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어드벤처–당신의 아기를 낳고 싶어-227화 (227/235)

00224 「23-3 : 어둠이 사라진 뒤……. (3)」 =========================

내가 죽은 사람들이나 마을을 원래대로 되돌린 것부터 시작해 괴물을 없앴다고 말했지만……솔직히 말해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나조차 ‘이걸 말하면 믿어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신(神)이랑 싸워서 이겼다고? 세상을 원래대로 복구(復舊)시켰다고? 마약 빨았냐? 무슨 약을 거하게 빨았기에 이딴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는 비아냥이 나오지 않을까 걱정됐다.

모두는 놀란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메이나 아스카의 경우 눈물까지 흘리며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기에 내가 더 놀랐다. 내가 해준 이야기의 어디에 눈물을 흘릴 대목이 있었단 말인가? 혹시 그건가? ‘이런 바보를 남편(아버지)으로 둔 내가 바보였다!’라고 느껴서 그런 걸까? 그런 거면 이해가 좀 간다. 내가 생각해도 쪼다짓 많이 했거든.

어디인지도 모를 곳에 남겨지게 된 나는 그 후로 꽤 헤매게 됐다. 아이템 같은 것을 넣어두는 홀로그램 윈도우조차 더 이상 쓸 수 없게 됐기에 제일 가까이 있는 마을로 가야만 했다. 아무것도 없는 채 며칠이고 노숙을 할 수도 없었거니와 내가 어디 있는지도 몰랐으니까.

아내들 말로는 내가 없어진지 일주일이 넘었다고 했었지. 그럴 수밖에. 내가 어디 있는지도 모른 채 4~5일을 헤맸는데 누가 나를 볼 수 있었겠는가?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었다. 남들 다 신경 썼는데 정작 아무런 힘을 쓸 수 없게 된 나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었으니까. 다 잘 했는데 끝에 가서 바보짓을 했구나 싶더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 예전처럼 아이템을 보관하거나 할 수도 없는 상태였기에 나는 최대한 걸으며 숲이나 마을을 찾으려 했다. 숲에는 먹을 수 있는 열매가 있을 테니 그걸로 식량을 대신할 수 있고, 마을이 있다면 거기 가서 사정을 설명하면 그만이었으니까.

4~5일을 헤맸다곤 하지만 살아남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더 이상 괴물이 없었으니 목숨의 위협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고, 숲이나 열매가 있는 나무는 자주 보였으니까. 살아남을 길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기에 ‘빨리 어딘가에 도착하지 않으면……난 죽을 거야……!!’라는 극한 서바이벌 분위기를 느낄 필요는 없었다.

6일째 아침. 내가 도착한 것은 루인이었다. 내가 도착하자마자 수상한 놈이라며 칼을 겨누는 경비대원을 보니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젠장, 좋은 일 해봤자 알아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니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 모습이 여자들과 다르다는 걸 눈치 챈 경비대원이 내 이름을 물어봤다는 것이다.

내 이름을 말하자 그들은 적잖게 놀라는 눈치였다. 왜 놀라지? 예전에 임금이었는데 유린한테 NTR 당한 병신으로 유명한 건가? 그렇게 생각했지만 나중에 들어보니 전혀 별개의 이유였다.

그녀들은 하나 같이 소생할 때 내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그녀들이 내 목소리로 들었던 내용은……내가 아내들한테 사랑과 사죄를 담았던 말이었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되돌릴 때 했던 말이 그녀들한테 전해질 줄은 몰랐기에 좀 당황스러웠다. 왜 그 목소리가 모두한테 전해졌을까?

내가 수상한 놈이라는 오인은 금방 풀렸다. 내 이름과 정체는 모두 알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NTR을 당하기 전. 그러니까……마리아와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내 이름이 전해졌다고 했다.

좆물캡슐을 무료로 배분할 때 내 이름을 거론했다고 들었었는데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이야. 인생, 착하게 살아야 하는 법이구나 하고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초원을 헤매는 동안 아내들이 이곳을 찾아왔었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마리아가 나를 발견할 경우 즉시 수도로 연락 혹은 이송을 하라는 명령도 내려와 있었기에 곧바로 수도로 갈 수도 있었지만……난 수도로 가지는 않았다. 루인에 온 이상 만나야 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비대원한테 부탁해 찾아간 집은 예전에 이루이와 함께 피신해있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문을 열자 이루이의 어머니로 보이는 여성과 함께 식사를 준비하던 이루이는 다짜고짜 날 끌어안았다. 손에 뭘 안 들었던 게 망정이지, 쟁반이나 식사 같은 걸 들고 있었더라면 메이한테 말했던 것처럼 ‘떨어뜨리지 마라’라고 소리 지를 뻔했다.

이루이는 날 껴안은 채 엄청 울어댔다. 처음에는 ‘그래, 고생 많았지?’라며 머리를 쓰다듬었지만……그것도 정도껏 해야지! 20분 이상 날 잡고 울어 대길래 ‘아, 그만 좀 울어 이것아!’라며 화를 냈다. 그래도 울더라. 결국 그녀를 말린 것은 이루이의 어머니였다.

이루이의 어머니는 이루이보다 더 작았다. 이루이가 150cm 정도였는데 그보다 작다니. 대략 140cm 정도쯤 되려나? 전체적으로 키가 작은 모녀를 보니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깨끗한 거울색의 머리카락을 잘 다듬은 두 명을 보니 찾아오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의 가슴은 이루이보다 작았다. 음, 로리거유의 유전자는 후대(後代)에 와서 성장한 건가. 그렇다 쳐도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이루이를 볼 때마다 야만족의 키리가 떠올랐는데……그녀도 지금쯤 안즈와 만나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있겠지. 청록색 촉수괴물을 비롯한 모든 괴물이 사라졌으니 더 이상 배가(倍加) 능력을 쓸 필요도 없을 것이다.

두 명 다 키에 콤플렉스가 있는지 짧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짧은 바지는 다리를 (상대적으로) 길게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었지만, 그걸 두 명이 동시에 입다니. 어지간히 키 지적 받기 싫어하는구나 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식사를 하며 이루이는 다양한 걸 물었지만 이내 어머니한테 저지당하고 말았다. 그 배려가 참으로 기뻤다. 숲과 초원을 오가며 제대로 된 목욕이나 식사를 접하지 못한 나한테 있어 음식을 눈앞에 두고 질문에 대답하는 건 고문에 가까운 행동이었으니까. 그런 배려와 마음 씀씀이를 보니 이루이가 착하게 자란 것도 이해가 갔다.

식사는 맛있었다. 단순한 스프와 빵, 고기 메뉴였지만 늘 열매로 식사를 해결하던 나한테는 진수성찬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밥을 다 먹은 후 이루이의 어머니는 나한테 목욕을 권했다. 아무래도 내 외관(外觀)이 꽤 꾀죄죄했나보다.

원래라면 욕탕에서 이루이와 19금 이벤트가 일어나야 했지만……나는 상당히 피곤한 상태였다. 괴물이 없다고는 하지만 노숙을 즐기는 타입은 아니었거든.

설마 내가 노숙을 하는 동안 ‘이게 바로 RPG의 묘미지!’라며 즐거워했다고 생각했냐?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라. 난 평화와 행복을 사랑하는 남자. 여행이나 노숙과는 가장 동떨어진 생물이라고.

목욕이 끝난 나는 이루이와 이루이의 어머니. 두 명과 대화를 나누었다. 이루이의 어머니는 ‘아루아’라는 이름을 가지고 계셨다. 아루아와 이루이. ‘루’가 돌림자가 되긴 했지만 이 세상에는 ‘돌림자’라는 개념이 없는 걸로 아는데……. 아마 자기의 이름이나 가문을 나타내기 위해 이름과 운율, 공통된 글자를 신경 쓴 거겠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이루이의 어머니, 아루아가 왜 살아났는가. 그것은 이루이나 아루아만 느끼는 의문은 아니었다. 카인에 의해 모두가 괴물로 변해버렸던 것은 이루이뿐만 아니라 괴물로 변했던 여자들도 인식하고 있는 문제였다.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던 상태에서 어떻게 되살아났는지에 대해 대답하는 것은 꽤나 힘든 것이었다.

카인의 존재부터 시작해 다양한 이야기가 있었기에 어느 정도 얼버무리고 이야기를 건너뛰며 그녀들의 질문에 대답했다. 내가 그녀들을 소생시켰다는 이야기를 할 때는 ‘아, 시발. 미친놈 보듯이 안 보면 좋겠는데……’라고 생각했었다. 소생시켰다는 걸 자랑 삼아 이야기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이야기를 다 들은 이루이는 고맙다며 고개를 숙였다. 내 미친 이야기를 믿냐고 물으니 믿는다고 했다. 이유를 물어보니 ‘거짓말로 할 말도 아니고, 실제로 그런 일을 겪었으니까요’라고 했다.

쉽게 말하자면……‘내 부모님이나 주변 사람들이 괴물로 변해 죽을 뻔했는데 니가 신이랑 싸웠다는 이야기도 못 믿겠냐?’라는 뜻이었다. 으음……얘도 한 성깔 하는 애 같다.

아루아도 고맙다며 인사했다. 자기가 죽어버림으로써 이루이를 힘들게 만든 것도 마음에 걸렸지만, 카인 때문에 폭언을 던진 것도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자지와 좆물만 있으면 너(이루이) 같은 년보다 훨씬 예쁘고 아름다운 애를 만들 수 있으니 마을 밖에 있는 괴물한테 강간당해 죽든 찢어발겨져서 죽든 간에 알아서 해라’라고 했었지.

카인에 의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곤 하지만 딸한테 말할 내용은 절대 아니었기에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이루이한테서 전해들은 나도 충격이 컸는데 하물며 그 말을 직접 들은 본인은 말할 것도 없겠지. 그나마 시간이 지나서 나아지긴 했지만……어머니가 딸한테 그런 말을 하다니. 그런 끔찍한 상황은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내 육체와 영혼을 되찾았다지만 여자가 되었던 때가 생각난다. 아기를 지니게 됐다는 것만으로 신체적인 충격이나 폭력에 매우 민감하게 변해버렸었지. 죽어버린 아기뿐만 아니라 여자가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경험한 나로서는 그녀들이 겪었던 상심(傷心)이 남의 일로만 여겨지지는 않았다.

신과 싸워서 모두를 원래대로 되돌렸다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믿어주니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었지만……문제는 이 다음이었다.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헤매던 차에 도착한 곳이 루인이라니. 당장 수도에 가도 상관은 없겠지만 나는 수도보다는 프레그넌트로 향하고 싶었다. 우선은 혜린이나 다른 애들을 보고 싶었으니까.

그녀들의 질문이 끝난 후에는 내 차례였다. 되살아난 사람들이나 마을의 상태, 달라진 점에 대해 물어보았다. 연유(緣由)는 둘째 치더라도 죽었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에는 모두 순수하게 기뻐했다. 하긴……마법과 괴물이 존재하는 판타지 세상이다. 소생(蘇生)이나 부활에 대해서는 나 같은 현대인 이상으로 빨리 받아들이겠지.

괴물이 없어지긴 했지만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경비대는 여전히 훈련이나 근무를 계속 한다고 했다. 괴물이 없어진 것은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무장을 해제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자신들의 생활과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의 유무에 관계없이, 사람들을 위험이나 곤란으로부터 지키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었으니까.

이야기를 마친 나는 경비대나 주변 사람들한테 부탁해 ‘텔레포트’를 쓸 수 있는 사람을 찾아줄 수 있냐고 물었다. 6일째 되는 오늘이 되어서야 겨우 여기에 도착했다. 이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들러야 하는 곳은 프레그넌트 외에도 많았다.

수도에 들러 마리아와 아테나, 헬레나를 봐야 했다. 날 발견하면 즉시 연락 혹은 이송(移送)하라는 명령을 들으니 웃음이 나왔다. 혹시나 날 잡아다 고문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함이 살짝 느껴졌지만……정중히 모셔야 한다는 부가 설명을 들으니 그건 아니겠구나 싶었다. 고문할 사람을 정중히 모시는 놈이 어디 있어?

마리아와 아테나, 헬레나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여왕인 마리아는 그 수박만한 가슴을 출렁이며 업무를 보고 있겠지. 아테나는 그 옆에서 마리아를 보좌하고 있을 거고. 여왕기사단의 부단장 업무를 보는 헬레나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웃음이 나온다. 원래부터 상대가 안 됐지만 걔랑 또 싸운다면 처발리는 미래밖에 떠오르지가 않는군.

야만족의 숲도 가야 했다. 내 생각이 맞다면 야만족의 경우 내가 생각하고 있는 숫자보다 더 많은 수의 사람이 되살아났을 것이다. 내가 안즈한테 납치당했을 때는 100명 정도밖에 없었지만……사실은 내가 납치당하기 전부터 이미 청록색 촉수괴물과 싸우고 있었으니까.

입에서 나오는 빔 공격 때문에 거의 전멸에 이르긴 했지만 그 전부터 죽었던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소생된 사람의 숫자는 생각보다 훨씬 많아야 했다. 나도 그걸 바랐었고.

내가 소생시키긴 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파악하거나 예상한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소생과 복구, 괴물 제거만을 했을 뿐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마리아가 나를 수도로 이송하라는 명령을 내린 걸 몰랐을 리가 없잖냐. 내가 진짜 전지전능한 신이었다면 6일째 아침까지 헤매는 일도 없었겠지.

야만족의 경우 ‘숲에서 도망칠 때 죽었던 사람들은 다 부활하겠지’라는 감밖에 잡히지 않았다. 죽었던 키리부터 시작해 청록색 촉수괴물한테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사람들까지 부활할 거라 생각하니 약간 머리가 아파왔다. 더 이상 괴물이 없으니 배가(倍加) 능력을 쓸 필요는 없겠지만……설마 그 힘으로 다른 마을을 침략하거나 하진 않겠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이것도 기우(杞憂)라고 생각했다. 배가 능력은 임신 상태의 여성이 쓸 수 있는 것이다. 정자를 주입할 내가 없는 이상 배가 능력을 쓰기 위해서는 ‘생명의 씨앗’을 쓸 수밖에 없었다.

소생을 준비하며 알게 된 것이지만……내 예상대로 마리아와 아테나가 ‘생명의 씨앗’을 만들 수 없게 된 것은 유린 탓이었다. 두 명이 ‘생명의 씨앗’을 만들 수 없게 만들었으니 아무리 노력해도 만들어질 리가 없었다. 신(神)의 장난질에 마음을 아파하며 자격지심(自激之心)에 괴로워하던 두 명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온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생명의 씨앗’을 먹으면 임신 상태가 되니 배가 능력을 쓸 수는 있게 된다. 하지만 이 세상은 중세 시대를 베이스로 만든 세상. ‘자식 = 보물이자 노동력’으로 인식될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아기를 소멸시키면서까지 싸워야 할 이유도 없었기에 침략을 할 리가 없었다. 그러다가 마법에 당하게 되면 자기들만 손해였으니까.

그나저나 내 목소리가 모두한테 들렸다니. 금시초문이었다. 6일 동안 헤맸으니 모르는 게 당연했지만……그것 외에도 내가 모르는 것은 가득 있었다. 유린은 지금까지 이러한 사항을 모두 알면서 장난질을 치고 있던 건가. 더더욱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원래부터 용서할 마음은 별로 없었다만.

힘이 없어졌다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힘든 것이었다. 납치당했을 때부터 이미 쓸 수 없게 된 ‘자지의 맹세’였지만, 그걸 비롯해 내 주위에 일어나는 일을 알아차릴 수 없는 것. 무슨 일이 일어나도 거기에 바로 대처할 수 없는 것. 대처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이토록 답답한 것일 줄이야…….

힘이 없는 사람은 힘이 있는 사람이나 자기가 힘이 있었을 때를 그리워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힘이 있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경험한 사람, 힘을 가진 것만으로 모두한테 경외 받거나 칭송받는 걸 보게 된다면 누구나 힘을 원하게 되니까. 이건 이 세상이나 내가 있던 세상이나 마찬가지였다. ‘힘=돈’은 아니었지만 우리 세상에서는 돈이 압도적인 힘을 발휘했지. 가문도 그렇고.

은채를 봐라. 지금은 현실을 받아들여 내 아내가 됐지만 여기 처음 왔을 때는 가관도 아니었다. 자기 집안이 돈이 많은 집안. 흔히 말하는 ‘금수저’라는 것을 아주 철저하게 이용하던 애였지. 이 세상에 적응한 우리는 피식 거리는 웃음으로 살포시 무시해줬지만……실제로 우리가 살던 세상이었다면 벌벌 떨었을 거다.

힘이란 건 그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자기가 판타지 세상에 떨어졌다는 사실조차 인지 못 시킬 정도로 엄청났지. 권력을 한 번이라도 맛본 사람은 거기서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다른 사람은 가지지 못한 힘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다니. 참으로 굉장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는 유린한테서 받은 힘인 줄도 모르고 마음껏 썼었지만……그 힘으로 혜택을 톡톡히 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자지의 맹세’에 걸린 아내들이 뭘 생각하고 있는지부터 시작해 과거를 알아볼 수도 있었고, 인격도 바꿀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오만한 병신짓이라고 생각한다만…….

다른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 힘에 매료된 나는 이 세상은 신이 나한테 준 선물이라 생각하며 엄청 깝쳤었다. 마법이나 무기, 이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 알고 싶어 하면서도 힘을 남용(濫用)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이왕 주어진 힘, 마음껏 쓰자는 본전의식에 사로잡힌 채 바보짓 하기에만 급급했었지.

안즈한테 납치된 후부터 쓰던 마법이나 증폭된 마력이 모조리 사라졌기에 그 당시부터 힘에 의존하지 않도록 노력했었지만……역시 모든 힘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은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지금 이 상황만 해도 그랬다. 내 목소리가 모두한테 들렸다는 것도, 마리아가 내 이송 명령을 내린 것도. 아무것도 몰랐잖냐.

한숨이 나온다. 오랜만에 한숨 쉬는 느낌이 드네.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는 머리를 텅 비운 채 목적지를 향해 걷기만 하면 그만이었지만……역시 배가 부르고 등이 따뜻해지니 잡생각이 많이 떠오르는군. 오기 전까지만 해도 다른 애들은 잘 있을까 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는데, 밥을 먹으니 힘이나 금수저 같은 생각을 하게 되니 말이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까. 이야기를 마친 나는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루이가 마을을 안내해주겠다고 했지만 아루아 씨는 딸을 말렸다. 오늘까지 계속 걷고 걸었던 사람한테 ‘마을을 안내해드릴 테니 같이 걷죠!’라니. 이루이야……그건 좀 아니잖니. 난 좀 쉬고 싶다고. 오죽하면 내가 여기까지 오면서 자위도 한 번 안 쳤겠니?

머리를 비운 채 걷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오면서 콧노래도 부르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힘든 건 뭐였냐고? 노숙이나 식사도 있었지만……목적지가 어디인지 모른다는 것. 그리고 혼자라는 사실이었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채 걷는 것은 누가 보면 로맨틱한 일이겠지만 걷는 당사자한테는 괴롭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마을을 목표로 걷는다면 7일 이내로 갈 수 있으니 어느 부분에서 페이스를 올린다, 어느 지형에서는 힘을 들이지 않도록 지나간다는 등 페이스 분배가 가능했으니까.

내 경우에는 내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어딜 향하는지도 몰랐기에 무작정 걷기만 했다. 이 세상은 그렇게 크지 않으니 일단 끝까지 간 후 거길 기점으로 가다 보면 무슨 마을이든 간에 나오겠지 싶었다. 미로를 나갈 때도 이런 방법을 쓴다고 했었지? 한쪽 벽에 손을 댄 채 거길 따라 걸으면 출구가 나온다고 하던가?

그 다음 문제가 좀 의외였는데……내가 어딜 가든, 어딜 향하고 있든 간에 혼자라는 사실이 나를 옥죄어 왔다. 내 육체와 영혼을 유린한테 바칠 때까지는 쭉 누군가와 함께였다. 여자가 된 후부터는 내 편은 단 한 명도 없었기에 완전히 혼자나 다름없었다. 유린이랑 싸울 때는 혼자였다만……나를 도와준 그들을 감안하자면 ‘몸은 하나지만 그 안에는 나를 도와주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고 표현해야 옳았다.

죽었던 사람들부터 시작해 유린한테 침식당한 사람들까지 모조리 되살려냈건만 정작 여행을 할 때는 혼자라니. 웃긴 이야기였다. 이럴 거면 뭐 하러 그 짓을 한 걸까 하는 생각도 몇 번이고 했다. 지금은 아는 사람과 만나 식사도 하고 이야기까지 나누었으니 그런 생각이 안 난다만.

누군가 내 마음을 듣고 ‘ㅋㅋㅋ 그 나이에 외로움 타냐?’라며 웃을 수도 있었지만……외로운 것은 외로운 것이었다. 이 감정은 나뿐만 아니라 유린한테도 적용되는 것이었다. 자기와 소통할 수 있는 인물, 자기와 어울리는 인물이 없다고 판단한 유린은 맹목적으로 다른 시공차원에 가고 싶어 했다.

그곳에 가면 여기보다 훨씬 더 멋진 세상, 자기와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지. 마치 시골소녀가 ‘도시는 내가 사는 시궁창 같은 시골보다 훨씬 더 멋지고 근사한 곳일 거야! 거기에는 꿈과 만남, 많은 이벤트가 존재할 거야!’라며 동경과 환상을 품는 것과 유사했다.

하지만……다들 알 거라 믿는다. 실제로 도시는 생각만큼 멋지지도, 아름답지도 않다는 사실을. 시골도 시골 나름대로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겠지만 도시라고 해서 그런 어려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들 간의 관계나 신뢰 문제 등을 생각한다면 시골보다 더 각박하고 살기 어려운 곳이 도시였다.

다른 사람의 일에는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관여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으며, 자기한테 관심이나 호의를 나타내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흑심(黑心)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의 이익이나 이득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기도 했으며 서로 간의 신뢰를 쌓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믿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나를 믿어준다고는 확신할 수가 없으니까.

사람이 사는 도시는 시골 처녀나 청년이 꿈꾸는 것처럼 아름답거나 멋진 곳이 아니었다. 온갖 권모술수(權謀術數)가 난무하는 곳. 그곳이 바로 도시였다. 꿈과 동경, 환상만을 가지고 온 젊은이들은 도시라는 이름의 괴물한테 소중한 청춘과 시간을 빼앗기기 일쑤였다.

자기와 맞지 않다고 깨달은 순간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다른 길을 찾은 경우에는 그나마 나았다. 좀 더 익숙해지면 될 거라며 더 많은 시간과 돈, 청춘을 쏟아 붓는 사람도 있었지만……그들의 미래가 항상 밝을 리는 없었다.

굳이 이런 말을 하지 않아도 모두 알 것이다. 환상과 꿈은 꿀 때는 즐거울지 모르지만 실제로 경험하게 되는 세상은 결코 따뜻하기만 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말이다.

유린의 계획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당장 사람이 사는 도시만 해도 저토록 위험하고 주의해야 하는 부분이 많은데……아직 가보지도 않았고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 시공차원에 맹목적으로 가고 싶어 하다니. 얼마나 여기가 싫었으면 그런 병신 짓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유린한테 말했다. 자기랑 비슷한 힘을 지닌 상대(나)한테도 고전하는 니가 어떻게 나보다 강한 사람, 너보다 위대한 존재가 득실대는 시공차원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냐고. 너한테 적의(敵意)를 가진 사람 하나 제대로 처리 못하면서 무슨 시공차원계에 가냐며 엄청 깠었지. 비웃기도 했고.

그 의견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그때는 온라인 게임으로 예시를 들곤 했지만 유린이 하려는 행동이 얼마나 멍청한지를 설명하는 데에는 다른 적절한 예시도 있었다. 바로 조금 전에 꺼낸 도시가 그러했다. 악의(惡意)를 가진 사람이 있다는 전제조건 자체를 아예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유린은…….

유린이 그렇게 된 건 앞서 말했듯이 ‘그의 곁에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라는 이유도 있었지만……지금 생각하니 또 하나 있었다. 바로 ‘신(神)의 힘에 너무 의존했다’라는 거지.

내가 ‘자지의 맹세’로 아내들을 지배하고 조종했듯이 유린 또한 자기 힘으로 사람들을 조종하곤 했다. 아내들을 지배하면서도 고깃덩어리라고 까는 모습은 참으로 웃긴 것이었지. 누릴 건 누리면서 욕은 다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런 위대한 힘을 지녔으니 다른 시공차원에 가서도 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야말로 우물 안 개구리가 따로 없었다. 뭐……나라도 유린 같은 처지에 놓였다면 그렇게 생각했겠지. 그런 착각을 하게 만들 정도로 놈의 힘은 대단했으니까.

이 세상을 관리하고 주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창조주·절대자·최강무적의 위치에서 모든 걸 꿰뚫어볼 수 있는 힘이라니. 지금 돌이켜봐도 내가 어떻게 그놈을 이겼나 하는 생각밖에 안 났다. 나한테 힘을 준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되살아나기도 전에 죽었겠지.

독 하나만 퍼트렸는데도 엄청 괴로워했었으니 그들이 생각했던 모든 계획 및 수단을 썼더라면……아마 유린과 붙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이미 끝난 이야기였지만……이렇게 보니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유린은 자기 때문에 안식을 찾지 못하는 영혼들에 대해 전혀 몰랐다. 그렇기에 그들은 나와 접촉할 수 있었지. 헌데……생각해보니 참으로 웃겼다. 다른 시공차원으로 갈 필요조차 없었다. 이미 자기한테 악의와 살의(殺意)를 가진 사람들이 그토록 많았건만, 그 사실조차 눈치 채지 못했던 유린이 다른 시공차원에 간다고? 하아……웃음을 넘어 한숨이 나왔다.

악의나 살의. 어느 쪽이든 간에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했고, 그런 감정을 가진 자들이 복수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유린이 어떻게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걸까?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놈은 바보였다. 머리 좋은 바보. 자기가 원하는 것만 보려 했기에 주변이나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은 바보였지.

단순한 바보라면 아직 갱생(更生)의 여지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는 자기의 힘을 악용하기만 했다. 그 최후는 괴로운 것이었지만……크게 동정심이 일어나진 않았다. 좀 더 노력해서 주변을 둘러보거나 소환한 사람들과 대화를 시도했다면 지금보다는 더 나은 미래를 거머쥘 수 있었을 텐데…….

이미 사라져버린 이 세상의 신을 생각하던 것도 잠시. 내 의식은 수마(睡魔)에 먹힌 채 어디론가 떨어졌다. 부드러운 침대 위에서 잠을 자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 작품 후기 ============================

이루이의 어머니인 아루아가 등장한 것. 그리고 그 묘사를 보며 대부분의 독자들은 눈치를 채셨을 겁니다. 그걸 스피드왜건식으로 말한다면 이렇게 되겠죠.

'이 구도는 모녀덮밥! 몇 번이고 어머니와 딸을 가지고 19금씬을 그려낸 작가의 더러운 마음씨가 훤히 보여! 아직 모녀덮밥 씬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작가의 지저분한 냄새가 풀풀 풍기는구만! 뿡뿡스루제!'

죠죠는 나중에 또 언급하도록 하고, 6일 동안 헤맨 세린의 모험기를 보니 웃기기도 하고 눈물도 납니다. 명색이 주인공인데 이런 취급이라니. 작가인 저조차 쓰면서 '얘는 무슨 방랑벽이라도 가지고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 그렇게 만든 건 작가 아니냐고요? 스피디 레드썬! 훗, 스피디하니까 후기 진행에도 별로 지장이 안 갑니다!

7일이라고 하니 신이 세상을 만드는 데에 7일이 걸렸다고 하는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만, 지금 생각하면 존나 화를 내야 할 부분입니다. 만들 때 한꺼번에 만들고 문제점을 해결했어야지, 하루에 하나씩 만드니 세상이 이 모양 요 꼬라지 난 거 아닙니까?

기독교는 싫어하고 불교는 큰 호감도, 적대심도 없습니다. 천주교에 대해서는 아예 무관심. 그치만 어느 곳의 신이든 간에 마음에 안 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너희 일은 제대로 하냐? 어떻게 된 게 신이란 것들은 다 마음에 안 들까요. 일을 하려면 제대로 하든가…….

어떻게든 루인에 도착한 세린입니다만, 아직 프레그넌트에 도착하기까지는 많은 이야기가 남았습니다. 그때까지는 세린의 대모험(이라 적고 방황이라 읽는다)을 차분하게 감상해주시면 될 거 같습니다.

코멘트에 대한 답변입니다.

sckgjjjDrthcjfjdj님, 아마 세린은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여러 모로 구를 거 같습니다. 아내들을 빼앗기거나 하는 일은 안 겪겠지만 고생문이 닫혔다고는 단 한 마디도 안 했거든요. 이야기가 끝날 때 세린이 과연 작가를 어떻게 깔지를 기대해주세요.

qndyd02님, 안 되는 데슥! 소아온 팬픽은 끝난 데슥! 와타시가 대작가가 되어 돈 많이 벌며 전업작가가 되지 않는 이상 소아온 세린의 미래는 없는 데슥! 그러니 소아온의 세린은 관짝에 넣어두고 명복을 빌어주시는 데승♡ 데? 아스린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데승?

……레드썬!

로리콤MK님, 저를 로리로 만들면 눈이 썩습니다. 남자를 로리로 만들다니. 세린을 TS시키는 것보다 더 엄청난 정신적 고통 + 시각적 고통을 겪고 싶으신 겁니까? 나이 30줄 되어가는 남자놈을 TS+로리화라니! 그런 사악한 생각, 저조차 한 적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현실을 멀리하고 동인지를 가까이 둬야 합니다. 눈동자(힛오미) 킵시다!

이상입니다. 야근 때문에 늦게 돌아와 부랴부랴 씻고 작성하는 후기네요. 독자분들 모두 감기 조심하시고, 이제 곧 찾아올 2017년의 마지막을 잘 마무리 지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