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어드벤처–당신의 아기를 낳고 싶어-196화 (196/235)

00193 「20-2 : 데드 엔드 (3)」 =========================

이루이가 가진 마법은 상당히 실용적·생활필수적인 마법들이었다. 물을 만들거나 조그마한 불꽃을 만들거나 하는……. 전투에는 써먹을 수는 없지만 생활에서는 생각 이상으로 편리한 마법들이었기에 보는 나도 ‘오오, 역시 판타지 세상! 마법을 생활에 이용하는군!’이라며 감탄했었지.

프레그넌트에서 오래 살긴 했지만 이루이가 쓰는 마법 같이 전투에 적합하지 않은 마법은 별로 본 적이 없었다. 마법 쓰는 걸 자랑할 사람도 없었거니와 당시의 우리한테는 전투에 적합한 마법이 훨씬 더 필요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래도 한두 개 정도 전투에 쓸 만한 마법을 익혀둔 것은 아마 호신(護身)을 위한 거였을 거다. 이왕 익히는 마법, 위험할 때 공격해서 싸우거나 도망치거나 하는 게 좋았겠지. 자기 몸은 자기가 지켜야 했을 테니까.

이루이의 손에 만들어지는 화염은 지금까지 중에 가장 격렬하게 불타고 있었다. 초보적인 마법일 수도 있지만 우리의 목적은 저 괴물들을 뚫고 나가는 것. 전멸시킬 수도 없지만 그럴 필요도 없었기에 이 정도면 충분했다.

이루이는 내 지시가 있을 때까지 대기했다. 어차피 1분도 안 돼서 튀어나갈 거다. 괴물들은 아무런 패턴 없이 막 움직이고 있었기에 그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간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앞에 있는 놈들을 최대한 빨리 죽이며 나간다. 그거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시뻘건 괴물, 시퍼런 괴물, 초록색 괴물. 신호등 대신 저 새끼들을 설치하면 어떨까 하는 미친 생각을 하며 점점 타이밍을 잰다. 난 손을 가볍게 들었다. 손가락을 하나씩 굽혀 간다. 5, 4, 3, 2, 1.

“날려!”

이루이는 손을 놈들한테 내밀었다. 투영마술로 만들어진 투영물이 힘차게 나아가듯 활활 타오르는 화염이 놈들의 사이에 들어가……폭발했다!?

“으헉!?”

생각지 못한 공격에 놀란 건 괴물이 아니라 나였다. 이루이를 보니 그녀는 ‘왜요?’라는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저거 폭발하는 거였어!?”

놀라움과 황당함을 때려 박은 내 질문에 이루이는 머리를 긁어댔다.

“그게……엄마가 ‘이왕 배우는 거 큰 거 한 방 배우렴’이라고 하셨거든요……. 세린님한테는 보여드릴 기회가 없어서 말씀을 못 드렸는데……괜찮았나요?”

이루이 어머님, 당신은 딸한테 대체 무슨 마법을 가르쳐 주신 건가요? 딸을 위해서라지만 너무 강력한 마법을 가르치신 거 아닙니까?

묻고 싶은 것과 따지고 싶은 것이 산더미처럼 많아졌지만 그건 곧 머리에서 지워졌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질문이 아니라 뛰는 거다. 뛰자는 내 말에 이루이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을 움직였다.

예상도 못한 마법이 자기들 사이로 날아온 것도 타격이 컸지만 폭발적인 위력과 범위를 가지고 있었기에 피해는 상상 이상이었다. 몸에 불이 붙어 촉수를 이리저리 휘둘러대며 발광을 하는 놈들을 보니 기분이 참으로 상쾌했다.

나와 이루이를 보자마자 괴성을 지르며 달려오려는 놈들은 친절히 대가리나 얼굴 주변에 총알을 박아줬다. 괴물이 많았지만 그 종류를 보며 난 안심할 수밖에 없었다. 청록색 촉수괴물이 없다는 것은 마법내성을 지닌 괴물이 없다는 뜻. 즉…….

“공격하면 데미지가 전부 다 박힌다, 이 말이지!”

오랜만에 철 찌꺼기 외에 다른 것을 투영했다. 내가 지금까지 투영했던 것은 간장·막야 (干將·莫耶)와 철 찌꺼기. 두 종류뿐이었다. 그 이상으로 강한 무기를 써야 하는 상대가 없었기도 했고, MP를 함부로 낭비할 상황이 아니었기에 투영의 필요성 자체를 못 느꼈지만……지금은 아니었다.

예전에 하려고 했지만 마력이 많이 줄어든 상태라 하지 못 했던 것. 철 찌꺼기를 투영하는 것으로 그쳤지만 원래 투영하려고 했던 그 검이 내 주위에서 나타났다.

「거짓・나선검 칼라드 볼그Ⅱ(偽・螺旋剣 カラドボルグⅡ ; Caladbolg Ⅱ)」. 드릴처럼 검신(劍身)이 돌아간 그 모습은 척 봐도 백병전(白兵戰)에서 쓸 법한 물건이 아니었다.

원작에서는 서번트 클래스 아처(Archer)에 해당하는 인물이 보구를 폭발시키는 기술. 「브로큰 판타즘」을 사용해 적한테 많은 데미지를 주고는 했지만……여기서는 그러한 세부 설정이 구현되어 있지 않았기에 【착탄(着彈) = 폭발】이라는 성질을 띠고 있었다.

원작에서는 공간을 비틀거나 전이(轉移)해 버리는 능력도 있었지만, 이곳에서는 세부 설정이 없어진 만큼 단순한 폭발성 검으로 변한 상태였다. 있는 마력을 써서 세 자루를 만든 나는 차례로 우리가 가려는 길 주변에 투영물을 발사시켰다.

폭발로 인해 안 그래도 몸이 불에 타고 있는 놈들한테 또 폭발물을 끼얹어주다니. 오늘은 운수대통하는 날이군. 엄청난 폭풍과 함께 하늘에 붕 뜬 괴물들은 발과 손, 촉수를 허공에서 허우적대며 땅으로 자유낙하를 경험한다. 닿자마자 ‘파샥!’이라는 역겨운 소리와 함께 신체 일부가 완전히 곤죽이 된 걸 보니……으윽, 밥맛 떨어진다 시발!

떨어져서 죽는 것도 멋졌지만 그보다 더 통쾌했던 것은……떨어지는 괴물이 다른 괴물과 부딪치며 둘 다 죽는 연쇄충돌(憐殺衝突)이었다. 땅에 떨어져 죽는 놈들이 있는가 하면 자기 동료들과 부딪치며 둘 혹은 셋 이상의 괴물들한테 뉴턴의 법칙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가르쳐주는 놈들도 있었다.

촉수 등으로 인해 사람보다 훨씬 무거운 저놈들이 하늘에 붕 떴다가 떨어진 거다. 저들이 지닌 무게, 중력, 낙하 및 운동 에너지를 계산한다면 최소 사망. 운이 좋아도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지는 게 보통이었다.

세 발의 칼라드볼그Ⅱ가 착탄할 때마다 주변은 엉망진창이 되어갔다. 앞, 옆으로 퍼지는 먼지와 괴물들의 시체는 괴물들한테는 전의(戰意)를 상실(喪失)시키는 요소가 될지 모르지만 나나 이루이한테는 앞으로 달려 나가게 만드는 원동력이나 다름없었다.

간당간당한 MP를 한계에 가깝게까지 쓴 덕분일까? 내 레벨은 38이 되었고 조금 전까지 줄어있던 MP는 완전히 다 찬 상태로 변해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파티 멤버가 된 아내들의 스테이터스까지 신경 쓰며 싸워야 했겠지만 ‘자지의 맹세’가 사라진 이후로는 파티 멤버를 받을 수가 없게 됐기에 그럴 필요는 없었다.

배에서 나온 촉수를 힘겹게 휘두르고 있는 붉은색 촉수괴물이 주변에서 다가온다. 청록색이나 초록색 촉수괴물들은 이미 죽은 지 오래지만, 붉은색은 다르다. 처음부터 죽어 있었기에 고통이나 부상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동속도는 느리지만 좀비 같은 끈질김과 입에서 나오는 산성액은 이동속도라는 디메리트를 채우고도 남을 정도의 이점이었기에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되는 놈들이다. 얼굴과 입, 팔 주변에 총을 쏠 때마다 강렬한 총성이 귓전을 때렸다.

사격하러 갈 때도 그랬지만……사격을 할 경우 이명(耳鳴)현상을 자주 느끼고는 했다. 이명증이라고도 부르는 이 현상은 사격 소음으로 인해 겪는 것 중 하나였다. 사격이 그쳐 주변에 소음이 없는데도 귓전에서 ‘삐이~’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려오는 거였다. 군대 갔다 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거라 생각한다. 그 뭣 같은 느낌.

이런 현상은 사격이 끝난 후 곧 사라지게 되지만 운이 나쁠 경우 ‘소음성 난청’으로 발병될 수도 있었다. 원하지 않는 군생활도 힘든데 병을 얻게 되어 나가다니……. 물론 자랑스런 대한민국에서는 그런 걸 정신력이 약해서 그렇다, 곧 나아진다 등으로 얼버무리려 했지만……그게 되겠냐?

군 이명 피해자들이 진료기록을 확보하는 것부터 시작해 군 병원에 방문하는 등 자신의 몸에 대해 적극적으로 호소했기에 어떻게든 대처를 받을 수는 있었다. 심할 경우 국가유공자(國家有功者)로 지정될 수도 있었지만 여전히 한국의 군대는 자신들로 인해 발생한 피해나 사건을 최대한 은폐하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런 케이스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군 생활로 인해 다치거나 병을 얻게 되는 사람들을 보며 늘 안타깝다고 느꼈다. 예전에도 말했잖냐. 인생 한 방에 훅 갈 수 있다고. 나도 그런 ‘훅 가는 사람들’ 중 한 명이 될 수도 있었기에 남 이야기를 듣는 느낌이 안 들었다니까? 현재는 괴물 때문에 훅 가게 생겼다만…….

“어큭!?”

강렬한 충격이 등을 덮쳤고 난 괴성을 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기침을 해대며 총을 바로 잡은 나는 뒤를 보며 누가 나를 때렸는가 확인했다. 역시……팔 한쪽이 날아갔음에도 불구하고 부지런하게 기어온 붉은색 촉수괴물이 날 향해 웃고 있었다.

찢겨져 나간 촉수를 강하게 휘둘러댈 때마다 검은색 피가 땅이나 주변에 흩뿌려졌지만 그것마저도 신경을 안 쓰는 걸 보니……저놈들은 앞으로 ‘좀비 타입’이라고 불러야 할 거 같았다. 보통 신체 일부가 찢겨지거나 하면 패닉에 빠져야지! 저 새끼들처럼 몸이 잘렸는데 신나게 싸우진 않는다고!

“세린님!”

이루이가 내 이름을 부르며 곁으로 다가왔다. 내가 맞는 걸 눈앞에서 봤으니 놀랄 만도 하겠지. 이루이가 치료 마법을 쓰는 동안 나는 자세를 고쳐 날 때린 놈한테 투영마술로 만든 철 찌꺼기를 선물해줬다.

턱에서 목, 촉수 뿌리까지. 단번에 파고 들어간 철 찌꺼기는 놈의 신체를 고속도로처럼 찢어 발겼다. 아무리 좀비라지만 턱이나 목, 촉수가 모인 뿌리 부분을 동시에 공격당했으니 무사할 리는 없겠지. 내 예상대로 놈은 껄떡대다 옆으로 쓰러졌고 그와 동시에 치료 마법이 풀렸다. 아픈 건 좀 가셨군…….

고맙다는 말을 한 후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놈들……사람 냄새는 기가 막히게 잘 맡는다니까? 다친 동료들을 밟으며 오는 걸 보니 몸서리가 일어났다. 짐승 같은 놈들. 그렇게 뭔가를 먹고 싶으면 죽은 동료나 처먹든가! 왜 우리한테 오고 지랄이야?

거의 500m쯤 왔을까? 우리를 쫓아오는 괴물과 가로막는 괴물. 두 부류의 괴물을 상대해야 했기에 체력 소모가 장난이 아니었다. HP 수치 3,800. 레벨 업 덕분에 MAX 게이지를 자랑하던 HP는 벌써 2,800 점 정도를 나타내고 있었다. 등짝 한 대 맞은 것뿐만 아니라 가끔씩 스치는 촉수를 피했는데도 이 정도다. 정통으로 몇 번 맞으면 【좆 \^0^/ 망】!!

산 넘어 산이라고들 하는데……그거 아냐? 난 아직 산에 도착도 못 했어! 왕궁이라는 이름의 산에 도착한다면 카인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산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나는 아직 왕궁에 닿지조차 못했다고! 지금 이 상황도 좆 빠지게 힘든데 이거보다 더 힘든 미래가 날 기다리고 있다고? 그냥 쟤들한테 힘차게 달려갈까?

한숨을 쉬며 이루이를 본다. 시발……내 곁에서 최대한 전투를 피하며 가끔은 공격 마법도 날리곤 했던 이루이지만……그녀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시퍼런 멍과 핏자국. 은색 비키니 아머는 무사했지만 거기에 보호되어야 하는 몸은 상처 투성이다. 내가 여자는 좋아하지만 상처 투성이의 여자를 안는 취미는 없단 말이야…….

“세린님……괜찮으세요?”

이 와중에도 날 걱정하는 걸 보니 참……다시 한숨을 크게 쉰 후 내가 물었다.

“나는 괜찮은데 너는 안 괜찮게 보인다.”

그 말이 웃겼는지 이루이는 킥킥댔다. 왜 이루이나 다른 사람들은 내가 걱정하는 말을 듣고 웃는 걸까? 웃을 포인트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고 지금이 웃을 때도 아닌데 왜 웃는지 모르겠다.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개그맨이라도 노려봐야 하나?

“이루이야. 앞으로 얼마나 마법을 쓸 수 있겠어? 치료 마법 위주로.”

이루이의 엄호는 고마웠지만 마력이 고갈될 걸 작정하고 쓰는 나한테 비하면 그리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남은 마력을 치료해주는 데에 써주는 게 더 나았다.

“아마……세내 번 정도 쓰면 마력이 다 닳을 거 같아요.”

세내 번이라……. 최소한 3번. 쥐어짜면 4번이란 거겠군. 마력을 쥐어짜면 정신력뿐만 아니라 체력도 소모하기에 결코 바람직한 자세는 아니었다. 물론 여기서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몇 백 배나 나은 처신이다만…….

마력 고갈을 작정하고 싸우는 내 모습은 이 상황을 헤쳐 나가는 데에는 바람직한 모습이겠지만 나중을 생각하면 절대 좋은 것은 아니었다.

내가 HP & MP가 MAX 상태에서 싸운다 치더라도 타격을 줄 수 있을지나 의문인 카인이랑 싸워야 하는데 여기서 온갖 게이지를 모조리 다 소모해야 한다니. 왕궁에 닿으면 잔치라도 열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도 우리를 향해 앞뒤에서 다가오는 걸 보니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다. 여기서 죽기는 싫고, 정공법(正攻法)으로 싸워서 이길 만한 숫자는 아니고. 내가 가진 투영마술을 써서 가장 강한 무기를 꺼낸다고 한들 놈들을 다 물리칠 수는 없었다. 애초에……지금 내 마력으로는 꺼낼 수 있는 투영마술에도 한계가 있었다.

내 레벨은 38. 3,800이 기본 마력 게이지지만 【사랑과 신뢰의 반지】로 인해 약간의 보너스를 받고 있었다. 안즈와 이루이 덕분에 한 사람당 1,000 포인트. 보너스 2,000 포인트가 가산(加算)되어 5,800의 MP를 지닐 수가 있었다.

원래라면 마력을 2.5배로 뻥튀기 시켜주는 능력도 적용되어야 했지만……아내들의 사랑과 신뢰가 사라지며 【마력 2.5배 증가】의 효과 또한 사라져버렸다. 따라서 ‘기본 마력 + 아내들의 보너스’에 해당되는 마력밖에 지닐 수가 없었다.

레벨 업을 한 후에는 철 찌꺼기와 사격밖에 한 일이 없었기에 마력 자체는 상당히 남아돌고 있었다. 아직도 5,500 이상이 남아 있는 걸 보니 나름 흡족한 마음은 든다만……저놈들의 개떼 같은 수 앞에서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숫자였다.

저놈들한테 총 한 발씩을 쏴서 죽이는 기술. 흔히 말하는 원샷원킬(One Shot One Kill)을 해낼 자신도 없을뿐더러 좀비 타입한테는 한 발 이상을 쏴야 했다. 레이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대체 몇 명이라고 생각하는 건데? 좀비 타입에 다른 괴물까지 합쳐졌으니……놈들의 머릿수는 레이프의 인구수보다 많을 거다!

압도적인 적의 숫자만 해도 머리가 아득해지는데……지금 그거 때문에 정신을 잃을 때가 아니었다. 백발백중의 실력을 지니지도 않았다만……내가 잘 쏜다고 해서 쟤들이 가만히 맞아주는 건 아니잖아!?

앞뒤에서 현재완료진행형으로 꾸역꾸역 몰려들고 있는 쟤들 좀 봐라! 사람만한 개미떼 같아서 안 그래도 구역질과 혐오감을 유발시키는데……쟤들이 멈추겠냐? 내가 총 쏜다고 가만히 맞아주겠어? 앞뒤에서 다가오는 놈들한테 ‘얘들아, 스톱! 작전타임!’이라고 외친다고 ‘인정한다!’라며 가만히 있을 놈들이 아니라니까?

왜 있잖아! 좀비들이 개떼 같이 몰려오는 장면! 그런 곳에서 경찰이나 군인들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총을 쏘고 쏘고 또 쏘지만……고통에 아랑곳 않을 뿐만 아니라 동료를 방패삼아 다가온 후 물어뜯는 장면은 이제 흔하다 못해 지겹잖아?

지금 우리가 딱 그 꼬라지다. 다가오는 놈들을 보니 생각 같아서는 무기고 뭐고 전부 다 던지고 죽음을 기다리고 싶었다. 차마 그럴 수가 없어서 안 하고 있지만 그런 결과가 올 거 같은 느낌은 여전했기에 아무런 행동을 취할 수가 없었다.

“세린님……. 저희……나름 열심히 한 거죠?”

체념이나 다름없는 말을 하는 이루이는 후련하면서도 아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 이해 간다. 지금까지 괴물한테 많은 걸 잃었으니 한 번 정도는 멋지게 반격을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괴물을 모조리 처리하고 저 왕궁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지금까지의 여행 중 가장 통쾌하고 멋진 시간이었지.

원래라면 ‘그래, 우린 최선을 다했어’라고 말해야겠지. 더 이상 손쓸 방법이 없으니까. 총이나 투영마술로 겨우 여기까지 온 건데 그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나나 이루이는 기계가 아니니까 언제까지고 기계적인 싸움을 되풀이할 수는 없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여기서 포기하는 게 당연하겠지.

……‘평범한 사람’이라면 말이다.

“이루이야.”

내 부름에 이루이는 고개를 들었다. 슬픈 것인지 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이루이는 울고 있었다. 난 그 눈물을 살짝 닦아줬다. 나도 죽기 싫지만 이 아이를 죽게 내버려두는 것도 싫었다. 단 하나의 방법을 생각해낸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왜 매일 이 방법을 쓰게 되는 걸까? 정말 하기 싫은데…….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내 표정이 이별을 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는지 이루이의 표정이 변한다. 말을 잘 듣기 위해 귀까지 쫑긋 세우려 하다니. 어이구, 얘 놔두고 내가 어떻게 죽냐……. 살아야지.

“난 지금부터 저놈들한테 돌격할 거야.”

“그, 그럼 죽잖아요!”

어이구, 이 철없는 아가씨야! 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냥 있어도 죽잖아. 그럴 바에야 한 놈이라도 더 죽여야지. 쟤들을 살려둬 봤자 공기낭비밖에 더 되겠니?”

내 말에 이루이는 뭐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 진짜 해야 할 말은 지금부터다.

“걱정 마. 내 생각이 맞으면 말이지……아마 죽지는 않을 거야. 안 죽고 여기를 지나갈 수 있을 거야. 둘 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묻는 이루이한테 자세한 것은 알려줄 수가 없다고 했다. 시간이 없으니까 말이지.

“내가 만약 살아남는다면 넌 나를 따라 왕궁으로 가면 돼. 달리면서 저놈들의 촉수를 피하는 거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 그저 달리기만 하면 돼. 알겠지? 내가 길을 만들 테니까 따라오기만 하면 돼. 이해했어?”

내 엉망진창 권유에 이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드러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은 후 ‘괴물들한테 습격을 당할 정도는 아니지만 나한테서 너무 떨어지지는 마라’라고 했다.

내가 너무 혼자 앞서가면 이루이를 지킬 수 없게 된다. 그치만 괴물들한테 덤벼드는데 너무 가까이 있으면 얘도 공격받게 되니까. 지키기도 어려운 주문을 참 쉽게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총을 든 나는 이루이를 뒤로 한 채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놈들을 향해 총을 쏘는 게 아니라 달려 나가자 이루이가 날 불렀지만 무시한다. 부카케에서 했던 일이 생각나는군. 그때는 혈기 넘치는 왕성한 젊은이였고 지금도 똘끼 충만한 병신이긴 하다만……선택하는 길은 늘 이거밖에 없었다.

“이 애미레스 애비레스 짐승 새끼들아아아────ㅅ!!”

마음속에 있던 수많은 욕 중 가장 심한 욕. 패륜드립. 통칭 패드립을 치며 난 놈들을 향해 힘껏 총을 ‘휘둘렀다’. 멀리서 쏴야 하는 총을 휘두르니 놈들도 당황했는지 움직임이 둔해졌고 덕분에 파란색 촉수괴물의 턱을 밑에서부터 때릴 수 있었다.

파란색 촉수괴물의 다리 사이에 달린 촉수는 날카로울 뿐만 아니라 독을 포함하고 있었다. 좀비 타입을 제외한 괴물 중 가장 위험도가 높은 건 바로 파란색이었다. 이런 곳에서 해독(解毒)을 할 수도 없거니와 그럴 아이템도, 능력도 없었으니까.

가장 짜증나는 놈 중 하나의 턱을 멋들어지게 올린 나는 다시 놈들을 향해 총을 휘둘렀다. 최선을 다해 휘두른 총은 허공만을 갈랐고 나는 가슴팍에 강한 충격을 느끼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어쿠! 이, 콜록! 개, 콜록……!!”

욕도 제대로 못 할 정도로 아프다!! 아, 시발! 내가 진짜 이 짓을 해야 하나? 계속 그런 생각만 들었다. 생각 같아서는 놈들한테 달려가 드롭킥이라도 먹여주고 싶었지만……그건 안 된다! 놈들한테 둘러싸인 그 순간 끝이다! 내가 노리는 것은 지속적인 데미지를 얻는 것이었지, 둘러싸여 촉수에 맞아죽는 게 아니었으니까!

“세, 세린님! 치료마법을 받으셔야 해요! 이리 오세요!”

내 데미지를 걱정하는 이루이였지만……나는 니 뒤가 더 걱정이다! 젠장! 투영마술을 다시 써서 칼라드볼그Ⅱ를 다시금 날린다. 이루이의 뒤에서 슬금슬금 기어오던 놈들은 멋진 연출과 함께 주변으로 날아갔다. 내장이나 장기, 팔 등이 찢겨 나가는 장면은 참 좋은데…….

투영을 마친지 2초도 안 됐는데 다시 강력한 충격이 몸을 엄습한다. 이번에는 머리와 어깨 부분이었다. 왼쪽 어깨와 이마 부근에서 몸이 타오르는 듯한 충격을 느끼며 난 신음을 뱉어댔다. 맞은 덕분에 뒤로 나가떨어진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왼쪽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뜨뜻한 무언가가 왼쪽 눈의 시야를 붉게 물들였기에 세상이 시뻘겋게 보였다. 왼쪽 어깨에 왼쪽 눈. 난 왜 왼쪽 부분을 자주 공격당하는 거지? 내 몸 왼쪽에 꿀이라도 발라놨나?

제대로 설 수조차 없는 나를 이루이가 안은 채 괜찮냐고 물었지만……내 시선은 이루이가 아니라 스테이터스 바에 가있었다. 2,800 정도를 나타내던 HP는 이미 1500 이하로 줄어들었지만……조금만 더! 조금만 더 내려가야 한다! 아직 더 닳아야 해!

이루이의 품에서 떨어진 나는 총을 들고 다시 놈들한테 달려갔다. 들고 있던 M16A1을 힘껏 던진 후 K2 소총과 아밍 소드를 힘껏 휘둘렀다. 소총에 맞은 부분은 우직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조금 찢어졌고 아밍 소드에 베인 촉수는 바닥에 떨어져 펄떡거리고 있다. 역겨워!

나한테 촉수를 훼손당한 초록색 촉수괴물은 양 다리와 오른쪽 옆구리를 촉수로 강타했다. 양 다리를 맞아 중심도 못 잡는 상태에서 오른쪽을 맞았으니 난 왼쪽으로 슬라이딩을 하듯이 넘어졌다. 입에서 비릿한 맛이 느껴졌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스테이터스의 HP 게이지는……540을 가리키고 있었다.

“……고맙다.”

내 혼잣말이 멎은 순간 커다란 총성이 들렸다. 제일 먼저 총알을 맞은 것은 내 양 다리와 옆구리를 때린 개자식이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5.56mm 탄알 세례를 맞은 그놈은 검은색 피를 줄줄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세린님!”

이루이는 이 좋은 광경을 놔두고 나한테 달려왔다. 어이구, 이 아가씨야. 걱정도 팔자다……. 원래라면 벌떡 일어나야 했지만 아직 충격이 완벽히 가신 게 아니었기에 이루이한테 기대어 간신히 설 수 있었다. 내가 일어나는 걸 착하게 기다려줄 놈들이 아니었지만……기다릴 수밖에 없겠지.

하늘을 날아다니는 M16A1와 K2 자동소총 앞에서 자기들이 뭐 어쩔 건데?

이루이는 한손으로 치료마법을 걸며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고 난 설명은 나중에 할 테니 얼른 가자고 했다.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놈들은 하늘에 둥둥 뜬 채 5.56mm 탄알 세례를 받았고, 자기들 동료가 죽어나가자 함부로 손을 댈 수가 없었기에 조금씩 물러선다.

자기들 동료가 죽어나가는데 물러서는 것은 동료를 위한 게 아니라 [죽이러 간다 = 죽는다]라는 걸 학습해서 그런 거다. 너흰 진짜……몸이 아픈데도 웃음이 튀어나왔다. 나도 인간쓰레기지만 너희도 충분히 쓰레기라는 거 알긴 알지?

내가 놈들한테 얻어맞은 것은 자동사격 모드를 발동시키기 위함이었다. 자동사격 모드는 내 HP가 30% 이하가 됐을 때 발동되는 패시브 스킬이었다. M16A1와 K2 자동소총이 자동으로 내 주위를 날아다니며 사격을 개시했기에 전투력 부분에서만 보자면 가히 최강급의 기술 중 하나였다.

이렇게 좋은 기술이 있는데 왜 안 썼냐고 묻는 사람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부카케에서도, 야만족의 숲에서도. 자동사격 모드가 발동됐을 때는 매우 급박한 상황이었다. HP가 30% 이하가 되어야 했지만 거기에 딱 맞게 HP를 소모할 재주도 없었고, 그러다 죽을 수도 있었다. 날 봐라. HP가 540밖에 안 남았잖아.

원래라면 3,800의 30%. 1140 포인트가 되거나 그 이하로 떨어지면 자동사격 모드가 발동되지만……난 그걸 못 맞춰서 540이라는 HP를 겨우 유지할 수 있었다. 아마 조금 전에 한 대라도 더 맞았으면 진짜 위험했을 거다. 의식을 잃어버리지 않았을까?

문제는 또 있었다. 레벨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HP가 많아졌기에 ‘30%이하’라는 조건을 만족시키는 게 더 힘들어진다는 거였다. 예전에는 몇 대 맞다가 끝났지만 이번에는 스스로 맞으러 가야 할 정도로 HP가 늘어났던 게 문제 아닌 문제였지.

발동 조건도 맞추기 어렵고 스스로 발동시키기 위해서는 죽음까지 고사해야 하는데 내가 미쳤다고 이걸 쓰고 싶어 하겠니? 나도 가능하면 이건 쓰기 싫었는데……이 개떼 같은 놈들을 보니 그거밖에 답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난 이루이한테 치료마법을 그만 쓰라고 했다. 기껏 맞춘 HP다. 여기서 1140을 넘기게 된다면 자동사격 모드는 바로 취소될 것이다. 1000을 넘지 못하는 HP를 확인한 나는 이루이한테 달리자고 했다.

우리가 가는 길을 방해하는 놈, 우리를 공격하는 놈을 최우선으로 족치는 소총 두 정 덕분에 길은 매우 쾌적했다. 달리다가 통증 때문에 넘어지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이루이가 날 도와줬다. 젠장, 명색이 남편인데 온갖 바보 같은 모습, 못 보일 꼴을 다 보여주는군. 그래, 오늘이 내 흑역사의 새로운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날이다!

자동사격 모드가 발동됐지만 내 MP는 여전히 여유가 있었다. 5,800 이라는 수치는 장난삼아 만든 게 아니다. 나를 믿어주는 아내들, 내가 지금까지 한 여행. 그 모든 것을 집약한 수치였기에 그리 쉽게 떨어질 것이 아니었다.

철 찌꺼기와 칼라드볼그Ⅱ를 연이어 투영하며 길을 서둘렀고 우리는 마침내 왕궁에 다다를 수 있었다. 왕궁에도 경비대원은 없었기에 우리는 허겁지겁 그곳으로 들어갔다. 우리를 쫓던 괴물들은 왕궁 입구 안으로는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

괴물을 막는 효과가 있는 건지, 카인이 저렇게 만든 건지는 모르겠지만……더 이상 우리를 쫓아오지 않는 괴물. 마침내 목표인 성으로 들어올 수 있었기에 우리는 기진맥진(氣盡脈盡)이 된 채 왕궁의 벽에 몸을 기댔다.

“……우리, 좀만 쉬다 가자.”

이루이는 대답이 없었다. 대답조차 힘들어하는 그녀의 태도를 긍정으로 여기며 난 눈을 감았다.

============================ 작품 후기 ============================

투영마술을 묘사할 때마다 생각하는 게……그런 검 말고 수류탄이나 클레이모어, C4 투영하는 게 몇 배는 더 낫지 않겠냐는 거였습니다. 물론 본편 설정에 따르면 모양만 비슷하고 안은 텅 빈 무기가 나올 확률이 높습니다만 이 소설에까지 본편 설정을 적용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그래서 많이 후회하고 있습니다.

칼라드볼그나 간장막야 등이 아무리 강해봤자 현대무기 앞에서는 뚜샤뚜샤 빵야빵야 끝! 마력을 쓸 수 없는 사람이라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현대무기 쪽이 훨씬 더 매력적이더군요. M16이나 K2 외에도 현대 무기를 사용하게 만들어야 했다는 때늦은 후회만 가득하네요.

어찌 됐든 계속해서 전진하는 세린과 이루이입니다. 괴물들을 물리치고 나간다 하더라도 기다리고 있는 건 사실상 신이자 최종보스인 카인. 산 넘어 산이어야 하는데 아직 산에도 도착 못 했네요. 열심히 구르는 걸 보니 저도 참 작정하고 굴리는구나 싶습니다.

회사는 점점 좆같아지고 있습니다. 계약직인데 왜 정규직 하는 일을 시키는 거냐 니들은……? 인건비가 아까우면 정규직한테 여러 일을 시켜야지 등신들아……!!

가면 갈수록 인건비가 비싸지니 한 사람한테 여러 일을 맡기자는 취지는 알겠는데……정규직이 모르는 걸 계약직한테 시키는 놈들이 어디 있어 시발!?

세상은 넓고 미친 연놈들은 많습니다.

그런 미지(未知)의 인간들과 만나고 싶다고요?

블랙기업이나 중소기업에 도전해보세요.

세상이 다르게 보일 겁니다.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이상입니다. 이번 달로 200화를 달성한다 생각하니 감개무량하네요.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작가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