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07 「21-6 : 지옥(地獄) (6)」 =========================
자기가 사는 세상이 멸망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보통 사람들은 ‘그 새끼 미친 거임?’이라고 말할 거다. 그렇겠지. 나도 초등학생이었을 무렵, 1999년 7월에 세상이 멸망할 거라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을 듣고 불안했던 적이 있었으니까.
비단 무서워할 것은 예언만 있는 게 아니었다. 내 한 목숨 부지하기도 힘든데 가스 누출 사고나 폭발 사건, 자동차 충돌을 비롯한 교통사고 등.
하루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가고 있고 그러한 사건이 내 주변에서, 너무나 흔히 보거나 접하는 것들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로는 늘 주위를 조심하게 됐다. 인생 순식간에 종칠 수 있었으니까.
내가 예전에 말했을 것이다. 인생은 한 방이라고. 복권 등에 당첨되어서 부잣집 도련님이나 아가씨. 혹은 사장님이나 사모님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사고나 사건 때문에 훅 갈 수도 있다는 뜻을 품고 있기도 했다.
세상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 빛과 어둠. 승리와 패배. 동전의 앞과 뒤 같이……서로 정반대의 성질이나 속성을 지녔지만 떨어질 수 없는 것들. 한 쪽이 있어야 다른 한 쪽도 존재할 수 있는……그런 성질의 것들이 존재했다. 인생도 그러했다. 단숨에 인생이 나아질 수도 있었지만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기도 했다.
인생이 한 방에 나아지는 일은 좀처럼 없었지만 한 방에 훅 갈 수 있는 경우는 아주 많았다. 사고나 사건. 원해서 그런 것도 있고 원하지 않는데 어떤 일에 휘말리는 경우도 있었다만 경위나 원인이 어찌 됐든 간에 훅 갈 경우 심하면 목숨. 가벼워도 인생의 소중한 것들을 많이 잃어버리는 게 태반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훅 간다’라는 표현은 쓰지 않으니까.
세상이 멸망하는 것도 무섭지만 주변에서 일어난 사고나 사건에 휘말려 훅 가는 것도 충분히 무서운 일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세상살이는 각박해졌고, 인간관계가 점점 이어지지 않음에 따라 무차별 살인 및 폭행 사건을 저지르는 사람도 많아졌으니까. 아무런 이유 없이 폭행이나 살인 사건에 휘말려 목숨을 잃게 되다니. 이 얼마나 억울한 일이겠는가?
설령 목숨을 건졌다 하더라도 몸의 소중한 부분 중 일부를 잃어버리거나 하면……더 이상 예전의 삶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게 일어나니 더욱 더 개인의 안전과 주변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게 됐다. 한 방에 훅 가는 걸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나도 그랬다. 아무런 이유 없이 범죄를 저지르는 놈한테 휘말리는 건 사양이었기에 최대한 조용히. 조심하며 이 세상을 살아왔다. 유린에 의해 하렘 어드벤처의 세상으로 소환될 줄은 몰랐다만……그건 내가 아는 상식의 범주에서 벗어난 일이었기에 내 힘으로는 막을 수도 없었고 일어날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으니까.
자기가 깃들만한 몸 하나 얻자고 13명의 남자를 소환한 미친년 덕분에 난 영혼과 육체를 빼앗겨버렸다. 남은 정신은 놈이 쓰던 여성의 육체에 들어간 탓에 난 이제 완전한 여성이 되어버렸다. 놈을 증오스럽게 여기면서도 그 빳빳한 자지를 볼 때마다 진한 키스를 하게 되다니. 굴욕이었지만 굴욕을 느낄 즈음에는 이미 정사를 마친 다음이었다.
원하지도 않는데 여자가 되어 임신까지 당해 버렸지만……그것보다 걱정되는 일은 앞으로의 일이었다. 주로 나를 범하고 있긴 했지만 언제까지고 이런 게 계속될 리는 없었다.
유린은 손에 넣은 육체로 뭐가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가를 테스트하고 있었고 이 시험이 끝나면 다른 시공차원계로 넘어갈 계획이었다. 예전에 들었기에 어떻게 막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만…….
문제는 그 이후의 일이었다. 난 계속해서 생각하고 걱정했다. 유린이 이 시공차원에서 떠나버리면? 자기가 만든 하렘 어드벤처에서 떠나게 된다면……여기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낙천적인 사람이라면 ‘에이, 남겨두겠지. 설마 자기가 만든 걸 모조리 없애겠어?’라고 말하겠지만……유린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놈이었다. 오히려 없애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쪽이 이상했다.
생각해봐라. 이 하렘 어드벤처에서. 자기가 만든 세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20년 동안 온갖 시험을 다 해온 놈이다. 자기가 원하던 것. 내 영혼과 육체를 손에 넣고 즐길 걸 다 즐긴 유린이 여길 남겨둘 거라고? 도저히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당장 여기를 없애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여기를 없앤다면 이 세상은 소멸하겠지. 그 소멸(消滅)이라는 뜻은……말 그대로 소멸. 혹은 멸망이라 봐야 했다. 땅이나 하늘. 나나 아내들. 괴물들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와 공간이 사라진다고 이해해야겠지. 조금이라도 남는다면 그건 멸망이나 소멸이라 표현하지 않으니까.
이곳을 멸망시킬지 보존시킬 건지에 대해서는 ‘멸망시킨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지만……설령 이곳을 가만히 놔둔 채 다른 곳으로 넘어간다 치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살아남았으니 다행 아니냐고? 그럼 물어보자.
지금 저 밖에 1,000 마리가 넘는 괴물들이 득실대는데 그게 다행이냐? 괴물들로 가득한 것도 모자라 앞으로 살아갈 곳도, 먹을 것도 찾을 수 없게 된……그야말로 ‘좆 됐다’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상황인데 이게 다행이냐? 기뻐서 춤이라도 출 상황이냐고?
현재 왕궁(王宮)에 있긴 했지만 유린이 사라져버린다면 이곳에 괴물이 들이닥칠 거라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자기 일을 방해받기 싫으니 괴물을 들여보내지 않는 것일 뿐. 자기한테 있어 나나 아내들은 전부 다 고깃덩어리나 마찬가지인데……그런 유린이 우리를 위해 살 곳과 먹을 것을 남겨둘 거라 생각하냐?
만약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있다면 진심으로 동정과 연민을 보내주고 싶었다. 그 새끼가 그럴 위인으로 보이냐?
배려? 남을 배려할 마음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죄 없는 사람들을 지 멋대로 소환해 죽이지도 않았겠지! 그 넘치는 배려심으로 괴물을 없애 하렘 어드벤처의 평화와 번영을 꾀했다면 또 모를까, 남 데려와서 죽이는 게 배려냐?
시녀나 여왕기사단의 단원들. 자기가 써먹을 왕궁의 일부 사람들 외에는 모조리 좀비 타입의 괴물로 만들었다고 이전에 말했었다. 이미 죽은 사람들도 문제였다만……우리의 운명도 그리 긴 것은 아니었다. 마리아나 아테나가 아무리 강하다 치더라도 레이프 안에 있는 모든 괴물을 퇴치할 수는 없었다.
개인한테 자동으로 지급되던 돈 등은 더 이상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아기를 양육하기 위한 비용부터 시작해 생활비까지 들어있던 지급금(支給金)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는다니. 이게 무슨 뜻인지 다 알 거라 생각한다. 뭐냐고? 뭐긴 뭐겠어?
“더 이상 그런 걸 줄 필요도, 신경 쓸 필요도 없다는 거지…….”
너무나 답답했기에 육성(肉聲)으로 말했다.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 있었다 치더라도 읊조렸겠지. 너무나 답답한 현실.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지만……설령 나나 아내들이 힘을 합친다 치더라도 이 상황을 뒤집는 것은 불가능했다.
존댓말을 하며 비굴하게 굴었던 때를 떠올렸다. 평화로운 예전으로 되돌아가?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 헛소리였다. 유린 말 대로였지. 유린이 왜 그런 짓을 해야 할까? 이제 곧 다 죽을 텐데.
자동으로 개인한테 주어지는 지급금은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고 마을과 수도는 폐허 상태. 살아남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뿐이며, 이들은 모두 유린한테 지배당하고 있었다.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정신조차 없는 사람들과 폭군이라니. 딱 봐도 이미 멸망각이잖냐. 멸망의 스멜이 풀풀 풍기잖아.
으음……멸망(滅亡)의 스멜(Smell)이라고 했지만 좆망의 냄새가 난다고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군. 이 세상의 존망(存亡)이 좆☆망하게 생겼는데 유린이 우리나 이 세상을 신경 쓸 거 같냐? 곧 죽을 놈들을? 여자들을 고깃덩어리라 부르며 자기 꼴리는 대로 행동하는 사이코패스 폭군 새끼가? 바랄 걸 바라야지, 시발!
소멸시켜도 좆망. 멸망하게 내버려둬도 좆망. 뭘 하든 간에 좆망 & 몰살이라는 궁극의 양자택일(兩者擇一)이라니. 죽거나 좆망하는 거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냐며 투덜거렸지만……그것 외에는 정말 선택지가 없었다.
내가 막는다고? 여자가 되기 전부터 마법이나 무기의 사용권한을 빼앗겼고, 아무런 능력 없이 유린한테 강간이나 겁탈당하기 일쑤인데? 그런 나보고 싸우라고? 허, 참. 농담도 정도껏 해야지. 과유불급이라 했다. 지나치면 모자라는 것만 못하지. 지나친 농담은 짜증만 유발할 뿐이다.
그래, 그래도 사람이니까. 불가능한 일을 최대한 이루어낼 수 있도록 노력하고 발버둥치는 게 사람이란 존재니까……그래, 이길 수 있다 치자. 나한테 예전의 힘과 무기, 마법을 준다 가정하자고.
아주 운이 좋아 유린을 쓰러뜨렸어!
우왓! 웃~우우웃!! 존나 좋아요, 프로듀서!!
근데 이긴 후에는?
이 세상은 어떻게 해?
아니, 어떻게 되는 건데?
이기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이긴 후에도 문제였다. 예전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만……걱정할 게 너무 많아 문제였다. 예전에는 아내들과 평화를 주제로 고민했었다만 지금은 이 세상의 미래와 존재를 걱정하다니!? 대단해, 굉장해! 내가 설마 이 세상의 미래까지 걱정하게 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본인인 나도 몰랐는데!
이긴다 치자. 그래, 좋아. 좋겠지! 이겼는데! 근데 그 다음은? 이미 수도나 마을은 괴물들로 가득! 더 이상 식량이나 돈은 지급되지 않았다! 돈이 있다 치더라도 그걸 사거나 팔 시장이 형성되지 않으면 돈은 단순한 금속이나 종이 쪼가리일 뿐이지! 아무리 부자라도 죽을 때는 소용없듯이, 멸망을 앞둔 이 상황에서 돈은 무용지물에 불과했다.
이겼다고? ‘이긴다 = 살아남는다’가 아니란 말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필요한 건 의식주다! 옷은 그렇다 치더라도 살 곳은? 이 왕궁 안에 괴물들이 몰아닥치면 대체 어디로 도망가야 할까? 어디서 잠을 청하고 식사를 해야만 하는 걸까?
식량은? 나와 내 아내들. 최소한 17명이다. 거기에 아기까지 태어나버리면 32~33명. 나나 아스카를 제외한다 치더라도 최소 30명 이상의 사람이 있는데……먹을 게 하늘에서 뚝 떨어지겠냐?
아이들이 1~2개월 만에 성인급으로 성장할지 어떨지에 대해서는 모르지만……성장하는 아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식량과 거주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길 가능성도 없지만 그걸 우리 힘으로 만들 가능성도 없었기에 난 머리를 감싼 채 한숨만을 푹푹 내쉬었다.
걱정할 게 이거밖에 없냐고?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소멸시킬지, 멸망하게 내버려둘지도 문제고 이긴 후의 미래도 문제다만(물론 전부 다 어찌 될지 모르고, 싸운다는 것 자체가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웠기에 거론의 가치가 별로 없었다)……. 만약 유린이 다른 곳으로 간다 치자.
그럼 내 영혼은?
내 영혼은 어떻게 되는 거지?
유린이 다른 시공차원으로 간다는 걸 들은 후부터 계속 나를 괴롭히던 문제 중 하나는 바로 내 영혼이었다. 이 세상이 사라지든 남든 간에 내 정신이 남아 있다면 아마 이대로 최후를 맞이할 수도 있겠지. 그건 이해가 갔다.
근데 영혼은? 내 육체를 빼앗은 것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놈한테 넘겨주게 됐다만……영혼의 주도권은 어디까지나 유린한테 있을 뿐. 놈한테 맡긴 내 영혼이 어떻게 될지도 매우 신경이 쓰였다.
게임이나 만화, 애니메이션이나 소설, 영화나 드라마 등. 각종 서브 컬쳐 및 인쇄·영상 매체를 봐온 내 잡지식(雜知識)을 살려 최대한 희망적으로 생각하려 했지만……이 지경에 굴러 떨어지기까지 온갖 엿을 먹었기에 더 이상 희망적인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듯이 희망을 생각하면 늘 그 이상의 절망이 나를 덮쳐왔으니까.
놈이 다른 세상에 넘어가면 과연 내 영혼은 어떻게 될까? 그 답은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온갖 부정적인 생각, 안 좋은 엔딩, 엿 같은 이벤트 등을 겪었기에 ‘이게 더 엿 같을 거야! 히히힛!’같은 느낌과 함께 배드 엔딩 리스트가 쫙 뜨는 걸 볼 때의 기분은……매우 엿 같았지.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결론부터 말하자면……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영혼의 소멸. 절망적인 것은 놈의 영혼이 되며 나라는 존재는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내 정신이 소멸함에 따라 영혼도 따라 소멸하거나 상처를 입으면 그나마 낫겠지 싶더라. 그럼 최후의 최후에 유린한테 엿 한 방 거하게 먹일 수 있으니까.
그러나 정신의 소멸 유무와 관계없이 영혼이 무사하다면? 영혼의 주도권을 가진 유린과 함께 시간을 보낼수록 점차 그의 것이 될 거고……신세린의 영혼이었던 것은 유린의 것이 됨과 동시에 신세린이라는 존재는 완전히 소멸하게 되겠지. 내가 살던 세상에서도, 이 하렘 어드벤처 속에서도 말이다.
물론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이다. 유린을 만나 모든 것을 듣기 전까지 왜 이런 짓을 저질렀고 그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애초에……판타지나 시공차원계라는 개념이 존재했는지조차 몰랐었으니까. 아무리 열심히 생각해도 이것들은 내 생각에 지나지 않았으며 근거도, 확신도 없는……일종의 시간 죽이기에 가까운 내용들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더 이상 천장을 올려다볼 수도 없었다. 올려다보면 무슨 뾰족한 수가 나오나? 좋은 방법이라도 떠오르냐고. 생각하는 것도, 고민하는 것도. 모두 다 그만두고 싶었다.
지쳤다. 힘들다. 쉬고 싶다. 그게 내 마음이자 바라는 것이었다. 야, 너무하잖아. 넌 이미 이겼잖아, 유린. 날 엿 먹인 것도 모자라 니가 원하는 걸 모조리 손에 넣었다고. 난 패배자고 원하지 않는 상황에 처하게 됐지.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그래, 인정할게. 그게 현실이니까. 내가 부정한다고 현실이 달라지지는 않으니까.
근데 이게 뭐야? 왜 내가 모두를 걱정해야 하지? 왜 내가 이 세상의 미래부터 시작해 모든 사람들의 미래, 의식주, 영혼의 상태를 걱정해야 하는 건데? 이제 충분하잖냐……. 내가 대체 뭘 얼마나 더 생각하고 걱정해야 하는 건데? 내가 그럴 의무나 가지고 있냐?
이전까지는 유린의 계획대로 전투력의 성장, 건강한 육체의 완성을 위해 노력했다고 치자. 근데 지금은? 이제 아니잖아. 없잖아. 대체 나보고 이제 뭘 어떻게 하란 건데? 여행? 전투? 그딴 게 가능했으면 이 왕궁에 처박혀 있을 리가 없잖아.
꼭 의무가 있어야만 노력하냐고? 그건 아니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의무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하겠지. 그게 흥미가 있어서 그러는 것이든 아니든 간에……의무가 없다고 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 그래, 맞아. 그럼 또 하나 물어보자.
내가 노력한다고 의미 있냐? 노력에 의미가 있다고? 그럼 내가 지금까지 해온 건 다 뭔데? 유린 손바닥 위에서 춤추듯이 온갖 짓을 다 했었지. 목숨 걸고 전투하고, 다른 사람 구하려고 노력하고. 납치는 두 번씩이나 당했지!
안즈한테 납치당한 후부터 지금까지 개고생만 하면서 이 지랄 염병을 하고 있는데? 그게 다 유린을 위한 거였는데 뭐? 노력하라고? 지금까지 내 노력뿐만 아니라 평화로운 일상을 위한 계획까지 모조리 부숴온 주제에 또 노력을 하라고? 다른 사람 걱정을 하라고?
씨발 너희 연놈 새끼들(유린과 카인. 남녀 둘 다 싸잡아서)은 대체 어떻게 생겨 먹었길래 그딴 말을 지껄이냐? 말이면 다냐? 입에서 나오면 그냥 그게 다 말이 되냐?
아, 그래. 말이 되겠지! 이 세상의 잘나고 위대하신 창조주(웃음)이자 절대자(ㅋㅋㅋ)님이신데!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못하니까 내 몸과 영혼까지 빼앗은 분이신데! 암, 말이 되겠지! 그렇고말고!
걱정? 하고 싶지도 않다. 고민? 지금까지 쌓아온 고민만 해도 트럭 한 대는 쉽게 채우고도 남겠지! 당장 이 세상이 멸망할지도 모르는데 대체 내가 왜 이딴 생각이나 하며 괴로워 해야 한단 말인가?
아기? 뱃속의 아기! 아아, 그래! 내 자지에서 퓻퓻 뿜어져 나온 정자와 자궁 속의 난자가 버무러진 환상의 결합체! 생명의 신비! 근데……그거 의미 있냐?
이 세상은 아무리 길어봤자 한 달. 한 달도 잘 쳐준 거지. 일주일이나 가면 신기할 텐데? 유린이 몸을 시험하는 게 끝나면 일주일보다 더 빨라질 수도 있는데 대체 아기 걱정을 왜 해야 하는데?
혹시나 유린이 현재 생활에 싫증이 나면? 그건 그거대로 끝이겠지! 절대자의 기분이 상하면 전부 다 끝나는 세상이라니! 하하, 내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내 몸 하나 건사 못 하는 놈이 무슨 세상의 미래와 존망(存亡. 좆망도 포함)을 걱정한단 말인가?
“이제 지쳤어……날 좀, 그냥 내버려달라고…….”
결국 난 눈물을 터뜨리며 베개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모든 게 유린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던 거라니! 내가 지금까지 만들어온 인연과 사랑, 평화! 내 손으로 일구었던 것들이 모두 계획된 것들이었다니!
난생 처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프레그넌트의 숲을 정화(淨化)시켰고 마을도 평화를 되찾았었지! 내가 생각하던 모든 것들이 순탄하게 이루어져 이 이상 기쁠 수는 없는 나날이! 늘 내가 바라던 평온한 미래가 날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모두 다 박살나버렸다. 전부 다. 남김없이. 마을은 폐허가 되고 주민들은 많이 죽었다. 다른 곳으로 도망갈 방법도 없었으며 육체와 영혼을 빼앗긴 채 하염없이 울기만 하는 생활이라니! 언제 강간을 당할지 몰라 벌벌 떨며 원하지도 않은 아기를 쓰다듬어야 하는 인생이라니!
놀아난 것만 억울한 줄 아냐? 내 아내들과 지위.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빼앗긴 것도 모자라 원하지 않는 여성의 육체와 아기까지 얻어버렸어! 자살하지 않은 게 용한 이 상황에서 또 걱정하라고? 싸우라고? 뭘 어떻게? 대체 내가 뭘 어떻게 해줘야 만족할 건데? 내 인생 하나 제대로 못 챙기는데 대체 뭘 어떻게 해야 속이 풀리겠냔 말이다!?
“딱히 뭘 하라고 한 적은 없는데?”
베개와 침대 시트를 주먹으로 두들기던 도중 들린 목소리에 눈을 번뜩이며 고개를 들었다. 내 목소리와 몸을 차지한 유린이 이상하게 웃으며 침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너! 너, 이 개새끼! 죽어! 죽으라고!”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기에 조금 전까지 얼굴을 파묻고 있던 베개를 힘껏 놈한테 휘둘렀다. 당연히 맞아줄 리는 없었고 나는 모든 힘을 담은 풀스윙이 빗나가자 비틀대며 땅에 주저앉아버렸다.
“너 너무 다혈질(多血質)인 거 아니냐? 계속 그러면 아기가 너 닮아서 다혈질로 태어날 거 같은데……괜찮냐?”
“죽어! 진짜 죽어! 너만 죽으면 아기는 얼마든지 낳아줄게!! 죽어, 죽으라고오옷!”
어설픈 주먹을 휘둘렀지만 유린은 한 대도 맞지 않았다. 내 몸으로 저렇게 회피가 가능하구나 싶을 정도로 능숙하게 몸을 다루는 걸 보니 절망감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말도 안 돼……내 몸으로 저런 행동이 가능하다고? 마법도 안 쓰고!?
“왜, 놀랐어? 원래 주인인 너보다 훨씬 더 이 육체를 잘 다뤄서?”
표정을 읽은 건지, 생각을 읽은 건지. 멍하니 선 채 절망만을 안고 있던 나한테 유린은 그렇게 말했다. 더 이상 때릴 기력도 없었기에 차디찬 바닥에 주저앉았고 유린은 능글맞게 웃으며 다가왔다.
“너한테는 절망스럽겠지만 나한테는 최고의 육체거든. 너도 내 입장이 되어보라고. 20년 만에 얻은 육체. 내가 너를 위해서 이것저것 이벤트도 준비하고 그랬다지만……거의 10개월 동안 온갖 개고생에 좆뺑이를 친 육체라고. 그토록 원하던 걸 손에 넣었는데 그걸 다루는 노력을 게을리 할 거 같냐?”
그래, 잘났다 시발아. 얼마나 잘났으면 남이 노력한 것을 빼앗는 것밖에 모르는 놈이 되셨을까요, 개자식아.
“정중하게 디스하는 건 그만 좀 하지? 너한테는 여러 모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미안하다는 생각도 하고 있고. 어지간하면 야만족을 쓸 생각은 없었지만 니가 생각 외로 이 세상을 사랑해준 덕분에 이런 마음이 들더라고. 평화를 되찾기 위해 싸웠던 때도 굉장하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면 지금 이상으로 굉장해지지 않을까 하고…….”
“그래서 그 좆뺑이를 돌렸다, 이거지? 죽어!! 진짜 죽어! 아니, 죽어줘! 제발! 너만 죽으면 내가 죽어도 마음 편하게 죽을 수 있을 거 같아! 죽으라고! 쫌! 죽어! 왜 안 죽는 건데!?”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질문에 유린은 머리를 긁어대며 입을 열었다. 이런 질문은 어지간하면 하지 않지만 이놈한테는 예외였다. 오히려 ‘왜 자살 안 하고 살아있는 건데?’라고 물어도 약할 지경이었지.
“아니, 왜 살아있는 거냐고 묻는 것처럼 물어도……내가 ‘살아 있어서 살아 있다’라고 대답하면 화낼 거잖아.”
“당연하지 씨발아!!”
유린은 한숨을 크게 쉬었다. 내가 지금까지 저런 식으로 한숨을 쉬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만 그것도 잠시였다. 저놈이 한숨 쉬는 횟수는 그래봤자 하루에 10번을 넘을까 말까겠지만……나는 장담컨대 50번 이상이었다. 단순 계산으로만 쳐도 저놈의 5배를 넘으니 내가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한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겠지.
조금 전부터 울고 있었지만 이미 내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이 모든 일의 원흉을 생각하며 이를 갈고 있었는데 그 빌어먹을 새끼가 웃으며 내 곁으로 오다니. 이거야말로 신이 주신 기회 아니겠는가? 신이 ‘얼른 덤비지 않고 뭐하니? 멍석은 깔아놨어. 공격해! Fight!’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아니, 난 그런 소리는 한 적 없는데?”
“너 말고, 씹탱아!! 너 외에 다른 신! 시공차원계가 평행 우주든 평행 세상이든 간에 너 외에 다른 신이 있긴 있을 거 아냐, 병신 머저리 새끼야!!”
발악 수준으로 대답하자 유린이 ‘그건 그렇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가설 중 하나가 맞은 게 기쁘긴 했지만 달라진 건 없는데다, 내 속을 박박 긁어놓은 개새끼가 현재완료진행형으로 내 뚜껑을 열리게 만들고 있었기에 위안은 전혀 되지 않았다.
“다른 신한테 빌어봤자 소용없을걸? 이 시공차원은 내가 만든 세상이니까 다른 신이 온다 치더라도 그렇게 쉽게 깽판을 칠 수는 없을 거야. 하긴……자기가 있는 시공차원에서 다른 시공차원으로 가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니 올 수 있는 놈이 있는지나 의문이다만.”
내가 숨을 몰아쉬며 놈을 꼴아보자 유린은 기분 나쁘게 웃으며 내 곁에 앉았다. 둘 다 땅바닥에 앉았지만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중요한 건 있는 장소가 아니라 뭘 하느냐는 것이었으니까.
“니가 하던 생각이 나한테 다 읽힌다는 건 이미 알고 있지?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강렬한 욕과 디스를 해댈 리는 없었을 테니까.”
대답하지 않았다. 해서 뭐하냐? 다 끝이라니까? 이 세상의 끝이 점점 보이는데 아기가 다 무슨 소용이고 목숨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차라리 농땡이를 부리는 게 나았을 텐데. 필사적으로 싸우기보다는 아내들과 딸들. 모두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보내면 좋았을 텐데.
“하아……머리는 좋을지 몰라도 여전히 현실은 제대로 볼 줄 모르네. 우리 세린쨩♬”
“그딴 식으로 부르지 마.”
살의(殺意)를 담아 대꾸했다. 난 결심했다. 놈한테 ‘자지의 맹세’로 지배를 받지 않는 이상 놈이 더러운 물건을 내밀면 바로 깨물어 주겠다고. 나한테 유일하게 남은 무기 중 하나인 치아로 놈의 물건을 찢어발기겠다고 맹세했으니까.
“어이쿠, 무서워라. 근데 있잖아……너희 세상에도 이런 말 있지 않냐?”
고개를 과장스럽게 기울이며 그는 내 곁으로 다가왔다. 여자라서 그런지 남자가 이렇게 다가오는 것에 많은 공포를 느꼈지만 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 어깨에 한쪽 손을 올린 유린은 찢어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입을 활짝 벌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끝은 새로운 시작이다]라는 명언(名言) 말이야. 응? 있지?”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말을 꺼냈지만 당황하는 내 이성과 달리 뇌는 급속히 그 말을 받아들여 최악의 사태를 도출해냈다. 이 상황에 이런 말을 꺼낸 이유. 내가 조금 전까지 생각하던 것. 설마……설마……!?
“아직 고생할 게 남은 거 같네요. 우리 세린쨩……아니, 13번째 용사님……♡”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아직도……아직도 남은 건가?
아직도 시련이 남았다고?
육체와 영혼. 내 모든 것을 빼앗아간 악랄한 신의 한 마디에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지만……그럴 수 없었다. 내 정신이 빠져나가 안식을 취해야 하는 곳.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어야 할 마음의 안식처. 내 영혼은……이미 그놈의 수중(手中)에 있었으니까…….
============================ 작품 후기 ============================
게임이나 만화, 애니메이션이나 소설, 영화나 드라마. 각종 오락 매체를 볼 때는 참으로 즐겁습니다만 끝을 맞이할 때는 여러 모로 시원섭섭합니다. 재밌었던 작품이라면 지금까지 수고했다고 응원하고 싶고 슬프게 본 작품이라면 부디 그 이후의 전개가 행복해지기를 바라곤 하죠.
물론 유희왕 아크 파이브, 건담 철혈의 오펀스 같은 개씹좆망작 같은 것들은 예외입니다. 이것들은 시청자에 대한 예의범절이나 태도 자체가 이미 글러먹었습니다.
시드 데스티니마저 실시간 리얼타임으로 봤던 제가 차마 건담이라 부를 수 없었던 철혈은 그렇다 칩시다. 그치만 아크 파이브는 듬성듬성. 그것도 다른 분들 리뷰나 평가를 슬쩍 보니 답이 없더군요. 주인공인 사카키 유우야의 대표 카드 중 하나인 '스마일 월드'를 화형식에 처하는 것만 보더라도 그랬습니다. 역대 주인공의 카드 중 저런 취급을 당한 카드는 아마 찾아보기 어려울 겁니다.
생각없이 싱크로-엑시즈-펜듈럼 3연속 소환 콤보 처만들어놓고 이제 와서 밸런스 수정 못 하니 링크소환 + 엑스트라 몬스터 존이라는 개념으로 퉁 치려는 코나미. 근데 어쩝니까. 니들이 그딴 식으로 쳐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그 지랄을 하면 안 되죠.
GX에서는 융합 덱(엑스트라 덱) 실컷 쓰게 만들어놓고 5D's 시작하자마자 융합 덱 15장으로 줄여놓고 비(非)싱크로 유저 병신으로 만들어놓고 이제 와서 피해자 코스프레라니. 한 턴에 얼마나 전개하는가를 고민하게 만들어놓은 주제에 왜 밸런스 맞추려고 노력했다는 낮짝으로 병크를 저지르냐고 병신들아.
안 그래도 마음에 안 드는 코나미입니다만, 이번 경우를 보니 진짜 치가 떨리네요. 덕분에 유희왕은 그냥 과거작만 보게 됐습니다. 링크 소환? 브레인즈? 보면 뭐합니까. 그 작품 끝나면 또 새로운 소환방법이랑 룰 나올 텐데. 그냥 전 적당히 보고 즐기는 수준에서 끝낼 생각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작품이 끝난 이후에 주인공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누구나 같습니다만……세린은 아직 그 부분에 도달하지 못한 것 같네요. 코멘트로 '세린을 괴롭히지 마세요!'라고 적으시면서 속으로는 '헤헷, 강제TS→강간→임신 3단 콤보라니! 이 작가, 뭘 좀 아는구만!'이라며 즐거워하실 여러분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예? 그런 걸 어떻게 아냐고요? 어허, 척 하면 척이죠!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듣는 센스!
그게 작가가 가져야 할 소양 중 하나 아니겠습니까?
코멘트에 대한 답변입니다.
sj8077님, NTR요소는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부분입니다만 좋은 평가를 내려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다른 분들께서는 NTR요소에 거부감을 비치시거나 글을 읽는 걸 그만두시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개인취향이고 그런 걸 각오했기에 집어넣은 NTR요소이긴 합니다만, 다음 작품부터는 안 넣을 생각입니다.
186kr님, 우선 쓰고는 있습니다만 이제 슬슬 끝이 다가오고 있네요. 끝까지 함께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끝에 다가갔지만 아직은 거쳐야 할 관문이 많은 세린입니다. 그런 세린을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며 한 주 시작하도록 합시다. 점점 추워지니 감기 안 걸리도록 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