 반드시 면상을 갈겨주마……!!
그런 생각을 하던 것도 잠시간이었다. 저 밖에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누, 누구지? 안즈인가? 발소리가 한 사람 이상이었기에 속이 바싹바싹 타오른다. 도망친다는 선택지도 없었다만 단체로 린치(구타)를 당하는 것은 정말 싫었기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움막의 문이 열리자 밖의 맑은 공기가 함께 들어왔기에 갑자기 속이 맑아진다. 속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맑아지는 느낌이 드는 걸 보니 이 안에서 꽤나 스트레스를 받은 거 같군.
동물도 가둬두면 스트레스를 받는데 영장류인 인간은 안 그렇겠어? 이렇게 맑은 공기를 쐬니 그나마 그건 좋군. 이런 상황이 되니 사람이 긍정적으로 변하네. 좋은 현상이라 치자.
문을 연 여자들의 모습은……다행이었다. 여기에 나 혼자만 있어서 다행이라고 느끼기는 또 처음이군. 세 명의 여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매우 매력적인 여자들이었다. 흑인에 가까운 피부색이지만 햇빛에 비치는 그 색은 흑진주와 비슷해보였고, 붉은색의 훈도시는 바람에 나풀거리며 내 눈을 자극시킨다.
내 하반신을 자극하게 만드는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가슴을 말은 핑크색이나 노란색의 붕대는 색깔이 하얀색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줬다. 마치 애교를 부리기 위해 창녀나 입을 법한 옷을 단체로 맞추어 입었다니……정말 황홀하군.
납치됐다는 것조차 잊었을 정도로 내 가슴은 두근거리고 있었고, 하반신은 어느 새인가 벌떡거리며 욕정을 풀고 싶어 했다.
“일어난 모양이군. 일으켜 세워.”
아앗!? 저 말을 듣자 지금 당장에라도 ‘놔라! 이 더러운 것들! 내 발로 걸어간다!’라며 조선의 국모 놀이를 하고 싶었지만……그러다가 처맞으면 나만 병신될 거 같았기에 참기로 했다.
오히려 두 명의 여자가 각자 내 옆구리에 손을 넣어 일으켜 세워주는 서비스에 속으로 감동을 하며 일어났다. 젠장……원래라면 안즈와 사랑을 나누며 아침을 맞아야 했는데 이게 뭐야?
여자들의 부축……이라기 보다는. 마치 범죄자가 끌려가는 것 마냥 인솔당하며 움막을 나오자 주변은 녹색으로 우거진 곳으로 바뀌었다. 불어오는 산들 바람이 닿자 기분이 매우 좋았으며 햇빛 또한 따스하고 아늑했다. 이런 곳이 있었다니……마치 프레그넌트의 숲 같은 느낌이 들었다.
걸어가며 주변을 보니 다른 움막들이 보였고 간간히 나를 끌고 가는 여자들과 같은 복장의 여자들도 볼 수 있었다. 아스카가 현재 입고 있는 ‘시라누이 마이’ 복장도 조금 억지 삼아 말하자면 훈도시 비슷한 타입이다만, 역시 다른 거 다 벗어재끼고 훈도시만 입은 걸 보니 파괴력이 작살났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어, 어디로 저를 끌고 가는 거죠?’라고 물어야 했지만 나는 묻지 않았다. 쿨하게 보이려고 그랬냐고? 너님 같으면 쿨한 놈이 이렇게 납치나 당하겠냐? 전혀 쿨하지 않다고! 단지 물어도 대답도 안 해줄 거 같았고, 괜히 귀찮은 놈이라고 맞을 거 같았으니까. 내 인생 진짜 왜 이러냐…….
5분 정도 걸었을까.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을 보니 광장의 느낌이 들었다. 웅성거리며 나를 쳐다보는 여인들한테 ‘하핫, 제 자지 맛 좀 보실래요?’라고 외치고 싶었지만……그랬다간 처맞겠지. 그냥 입 닥치고 있자, 응. 주제를 알아야지.
“데리고 왔습니다.”
올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던 인솔자 중 한 명이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누구한테 말을 한 것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으니까.
“어, 벌써 온 거야? 빠르네?”
“……안즈 씨?”
가슴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인파 속에서 나타난 그녀는 틀림없는 안즈였다. 그녀 옆에는 안즈보다 더 작은……으음. 작아도 너무 작은데. 150cm 정도인가? 지금까지 보던 늘씬한 미녀들과 달리 키가 작은 사람은 별로 본 적이 없었기에 매우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안즈 씨!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죠!?”
지금까지 묻고 싶었던 게 속사포처럼 튀어나왔다. 이런 말을 다급하게 하니 놀라지 않았냐고? 놀란 건 오히려 나다. 가능하면 조용히 있자고 생각했는데 아는 사람을 만나니 단숨에 질문들이 튀어나왔다.
아니……이런 상황에서 침착함을 유지하라는 것 자체가 무리다! 난 엄밀히 말해 납치당한 거니까! 납치당했는데 잠을 푹 처자는 놈이 어디 있어!? 그거랑 같다고!
“진정해야지……? 너무 시끄럽게 떠들면 사람들한테 민폐잖아?”
난 곧바로 입을 닥쳤다. 사람들한테 민폐가 되면 안 된다고 배워서……그런 건 아니고. 그녀가 살기 어린 웃음을 띠며 나한테 다가와서 그랬지.
내가 아무리 바보라지만 이렇게 흉흉하게 살기를 띠는데 모를 턱이 있냐? 조용히 안 있으면 재미없을 거라는 미래가 훤히 보였기에 입을 꾹 다물었다.
“응! 잘 했어♡ 너 같이 말귀 잘 알아먹는 사람은 좋아해!”
젠장……맨 처음 만났을 때 ‘너……아니, 당신’이라고 했었지. 여기 와서는 반말도 반말이지만 호칭마저 ‘너’로 바뀐 상태였다. 대놓고 무시한다 이거군.
그때는 아내들도 있었고 부탁하는 사람의 입장이어서 조신 떨었지만 이제는 그런 거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이거지?
“안즈. 장난은 적당히 해. 우린 급하다고……!”
150cm 정도의 작은 키를 가진 그녀는 탁한 거울색의 머리카락을 흔들며 말했다. 포니테일로 묶은 걸 보니 풀면 꽤 길 거 같군. 배에 잡힌 근육이 안즈와 비교해도 지지 않을 정도로 탄탄했기에 그녀 또한 한 파워 하겠구나 싶었다.
“키리……넌 너무 진지해서 탈이라니까? 사람이 주변도 좀 둘러보고 즐길 것도 즐기며 살아야지. 그렇게 급박하게 살다가 죽으면 억울하잖아?”
친구한테 웃으며 말하듯 안즈가 입을 열었지만 내용은 좀 섬뜩했다. 괴물과 싸워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저런 말을 하다니. ‘키리’라고 하는 건가, 저 사람의 이름……?
“사람이 죽었으니까 급하다고 했잖아! 저딴 허약한 놈 하나 데려오느라고 그렇게 많은 시간을 허비한 주제에……!!”
아, 저건 알아! 내 이야기. 하핫, 허약한 놈이라니. 잘 아시는군요 아가씨! 제가 이래봬도 한 허약합니다! 딸한테도 근력 싸움에서 지는데 하물며 당신들이랑 싸워서 이길 수 있겠습니까? 멋진 표현, 인정합니다!
속으로 이딴 말을 지껄이며 한숨을 쉬었다. 마력봉인수갑 때문에 마법을 못 쓰는 것도 그렇다만, 애초에 내가 약하다는 걸 안즈한테 알려준 내 불찰이기도 했으니까. 몰랐다고 하더라도 날 납치하는 것에 그리 큰 어려움은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약하니까.
안나와 니나한테 당했던 것처럼 내 상태는 알몸이었다. 투영마술이 가능한 옷을 빼앗겼으니 전투능력도 떨어졌군. 투영마술 자체는 쓰는 데에 MP의 소모가 별로 없지만, 설령 입는다고 하더라도 마력이 봉인당한 이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못 하겠군.
옷도 빼앗기고 마력도 봉인당하고. 내 힘으로는 탈출은커녕 저항조차 불가능한 상태. 그레이트. 산 넘어 산이군. 이보다 더 최악의 사태가 어떤 방법으로 나타날지가 궁금해졌다.
이런 걸 생각하면 정말 그 미친 여자가 ‘어? 이거보다 더 최악을 원해? ㅎㅎㅎ 그래, 스스로 엿 먹기를 원한다는데 엿 먹여줘야지? 물도 먹여주고 엿도 먹여줄게. 옛다! 받아라!’라며 더 미친 짓을 저지를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 있잖아. 흔히 ‘에이, 지금도 힘든데 이거보다 더 힘든 일이 일어나겠어?’라고 하는 생각.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지만 높은 확률도 그 상황보다 더 힘든 시련이 주어지기 마련이지.
이런 생각한 사람, 그런 일(더 심한 일 안 일어날 거라 생각했는데 통수크리 처맞은 거) 겪은 사람. 나만 있는 건 아니잖아? 오히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누구나 공감을 할 거라 생각하는데.
설상가상, 엎은 데 덮친 격. 산 넘어 산. 이런 말이 왜 나왔겠냐?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차례차례로 찾아오니까 나온 거지. 누가 원하지도 않았고 바란 것도 아닌데 전자 메일에 쌓이는 스팸 메일 같이 찾아온다니까? 바로 지금처럼!
옷 빼앗기고 전투능력 없어지고 마법도 못 쓰게 됐지만 아직 중요한 이야기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듣지 않은 상태다. 지금보다 더 나빠질 상황을 생각하니 정말 미칠 거 같았지만……그렇다고 ‘에, 헤헤……세린이, 오줌 싼다. 똥 싼다. 뿌지직!’ 같은 말을 지껄이며 미친놈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으으……왜 매일 나만 이 지경이 되는 걸까?
대한민국에서는 시범타를 조심해야 한다고 늘 말하잖아? 난 매일 시범타로 처맞고 있는 학생이냐? 응? 왜 매일 무슨 일만 있다 하면 불려가서 이 지랄 염병을 떨어야 하는 거냐고? 당장에라도 목청 찢어질 정도로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만 그럴 수도 없었기에 미칠 노릇이었다.
“얘 무슨 생각하냐?”
“나한테 묻지 마! 니가 데려온 놈이잖아!”
안즈의 말에 앙칼지게 대답하는 ‘키리’를 보니 둘 사이가 아주 좋은 거 같지는 않았다. 윽, 또 내 표정이 얼굴에 나타난 건가. 됐다……이런 거 한두 번도 아니고. 얌전히 이야기나 듣자. 내가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하자 안즈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음, 니가 왜 여기 있는지 궁금하지?”
“……네.”
그러자 안즈는 즐겁다는 듯 웃었다.
“그야 그렇겠지. 내가 데려왔거든.”
그녀한테 다가가 단숨에 펀치를 날려주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묶인 상태만 아니었다면……!! 하다못해 마법이나 투영마술! 뭐든지 간에 쓸 수 있는 것만 있었다면 바로 날려버렸을 텐데……!!
“아하하, 그렇게 보면……기분 더럽잖아? 이 씨발 새끼가!”
“욱, 커억!? 우, 웩!”
내 적의(敵意)에 대한 감상으로 그녀는 펀치를 날렸고, 내 배때지에 꽂힌 묵직한 한 방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종류의 펀치였다. 묵직하면서도 위력 있는 주먹에 내 장기가 요동을 쳤고 곧 토사물이 식도를 거슬러 올라왔다.
알몸 상태에 토사물이 묻은 건 꽤 오랜만의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조차 떠올릴 수 없었다. 그저 압도적인 폭력에 몸을 부르르 떨 뿐.
“병신 같은 새끼……야, 한 번만 그 따위로 보면 뒤진다?”
“아, 윽……우, 웩!”
난 대답조차 할 수 없어서 토를 하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망할……! 이 년, 안나나 니나보다 질이 나쁘다! 성질이 더러운 것도 있지만 이렇게 힘의 가감(加減) 없이 때리다니!? 젠장, 이래서 납치는 두 번 당할 필요가 없다니까!? 한 번만 당해도 족한데 왜 이딴 경험을 두 번씩이나 해야 하는 건지 원!
눈물로 흐려진 눈을 간신히 어떻게든 닦으며 그녀를 올려다봤다. 이미 무릎을 꿇은 상태였고 일어나봤자 좋은 꼴은 당할 거 같지가 않았기에 이대로 있기로 했다.
안즈는 내 고분고분한 태도가 마음에 드는지 ‘음, 그래! 그래야지!’라며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키리라는 여자는 한숨을 쉬며 나와 안즈를 번갈아본다.
두 명의 사이가 생각보다 좋지 않다는 것부터 시작해 안즈의 성질, 사람의 됨됨이까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 대가가 배빵 한 방이라니……토사물로 범벅이 된 무릎과 발 주위에 눈을 찌푸리며 사고회로를 최대한 빠르고 날카롭게 전환시켰다.
살아남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힘만 있는 게 아니다. 생각지 못한 곤란한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지혜와 용기 또한 필요했다. 그리고 지금. 아무래도……살아남기 위한 싸움이 다시금 시작된 거 같았다.
============================ 작품 후기 ============================
세린과 안즈가 폭풍쎾쓰를 할 거라 생각했나요?
쟌☆넨! 두 번째로 납치당했습니다 ^^
웃우우우웃────!
플로듀서! 납치에요, 납치!
인신매매도 아니고 정자와 정액을 원해서 남자를 납치하다니!
하렘물을 제대로 쓸 줄도 모르는 주제에 ‘하렘 어드벤처’ 같은 거창한 타이틀을 단 결과가 이거예요! 납치로밖에 스토리 진행을 할 줄 모르다니! 작가짓 그만두고 생산직 일이나 해야 할 거 같아요!
웃우우우우웃────!
플로듀서, 청일점이에요 청일점!
여자들이 가득한 곳에서 나 홀로 남자라니! 이걸 청일점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뭐라고 부르겠어요?
근데 그런 상황에서 처맞기나 하다니! 주인공이 아니라 동네북으로 이름을 개명해야 할 거 같아요! 엑에에에에엣────!
……오랜만에 약을 빨고 쓰자니 힘드네요. 다시금 납치당한 세린입니다. 온갖 짓을 다 당해봤는데 당해본 거 또 당하다니. 그냥 그러려니 싶습니다. 원래 이 글이 그렇잖아요.
좋은 직장은 구하기 힘든데 열정페이 하려는 곳은 존나 많네요. 평일 연재(1주 5번)로 인해 내용뿐만 아니라 후기까지 생각해야 하는 실상입니다. 추천이나 코멘트만 하더라도 커다란 응원이 될 거 같네요. 얼른 새로운 (꿀 빠는) 직장을 구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