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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어드벤처–당신의 아기를 낳고 싶어-157화 (157/235)

00155 「16-4 : 빼앗겨버린 아내들 (4)」 =========================

납치된 것도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지만 목숨을 걸고 거기서 벗어났다. 그 와중에 많은 야만족들이 죽었고, 기껏 찾아온 프레그넌트는 그야말로 폐허가 된 상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아내들을 찾아 왔더니……그녀들은 별 거지 깽깽이 같은 놈한테 열렬한 사랑과 연모의 감정을 보내며 오붓한 식사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 그래. 자기들을 구해준 멋진 남자. 용사나 영웅에 비견될 정도의 활약을 벌인 남자다. 신세린이라는 남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추파(秋波)를 던지고 싶은 기분도 이해가 가. 내가 여자라도 그렇게 했을 테니까.

처음에 봤을 때 느꼈던 분노와 배신감은 지금도 절찬리 성장 중이었다. 너무나 많은 사실과 감정 때문에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아냐.

아직 아니다! 쓰러질 거라면……기절할 거라면 나중에 해도 된다! 적어도 지금은 모든 것을 다 들어야만 하는 때였다.

아이나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다섯 마리나 되는 청록색 촉수 괴물을 쓰러뜨린 그는 아내들한테 다친 데는 없느냐는 등의 안부를 물었다고 했다. 자기가 이 일을 꾸며놓고 마치 영웅처럼 등장해 내 아내들한테 작업을 걸다니. 그냥 지금 쏴 죽여 버릴까?

나 이외의 남자가 있다는 사실에 그들은 적지 않게 놀랐다. 괴물의 등장과 횡포, 그들로 인해 발생한 피해는 천문학적인 것이었지만……지금까지 단 한 명밖에 없다고 생각하던 ‘남자’. 나 이외의 남성이 그들 앞에 나타난 것 또한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겠지. 이해가 간다.

그는 자신을 ‘카인’이라 소개했다. 원래라면 성문에서 허가를 받고 들어가야 했던 여행자 입장이었지만 프레그넌트 안에서 발생한 마법이나 사람들의 비명을 듣고는 성벽을 넘어왔다고 했다.

본래대로라면 성벽을 넘는 행위는 옳지 않은 행위였지만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긴급사태였기에 그의 행동은 불문에 부쳐졌다. 그가 한 옳지 않은 행동보다는 자신들(아내들)을 구한 남자의 활약이 더욱 중요하고 가치 있었기 때문이다.

숫자는 정확히 모르지만 많은 괴물이 나타난 것. 경비대 막사에 있어야 했던 주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오자 낌새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던 아이나와 로라 일행은 경비대 막사에 도착했고 그녀들 또한 카인과 만남을 가지게 됐다.

하얀 머리카락과 붉은색 눈동자. 중2병이 냄새가 풀풀 나는 이목구비였지만 나 이외의 서브컬쳐 계열에 대해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기에 그의 외모는 오히려 플러스가 되었다. 옷 또한 고귀한 기사나 귀족들이 입을 법한 하얀색이었기에 그의 존재는 더욱 더 확실하게 부각되었다.

그는 간단히 자기소개를 한 후 왜 이 마을이 이렇게 됐는가에 대해 물었다. 단 3일 만에 많은 추억이 깃들어 있던 마을이 박살이 난 것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몰랐던 아이나는 정체 모를 괴물이 알 수 없는 루트를 통해 마을로 들어왔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괴물이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그걸 들은 카인은 지금은 대화보다는 부상자들의 치료 및 사망자의 시신(屍身)을 수습할 때라 했고 아내들은 그 말에 동의했다. 그 이야기를 듣자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자기가 죽여 놓고 뭐?

시신을 수습해?

너를 시신으로 만들어도 시원찮을 판이다, 개만도 못한 새끼야!

막사 안은 실로 처참했다. 생긴 건 청록색 피부를 가진 사람의 등짝에 많은 촉수를 박아 넣은 모습이었지만, 그런 놈이 다섯 마리 있다고 막사가 무너진 걸 감안하자면……사람보다 훨씬 더 무게가 나간다고 봐야 했다.

그런 괴물놈한테 짓밟혀 신체 일부가 터져버린 사람. 촉수에 붙잡히거나 관통되어 처참한 몰골로 최후를 맞이한 사람. 각양각색의 시체가 즐비했고 여기까지 말한 아이나는 메이처럼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괴물들의 빔 공격에 몸이 타들어가며 죽은 사람들 이야기가 나오자 울음을 터뜨렸던 메이. 메이는 당시 상황만을 이야기했지만 촌장인 아이나는 그 모든 것을 봐야 했기에 메이 이상으로 참혹한 심정이겠지. 이런 이야기를 시키는 게 미안하다고 느껴질 정도다.

결국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교대되고 말았다. 아이라가 아이나를 달래고 있었기에 안나가 이야기를 하게 됐다. 니나가 가끔 안나의 이야기에 살을 붙이는 걸 보니 가슴이 아파온다. 대체 왜 내가 예전까지 살던 마을의 일을 아내한테 전해 들어야 하는 걸까?

막사를 포함해 창고에 넣어둔 시체들을 모은 카인은 아이나한테 화장(火葬)을 제안했다고 한다. 죽은 사람의 장례식은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나뉜다.

관 안에 사체를 넣은 후 흙을 파서 무덤 안에 넣거나, 화장을 하거나. 화장을 해서 땅 안에 묻는 경우도 있긴 했다.

시체들을 모으니 그 모습은 실로 절망과 슬픔의 덩어리나 다름없었다. 조금 전까지 함께 웃으며 이야기하던 사람이 싸늘한 주검이 된 채 발견되다니. 이걸 슬퍼하지 않는다면 대체 무엇을 슬퍼해야 한단 말인가?

마을에 정착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안나와 니나. 모녀(母女)가 겪은 이웃사촌의 죽음은 보통 사람들이 겪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웃뿐만 아니라 함께 근무를 나가던 경비대원들까지 온전치 못한 시체. 잘려나간 살점이나 뼈 등으로 그들을 기억하고 추모(追慕)해야 했으니 정신적인 충격을 매우 많이 받았을 것이다.

모두의 추모와 동의 아래 시체들을 태운 것은 아이나였다. 비록 사람들을 구하는 데에 일조한 것은 카인이지만 촌장인 그녀가 사람들을 화장시키는 역할을 맡은 것은 마을 사람들을 위한 마지막 배려이자 행동이라 봐야겠지.

괴로운 와중에도 촌장으로서의 역할과 사명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는 아이나를 보니 내가 신붓감 하나는 진짜 잘 골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여릴 뿐만 아니라 배려와 사명감 또한 깊은 그녀를 보니 더욱 마음이 아프다. 왜 저렇게 예쁘고 착한 아이나가 그런 힘든 상황을 경험해야만 했을까?

왜긴 왜야, 내 앞에 있는 씨발놈 때문이지!

정말 굉장했다. 무슨 일이든 간에 모두, 전부 다 카인 탓으로 돌릴 수 있었다. 실제로 이 새끼 때문에 일어난 일이 대부분이니 그렇긴 했지만, 모든 일이 이렇게 ‘카인 탓이다’하나로 귀결되니 내가 더 놀라웠다. 니가 인간이냐? 이런 짓을 저지르고도 무사하길 바랐냐?

시체를 모두 태운 후 카인은 아내들과 경비대원, 마을 사람들한테 혹시나 발견 못 한 사망자가 있나 확인해달라고 했다. 그들이 사망자를 확인하는 동안 카인은 주민들이나 아내들을 보호하며 피 냄새나 혈흔을 지우는 마법을 썼다고 했다.

마을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가를 물었던 그였지만 우습게도 마을을 이렇게 만든 괴물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고 한다. 안나의 말을 들으니 난 속으로 ‘퍽이나, 시발놈……’이라고 그를 깠다. 몇 번이고 이야기했다만 저놈의 정체는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든 백발(白髮)의 여자다. 모를 리가 없지. 자기가 만든 괴물인데.

청록색 촉수 괴물은 지금까지 상대한 촉수 괴물에 비해 강한 힘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마법내성까지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렇기에 일반 경비대원의 마법이 좀처럼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그 결과는 그녀들의 죽음이 되어버렸다.

안타까워하는 것은 아직 일렀다. 입에서 나온 고열의 빛은 닿는 상대를 모두 녹여버릴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기에 방어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공격이었다. 피하기 위해서는 그 빛에 닿지 않거나, 마법으로 방어하거나, 발동 전에 입이나 얼굴 부분을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대부분 하는 행동이었지만 마법으로 방어할 수 있다는 건 몰랐군. 모르는 게 당연할 수밖에 없나? 가지고 있던 마법을 모두 잃어버린 나는 더 이상 ‘마법사’라고 부를 수조차 없었으니까. 마력을 쓰긴 하지만 매크로처럼 정해진 것만 쓸 뿐. 이런 걸 마법사라고 부르진 않잖아?

마법으로 방어할 수 있다는 정보는 처음 듣는 것이기에 유용했지만 그 다음 들은 정보도 놀라웠다. 청록색 촉수 괴물은 사람을 먹는 만큼 피나 시체 냄새에 쉽게 이끌린다. 따라서 시체나 혈흔을 완전히 제거할 경우 그들이 폭주할 가능성이 많이 줄어든다고 했다.

……시발! 생각해보니 진짜였다! 50명 이상이나 되는 야만족이 죽어버리고 38명(나 포함)밖에 안 되는 사람들이 탈출을 시도했지만……태반은 부상자였다! 그들의 피 냄새에 이끌려 온 거였다면 우리가 그 말도 안 될 정도의 습격을 받은 것도 이해가 간다!

안즈의 표정 또한 낭패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설마 그 트라우마급 경험에 이런 비밀이 있었을 줄이야…….

기억을 떠올리니 더욱 더 가슴이 아려온다. 동료들이 죽어 멘탈이 박살난 안즈를 움막 안으로 데려와 이야기할 때 피 냄새에 대해 이야기했었는데 설마 그게 놈들을 불러들이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였을 줄이야……!

아니, 그 촉수 괴물 새끼들이 개 같다고 자주 말하고는 했지만 진짜 개처럼 냄새에 민감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봤지! 알았으면 탈출을 제안했겠냐!?

안즈가 그놈들의 입에서 나오는 빛에 대해 몰랐듯이 이 정보에 대해서도 몰랐다고 생각하는 게 타당했다. 그렇다면 아가리에서 나오는 빛이나 피 냄새, 시체에 이끌린다는 특성은 카인이 만들어냈다고 봐야만 했다. 그게 어려울 리도 없을 테니 말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사망자는 아이나가 화장한 사람들 외에는 없었다. 내가 마을을 돌아다니며 시체나 혈흔을 발견하지 못 했던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군.

어쩐지……습격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체나 핏자국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었는데, 이런 내막이 있었을 줄이야.

괴물을 염려해 핏자국을 지웠다고는 하지만 거기에는 두 가지 효과가 있었다. 첫 번째는 카인이 말한 대로 괴물을 불러들이지 않도록 하는 효과. 슬픈 마음과 함께 시체까지 태운 상태다. 더 이상의 희생자가 늘어나는 것은 그 누구도 원치 않았다.

두 번째는 나를 엿 먹이는 거였다. 너무 나쁘게 생각하는 거 아니냐고? 댁이 여기 한 번 와보실라우? 정말 대단했다. 혀를 내두를 정도다. 모두를 생각해서 하는 행동에는 전부 ‘신세린을 엿먹인다’라는 목적이 존재했다. 이게 왜 나를 엿 먹이는 거냐고?

핏자국이 발견할 수는 없었지만 마을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해 ‘아무도 죽지 않았다’라는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지진이나 화재 사건이 발생하면 좋든 싫든 간에 다치는 사람이 나오니까. 피해자나 부상자를 바라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아무도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나와 안즈는 알고 있었다. 그런 내 입맛에 딱 맞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 넓디넓은 숲에서 38명이 탈출을 시도했지만 살아남은 것은 나와 안즈, 두 명뿐이었다. 90% 이상이 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배가 능력으로 도망을 칠 수도 있었던 그녀들이 몰살당했는데 하물며 강한 마법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마력도 적은 마을 사람들이 단 한 사람도 다치지 않고, 죽지도 않았다고? 하아……. 차라리 진실을 몰랐다면 좋았을 텐데. 그럼 희망이나 가질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런 입장에서 보자면 ‘핏자국이 보이지 않는다 = 희생자가 매우 적거나 아예 없을 수도 있다’라는 희망을 가질 수도 있었다. 카인이 정성껏 핏자국을 지운 것은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진실을 모르는 내가 헛된 희망을 가지도록 만들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공을 들여 엿을 먹이니 웃음밖에 안 나왔다. 대단하다. 박수라도 쳐야 하는 거 아닐까 싶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니 더 이상 프레그넌트에는 있을 수가 없었다. 새벽의 습격부터 지나 점심시간이 되자 간단한 식사를 한 후 카인이 이곳에서 떠날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촌장부터 시작해 마을 사람들은 정이 든 자기 마을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간에 당연히 취할 법한 반응이었다. 지금까지 살던 마을을 버리라니. 그게 말이나 될 법한 소리냐?

모두 난색을 표했지만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냐는 카인의 말에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성벽을 뛰어넘지도 않았고 비행 능력조차 없는 그들이 어떻게 마을 안에 들어오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말은 언제 다시 이곳에 그 괴물들이 무더기로 올지 모른다는 뜻이었다.

몇 마리만으로도 쑥대밭이 된 마을이다. 더 이상 마을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게 된 폐허에 영원히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을의 상태와 괴물의 습격을 고려한다면 이곳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물론 현명한 선택이라 해서 기분 좋게 따를 수 있는 건 아니다만……. 나쁘게 말하자면 마을을 버리는 거였으니까.

마을을 버리면서까지 가는 곳이다. 그만한 안전이 보장되는 곳이어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을 모두 수용(收容)할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곳. 그런 조건을 충족하는 곳은 단 한 곳밖에 없었다. 바로 왕궁(王宮)이었다.

왕궁의 크기는 생각 이상으로 컸으며 많은 사람들이 죽긴 했지만 여전히 300명을 넘는 프레그넌트의 주민들을 수용할 수 있을 거라 생각됐다. 마리아와 아테나한테 피해를 끼치긴 하겠지만 백성들의 위기가 코앞에 닥친 상태다. 인자하며 자애로운 두 명이라면 틀림없이 자신들의 사정을 이해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로라, 아이나, 아이라. 프레그넌트에서 가장 발언권이 강력한 촌장과 경비대장. 한 때 수도에서 근무를 권유받았던 아이라까지. 이 세 명이 수도를 다녀오기로 했으며, 그녀들이 갔다 오는 동안 마을 사람들과 아내들은 카인이 지키기로 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은 없었기에 바로 텔레포트를 사용했다.

갑작스러운 세 명의 알현(謁見)에 마리아와 아테나는 적잖게 놀랐다. 같은 남편을 둔 아내이자 친구인 세 명이 형편없는 몰골로 나타나자 이게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고, 아이나는 육체적·정신적으로 지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정을 다 털어놓았다.

청록색 촉수 괴물에 대해서는 나도 납치된 후에 처음 들었던 것이었기에 그녀들이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이미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에 마리아와 아테나는 슬픔을 표했고 두 말할 것도 없이 마을 사람들을 왕궁으로 데려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부탁하기도 전에 지시를 내릴 정도니 그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짐작이 간다.

다시금 텔레포트로 마을에 돌아간 세 명은 곧바로 마을 사람들을 모았다. 피난 같은 걸 갈 경우에는 가다가 쉴 경우를 대비해 물건 등을 챙기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어디로 갈지도 모르고 정처 없이 가다보면 배가 고프게 되니 먹을 걸 챙기는 것 또한 필수였지. 젠장. 왜 행군 생각이 나지?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그러한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었다. 사정을 딱하게 여긴 마리아와 아테나의 배려로 인해 왕궁에 그저 오기만 하면 됐다. 그 말을 들은 주민들은 기뻐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슬퍼하기도 했다. 소중한 추억을 챙길 시간마저 없을 정도로 상황이 촉박했었으니까.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는 없지만 그 사람과 함께 나누었던 추억을 떠올릴 수는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함께 추억이 깃든 물건이나 장소 등이 필요했고, 주민들은 그러한 물건조차 챙길 수 없을 정도로 난장판이 된 마을을 보며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폐허나 진배없게 된 건물 파편 속에서 자기가 원하는 추억의 물건을 꺼내야 한다니.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나 또한 안즈와 함께 물자를 찾았지만 절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물자 찾느라 힘들었고 시간 또한 많이 소비했었지. 게다가 찾으면서 시신이나 핏자국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정신적 피로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다.

카인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왕궁에 왔고 마리아와 아테나, 헬레나는 그들을 따스하게 맞아줬다. 여왕이나 공주는 흔히 권위주의적이며 사람들을 깔본다는 이미지가 있었는데 마리아와 아테나를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원래부터 인자하고 자애롭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성격이 좋았으니 혹시나 성격이 변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고.

왕궁에 묵게 된 주민들은 살아남은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의 리스트를 작성해 아이나한테 전달했으며 이를 통해 약 70~80명이 사망했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숫자를 들으니 손과 발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느낌이 든다. 야만족보다는 적지만 함께 사랑을 나누었던 주민들이 그렇게 많이 죽어버리다니…….

슬픈 건 그녀들의 죽음뿐만이 아니었다. 사실상 임신 3개월을 넘어 이제 4개월로 들어서는 아기들. 그녀들의 뱃속에 들어있던 아기들 또한 죽어버린 것이다. 이 세상의 공기조차 마시지 못한 채. 태어나지조차 못한 채 죽어버리다니……!! 대체 난 어떤 표정을 지으면 좋단 말인가!? 이 새끼 앞에서 눈물을 터뜨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사망한 자들은 안타깝지만 지금은 살아남은 자들을 봐야 했기에 언제까지고 슬픔에 젖어 있을 수는 없었다. 왕궁에서 지급되는 식사와 침구류를 사람 수에 맞게 배분해야 했기에 아이나와 아내들은 계속해서 움직여야만 했다. 움직이면 몸이 힘들어지고 그럼 힘든 생각, 슬픈 추억으로부터 잠시간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누군가 본다면 피도 눈물도 없는 여자들로 보였겠지만 나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납치되기 전까지 꾸준하게 하던 체술과 검술 훈련. 똑같은 동작의 반복이었지만 그때만큼은 힘들거나 괴로운 추억을 잊고 그저 몰두할 수 있었다. 같은 동작을 반복함에 따라 일종의 무아지경의 상태에 빠질 수 있었고 이는 아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백성(주민)들을 위한 전폭적인 지원에 몇 번이고 감사해도 모자랄 지경이다. 신분은 다르지만 그녀들은 내 아내들이었으며 식사 시간에는 함께 모여 현재의 상황이나 부족한 물자 등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는 했다. 그와 함께 거론되는 것은……그래. 바로 카인이었다.

영웅처럼 나타나 모두를 괴물로부터 구해줬을 뿐만 아니라 신속하고 정확한 판단으로 더 이상 누구 하나 다치는 일 없이 피난(피신)을 진행시켜준 사람. 무엇보다……나 이외의 남자라는 점에서 모두의 호기심을 끌기에는 충분한 존재였다.

카인은 나와 마찬가지로 남자였지만 공통점은 얼마 없었다. 눈을 떠보니 이곳에 있었다고 했으며 머물 마을을 찾던 중 프레그넌트에 오게 된 것이라 했다. 평소에 배워둔 검술과 마법으로 괴물을 물리쳤다고 했지만 그걸 들으니 의문점이 생겼다.

눈을 떠보니 이곳에 있었다는 놈이 어떻게 괴물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까? 수상하게 여긴 은채가 그것에 대해 묻자 자기가 살던 곳에도 그와 똑같은 괴물이 있었다고 대답했다. 그 이야기를 듣자 아내들. 특히 나와 함께 이 세상으로 소환된 아내들은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자기들 또한 원하지 않게 이 세상에 소환된 자들이다. 현실 세상에서는 존재할 리 없었던 괴물들이 실존할 뿐만 아니라 그들과 싸우기도 했다. 자기들이 상상도 하지 못한 세상이 존재했는데 하물며 자기들이 본 것과 똑같은 괴물이 존재하는 세상이 있다 쳐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오히려 그가 살던 세상에서 카인뿐만 아니라 괴물도 소환됐다고 보는 편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었다. 그녀들은 야만족에 대해서. 청록색 촉수 괴물이 주변에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기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카인이 소환됐듯이 괴물들 또한 소환됐기에 성벽에 관계없이 마을로 들어올 수 있었다고 결론을 지었다고 한다.

원래 살던 세상에 똑같은 괴물이 있었다고?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해라, 망할 놈아……. 그 괴물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예상치 못한 파워업까지 시켜 야만족을 대부분 죽이게 만든 놈이 뭐? 원래 살던 세상이라고?

당장 저 잘 생긴 얼굴의 미간에 총알을 박아주고 싶었다. 너무 참다 보니 암에 걸리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함마저 느껴질 정도다.

피난이 완료됨으로써 프레그넌트의 주민들과 아내들은 안전을 얻게 됐다. 3일 동안 엄청난 지옥을 겪은 그녀들한테는 휴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며,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조사대를 만들어 파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계획 또한 온전하게 흘러가지는 않았다. 우리가 레이프로 오면서 겪었듯이 주변에는 청록색 촉수 괴물이 우글거렸고 득실댔다. 이러한 괴물은 프레그넌트 주변에만 있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초록색 촉수 괴물은 레이프 주변에도 나타났으며 이 소식을 들은 모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프레그넌트에서 레이프까지는 대략 일주일 정도 걸린다. 그만한 거리를 쉬지도 않고 뛰어왔을 리가 없지 않은가!? 마리아와 아테나, 헬레나를 대동(帶同)한 아내들은 즉시 성벽으로 올라가 괴물들을 관찰했다.

청록색의 촉수를 휘둘러대며 주변을 배회하는 그 모습은 틀림없는 괴물이었다. 프레그넌트를 쑥대밭으로 만든 것도 모자라 소중한 주민들을 분별없이 죽여 댄 저주스러운 놈. 이미 괴물의 특성에 대해 들은 아내들이었기에 섣불리 다가갈 수는 없었다.

나와 안즈가 이곳에 들어올 때 분위기가 어수선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프레그넌트 때처럼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이미 그놈들이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경비가 삼엄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는 거다.

그리고……이런 위험한 순간에 멋진 활약을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얀 혜성’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모자랄 귀공자, 카인이었지.

검술뿐만 아니라 마법까지 높은 수준에 도달한 그는 단신(單身)으로 주변의 괴물들을 모조리 제압했다고 했다.

카인의 활약상을 말할 때 들뜬 안나와 니나의 모습은……차마 보기가 어려웠다. 그녀들의 목소리는 열락(悅樂)을 띠고 있었으며, 카인의 활약을 말하는 그녀들의 얼굴은 맹목적인 사랑에 젖은 상태였으니까.

내가 생각했던 최악. 그녀들이 카인과 잠자리를 가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다시금 머리를 아프게 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이제는 ‘과연 그럴까? 정말 그렇게 생각해?’라는 메시지가 머리를 가득 채운다.

단신으로 괴물을 없앤 강한 힘과 솜씨. 그 검술 솜씨는 이 세상 최강의 검사로 알려진 아테나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으며, 강력한 마법의 적절한 활용은 마법의 극에 도달했다고 소문이 자자한 마리아마저 홍조를 띠게 만들 지경이었다.

비록 말은 그렇게 안 했지만 그의 솜씨를 칭찬할 때마다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쑥스러워하는 아내들의 모습은 내 가슴에 커다란 대못을 몇 만 개씩 박아댔으며,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배신감과 슬픔에 손을 부르르 떨어야만 했다.

괴물을 없애긴 했지만 여전히 괴물들은 존재했으며, 내가 이렇게 쳐들어오기 전까지 정기적으로 괴물 토벌에 힘을 썼다고 했다. 카인의 행동은 그야말로 내가 예전에 했던 것과 똑같았다.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남들을 위해, 모두를 위해 괴물을 토벌하는 것.

단지 그것뿐이라면 나도 그한테 호감을 가질 수 있었겠지만……카인의 정체를 알고 있다면 그러한 행동마저 가식적인 연극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널리 알리고 그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삼은 사이코패스이자, 다른 사람들의 생명과 존재를 자신을 위한 도구로밖에 보지 않는 소시오패스 새끼다.

그가 아내들을 도운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목적─이 ‘하렘 어드벤처’에 본격적으로 관여하는 것과 나를 엿 먹이는 것─을 위해서이지, 결코 우리를 불쌍하게 여겨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의 정체를 아는 나는 단언(斷言)할 수 있었다. 모두한테 알려주고 싶었다. 이 새끼가 바로 모든 일의 흑막이자 원흉, 주모자(主謀者)라고.

하지만……문제가 있었다.

어떻게 알려야 하는데?

지금까지 ‘백발의 여인’을 본 것은 오직 나뿐이다. 이 세상이 그녀에 의해 창조됐다는 건 나와 그녀밖에 모른다. 아내들한테는 설명을 한 적조차 없었지.

지금까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고, 설명하기 위한 증거조차 가지지 못한 내가 그를 미친 여자라고 욕한다고?

대체 누가 믿어줄까?

증거가 어디 있다고?

애초에……이미 나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없어진 그녀들이 나를 믿어주기는 할까? 여전히 그한테 총을 겨누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그녀들이? 나를 예전처럼 사랑하는지 어떤지조차 모르는 그녀들이!?

난 결국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너무나 많은 정보와 사실, 감정에 의해 내 육체는 피폐한 상태였으며……더 이상은 잔혹한 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 의식은 이미 어둠속으로 가라앉고 있었고 정신을 잃으며 보지는 못했지만……카인은 비릿한 웃음을 입에 머금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광대가 익살스럽게 춤을 추는 걸 비웃는 것 마냥…….

============================ 작품 후기 ============================

아무것도 모른 채 하반신을 마구 박아댈 때는 좋았겠지만 현실과 음모를 깨달은 후부터는 엿 먹느라 급급한 세린입니다. 100화 이상 실컷 박아댔으니 앞으로도 실컷 굴려야죠. 굴렁쇠가 '형님, 오랜만입니다! 헤헤……'라며 인사할 때까지 굴릴 겁니다.

코멘트에 대한 답변입니다.

로리콤MK님, 고민한 끝에 나온 것이 결국 카인과 NTR 루트였습니다. 세린한테 있어 가장 큰 절망이라면 지금까지 얻어 온 사랑과 아내들을 모조리 잃는 게 아닐까 싶었거든요.

그치만 사고 같은 걸로 잃어버리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고의와 농간에 의해 잃게 된다면 더욱 더 큰 상처가 되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서는 그러한 행위를 'NTR'이라 칭하고 있죠.

추가 남캐를 적는 건 내키지 않았지만 최대한 정신적 고통을 주기 위해서는 이게 가장 좋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zxc54님, 전 실제로 NTR을 당한 적은 없지만……그나마 자기 주변에 남은 것들까지 모조리 빼앗겨버린다면 그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겁니다. 물론 전 그런 상실감을 세린한테 슬램☆덩크! 시켜버릴 생각이구요.

김민철이님, 위의 답변에 적었듯이 세린한테는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슬램★덩크! 해버릴 겁니다. 주인공인 이상 이러한 경험은 피해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주인공이니까요.

그저 여자를 범하며 즐기기만 했다면 이런 소설을 안 썼을 거라 생각합니다. 비록 19금이고 노블레스 소설이긴 하지만, 소설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 양판소 비스무리하게 보이지만 그 나름대로의 의미와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소설을 쓰자고 생각했거든요.

물론 제 졸작에서 엄청난 의미나 교훈을 발견할 수는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만……그래도 몇 개 만큼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네요. 그 중 하나가 세린이 현재 겪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일은 자기 뜻대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는 거죠.

왜 세린이 이런 일을 겪고 있는가, 어째서 백발의 여자는 카인이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올라서게 된 것인가. 이러한 의문은 소설이 진행됨에 따라 점차 풀릴 것입니다.

쌀쌀한 저녁이네요. 독자님들도 주무실 때 이불 꼭 덮고 주무시기 바랍니다. 살짝 추울 정도니 선풍기는 끄고 자야겠네요. 예? 레드썬은 언제 할 거냐고요?

……안심하십시오, 독자님들! 더 이상 레드썬은 없습니다! 독자님들의 기억을 바꾸는 일도, 세뇌하는 일도! 절대 하지 않을 거고 일어나지도 않을 겁니다! 그러니 독자님들은 안심하고 소설을 보십시오! 저는 끝까지 독자님들을 위해 소설을 쓰겠습니다!

예? 이런 말 하니까 6.25 전쟁 때 지 혼자 살겠다고 한강 다리 폭발시킨 놈 생각난다고요? 하하, 설마요. 제가 아무리 병신이라지만 그 정도로 병신은 아닙니다. 자기 혼자 살겠다고 국민 버리는 놈 정도로 병신이겠습니까?

예? 그 정도 병신은 아니지만 병신임에는 변함이 없다고요?

……

…………

……………… 받아라, 레드썬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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