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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어드벤처–당신의 아기를 낳고 싶어-202화 (202/235)

00199 「20-8 : 데드 엔드 (9)」 =========================

불공정거래(不公正去來, unfair transaction)라는 말이 있다. 불공정 계약이라고도 하는 이 행위는 거래나 계약 자체가 불공정한 것이기에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설령 성립된다 치더라도 불공정거래법에 적발될 경우 법에 따라 손해배상을 해야만 한다. 거래의 경우 금품. 돈에 대한 것을 다루고 있으니 꽤 엄격해질 수밖에 없는 거다.

그렇다면 불공정 계약은? 정식적으로는 불공정고용계약 [不公正雇傭契約 ; Yellow Dog Contract] 이라 부른다. 황견계약 등으로도 불리는 이 행위는 힘이 없는 사람들을 근로 및 고용할 때 좋지 않은 조건을 제시하며 강제 혹은 억지에 가까운 불공평한 계약 관계를 체결하는 걸 뜻한다.

불공정거래든 계약이든 간에 중요한 것은 ‘힘이나 권력이 있는 사람이 아무런 재산도, 힘도 없는 사람한테 공정하지 못한 거래 및 계약을 요구한다’라는 것이다.

대기업이나 갑(甲)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한테 자애나 자비 대신 무자비하고 불공평한 요구를 제안한다. 그 요구는 거의 자신들한테 유리하게 체결된 내용이다.

최근에 대한민국을 ‘헬조선’으로 만든 이유 중 하나는 지나친 갑(甲)질 때문이었다. 흔히 말하는 ‘열정페이’ 등이 갑질이나 불공정 거래 및 계약의 대표적인 예시였지. 돈을 얼마 안 들이면서 다른 사람의 재능이나 노동력을 착취하려는 것. 그게 바로 헬조선을 더욱 더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예시 중 하나였다.

다른 사람을 고용해 편하게 일하며 돈을 벌고는 싶지만, 많이 번 돈을 고용한 사람한테 주기는 싫다. 자기는 정당한 노동에 보수를 요구하면서 다른 사람한테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다니. 이런 이중 잣대는 대체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는 걸까? 궁금하지만 궁금하지는 않았다. 그걸 알게 되면 나도 그렇게 될 거 같았으니까.

가능하면 그런 일은 별로 겪고 싶지 않았지만……난 그런 일을 겪고야 말았다. 겪은 게 나라는 사실도 문제였지만 불공정계약의 조건 및 그런 짓을 한 사람. 당한 장소도 문제였다. 아니……솔직히 말해, 문제가 아닌 게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이 세상의 신, ‘유린’한테 나는 내 영혼을 바쳤다. 그 대가로 내 아내들과 예전의 행복했던 생활. 평화와 안전을 바랐다. 내 영혼을 받은 유린은 웃으며 그런 요구를 들어줄 필요는 없다고 했다. 쉽게 말해……받을 거 다 받고 뒤통수를 친 거다.

그러나……난 여기에 저항할 힘이 없었다. 영혼이라는 소중한 것을 바친 것도 문제지만 나와 계약을 한 사람은 이 세상의 신. 그야말로 갑 오브 갑(甲)이었다. 이 ‘하렘 어드벤처’의 창조자가 그렇게 말하는데 내가 무슨 수로 그녀한테 약속을 지키라며 강제적인 수단을 취할 수 있을까?

위에서 말했던 대로 불공정거래 및 계약에 대한 법으로 처벌하면 되지 않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어, 신을 처벌하는 것도 웃길 뿐더러……여긴 판타지 세상이었다. 그 법이 존재하지도 않았고 존재한다 치더라도 유린을 처벌할 수 있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야말로 그녀 자체가 법이자 무법자(無法者)였다.

이 계약은 원초적으로 무효가 되어야 했다. 영혼이라는……보통 사람 같았으면 생각도 못할 것을 계약의 대상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그녀는 얻을 걸 얻은 후에도 약속을 지키기 않았다. 이 계약은 무효가 되었어야 했다.

“원래 세상이었더라면 말이지. 너도 알잖아? 이 세상에서 그딴 건 바랄 수 없다는 사실은? 너무 그렇게 빤히 보지 마. 화를 낼 거면 내가 아니라 너 자신한테 내야 하는 거 아냐? 속인 건 나지만 소중한 영혼을 바친 건 너니까.”

너무나 당당하게 말하는 유린을 보니 기가 막혔다. 어떻게……?

“어떻게 그딴 말을 지껄일 수 있냐고? 너도 참 이상한 놈이다? 난 이 세상의 신이라니까? 이딴 취급을 받는 게 싫었으면 영혼만큼은 잘 간수를 했어야지. 뭐……그러면 내가 원하는 걸 못 얻게 되니까 그건 그거대로 싫지만……. 그거 알아? 신이긴 하지만 전지전능하지는 않다는 니 말, 실제로 겪으면 존나 짜증난다?”

사기나 다름없는 계약을 맺어놓고 날 조롱하던 그녀는 이젠 자기 넋두리를 풀어놓았다. 그 뻔뻔함에는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체 뭘 어떻게 하면 이렇게 사람이 뻔뻔해질 수 있는 걸까?

“말이 돼? 영혼은 만들 수도 없고 강제로 빼앗을 수도 없다니? 아아……그거 때문에 미칠 뻔했다니까? 이 세상과 사람들! 모두 다 내가 만들었는데 영혼과 내 육체는 못 만든다니! 그거 때문에 빡쳐서 뒤질 뻔했다니까? 크큭……뭐, 이제는 니 영혼과 몸이 내 손에 들어왔으니 그것도 옛날 일이지만.”

“……내 영혼과 육체? 영혼과 육체는 못 만든다니? 그게 대체……?”

젠장! 못 알아먹을 말이 미친 듯이 튀어나오니 머리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아는 단어나 개념이 나오면 그걸 토대로 조금씩 머리가 돌아가겠지만……속았을 뿐만 아니라 영혼과 소중한 미래까지 빼앗겼다는 충격 때문일까. 내 두뇌는 돌아가는 것을 거부한 채 조용히 있었다.

“그래, 그래. 다 이야기해줄게! 내가 이야기를 안 하면 누가 하겠어? 이 빌어먹을 좆같은 세상, ‘하렘 어드벤처’에 대해 말이지……. 내가 말했잖아? 난 이 세상을 존나게 싫어한다고. 내가 장난삼아 그런 말 한다고 생각했어? 에이, 그럴 리가 없잖아? 다시 한 번 말할게. 나는…….”

내가 혹시나 못 듣거나 잘못 들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내 앞으로 바싹 다가온 그녀는 확실하게, 또렷하게 발음했다.

“마음 같아서는 이 세상의 여자들의 목을 모조리 다 잘라버려도 속이 시원치 않을 정도로 증오해. 내가 만든 이 세상. 하렘 어드벤처를 말이지…….”

너무나 처참한 예시까지 들며 증오를 내뱉는 유린의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목을 모조리……? 어, 어떻게? 자기가 만든 세상이라지만 육체와 정신을……감정을 지닌 여자들을 그렇게 무참히 죽일 수 있는 거지? 불쌍하다는 생각 안 드냐? 그 사람들은 엄연한 인간인데? 인격체인데?

“이거 왜 이래? 그 인간이자 인격체를 니 멋대로 강간하고 다룬 건 바로 너잖아? 누가 누구한테 인간성을 논하는 건데? 아아……이래서 인간은 싫다니까? 특히 남자. 자기가 필요할 때는 온갖 억지 논리와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정작 불리하다 싶으면 자기가 했던 짓을 싹 잊어버리니까. 편리한 건지 뻔뻔한 건지…….”

유린의 말은 전혀 틀린 게 아니었다. 내가 반박을 못하자 그녀는 손을 들고 흔들었다.

“아, 됐어. 그딴 거 말 안 해도 돼. 지금은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중이니까. 말했잖아? 니가 궁금해 하던 거 모조리 알려준다고. 어차피 말해야 했고 너도 알고 싶어 하니까……. 자, 음……그래. 이렇게 시작해야겠지. 니가 말했지? 난 전지전능에 가깝지만 전지전능한 존재는 아니라고. 맞아. 정말 잘 맞혔어. 난 신이지만 정작 내가 원하는 건 얻을 수가 없었지.”

본격적으로 시작된 그녀의 이야기는 자조(自嘲)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이 있다지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었다니. 그것도 신(神)의 위치에 있던 그녀가……. 처음부터 아귀가 맞지 않는 이야기가 시작되어서 그런 걸까? 움직이지 않던 뇌는 호기심에 의해 조금씩 돌아가기 시작했다. 전원이 들어간 CPU처럼…….

“너 말이야. 이 세상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어떤 부분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응?”

소중한 아내들이나 미래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빼앗겨서 그런 걸까? 더 이상 저항할 마음도 생겨나지 않았다. 그저 죽기 전 호기심이나 의문이나 풀고 가자는 생각이 들었기에 닫혀 있던 입을 천천히 열었다.

“왜……여자밖에 없는가. 중세시대와 근대 시대가 섞여 있는가. 홀로그램 윈도우 같은 오버 테크놀로지가 존재할 뿐 아니라 마치 남자를 위해 만든 것 같은…….”

너무 많았기에 문장으로 다 만들 수도 없었다. 참새가 어떻게 봉황의 뜻을 알겠냐는 비아냥을 듬뿍 담은 유린은 자세를 낮춘 채 입을 쉴 새 없이 놀려댔다. 이쯤 되니 자기의 고생담을 들어주는 사람한테 자기가 왕년에 얼마나 날뛰었는지 설명하는 노인네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그래. 나한테 물었지? 어떻게 컴퓨터나 핸드폰 같은 기계를 아냐고. 그거랑 비슷하지만 설명하려면 좀 시간이 걸리겠네. 음……있잖아. 그거 알아? 내가 얼마나 오래 이 세상을 만들어 왔다고 생각해?”

난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성별을 바꾸고 온갖 괴물을 만드는 신의 나이 따위를 내가 알 리가 없지 않은가?

“자그만치 20년이야……. 너보다는 낮지만……생각해봐. 넌 친구도, 형제도. 부모님도 없이 20년 동안 혼자 살 수 있겠어? 주위에 아무도 없이, 20년 동안 대화 한 마디 없이. 응? 그런 고독에 이길 수 있겠어?”

놀란 것은 나이가 아니라 그녀의 처지였다. 20년 동안 혼자였다고? 주위에 사람도 없이? 대화도 안 나눈 채? 상상만 해도 끔찍한 것이었지만……내 입은 묻고 싶은 걸 불쑥 내밀었다.

“이, 이 세상에는 여자들이 있잖아. 니가 만든 여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유린은 언급할 가치도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런 말 할 줄 알았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생각해봐. 니가 게임을 만들었다 쳐. 넌 20년 동안 그 게임 하나만 플레이할 거야? 대화조차 불가능한 캐릭터하고 20년 동안 일상대화라도 나눌 생각이냐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20년 동안 같은 게임을 하는 것도 무리지만……게임 내의 캐릭터와는 의사소통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들은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니니까. 하지만……여기 있는 여자들은 게임 내의 캐릭터들과 다르잖아.

“나한테는 똑같아. 차라리 게임이 더 재미있을걸? 세린, 세린……불쌍한 세린. 생각을 해보라고 말했잖아? 니가 만든 창조물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 니가 언어나 지식, 성격 등을 부여하지 않으면 제대로 신음조차 불가능한 고깃덩이랑? 제발 부탁인데 그런 어리석은 소리는 하지 좀 마. 죽여 버리고 싶어지니까…….”

푸념과 짜증 끝에 나온 살의(殺意)에 몸을 살짝 떨었다. 그녀는 과장스러운 몸짓을 보이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하나하나 손보지 않으면 인간으로서 움직일 수조차 없는 고깃덩어리와 사이좋게? 아직도 이해가 안 가? 아까 안즈를 떨어뜨린 것도 잘 봐준 거야! 생각 같아서는 안즈 뱃속에 있는 아기를 밟아 죽여도 속이 시원찮은 판국이었다고! 쓸모없는 고깃덩어리 년들! 그저 하반신에 자지만 들어오면 신이든 너든 간에 앙앙 거리는 암캐년들! 퉷!! 후우……그딴 년들과 몸을 섞었다고 생각하니 당장에 가서 모조리 죽여 버리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다고! 씨발!”

자기한테 즐거움과 쾌락을 선사하던 아내들한테 저런 말을 하다니……. 믿을 수 없는 폭언(暴言)의 수위(水位)에 난 꼼짝도 못한 채 얼어 있어야 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저 여자는 나나 아내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다】 라는 사실을…….

“아아, 그래. 다르지. 후우……근데. 짜증나는 게 뭔지 알아? 이 하렘 어드벤처와 모든 생명, 문화, 물건 등을 만든 내가. 이 세상의 신이자 창조주, 절대자인 내가……이 세상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이 세상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는 사실이지.”

“……뭐?”

내가 ‘뭐?’ 혹은 ‘뭐, 뭐라고……?’라는 말만 하는 기계가 된 거 같았다. 자기 의지로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거나 이해할 수 없는 내용에 반사적으로 질문만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지만……유린은 이런 반응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래, 어이가 없지? 웃기잖아? 창조주(創造主)가 자기가 만든 세상에서는 벗어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 몸조차 못 만든다니! 그게 얼마나 기분 더러운지 알아? 전지전능(全知全能)에 가까우면서 자기가 원하는 곳에 갈 수도 없을뿐더러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몸조차 만들 수 없다니! 아아……그건 정말 지옥에 가까운 경험이었어! 두 번 다시 안 겪고 싶다니까?”

“마, 말이 안 되잖아.”

그녀의 푸념에 내가 훼방을 놓았지만 그녀는 전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지 않았다. 마치 자기가 자랑할 명품백이나 브랜드 상품을 알아보는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거 같았다.

“넌 카인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아내들을. 카미유나 루인에 있는 여자들을 범했어! 그건 대체……그게 육체가 없는 거였다고? 말이 안 되잖아!”

카미유나 루인에서 죽어나간 사람들은 모두 카인한테 강간당한 사람들이었다. 죽은 후 괴물이 되어버린 그녀들은 대체 누구와 몸을 나누었단 말인가?

“아아, 그거? 여기에서 활동할 수 있는 육체라면 나도 있지. 내가 말하는 건 말이지……밖으로 나갈 수 있는 육체야. 바로 이 썩어 문드러질 ‘하렘 어드벤처’에서 나갈 수 있는 진짜 몸. 니가 가진 것 같은 육신(肉身)을 말하는 거지. 말했잖아? 육체와 정신, 영혼. 세 개의 근간으로 사람은 이루어져 있다고. 나한테는 정신과 영혼은 있었지만……육체는 없었어.”

육체가 없었다니?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영혼의 존재라면 몰라도 육체와 정신만은 가지고 있었으니까. 27년 동안 육체와 정신.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영혼을 가지고 살아서 그런 걸까? 유린의 말을 바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신체(精神體)라는 말 알아? 형이상학(形而上學)에서 나왔던 거 같은데……쉽게 말해 정신적인 사고는 가능하지만 오롯한 육체의 그릇이 없는 걸 뜻하는 거야. 니가 지금까지 존재를 확인할 수 없었던 영혼과 비슷하지.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형체로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은 없잖아? 뇌를 가른다고 머리 안에 있는 지식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적절한 표현이군. 뇌를 가른다고 사람이 아는 지식이 모두 튀어나오는 건 아니었다. 정신이라는 것 또한 영혼처럼 애매모호한 것. 존재는 하지만 입증은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 유린은 육체 외에는 정신과 영혼만 가지고 태어났다는 소린데?

“전지전능에 가까운 신이지만 사람이 당연히 가치는 육체는 가지지 못하다니. 굴욕이었어. 그리고 원통했지. 후후……이 세상을 만들고 지배할 수는 없지만 벗어날 수도 없고, 다른 세상으로 갈 육체도 없다니.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다른 시공차원계로 갈 수 있는 몸은 만들 수가 없었지. 실패의 나날은 지금 와서는 좋은 추억이자 교훈이지만 당시의 나한테는 괴로운 경험일 뿐이었어.”

“……시공차원계는 또 뭔데?”

조금 전에 듣긴 했었지만 이걸로 두 번째.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단어였기에 흥미가 생겼다.

“거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해줄게. 그래서 말이지……난 생각했어. 이 세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럴 만한 힘과 육체를 지녀야 한다고. 근데, 그렇다고 내 목숨까지 걸 수는 없었어. 내가 이 세상의 신인데 내가 죽거나 사라져봐. 이 하렘 어드벤처도 함께 사라지잖아? 좆같은 세상이었지만 내 존재뿐만 아니라 내가 만든 세상도 사라지다니. 너무 슬프잖아? 육체도 없는데 ‘나’라는 존재가 만든 것, 내가 있었다는 증거마저 소멸된다니. 정말 최악이 따로 없지.”

자기의 존재를 걸면서까지 도전하기에는 너무나 위험한 도박이었다. 그녀가 만약 소멸했다면 이 세상에 올 수도, 아내들을 만날 수도 없었으니 그 판단은 전적으로 옳았다고 생각됐다.

“정신으로 이루어진 정신체. 가스나 기체, 액체처럼 존재는 하지만 어엿하게 그 모습을 가질 수 없었던 나는 곰곰이 생각했지. 다른 곳에 가기 위한 육체를 내가 만들 수 없다면……다른 사람의 몸을 빌리면 그만이라고.”

젠장. 역시 미친년이었어……. 소름 돋는 그녀의 발상에 눈을 감으며 한숨을 쉬었다.

“미친년이긴 했어. 내가 생각해도 웃긴 생각이었으니까. 다른 세상에서 나를 대신할 사람. 나한테 몸을 제공해줄 수 있는 사람을 소환한다니. 처음에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었는데……알아? 난 사람은 아니지만……사람이든 아니든 간에. 위기에 처하면 뭐든지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다 해. 그게 바로 생명체(生命體)거든.”

육체는 없었지만 그녀는 하렘 어드벤처를 만들 수 있는 힘. 전지전능(全知全能)에 가까운 천지창조(天地創造)의 힘을 가진 자였다. 그녀 또한 엄밀히 말해 살아 있는 생명체였고, 생명체는 생존과 종족번식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한다.

“종족번식까지는 아니지만……뭐, 그건 됐어. 말했지? 20년이라고. 처음 1년 동안은 현실에 안주하던 나였지만, 내가 생각해도 놀랄 만한 행동력이었어. 니가 있던 지구에서 사람 하나 끌어오는데 얼마나 힘이 드는지 알아? 자그만치 반년(半年)이야. 반년 동안 쓸 힘을 써서 소환할 수 있는 게 겨우 사람 한 명이라니. 이게 얼마나 힘든지 넌 상상도 안 갈 거야.”

웃으면서 고개를 젓는 그녀의 모습은 직장에서 겪었던 고통과 애환(哀歡)을 토하는 직장인 같았다. 반년? 난 빠르게 계산을 시도했다. 남자 12명. 여자 한 명씩을 소환했다 치더라도 12년 어치의 힘을 썼다는 건데?

“여자는 좀 달랐어. 여자는 그 정도로 많은 힘을 소모하지도 않았지만 남자를 소환할 때마다 늘 같이 소환하지는 않았었거든. 같이 소환해도 뒈질 뿐이고 여자를 대신할 고깃덩어리들은 얼마든지 존재했으니까. 가장 큰 문제라면…….”

“……모두 다 마을에 도착하지도 못 하고 죽었다는 거겠지.”

유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13번째인 나도 그 꼴 날 뻔했다. 운이 좋아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지.

“죽은 건 아마 괴물 때문이겠지? 그것도 궁금했는데……대체 왜 괴물 따위를 만든 거야? 이고 사람들의 목숨뿐만 아니라 니가 소환한 사람들의 목숨까지 위협하는……그냥 방해물일 뿐이잖아. 니 계획도 수포로 만드는 방해물을 왜 그냥 놔둔 거지? 그리고 소환한 사람들의 기준은 또 뭐고?”

공격성 섞인 내 질문에 그녀는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곤란해 했겠지만 지금은 그저 추억일 뿐일 테니 저렇게 웃을 수 있는 거겠지.

“소환의 조건은 아주 간단했어. 바로 ‘인간성을 잃어버릴 수 있는 남자’였지. 비겁하고, 치사하고. 늘 자기의 안전과 안위(安慰)만을 생각하며 자기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여자한테든 자지를 박아대는……인생 망치기 딱 좋은 쓰레기였지.”

화를 내고 싶었지만……틀린 게 없었다.

인생? 오기 전부터 망한 상태였다.

인간성? 아내를 써서 내 쾌락과 즐거움을 늘 채워왔고, 수틀린다 싶으면 ‘자지의 맹세’로 내 마음대로 조종했었지. 가짜 인격까지 쓰며 누릴 걸 누렸는데 이제 와서 아니라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인간성의 타락은 영혼을 쉽게 약하게 해주지. 육체와 정신도 약해지지만 사람의 영혼은 나한테는 아주 소중한 것이었거든. 육체를 얻기 위해서는 영혼의 주도권(主導權)을 가져야만 했으니까. 정신이야 아무래도 좋지만 육체를 얻으려면 영혼도 얻어야 했어. 바로 너한테 얻은 것처럼…….”

“잠깐만. 육체는 원래 니가 조종했었잖아.”

난 잊지 않고 있었다. 꿈속뿐만 아니라 실제로 나나 미카의 육체를 조종했었지. 나는 거기에 조종당해 미카의 남은 눈에 자지를 박아대려는 끔찍한 짓을 하려 했었고.

“아, 그거. 미리 말해두지만……그 ‘끔찍한 짓’은 니 잔학성(殘虐性)과 마음을 나타내기 쉽게 만들었을 뿐이었어.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리지 마. 탓하려거든 너의 더러운 마음과 잔인함을 탓해야지. 내가 잘못한 건 있지만 니가 한 더럽고 치졸한 짓까지 내 탓으로 돌리지는 말라고.”

……시발. 욕밖에 안 나오는군.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범인이 나였다니. 조종당해서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내가 바라던 거였다고? 한쪽 눈밖에 남지 않은 미카의 눈에 자지를 박아주고 싶다 생각하다니. 이래서야 완전히…….

“인간쓰레기지. 말했잖아? 넌 인간쓰레기라고. 육체의 지배는 여자라면 모를까 너한테는 오래 통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못 했던 거지.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널 소환했겠어? 죽은 남자들의 육신을 개조해서 내가 썼겠지. 그런 짓도 불가능하거니와 나한테 필요한 건 살아있는 건강한 육신과 영혼이야. 죽은 놈의 시체 따위 괴물이나 처먹으라지.”

죽은 12명의 남자가 불쌍해진다. 원래 불쌍했지만……‘인간성을 잃어버릴 수 있는 남자가 될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영문도 모른 채 이곳에 소환되어 목숨을 잃어버렸으니까.

나는 운이 좋아 살아남았지만……만약 운이 나빴다면 13명 째의 희생자가 됐겠지. 그럴 경우에는 지금 유린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남자가 ‘14번째 용사’가 됐을 수도 있고.

“성욕(性慾)이라는 건 무서운 거야. 3대 욕구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이거 때문에 인생을 망친 놈이 한두 명이 아니니까. 그런 놈들이 이 세상에 익숙해지며 인간성을 잃거나 타락시키게 된다면 정신도 거기에 따라 오염되지. 정신이 오염된 놈들이 정상적인 사고를 가질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니 영혼을 얻을 확률도 높아지고. 아까 말했지? 정신이라는 개념은 나한테는 아무래도 좋은 거라고.”

그렇군. 필요한 건 육체라는 그릇과 그걸 통제하는 영혼뿐. 성욕으로 인해 정신이 오염되든 말든 상관 안 한다라……그럼 남은 정신은 어떻게 되지? 몸을 빼앗긴 후에 한 몸에 동시에 공존(共存)하게 되나?

“그건 나중에 차차 알게 될 거야. 다른 시공차원계로 갈 수 있는 육체. ‘나 자신만의 몸’을 얻게 된다면 내가 가진 능력도 얼마나 쓸 수 있을지를 확인할 수 있게 될 테니 나한테는 정말 꿈만 같았지. 다른 세상에 가서도 내 능력이 얼마나 잘 통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으니까. 하아……근데. 문제가 있었지. 꿈이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거. 너도 알지?”

모를 리가 있나. 내가 너한테 영혼 바치며 그토록 과거로 돌아가기를 바랐는데 이 지경, 요 모양, 쓰레기 같은 꼬라지가 됐는데. 이렇게 크게 실망한 것도 오랜만이었다. 모두 다 빼앗겨버렸지만 저항조차 불가능했기에 더욱 더 비참함을 강조시켜준다만……별로 경험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었다.

“잠깐만. 그럼 괴물은? 계획에 방해만 되는 괴물을 만들고 방치시킨 이유는 아직 설명 안 했잖아.”

소환된 사람의 조건만 말했기에 난 의문을 나타냈고 유린은 박수를 치며 과장된 몸동작을 보여줬다.

“우리 세린, 기억력도 좋네? 이제 말할 생각이었어.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그걸 말 안 할 리가 없잖아? 이렇게까지 개고생을 하며 이룬 성공신화인데……당연히 빠짐없이 말해줘야지. 그게 바로 예의잖아?”

남 엿 먹이는 장대한 서사시(敍事詩)를 ‘예의’라고 부르지는 않는다만……그가 지금까지 겪어온 것. 지금까지 짜둔 계획은 들어야만 했다. 모든 것을 빼앗긴 나한테 있어서는 그나마 그것만이 유일하게 허락된 것이었으니까.

이길 수 없는 신에 의해 이미 죽음이 확정된 이상 의미 없는 발버둥을 치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천천히 다가오는 죽음을 잊기 위해서도 이 이야기에 집중하고 싶었다. 망각과 도망이 사건을 해결해주지는 않지만……이 상황을 해결할 뾰족한 방법 따위, 나한테는 없었으니까.

============================ 작품 후기 ============================

성공한 악당만큼 입을 놀리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자기가 왜 악당이 된 건가, 이 세상에 어떻게 복수할 것인가, 그 복수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준비했는가. 그런 걸 주절주절 떠벌이고 싶어 미칠 지경일 테니 말입니다.

말이 나와 하는 말인데, 저도 세상살이 힘든 거나 짜증나는 거라면 하고 싶은 말 엄청 많습니다. 단지 말해봤자 의미도 없고 후기에 그런 거 쓴들 좋아하시는 분은 아무도 없으니까 안 쓸 뿐이죠.

점점 자기 목적과 계획을 말하는 유린. 그런 유린으로부터 도망조차 치지 못한 채 듣고만 있어야 하는 세린. 거기에 세린이 얼마나 인간쓰레기인가를 직접 말해주는 서비스까지. 주인공을 실컷 굴리려고 작정한 작가의 모습이 떠오른다고요? 레드썬 한 방 거하게 쏴드려요?

여하튼 이제 수요일입니다. 오늘만 지나면 한 주의 3/5이 지나가버리는 거네요. 200화가 가깝다지만 실제로 끝이 가까워지니 여러 모로 시원섭섭합니다. 후속작 준비에 개인 사정, 회사일까지. 이리저리 겹치고 얽히고설키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네요.

코멘트에 대한 답변입니다.

고양이새벽님, 늘 즐겁게 읽어주시고 코멘트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속적인 구독과 코멘트는 힘이 됩니다. ㅠㅠ 코멘트가 없으면 ‘으응? 조회수는 늘어났는데 코멘트가 없네. 재미없었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악성 코멘트를 바라는 건 아닙니다만, 그래도 코멘트는 있는 편이 더 힘이 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백작냥님, 아스라이는 제 블로그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루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제 뜰 접속 - 뜰 우측의 소개글 첫줄에 있는 블로그 링크로 접속 - 블로그의 카테고리에 있는 ‘소설’로 이동 - 아스라이 다운 후 전자책 뷰어로 감상

이상입니다. 전자책 뷰어만 있으면 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 전자책으로 내다보니 텍스트 문서로 배포하긴 좀 그랬고, 조아라에 분할해서 올리자니 회사일이나 개인사정이 바빠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전자책 파일로 소개드린 점,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스라이는 개인적으로 제일 즐겁게 적은 글이자 적고 싶은 걸 모두 다 때려 박은 소설입니다. 시공차원계라는 설정도 있지만 어차피 200화가 되면 잠시 휴재하게 될 테니 심심풀이 삼아 보셔도 괜찮을 거 같아 거듭 말씀드리게 됐습니다.

200화를 올리며 여러 모로 복잡한 사정이 있다는 걸 말씀드릴 테니 그때까지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시기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봐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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