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8 「14-7 : 왜 내 인생은 늘 이러냐……? (13)」 =========================
난 버림받았다. 내 아내들한테.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고 인정할 수도 없는 사실이었지만, 내가 인정 안 한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세상이 사실을 보여주면 그걸 인정할 줄도 알아야 했지. 지금이 바로 그런 때였다. 너무 어려운 말이라면 알아듣기 쉽게 말해주마.
바람이 눈에 안 보인다고 존재 안 할까? 눈에 안 보이는 건 많다. 바람, 공기, 귀신, 마음 등. 눈에 안 보인다고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듯이, 사실이나 현실은 개인에 의해 정해지는 게 아니라 세상에 의해 정해진다는 뜻이다. 하아……더 알아먹기 어렵군.
히로인한테 버림받은 주인공이라니. 보통은 동료들이나 여자 친구한테 버림받은 거잖아. 근데 난 이게 뭐야? 히로인도 아니다. 내 아내다. 아예 결혼을 하고 몸까지 섞은 내 아내들이라고.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모르고 알 바도 아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중요한 건 날 버렸다는 사실이었으니까!
각 마을 간의 거리는 걸어서 일주일이다. 헌데 이 숲은 세 시간이라 했다. 걸어서 말이다. 걸어서 세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 곳에 5일 동안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니.
이걸 보고 ‘구, 구하러 올 거예요! 분명히 구하러 왔을 거예요! 아직 못 만나서 그런 거예요!’라고 하는 놈이 있다면 당장 죽이고 싶었다.
숲 주변의 괴물 때문에 들어오지 못했다고? 청록색 촉수괴물은 이 지역. 정확히는 이 숲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물론 그게 이 숲이 좋아서인지, 아니면 야만족을 마음껏 먹을 수 있어서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만……여하튼. 그래. 괴물이 있긴 있지. 없을 리가 없지.
근데 이전 편에서 말했잖아. 텔레포트랑 비행 마법은 엿 바꿔 먹었냐? 아스카랑 레이 시리즈는? 이 숲에서 나를 찾고자 한다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괴물이라는 핑계 아래 나를 찾지 못했다는 말은 도저히 성립될 수가 없었단 말이다!
하하……이렇게 버림받게 될 줄이야. 이건 마치 최근의 내 인생과 판박이이지 않은가? 계약직이었지만 나름 노력했던 곳에서 재계약의 희망조차 잡지 못한 채 단숨에 잘렸었다. 1년 동안 일했는데 10분 만에 통보받은 계약 만료의 메시지. 근데 설마 그런 아픔을 여기 와서도 맛보게 될 줄이야.
하지만 엄밀히 말해 같은 게 아니었다. 더 비참했다. 나는 그녀들을 사랑했다. 지금도 사랑하고 있고. 비록 미친 짓을 많이 하긴 했지만 많은 걸 해주었다.
함께 사는 마을을 위해 괴물 토벌부터 시작해 고민 해결, 여행, 여동생인 아이라 데려오기, 미카가 사는 부카케 주변의 괴물 토벌, 안나와 니나의 새로운 삶의 터전 찾아주기, 아이라와 아이나를 화해시켜주는 것 등.
그것뿐이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괴물 토벌을 하며 숲을 안전하게 만든 것뿐만 아니라 모든 마을과 수도에 있는 여성들한테 ‘생명의 씨앗’을 대체할 캡슐까지 줬다. 납치되기 전까지 마을 여성들을 위해 분신술을 써 그녀들의 육체적인 욕구불만까지 풀어주려 했다. 실행까지는 아니지만 계획을 짜고 있었다고.
그 결과가 요거냐? 납치당했는데……지금까지 그녀들을 위해 대부분의 일을 무상(無償)─내가 무언가를 바란 적은 없었다. 마력증폭기의 조각이나 다른 걸 얻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것이었지, 스스로 바라진 않았다─으로 해줬는데 그 결과가 이거야?
버리기?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건 전부 아무런 대가 없이 아낌없이 주는 나무 놀이였냐? 하하…….
“장난 빠냐 씨발년들아! 어떻게 너희가 날……!! 어떻게 너희가 날 버릴 수 있냐!!”
흙바닥에 얼굴을 쳐묻은 채 힘껏 외쳤다. 씨발 간수년이든 뭐든 마음대로 하라 그래. 난 지금 존나 소리칠 테니까 알아서 하라고. 눈물을 뚝뚝 흘리자 흙바닥은 촉촉하게 젖어 들어갔다.
지금이라도 내 앞에 나타난다면 내가 소리친 걸 들었을 수도 있겠지! 아니, 차라리 그러길 바란다! 그럼 이 주변에 왔다는 소리일 테니까! 어떻게든 상반신을 들어 주변을 살핀다. 샅샅이! 혹시라도 내 아내들이 있나 싶어 살펴봤지만……하하, 그래. 있을 리가 없죠? 있으면 날 불렀겠지!
수갑 때문에 제대로 눈물을 닦기도 어려웠지만 그래도 손을 눈 주위로 갖다 댔다. 지금 내 모습은 부모님이 어디 갔는지 몰라 눈물을 펑펑 흘리는 어린애 같겠지. 고개를 흔들며 이럴 리가 없다는 걸 감안한다면 어린애 이하겠지만……그럼 좀 어때. 지금은 울고 싶은데.
믿을 수가 없었다. 내 아내들이……내가 목숨 걸고 많은 일을 해줬고, 날 사랑한다며 그토록 웃어주고 함께 몸을 나누었던 여인들이 이토록 나를 간단하게 버리다니! 계약직에서 해고 통보를 받았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슬펐다. 감히 그런 것에 견줄 바가 아니었다.
계약직을 할 때 나름 보람은 느꼈지만 그곳이 내가 있을 곳은 아니라 느꼈다. 정규직이 되든 다른 계약직을 찾든 간에 ‘내가 있을 곳’은 그런 곳이 아니라 생각했지. 난 이 세상에 와서 비로소 알게 됐다.
이곳이……이 ‘하렘 어드벤처’가 내가 있을 곳이라고. 그렇게 생각했기에 모두를 위해 일하고 싸웠다. 내가 사는 곳을 지키기 위해. 더욱 안전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계약직 때는 돈을 위해 일했지만 이곳에서는 나와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를 위해 일했다. 암, 비교 자체를 할 수가 없었다. 돈과 사랑이라니. 돈은 언젠가 없어지기 마련이지만 그들과 이 세상을 향한 내 사랑은 더욱 커지기만 했다. 결코 줄어들 리가 없었던 말이다.
‘그러니까 이용당하는 거야, 호구 새꺄. 기분 어때? 늘 너를 사랑한다며 몸을 나누던 아내들한테 버림받은 기분은 어떻냐고? 신나지? 기분 째지지? 응, 말 좀 해봐? 궁금하잖아?’
믿고 싶지가 않았다. 보통 안 좋은 일이라면 ‘좆같다, 시발 쓰레기 같다’며 웃어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농담으로라도 하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그 엄청난 일이 실제로 일어나자 내 정신은 셧 다운(Shut-down) 상태가 된 거 같았다.
권투 선수가 복싱을 할 때 자주 KO를 보고는 한다. 넉 아웃(Knock Out)은 권투를 대표하는 가장 널리 알려진 승리 조건 중 하나다. 상대방의 기절 또는 실신. 이런 건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KO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바로 기절의 이유다.
우리는 권투 선수가 쓰러지면 ‘너무 많이 맞아서 기절한 거야……에휴, 어쩔 수 없지. 오히려 저렇게 될 때까지 싸운 거니까 잘 한 거지’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그러나 뇌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권투 선수가 쓰러지는 이유는 뇌가 그렇게 명령을 내린 탓입니다. 기절하라고 말이죠. 더 이상 싸우면 치사(致死) 상태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걸 깨달은 뇌는 의식을 기절시킨 거죠.’
난 후자(後者)쪽에 더 설득력이 있다고 믿었다. 왜냐고? 사람의 의식이란 건 그런 거였으니까. 내가 이곳에 납치되자마자 ‘날 구하러 오겠지’라고 생각했던 아내들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재수 없는 생각이 떠오르기도 했다.
‘널 구해? 왜? 미쳤다고 널 구하러 여기까지 오냐? 괴물과 야만족이 있는 이 숲에? 야, 생각해봐. 그들은 이미 임신했어. 소중한 아기를 가졌다고! 니가 바보 같이 열심히 노력해준 덕분에 괴물도 사라지고, 아기도 가지고, 평화가 찾아왔어! 여기 왔다가 죽을 수도 있는데 뭐? 널 구하러 와? 하하, 자의식과잉(自意識過剩) 있냐 너?’
처음에는 ‘이딴 병신 같은 생각 하지 말자’라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내들은 구하러 오지 않았고 저 생각은 더욱 더 모습을 자주 드러냈었다. 위에 있는 권투 이야기와 내용이나 주제는 달랐지만 사람의 무의식이라는 것은 정말 무서운 것이었다. 이미 5일 전부터 이런 결말을 예측하고 있었다는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사람은 정신줄을 놓을 거 같으면 미친 짓을 저지른다고 한다. 아니면 정신줄을 놓아버린 채 미쳐버리거나. 생각 같아서는 둘 다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어쩌면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으니까.
‘잘못 생각하고 있을 가능성? 아하핫! 쩌네! 이 상황이 되어서도 아내들 믿냐? 야, 생각해봐. 니 아내들은 널 버렸어. 아니지? 이제 널 버렸으니 사실상 결혼을 파기한 거나 마찬가지잖아? 그런 걸 넌 아내라고 부르냐?’
조금 전부터 나한테 이딴 말을 하는 ‘내면의 목소리’는 전적으로 내 것만 있는 건 아니었다. 분명 그 머리 하얀 미친년도 함께 말을 걸고 있겠지.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통렬하게 지적하고 공격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사람은 자기 자신한테는 무르고 관대하기 마련인데 이건 핀포인트 급 공격이었으니까.
빌어먹을……! 일이 이렇게 된 것도 전부 다 그 미친년들 때문이다! 미친년들이 누구냐고? 책임이 덜한 것으로 치자면 야만족의 안즈와 키리, 모두 다. 다른 사람 인생이 어찌 되든 간에 자기들만 살면 좋은 거 아니냐는 식으로 행동한 덕분에 이 꼬라지가 됐다.
날 납치한 건 용서할 수 없지만 그들을 무조건 탓할 수는 없었다. 왜냐고? 이 모든 일에는 그 머리 하얀 미친년이 있었으니까! 모든 직접적인 책임은 그 년한테 있었다. 하렘 어드벤처부터 시작해 모든 걸 그년이 꾸민 건데 대체 그 머리 하얀 년 외에 누구한테 책임을 물을 수 있단 말인가?
‘레벨 10이 됐을 때, 너희가 부카케에 도착했을 때. 그리고 안나랑 니나한테 납치당했을 때. 마리아랑 아테나까지 보냈었지. 니 생각 맞아. 니가 말하는 ‘원하지도 않는데 휘말리는 상황’을 만든 건 바로 나야. 하지만 말이지……니가 그때마다 했던 일을 생각해봐. 그 이벤트가 뭘 뜻하는지 금방 답이 나올걸?’
“……읏!?”
수갑 때문에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손으로 얼굴을 가리려 했다. 무언가……아주 중요한.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깨달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방금 그 말……그래. 예전에 그 여자가 했던 말이야……! 근데 왜 그게 지금 떠오르는 거지?
‘힌트 잘 들어? 힌트는 바로……. ‘언제나 너는 거기에 있었다’야. ‘거기’가 어디냐고? 그건 니가 찾아야지. 단어 선택에 따라 다르겠지만 찾으면 분명 반성할걸? 태어나서 지금까지 했던 걸 합쳐도 도저히 상대가 안 될 정도로 엄청!’
아냐……틀려! 내가 그때마다 했던 일? 야만족한테 처맞아가며 노예, 도구 취급받던 나한테 뭐가 ‘그때마다 했던 일’이라는 건데? 왜 모든 책임을 나한테 돌리는 거냐고!? 그건 다 니 탓이잖아! 나한테 모든 걸 돌리지 마! 난 최선을 다했어! 최선을 다했기에 여기까지 온 거라고!
갑자기 왜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오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눈물과 콧물, 흙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씻고 싶었다. 한숨을 쉬며 하늘을 봤다. 이제 곧 점심시간인가……. 이 와중에도 배가 고픈 걸 느끼다니. 헛웃음이 나왔다.
비극의 히로인 놀이도 예쁘거나 멋져야 할 수 있지. 내가 무슨 비극의 히로인이야. 히로인도 아니지. 남자니까. 그럼……그냥 버림받은 병신 놀이인가?
내가 나 자신을 아주 높게 평가하는 놈은 아니지만 그건 알고 있다. 난 주인공감이 아니라는 거. 내가 나 자신을 주인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그럴 그릇이 아니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이 ‘하렘 어드벤처’의 여성들을 단순한 데이터 집합체. 백발 미친년에 의해 만들어진 단순한 캐릭터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 그녀들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
그치만 이렇게 보니 참 웃겼다. 주인공도 아닌 내가 그녀들을 사랑한다고? 사랑하면? 사랑해서 나온 결과가 이거냐? 마을을 괴물의 위기에서 구하고, 생명의 씨앗을 대신할 좆물을 끼얹어주고, 타지(他地)에 있는 동생까지 데려온 보답이 이거냐? 납치된 놈 내버려두기?
사랑? 사랑 좋지! 난 그녀들과 사랑을 나눴다! 남편이며 아버지였으며 연인이기도 했다! 왜 과거형이냐고?
시발, 생강 먹고 생각을 해봐라! 이 글을 읽는 사람이 남자든 여자든 관계없다 치자. 니 남편이나 아버지, 혹은 연인이 납치당했는데 아무런 행동도 안 하고 5일 동안 놀고먹고 있다 생각해봐라. 기분이 어떨까? 단언컨대 좆같다. 지금 내가 그렇거든.
세 시간? 3일이 아니라 세 시간이라고? 하핫, 그래. 하룻밤만에 나를 옮긴 거니 시간은 널럴했겠지. 근데 이게 뭐야? 얘들은 3일이 지나도 아무런 대응도 안 하고 있었다는 뜻이잖아?
그럼 난 뭔데? 내가 뒤지든 말든 목숨 걸고 너희 평화와 미래 위해 싸우기만 하는 노예 새끼냐? 아기 씨앗만 얻으면 버리는 1회용품이야? 개 같은 년들……!!
지금까지 사랑한 사람한테 어떻게 그렇게 욕을 할 수 있냐고? 정반대다. 오히려 지금 당장 가서 죽여 버려도 속이 시원찮을 레벨이었다.
하하, 설마 살면서 아내들한테 이런 멋진 후두부 어택─뒤통수 치기. 배신 혹은 배반이라 이해해라─을 맞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는데! 오늘 정말 여러 가지 기록 세우는구나? 상상도 못 했던 사건들이 불꽃놀이처럼 펑펑 터진다!
그래, 상황이 이렇게 됐는데 생각이나 한 번 진득하게 해보자. 나를 구하러 오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나를 구하러 오지 않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구하러 오지 ‘않은’ 것. 자의(自意)로 정한 거라 봐야겠지. 그럼 대체 이유가 뭘까?
자랑은 아니다만 ‘자지의 맹세’뿐만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나와 아내들은 서로 사랑하고 있었다. 헌데 왜 구하러 오지 않은 거지? 내가 살아남아 그들과 함께 있기를 바라면 또 모를까 구하지도 않고 죽게 내버려둬?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오히려 내가 더 알고 싶었다.
궁금한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마을에서 나올 수 없는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만 만약 마을을 나올 수 없었다 치자. 그래, 현실이 내 상상 이상으로 아스트랄하니 그럴 수도 있다 쳐. 그럼 마리아와 아테나는? 왕가(王家)에 있는 두 사람조차 움직일 수 없다고? 걔들은 여왕이랑 공주인데? 대체 날 못 구할 이유가 어디에 있냔 말이다?
프레그넌트는 괴물 토벌 이후로 매우 안전한 마을이 됐다. 괴물이 없어진 숲은 마을 사람들의 오락처로 쓰이고 있었으며, 나도 가끔은 기분 전환을 위해 숲으로 가고는 했다. 숲에서 사랑하는 아내들과 섹스를 하는 것 또한 매우 짜릿한 일이었기에 자주 하고는 했었지.
근데 더 이상 괴물 때문에 병력 운영에 고심할 필요도 없잖아. 괴물 때문에 그런 것도 아냐, 마을에서 못 나올 사정이 있는 것도 아냐. 여왕이나 공주인 두 명이 내 상황을 모른 척할 리도 없다. 그럼 대체 이유가 뭔데? 왜 나를 이 시궁창 같은 현실에 내버려두는 거냐고!?
모르겠다!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다시금 과다호흡을 일으킬 것 같아 조금씩 진정을 취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쓰러졌다가 심장 마비나 호흡 곤란으로 죽어버리면 그거야말로 개그다. 진정하는 거다. 일단 내가 처한 상황이 어떤가, 무얼 해야 하는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좌절은 그 후에 해도 늦지 않으니까.
……이미 할 좌절, 못할 좌절 모조리 다 한 느낌이다만. 진정이 되자 눈을 감았다. 마지막이다. 이걸 마지막으로 하자. 이 이상 현재 상황에 대해 생각하다간 내 머리가 터질 거 같았으니까.
1) 현재 이곳과 프레그넌트의 거리를 감안하면 구하러 ‘못’온 것인가, ‘안’온 것인가?
- 현재 이 숲과 프레그넌트의 거리는 3시간 거리며 도보 기준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루 안에 올 수 있는 곳에 5일째 되는 오늘날까지 오지 않은 것은 ‘안’ 온 것이다. 즉, 이는 자의로 나를 버렸다고 볼 수 있다.
2) 생각지 못한 사건이 발생했을 수도 있다. 그로 인해 못 오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 그 ‘생각지 못한 사건’이 대체 뭔지 모르겠다. 내가 이곳에서 접할 수 있는 정보는 전무(全無)하다고 봐도 좋다. 그들이 내 사정을 헤아릴 수 없듯이 나 또한 그들의 사정을 헤아릴 수 없다. 만약 벌어졌다 치더라도 병력의 일부를 운용해 나를 구출할 방법 또한 있을 것이다.
만약 병력이 없다면 마리아나 아테나. 헬레나가 소속된 여왕기사단을 쓸 수도 있다. 별로 그런 자각(自覺)은 없지만 일단 내 위치는 임금이다. 왕인 내 목숨이 위협 받고 있는데 5일 동안 손 놓고 나 몰라라 하다니. 이게 말이나 될 법한 소리냐?
끝내주는군. 도무지 빠져나갈 길이 없는 미로 같았다. 어디로 어떻게 가든 간에 ‘날 버릴 수 있는 타당한 이유’라는 골에 도달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래. 아직 하나 남았다.
3) ‘신세린’이라는 인간의 위치와 업적, 가치.
- 14명의 아내를 거느리고 있으며 모두는 아니지만 대부분 마을 사람이나 아내를 위해 행동했다. 대가를 그다지 바라지 않았으며 임금이기도 하기에 위치 부분에서는 높은 수치를 차지한다.
사리사욕을 부리지 않았다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설령 그렇다 치더라도 마을의 안전을 위한 괴물 토벌부터 시작해 모든 여성을 임신시키기 위한 캡슐을 무상 제공했으며, 마을 여성들을 위한 계획 또한 세우고 있었다.
응? 여자들 집에 가 섹스를 하는 게 여성들을 위한 거냐고? 물론이지. 내 아내들이나 경비대원과 몸을 나누는 건 자주 있는 일이었지만 난교 파티 이후로 마을의 여자들은 육체관계를 좀처럼 나주지 못했다. 욕구불만을 가진 그녀들을 위해 마력까지 모조리 털어가며 무상으로 서비스하는데 욕이나 비판을 들을 이유는 없잖아.
내 위치와 업적을 볼 때 내가 모두한테서 구조를 받으면 받았지 이렇게 헌신짝 버리듯 버림받아도 마땅한 놈은 아니었다.
당장 납치당했던 당일을 생각해봐라. 로라와 아이나, 아이라가 나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에 매우 기뻐했던 게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런데 나를 버렸다고? 다 쓴 1회용품 쓰레기처럼? 이게 말이 돼?
위치와 업적도 이 정도인데 가치는 아무 할 말이 없을까? 난 이 ‘하렘 어드벤처’의 유일한 남자잖아! 아기를 낳았다고 다가 아니었다. 아기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원하는 아내들은 너무나 많았고, 그녀들을 모두 만족시키기 위해 매일 밤마다 분신술을 써야만 했다.
적어도 로라를 비롯해 몇 명의 아내들한테 있어서 나는 정신적인 버팀목이었다. 함께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기쁘고 즐거웠다. 그런데……어떻게 그런 아내들이 나를 이렇게 버려둘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버리면 대신할 누군가가 있는 존재’가 아니었는데!
나한테 있어서의 아내들 또한 그러했다! 아니, 지금도 그렇다! 난 지금도 아내들을 사랑하고 있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분노하지도 않았겠지! 오히려 ‘이럴 줄 알았다……그딴 년들, 처음부터 안 믿고 있었다’라고 했겠지!
하지만 아니었다! 그녀들은 내 아내들이며 연인이며 지켜주고 싶은 여인들이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극심한 배신감에 몸을 떠는 거란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이해해서도 안 된다! 대체 어쩌다가 이런 상황까지 왔단 말인가? 수갑에 묶인 손으로 얼굴을 만지는 것 정도는 이제 꽤 익숙해진 상태였기에 그나마 좀 도움이 됐다. 망할. 또 눈물 나오잖아…….
1), 2), 3). 세 개의 조건 아래 상황파악을 한 결과 ‘나를 도우러 올 수 있는데 오지 않은 이유’를 도출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 이유를 도출해내긴 했지만 도저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게 뭐냐고?
[도보 거리에 있는 ‘야만족의 숲’에 오지 못한 이유는 알 수 없다만 ‘신세린’이라는 인간의 ‘가치’는 쓰고 버리는 물건이 아니다. 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하러 오지 않은 이유는 왕가부터 시작해 프레그넌트에서 벗어날 수 없는 천재지변급의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며, 이로 인해 구출부대의 창설 및 운용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신세린의 가치는 인정하지만 그를 구하기 위해 현 상황을 위험하게 만들 수는 없으므로 신세린의 구출은 포기한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이냐? 이걸 스스로 생각해낸 건 나지만 내가 오히려 묻고 싶었다. 대체 저게 무슨 말인데? 한국어로 적었다고 다 한국어가 아니에요. [갸냐댜랴쀍뚫훑]이 한국말로 보이냐? 표기가 한국어일 뿐이지 뜻이나 사용 빈도를 볼 때 저건 한국어가 아니라 그냥 이상한 말이잖냐.
천재지변급의 사건? 그게 대체 뭔데? 나를 구하러 오는 걸 포기해야 할 정도로 중대한 거냐? 야, 웃기잖아. 그런 천재지변급 사태가 벌어지면 이 숲에 있는 야만족들도 무사하지는 못할 텐데, 얘들은 그걸 하나도 모른 채 괴물이랑 싸우러 갔다고? 정보통제라도 당하고 있는 거냐?
아, 그래 좋아. 모른다 치자. 숲에 있으니까. 근데 말이야. 천재지변이 일어나든 말든 텔레포트 정도는 쓸 수 있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조금 전에 떠올린 ‘이유’……아니, 핑계를 납득하기에는 논리적인 구멍이 너무 많았다. 애시당초……천재지변급 사태는 또 왜 일어나는데? 그게 뭔지도 모르는데?
변수가 너무 많고 정보도 너무 적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딴 말도 안 되는 이유를 생각해내는 정도다. 허탈했다. 지금까지 기다리며 언제쯤 올까, 어디에서 나타날까, 나타나면 어떻게 여기에서 탈출하지 등을 쭉 생각했는데 그게 몽땅 헛수고 병신짓이었다니.
만화 같은 곳에서는 적이 주인공을 무시하면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아는 거지!’라고 말한다만……그건 틀린 말이다. 길고 짧은 건 서로 가진 게 비슷할 때의 이야기지.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은 대볼 필요도 없었다.
14명의 아내부터 시작해 여왕기사단 등 날 구해줄 사람이 어림잡아도 30명을 넘는데 그 중 한 명도 안 나타났다. 5일 동안. 그것만으로 이미 헤드샷 아니냐? 세 시간 거리라고? 텔레포트 안 쓰고 걸어와도 될 거리에 있는 나를 5일이나 이렇게 방치했다고? 미쳤군. 뭘 어떻게 하면 그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원.
하늘을 쳐다보며 한숨을 쉰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까? 아내들이 날 버렸다고 사실상 확정난 거나 다름없는데 여기서 아무리 기다린다고 한들 도와주러 오는 이는 없겠지. 여기서 세월아 네월아 하며 허송세월을 보낼 생각도 없다만……날 버린 아내들을 용서할 마음도 없었다.
이 마력봉인도구만 풀린다면 ‘자지의 맹세’를 바로 써주마. 여기에 있는 야만족 년들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괴물들이랑 싸우다 뒈지라고 그래.
하지만 나를 배반한 아내들. 네년들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복수해주마. 지금까지 좀처럼 쓰지 않았던 ‘자지의 맹세’로 정신이 부서질 만큼 확실히 가지고 놀아주마.
아내에 대해 어떻게 그런 생각할 수 있냐고? 그럼 나도 물어보자. 아내들이 나한테 한 짓은 용납할 수 있냐? 그녀들을 위해 목숨 걸고 싸웠고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던 나를 버리는 건 괜찮은 짓이냐? 칭찬 받아 마땅할 짓이냐고? 아닐 텐데?
용서를 할 생각은 없지만 이곳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마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우라질! 다시 그년들한테 머리를 조아릴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욕이 튀어나온다. 하지만 이것 외에 방법은 없었다. 너희가 안 오면 내가 찾아가주마. 그러기 위해서는 뭐든 해주마.
점심시간이 됐기에 먹을 빵과 스프를 받은 나는 그걸 먹으며 어떻게 말을 해야 안즈와 키리가 내 구속을 풀어줄까에 대해 고민했다. 아부를 떨어도 안 될 거 같으니 괴물 토벌에 힘을 빌려준다고 하는 수밖에 없나……. 풀자마자 텔레포트로 도망갈 수도 있고 하지만 일단은 이 수갑을 푸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었다.
“……응? 벌써 온 건가?”
점심시간 때 돌아온다는 말이 있었는지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모르겠다만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진다. 많은 사람들……적어도 40~50명 이상의 사람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뭔가 소리치고 있는데? 토벌이 성공적으로 끝난 건가?
하아……나갈 때는 그녀들의 패배와 실패를 바랐다만 지금 생각하니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이들이 죽으면 죽을수록 안즈와 키리를 설득하는 건 힘들어질 테니까.
감정적으로 변한 그녀들을 잘 설득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던 내 눈에 들어온 것은……피투성이가 된 야만족들을 업거나 부축하며 걸어오는 여자들이었다.
============================ 작품 후기 ============================
버림받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온갖 가정과 가설을 세우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기분이 좋습니다. 지금까지 좋다며 하반신을 여기저기 박아댔으니 이제 좆☆망!의 세계로 굴러 떨어져야죠. 예? 너무한 거 아니냐고요? 헤헤, 아닙니다. 이 정도는 약과입니다. 아직 시작도 안 했다구요!
독자분들이 싫어할 테니 츤데레 흉내는 안 내겠습니다만, 여하튼 ‘아내들이 구하러 오지 않는다’라는 사실만큼은 확실하게 나타났습니다. 도보로 3시간 걸리는 위치에 있는 숲에 5일 동안 안 오다니. 현실이었어도 통수쳤구나 하고 깨닫겠죠.
우스갯말로 ‘OO 먹어봤어요? 안 먹어봤으면 말을 마세요’라고 하는데……저는 이렇게 물어보고 싶네요.
‘통수크리 처맞아보셨어요? 안 당해보셨으면 절대 당해보지 마세요. 기분 존나 더러워요’
이전과 같은 주제고 별 재미도 없는 거지만……여러분, 배신(통수) 당하는 건 가능하면 피하세요. 존나 강한 통수 처맞으면 정신적으로 좆빠지게 힘들어서 일도 제대로 하기 어렵습니다. 그 정도로 통수란 건 강력한 겁니다. 저도 가능하면 안 당하고 싶었는데……이런 저런 일을 겪다보니 군대에서도 겪고 사회에서도 겪게 됐네요.
물론 겪으면 좋은 점도 있긴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어느 정도 강해져서 약한 통수 등에 대해서는 ‘에휴, 그럼 그렇지 시발’하며 적당히 넘길 수 있게 됩니다. 멘탈이 강해지는 건 좋지만 그만큼 여러 일을 겪어야 하기에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는 거죠.
힘든 나날이 계속 되는 가운데, 여전히 청년실업은 이어지는 추세입니다. 이 추세가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S - 흐, 흥! 코멘트를 안 달아줬다고 딱히 화가 난 건 아니니까! 착각하지 말아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