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98 「20-7 : 데드 엔드 (8)」 =========================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느낌이다. 방금 뭐라고 한 거지? 영혼(靈魂)? 소울(Soul)말인가? 너무나 갑작스럽게 들린 말이었기에 침을 꿀꺽 삼킨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야 했다. 최대한 유린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도록 눈치를 봐야 한다니. 예전에 카인이나 유린을 쓰러뜨릴 거라며 깝쭉대던 신세린의 모습은 조각조차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 그건 설마……저, 저한테 죽으라는……?”
내가 지레짐작을 하며 겁을 먹자 유린은 폭소를 터뜨리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렇게 힘을 줘서 두드리는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내 어깨를 칠 때마다 영혼이 마구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아하하핫! 진짜! 제발 웃기지 좀 마! 일종의 보험이라구! 생각해봐! 너도 알잖아? 말로는 충성한다 복종한다 하면서도 속으로는 배반이나 모반(謀反), 배신을 생각하는 놈들! 니가 있던 현실에서도 그런 놈들은 많았잖아?”
“그, 그건 그렇습니다…….”
배신, 배반. 흔히 말하는 후두부 어택─이라 적고 ‘뒤통수 치기’라 읽는다─ 등. 말로는 충성과 복종을 맹세하지만 속으로는 칼 들고 ‘시발, 밤길 조심해라……니 등이나 볼록하게 부풀어 오른 배때지에 내가 꼭 칼로 쑤셔주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존재했으니까. 오죽하면 구밀복검(口蜜腹劍)이라는 말이 생겨났겠냐?
사자성어임에도 불구하고 ‘말로는 친한 척하지만 그 속에는 검(흉흉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라는 뜻을 지닌 걸 볼 때 배신자나 배신이라는 사건은 옛날부터 자주 일어났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아마 유린은 그런 걸 생각해서 저런 말을 한 거겠지.
“그, 그렇지만……영혼을 바치지 않더라도 이 세상의 절대자인 유린님한테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아부가 섞이긴 했지만 여기에는 내 의문도 들어있었다. 굳이 영혼을 바치지 않더라도 이 세상의 모든 걸 지배하는 유린 정도면 반역자나 배신자 따위는 순식간에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어째서 그런 걸 요구하는지 모르겠다.
“말했잖아? 보험이라고. 너도 알겠지만……인간이라는 건 그렇게 쉽게 믿을 만한 생물이 아니거든. 틈만 나면 저항을 하려고 하지. 자기가 하는 짓이 배반이든 반역이든 간에 같잖은 명분을 붙여대며 자기들이 하는 짓을 정당화하려고 하지. 너도 현실에서 겪어봤잖아? 노력하던 계약직에서 순식간에 해고 통보를 받았을 때를 잊은 건 아니겠지?”
내 생각뿐만 아니라 과거를 알고 있다는 건 꿈속에서 만났을 때 깨닫게 된 사실이었다. 비참했던 과거가 마치 좀비처럼 되살아난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한테는 더 나은 조건을 갖춘 사람이 필요하다. 너와의 재계약은 아예 없으니 그렇게 알아라’라고 하며 잘랐었지.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자격증이나 다양한 재능을 가진 사람을 쓰고 싶어 한 선택이겠지만……그들을 믿으며 노력했던 내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슬픈 선택과 통보였다. 그게 정말 최선이었는지는 지금도 의문이었다. 그들이 좀 더 나를 받아들여줬다면 공무원 공부 외에도 길이 있었을 텐데…….
“단지 바치는 거뿐이야. 너도 알잖아? 지금까지 너한테 찾아왔던 온갖 달콤한 이벤트. 현실에서는 결코 가질 수 없었던 여자들과의 쾌락. 누구나 너한테 복종하는 안락한 세상. 그 모든 걸 만들어준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저항했지만……나는 부처님 손바닥 위에 있는 손오공이었다. 어, 음……아니군. 생각해보니 손오공 이하였다. 손오공은 제천대성(齊天大聖)이라 불릴 정도의 힘이나 가진 놈이었지. 나? 계약직에서 단숨에 잘렸다니까? 나한테 뭘 기대했음?
보통 사람이라면 주저할 거다. 나도 지금 주저(躊躇)하고 있으니까. 사람의 영혼이란 사람이 가진 일종의……최후의 보루? 사람을 나타내는 거울이라고 해야 할까? 영혼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았지만 유린의 말로 인해 영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오늘 많이 깨닫는군.
“그……영혼과 정신은 많이 다른 건가요?”
갑작스럽게 영혼을 넘기라 했기에 내 정신은 제대로 된 사고를 하기 위한 태세. 흔히 말하는 ‘리부팅’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그 시간을 조금 메우기 위해 색다른 질문을 던졌다. 흔히 육체나 영혼, 정신 등을 이야기하는데……정신과 영혼은 무슨 차이가 있는지 알고 싶었다.
“다르긴 다르지. 사람을 이루는 요소. 흔히 말하는 근간(根幹)이 뭐라고 생각해?”
안 그래도 이 세상은 판타지 월드인데 갑자기 또 사람을 이루는 요소라니. 서양의 판타지에 동양의 철학 혹은 형이상학(形而上學)이 겹쳐진 거 같아 기분이 묘했다. 자기 자신을 분해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 육체랑……영혼? 뭐 그런 거 아닌가요?”
유린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역시 뭐 하나를 빼먹었나?
“정확히는 육체와 정신, 영혼이야. 삼위일체(三位一體)라는 말 정도는 들어봤잖아? 삼위일체라고 하니 성부, 성자, 성령을 떠올리는 종교인도 있겠지만 정확히는 육체와 정신, 영혼. 세 가지가 한 데로 어우러지는 걸 말하는 거지. 니가 살던 현실에서는 이런 초현실적인 이야기를 증명할 방법이 없었을 테니까 모르는 게 당연하겠지.”
내가 살던 세상은 현실. 말 그대로 ‘현실 세상’이었다. 총이나 화약이라면 모를까 초능력이나 괴물, 판타지틱한 요소는 쥐뿔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육체나 영혼 같은 이야기가 나와도 ‘ㅋㅋㅋ 그딴 걸 누가 믿어? 증명할 방법도 없는데?’라며 코웃음 치기 바빴지.
“육체와 정신은 어느 정도 노력하면 가질 수 있겠지만……영혼은 특별해. 영혼에 의해 육체와 정신이 지배된다고 해야 하나? 이런 말하니 겁먹을 수도 있겠지만……나한테 있어 영혼이란 건 그리 대단한 게 아냐. 말했듯이 배신이나 저항을 막기 위한 보험이지. 니가 말했던 대로……그런 게 없었다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나를 이길 사람은 없을 테니까.”
불쌍했다. 누가 불쌍하냐고? 내가! 이런 사실도 모른 채 노력하면 이길 수 있을 거다, 총알 한 발 거하게 박아줄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었던 내 자신이 너무나 불쌍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그 말이 딱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렇게 날뛸 수 있었던 거겠지.
“그, 그럼……로라나 다른 사람들도 영혼을 가지고 있는 건가요?”
로라나 메이. 나나 혜린이 같이 원래 세상에서 소환된 사람들이 아닌, 유린에 의해 창조된 인물들한테도 영혼이 있는가 궁금했다. 유린은 당연한 걸 왜 묻냐는 식으로 입을 열었다.
“당연히 없지. 있을 거라 생각했어?”
“……어, 네…….”
영혼이 당연히 없다니.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걸 보니 역시 유린과 나는 사고방식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나한테 있어서 그녀들은 모두 사람이니까 당연히 영혼을 지니고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유린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가 만든 세상과 피조물이지만 걔들이 지닌 건 육체와 정신뿐이지. 영혼이란 건 만들고 싶다고 해서 만들 수 있는 게 아냐. 이 세상에 와서 동물을 본 적 있어?”
“어, 없습니다. 벌레 같은 것도요.”
신기한 것 중 하나였지. 벌레나 동물이 없는 것 또한 질문하고 싶은 것 중 하나였기에 내 궁금증이 해소되는구나 싶었다.
“육체나 정신을 만드는 건 내가 이 세상의 신이기 때문이지. 하지만……신이라고 해서 영혼을 멋대로 만들 수 있는 건 아냐. 생명의 창조라면 모를까 영혼은 깃들 곳에 깃드는 거니까. 사람을 만들어도 영혼이 없는데 껍데기밖에 없는 벌레나 동물을 만들 필요가 없잖아? 동물이라면 그나마 낫겠지만 벌레한테 영혼이 있을 리도 없고.”
차별적인 발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영혼이라는 것은 동물이나 벌레한테 주어질 만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은 나도 했었다. 나뿐만 아니라 현실 세상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하겠지. 인간만이 특별한 존재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라고 대답하겠지만……반대로 이렇게 묻고 싶었다.
【화장실이나 시궁창에서 기어 다니는 바퀴벌레한테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냐?】
이건 사람의 영혼에 대한 모욕이 아닐까 싶었다. 반려동물로 대우받는 동물들을 보면서도 ‘쟤들한테도 영혼이 있지 않을까?’라고 조심스럽게 생각을 하는데 벌레나 해충한테? 그 바퀴벌레에 영혼? 인간만이 가진 영혼의 가치가 순식간에 벌레와 같은 급으로 전락하다니. 인간으로서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고 인정할 수도 없었다.
인간이 존나 위대하다는 건 아니지만……동물이나 식물, 곤충 등에는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예외적인 것도 있긴 하겠지만……여하튼. 신인 유린조차 만들 수 없는 영혼이다. 벌레나 동물에 깃들 리가 없었고 그래 줄 생각도 없었으니 아예 만들지 않았겠지.
“그렇게까지 내가 만든 세상을 사랑했다고 하니 나도 좀 기쁘긴 기뻐. 노력해서 만든 세상이니까. 넌 니가 그리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그 과거로 돌려보내줄 수도 있어. 너도 내 능력을 알잖아? 지금까지 당해봤으니까 말이지…….”
욕이 나올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그거 덕분에 엿 먹은 게 내 평생이었으니까. 이 ‘하렘 어드벤처’에서 내가 겪은 모든 모험과 엿은 모두 유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런 유린한테 저항? 배신? 다 헛된 일이었다.
난 이제 모든 일에 지쳐있었다. 남은 평생을 쾌락과 평화로 보내도 모자랄 판국이다. 이제 다른 건 다 좆까라고 그래…….
“정말로……정말로 영혼만 바치면 되는 거죠? 그것만 바치면……?”
내 조심스러운 한 마디가 그녀의 심경을 거스르지 않을까 싶었지만……이런 재차(再次) 확인을 받아야 할 정도로 ‘영혼을 넘긴다’라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있는 줄도 몰랐고 그 실체도 확인하지 못했었지만……그렇다고 넙죽 넘길 정도로 내 영혼이 가치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물론이야. 말했잖아? 우수한 용사를 잃어버리긴 싫다고. 내가 만든 거짓된 세상이라도 좋다는데 들어주지 못할 이유가 없잖아? 허튼 짓을 못 하도록 영혼을 바치는 게 다야. 충성이나 복종 같이 형체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더 확실하니까……서로 좋잖아? 너는 니가 바라던 생활로 돌아가고, 나는 우수한 용사의 영원한 충성과 복종을 얻게 되고. 안 그래?”
거짓된 세상이라도 좋다. 애초에……나나 혜린이, 희진이나 은채. 현실 세상에서 온 사람들을 제외하면 전부 다 유린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었다. 그걸 알게 된다고 해서 실망할 일은 없었다. 이제 그딴 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고. 중요한 건……내가 모두와 함께 있던 때. 그토록 돌아가기를 바라는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거다. 바로…….
“유린님께……제 영혼을 바치겠습니다.”
이 한 마디로 말이다.
주변이 고요했다. 살면서 영혼을 바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더 이상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아무리 발버둥 친들 헛된 저항밖에 되지 않는데 영혼이 다 무슨 소용일까? 아무리 부자라도 죽은 후에는 빈손으로 저승에 가듯이, 아무리 소중한 영혼이라도……뒈지면 말짱 도루묵이니까.
“……큭. 크흐흑……아하하하하핫! 으, 으큭! 아, 꺄하하하핫! 으응, 그래! 잘 했어! 확실히 받았어! 충성과 복종 같은 쓸데없는 것보다 몇 십 배, 몇 백 배는 더 가치가 있는 니 영혼, 확실히 받았다고! 꺄하하하하핫!”
내 몸은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하겠지. 지금까지 웃으며 나긋나긋하게 이야기하던 유린이 갑자기 몸을 뒤로 젖힌 채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으니까. 갑작스러운 그녀의 변화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와 함께 웃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만……대체 왜 웃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 영혼을 얻은 게 그렇게 기쁜가……?
“고마워……정말로 고마워! 나한테 이렇게 많은 선물을 주다니……내 눈썰미가 맞았다니까? 지금까지 12번이나 실패를 겪어왔지만……이거 보라고! 난 성공했잖아! 내가 원하던 걸 모두 얻었어! 아아……이제 난 더 이상 형체를 가지지 않는 신이 아니야! 정신과 영혼으로만 이루어진 반푼이 같은 병신이 아니라고! 아, 아하하하핫!”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마구 웃던 유린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정을 모르는 나라도 그 눈물이 기쁨의 눈물이라는 사실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바라던 걸 마침내 이룬 기쁨의 눈물……. 내 앞에서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기쁨과 쾌락을 맛보고 있는 유린을 보니 몸이 더욱 떨린다.
나……혹시 터무니없는 짓을 한 건가?
내가 한 짓은 ‘해서는 안 되는 짓’이 아니었을까?
숨쉬기가 어려웠다. 1분이 넘도록 계속 웃어대는 유린을 보니……이건 아니야. 뭔가 잘못됐어. 아주 크게 잘못됐다고. 내 뇌는 이미 잘못 내린 판단과 행동에 질타와 비난을 쏟아 붓고 있었고 난 어찌할 줄 몰라 하며 우두커니 서있었다.
“세린……이 세상이 좋다고 했지?”
“네? 아, 예…….”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유린은 다시 말을 이었다. 혼잣말에서 대화로 바뀐 것을 보니 아직 이성은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내 영혼을 얻은 그녀가 내가 영혼을 바치기 전까지 이야기를 하던 때의 이성과 호의를 가지고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래……좋겠지. 영혼을 바쳐서라도 내가 만든 거짓된 세상에 살고 싶어 했을 정도니까 오죽하겠어? 그래, 이해해. 암, 이해해야지. 니가 아니라 지금까지 소환됐다가 죽었던 12명의 남자들이라도 이런 상황이 오면 영혼을 바칠 거야. 현실에서는 절대 맛 볼 수 없는 쾌락과 자극이 계속되는데 누가 싫어하겠어?”
긴장은 됐지만 그 말을 들으니 희망이 보였다. 그래……유린도 저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을 거다. 아내들과의 즐거웠던 기억. 섹스와 아기에 대한 기대감으로 하반신이 젖어있던 나날. 이런 걸 경험했더라면 내가 아니라 그 누구라 하더라도 영혼을 바칠 것이다.
“근데 세린. 그거 알아?”
“네?”
짤막하게 대답한 게 다행이었다. 그녀는 내 가슴팍을 발로 찼고 난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의자와 함께 뒤로 나자빠졌다. 등과 뒤통수에 강렬한 충격이 전해졌지만 그보다 놀라운 것은 그녀의 행동이었다. 왜……왜 나를 발로 찬 거지?
“억, 허억……!”
쓰러진 나를 가만히 놔두지 않겠다는 듯 목을 부여잡은 유린은 나를 침대 쪽으로 던졌다. 푹신한 침대 덕분에 충격이 완화되긴 했지만 졸리고 있던 목은 상당히 욱신거렸기에 숨쉬기가 어려웠다. 기침을 해대며 고개를 든 나는 다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유린은 내 눈앞에까지 다가와 아주 섬뜩하게 입을 열었으니까.
“난 이 세상이 존나 싫거든.”
“……예?”
지금까지 날 비웃기도 했고 은근히 회유하기도 했던 유린의 표정은……증오와 분노를 띠고 있었다. 갑자기 이렇게 변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단 하나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나와 달리 그녀는……이 세상을 매우 싫어하고 있다는 것.
“그거 알아? 너나 남자들. 자지 달린 새끼들은 참 병신이라는 거? 자지만 박을 수 있다면 영혼이 있든 없든 간에 여자이기만 하면 그저 좋다며 이리 저리 좆물을 뿌려대는 한심한 모습! 그 한심한 꼬라지를 볼 때마다 얼마나 열 받았는지 알아? 응? 아아, 넌 모를 거야! 모르고말고! 육체와 정신, 영혼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그걸 알 리가 없잖아? 응?”
나뿐만 아니라 남자라는 종(種) 자체에 신랄한 비난을 던지는 유린을 보니 내가 뭘 잘못했나 싶었지만……그런 짓은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한테 존댓말을 하며 비굴한 모습까지 보였었다. 그녀가 바랐던 대로 영혼까지 바쳤는데……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찌질이, 병신들 주제에 미인들이 헐벗은 몸으로 달려오면 그저 좋다고 자지를 발딱 세우는 꼬라지라니! 아하핫, 그거 알아? 12명은 마을에 도착하지도 못하고 죽었지만 너랑 다를 바 하나 없었다는 인간이었다는 거! 그런 놈들밖에 소환 못 하는 게 얼마나 짜증인지 알아? 그런 놈들한테 내 미래를 맡겨야만 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구역질나는지 알기나 하냐고, 멍청아!”
전혀 알아먹을 수 없는 말을 하던 유린은 다시 내 목을 잡았다. 그 가녀린 몸 어디에 이런 힘이 있었을까? 목을 잡은 채 내 몸까지 위로 올린 악력(握力)은 여자의 것이 아니었다. 성인 남성이라도 같은 성인의 목을 잡은 채 하늘로 치켜드는 짓은 불가능하다. 쉽게 말해……이건 인간급의 힘이 아니었다.
그녀는 나를 다시 힘껏 던졌다. 마치 물건을 힘껏 던진 것처럼 바닥에 데구르르 구르던 나는 몸을 벌벌 떨며 바닥에 손을 짚었다. 손 밑에 깔려 있어야 할 부드러운 카펫은 온 데 간 데 없었고 어둠과 검은색만이 주변을 채우고 있었다. 이건……꿈속에서 봤던 그 광경이다!
꿈속에서 말빨만으로 유린한테 처발렸었던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있는 곳은 더 이상 마리아의 침실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오직 검은색만이 남은 시커먼 세상. 꿈속에서 봤던 그 공간이 왜 현실에 펼쳐진 거지? 나는 잠을 자지도 않았고 기절하지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이 세상의 본질이거든! 아무것도 없는 세상! 니가 있던 세상이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 얼마나 많은 축복을 받은 곳인지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겠지! 아아……왜 너 같은 병신들이 그런 멋진 세상에 태어났는데 난 여기에 갇혀 있어야만 했던 건지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어! 왜 세상이나 영혼의 가치를 모르는 너희가……으, 흐흑……!!”
이번에는 눈물을 터뜨렸다. 조금 전에는 웃으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던 그녀가 온갖 알 수 없는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다가 끝내는 울어버리다니. 혹시 조울증(躁鬱症)이라도 앓고 있는 거 아닐까? 저러다가 또 미친 짓을 저지르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다.
“흐, 흐흑……그치만……이제 괜찮아. 응, 괜찮을 거야. 안 괜찮을 리가 없잖아? 마침내 영혼을 얻었는데……13번째 시도 만에 겨우 영혼을 얻었는데……드디어 목적을 이루었는데……행복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
아, 내 안목. 역시 내 눈을 찔러 시력을 없애거나 안목을 더 키워야 했어.
막심한 후회와 불안함이 내 잘못된 선택에 후회하며 나를 질타했다. 그녀의 말과 행동으로 봤을 때 영혼은 넘기지 말았어야 할 소중한 것이었지만……내가 그리던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기에 결국 넘겨버렸지.
“유, 유린님……. 소원은……영혼을 드렸으니까 소원은 이루어주시는 거겠죠? 네?”
이 와중에도 나는 소원을 이루어달라고 말했다. 그녀가 바라던 대로 영혼을 바쳤으니 내가 할 일은 더 이상 없었으니까. 헛된 희망이나 약속일지 몰라도 아직 실행의 가능성이 남은 이상 거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지푸라기가 남아 있는 한 잡아야 하는 게 사람이었으니까.
“소원……? 아, 맞아. 이뤄줘야지. 응,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겠지? 아늑했던 과거. 니 손으로 평화와 행복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던……그 어리석은 시절로 돌려보내달라는 소리지?”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머리가 아주 좋은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들어도 저 말은 호의적인 말이 아니었다. 생각 이상으로 무언가가 크게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은 나는 초조함을 억누른 채 다시 입을 열었다.
“그, 그렇습니다. 제 아내들과 예전의 마을을……돌려주십시오.”
내가 영혼을 바치고 그녀의 말대로 했으니 그녀 또한 신의성실의 원칙을 지켜 약속을 이행해주길 원했다. 그래야 하는 게 정상이었고. 그녀의 사정은 모르지만 서로 잘 된다면 Win-Win 전략이 성립된 거나 다름없는 거잖아.
“응……돌려줘야 할 필요 있을까? 이제 전부 다 내 것이 됐는데?”
“……네?”
아냐, 아냐. 이건 아니라고. 잘못된 것이 점점 행동과 말로 나타나는 것을 보니 심장박동이 더 빨라진다. 내 소원을 절대 이루어주지 않을 절대자와의 계약은 처음부터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와 교훈이 숨을 막히게 한다.
“아, 존댓말 더 이상 안 해도 돼. 존댓말을 하든 말든 어차피 니 영혼은 내 거니까. 와아……정말 고생했다니까? 내가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던 걸 생각하면 책으로 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야! 너도 이해가 갈 걸? 자그만치 13명이나 소환을 해댔는데……응? 표정이 왜 그래?”
“……내 아내들이랑……마을은……?”
존댓말도, 반말도 아닌 단어만을 읊조리는 내 상태는 확실히 말해……폐인 같았다. 그나마 가지고 있던 자존심까지 모조리 버려가며 영혼까지 바친 결과가 단 한 마디에 부서지다니……?
돌려줘야 할 필요가 있냐고?
그, 그게 뭐야? 그럼 나는……나는 뭔데?
왜 영혼을 바친 건데? 지금까지 나한테 했던 말은 다 뭐고?
이게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데?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긴…….”
투명한 네글리제를 입은 채 다가오고 있었지만 내 하반신은 축 처진 상태였다. 매력과 성욕보다는 공포와 생존에 대한 갈망이 나를 움직이고 있었다. 저항조차 할 수 없는 내 앞으로 다가온 유린은 조용히……하지만 승리를 확신한 목소리로 내 청각을 자극했다.
“이제 다 끝났다는 거지. 너도 이미 머리로 이해하고 있잖아? 전부 다 끝났다는 거.”
“……끝나?”
아주 중요한 부분만을 읊조리자 유린은 신이 난 아이처럼 부연설명까지 덧붙였다.
“그래, 끝난 거지. 원래 세상으로 못 돌아가고, 아내들은 되찾지 못하고. 부서진 마을과 평화는 영원히 사라진 채……육체와 정신, 영혼까지 빼앗겼지. 내가 한 짓이긴 한데……참 대단하다고 생각해. 이렇게까지 시궁창에 떨어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거든. 아, 다른 건 몰라도 영혼을 넘긴 건 너 자신을 원망해야 할 거야.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거든?”
손에서 힘이 쭉 빠진다. 해서는 안 되는 계약을……악마와의 거래를 성사시킨 게 바로 나라니. 다름 아닌 나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행동을 해버리다니……. 망연자실한 상태로 무릎을 꿇었지만 유린은 정신적 충격 때문에 정신을 잃는다는 걸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계속 입을 놀려댔다.
“그 소중한 영혼을 바친 대가로……모두 다 알려줄게. 니가 궁금해 하던 모든 것. 이 세상의 탄생과 창조부터 시작해 왜 너를 포함한 남자들을 소환했는지. 왜 이런 세상을 만들었는지. 그리고……내 목적이 뭐였는지를. 전부 다 말이야……. 기뻐하라고? 이 시공차원계(時空次元界)의 탄생과 창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걸 듣는 사람은 니가 최초일 테니까……?”
자기가 얻을 것을 모두 얻은 유린은 너무나 기뻐하며 자비를 베풀었다. 내가 궁금해 하던 모든 것들을 스스로 설명해주겠다며 웃는 표정에서는 기쁘다 못해 인자함까지 느껴졌지만……그 인자함과 자비는 내가 원하던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영혼까지 바치며 약속을 이행하길 바랐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일말의 자비도, 용납도 없었다.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충실하게 얻어간 유린은 더 이상 나와의 약속을 지킬 생각도, 의무도, 필요도 없었다.
“자, 어디부터 시작해볼까……역시 이 세상의 창조부터 이야기해야겠지? 응, 길어질 거야. 그치만 걱정 마.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은 오직 나만의 것이니까…….”
모든 것을 얻어 기뻐하는 악마의 넋두리가 그렇게 시작됐다.
============================ 작품 후기 ============================
이번화를 한 단어로 줄이면 매우 간결하면서도 확실하게 줄일 수 있습니다.
세린 좆 됐다 오 ^0^/
어떻게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 가냐고요?
주인공이 역적하는 해피엔딩 루트 아니었냐고요?
신세린 vs 유린(카인)의 피 터지는 라스트 배틀은 언제냐고요?
여러분. 이거 왜 이러십니까?
이 소설이 정상적으로 흘러가길 바라셨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이 소설이 언제 정상적으로 흘러간 적 있습니까?
소설 작가가 정상적인 소설만 쓰며 여기까지 왔나요?
물론 아닙니다. 인실좆(인생은 실전이야 좆만아)의 정신에 입각해 험난한 세상살이, 좆같은 인생, 엿 같은 헬조선만을 나열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정상적이지 않은 작가와 정상적이지 않은 소설이 합쳐진 겁니다.
주인공이 갑자기 각☆성! 유린을 생선 뼈 발라버리듯이 처발라버림! 모두 함께 합삐합삐!……같은 전개가 될 리가 없다는 건 대부분 다 예상하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 개연성 제로의 전개는 독자분들 이전에 제가 납득할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존댓말에 아부까지 떠는 세린입니다. 주인공이라는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굴한 짓, 병신 같은 행동은 다 해대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 세린이 갑자기 파워업하더니 유린을 발라버린다? 개연성? 나니 소레? 오이시이? 우걱우걱!
기승전결을 위해, 읽는 분들의 즐거움을 위해.
주인공인 세린의 정신적 성장을 위해.
계속해서 현재의 상황을 지속시킬까 싶습니다.
그리고 이건 개인적 바람이긴 합니다만, 이번 화를 보며 ‘어? 이 단어 또 나왔네?’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으셨으면 좋겠네요. 이번 화를 통해 나온 ‘시공차원계’라는 설정은 하렘 어드벤처를 비롯해 전자책으로 낸 ‘아스라이’에서도 나오는 개념입니다. 완성은 아스라이 쪽이 훨씬 더 빨랐지만 말입니다.
다음 편부터 계속해서 나오겠지만 제가 쓰는 모든 소설(팬픽을 포함)은 이 ‘시공차원계’라는 설정을 채용하고 있습니다. 다른 후기에서도 적었지만 혹시나 200화까지 보신 후 심심하신 분이 계시다면 전자책으로 낸 ‘아스라이’를 한 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어차피 무료고 심심풀이로 읽으시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코멘트에 대한 답변입니다.
고양이새벽님, 늘 빨리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정 업로드는 너무 빠르고 직장 업로드는 할 수가 없어 출근 전에 업로드하는 점,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vdfs님, 흠+인터레스팅인가요? 재미있긴 하지만 뭔가 마음에 드시지 않는 느낌이 아닐까 싶네요. 위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재미와 주인공의 성장을 위해 고통 받는 루트를 선택했습니다. 핵사이다 역전을 원하시는 거라면……죄송합니다만, 당장은 보여드리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상입니다. 200화까지 꾸준히 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