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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어드벤처–당신의 아기를 낳고 싶어-232화 (232/235)

00229 「23-8 : 어둠이 사라진 뒤……. (8)」 =========================

이야기를 너무 오래 해서 그런 걸까? 목이 말랐다. 집무실 안에 있던 아내들은 내 이야기에 완전히 빠진 상태였다. 그렇게 빤히 보면 부끄럽단다. 내 나름대로 간추리고 정리해서 한 이야기였다만……루인부터 시작해 야만족의 숲을 거친 것까지 말하니 이야기가 꽤 길어졌다.

사람들은 돌아오고, 마을은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더 이상 괴물도 없으니 그야말로 내가 바라던 행복과 평화가 이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지만……내가 해야 할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모두 왜 일어나냐는 눈빛으로 날 봤다. 난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사과했다.

“얘들아. 정말 미안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하고 있겠지. 아무 말도 안 하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것이었지만……그래도 나는 말하고 싶었다. 용서를 빌고 싶었다. 내가 여자가 됐을 때도 사과했었던 걸로 기억나지만……그건 그때고 이건 이거다.

“정말 미안했어. 너희한테 여러 가지 사실을 숨겨서. 중요한 사실을 숨기고 있는 주제에 힘들고 괴로울 때는 너희 탓만 하며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서……정말 미안했다.”

숨소리도 잘 안 들린다. 가슴이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필요할 때는 너희를 탐했으면서 내가 힘들 때는 뭐든 간에 전부 다, 모조리 너희 탓으로 돌렸어. 너희 중에 아직도 나를 싫어하거나 증오하는 사람이 있다면……그건 당연한 거야.”

깨닫는다. 그래, 이것을 위해……. 이 한 마디를 위해. 내가 잘못했던 것을 반성하고 사죄하기 위해 난 여기에 온 거다. 아내들을 사랑했고 소생한 사람들과 마을을 확인하고 싶었던 마음도 컸지만……중요한 것은 ‘내가 한 일을 사죄해야만 한다’는 점이었다.

“나는 욕먹어도 싼 놈이야. 너희랑 사랑을 나눌 때는 너희밖에 없다고 지껄였으면서 정작 외롭고 힘들 때는 주변에 있는 여자한테 자지나 박아대는……그런 한심한 병신 머저리 새끼였어. 과거형으로 말하긴 했지만……지금도 그렇다고 생각해. 너희가 있는데도 여자를 보고 욕정했었으니까.”

난 참으로 웃긴 놈이었다. 안즈가 나와 동침(同寢)을 원했지만 나는 프레그넌트에 가서 하고 싶다고 했다. 이게 웃긴 일이지 않으면 무얼 웃기다고 하겠는가? 사죄해서 용서를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고, 아내들이 나한테 몸을 제공해줄지 어떨지도 모르는 주제에 섹스부터 생각하다니? 완전 미친 새끼지 않은가?

“난 더러운 놈이야. 너희가 날 용서해줄지 어떨지도 모르면서 프레그넌트에 도착한 다음 첫 섹스를 하고 싶다고 말한……개노답 머저리 새끼야. 진짜 구원의 여지가 없는 등신이라서 나도 가끔은 나를 죽이고 싶다고 생각해. 너희도 한 번 이상은 생각했을 거야.”

“지금도 그런 생각하고 있어.”

은채의 말이 들려온다. 그래,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다. 차라리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게 낫지. 얼버무리고 아무런 말도 안 하는 것은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건 몰라도 더 이상 아내들한테만큼은 임시방편으로 상황을 얼버무리고 싶지 않았다. 솔직한 마음을 드러내고 싶었다.

“지금까지 정말 미안했다. 너희를 속이면서 즐기고 싶은 건 다 즐기고 얻고 싶은 건 다 얻었었어. 내가 여자가 됐을 때……너희가 말했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후회가 돼. 왜 좀 더 빨리 너희한테 모든 것을 말하지 못했을까. 왜 당시의 나는 얻고 싶은 건 얻으면서 말하고 싶지 않았던 건 모두 숨기려 했을까……하고.”

참으로 머저리 같은 태도였다. 내가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은 교묘히 숨기며 얻고자 하는 것만 취하려 했었다. 불리하다 싶으면 ‘자지의 맹세’로 그녀들을 조종하려 했었고. 그저 유리한 위치, 우위(優位)를 점할 수만 있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다는 자세를 보였던 것이 너무나 후회스러웠다.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못 하는 평범한 사람이야. 무기도 없고 마법도 못 써. 아마 너희한테 저항도 못 하겠지. 솔직히 겁나긴 하지만……날 때리거나 칼로 찌르는 걸로 너희 마음이 풀린다면……그렇게 해.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속죄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게 다였다. 아무리 말로 미안했다, 반성하고 있다고 해도 그걸 증명할 방법은 없다. 사람의 배나 가슴을 쪼갠다고 한들 마음이 보이는 건 아니니까.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사죄의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나 자신을 맡기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유린을 막기 위해 많은 지식과 힘을 가진 상태였다. 독 하나 주입했다고 유린을 떡실신 직전까지 몰고 갔던 걸 생각하면 참으로 우스웠다. 독 외에 다른 방법, 다른 힘도 많았는데 그거 하나 썼다고 죽을상을 짓다니.

유린이 약하다기보다는 그런 독이나 지식을 준비한 영혼들이 너무 강하다고 봐야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5년 이상을 증오로 지새운 사람들일 테니 쌓인 게 장난이 아니었겠지.

아, 유린이 약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기와 비슷한 힘을 지닌 사람과 싸운 적이 없었다는 점. 전투나 적의(敵意)를 가진 적에 대한 대처 방법이 매우 미숙했다는 것도 그를 멸망시킨 이유 중 하나였다.

나를 비롯해 하렘 어드벤처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늘 목숨을 걸고 싸워야만 했다. 괴물이 득시글대는 세상에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마을 밖으로 나가는 것은 목숨을 내다버리는 행위였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괴물과 싸우는 방법,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배워야만 했다.

그러나 유린은 달랐다. 그는 원래부터 이 세상의 신이었고 그한테 대들 존재는 없었다. 영혼들로부터 힘과 지식을 받은 내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항상 자기 뜻대로 모든 것을 진행하고 가지고 놀았기 때문에 적(敵)에 대한 대처에 대해서는 매우 무방비한 상태였다. 그게 놈의 패인(敗因)이었지. 나한테는 절호조의 기회였다만.

유린을 없애고 이 세상을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 나는 모든 힘을 썼다. 내가 가진 모든 힘 안에는 날 도와준 사람들로부터 받은 것부터 시작해 기본적인 것들……. 여기 사는 사람들처럼 아이템 창을 연다거나 하는 능력까지 들어가 있었다.

마법도 못 쓰고 무기도 없다. HP와 MP는 존재하겠지만 그 수치는 알 수가 없게 됐다. 전투능력? 있을 리가. 내가 맨 처음 이 세상에 왔을 때 괴물한테 죽을 뻔했던 거, 기억 안 나냐? 전투는커녕 도망갈 능력이나 있으면 용하겠지.

난 내 자신을 걸었다. 도망? 쳐서는 안 된다. 물론 나도 사람이다 보니 아픈 것도 싫고 죽는 거 더 싫었다. 하지만……이대로 그녀들한테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 그냥 넘기자 ㅋㅋㅋ’라며 없던 일로 만드는 것은 싫었다. 그럴 거 같았으면 뭐 하러 여기 돌아왔겠냐?

가슴이 두근거린다. 당장에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아내들의 입에서 튀어나올 쌍욕이나 비난이 두려워진다. 얼마나 아플까? 여자가 된 후 아내들한테 꽤 많이 맞았었는데 여기 온 후에 또 맞게 될 줄이야. 나는 혹시 전생이 동네북이었던 걸까? 심심하면 패는 그게 내 전생이라면 내 시궁창 같았던 인생도 나름 수긍할 만한 퀄리티였다.

“……세린.”

혜린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미안. 나 허리 굽힌 상태라 얼굴 보고 대답은 못 해.

“고개 들고 우리 봐.”

목소리는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싸늘한 목소리로 날 찌를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다. 응? 혹시 그건가? 고개를 드니 사람 죽일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는 전개냐? 시간차 공격이라니. 내 아내들도 나 못지않게 음흉하구만요!

고개를 든 나는 깜짝 놀랐다. 몇 명은 울고 있었고 몇 명은 화난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어, 왜 이러지? 내가 또 어그로 끌 만한 말했나? 나름 내가 얼마나 개새끼인지 나타내려고 이상한 헛소리까지 했으니 화가 난 건 이해가 간다만……왜 우니, 너희는?

“우리가……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화를 내는 혜린이의 목소리는 살짝 갈라진 상태였다.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기에 유리 세공품을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러다 터지면 나쁜 놈 될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세린. 세린이 한 짓은 확실히 나쁘고 비겁한 짓이었을지 몰라요. 그치만……우리를 구하고 싶다는 마음은 유린한테서 받은 거였나요? 단 한 번도 우리나 프레그넌트를 지키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나요?”

“아니에요! 그건 내 의지였어요! 아, 어……미안해요, 로라. 소리 쳐서…….”

로라의 말에 소리를 올려버린 나는 무안함을 느끼며 사과했다. 젠장, 꼴사납다. 어떻게든 자기한테는 잘못이나 과실이 없다는 걸 증명하려는 사람이 된 느낌이 든다.

“아빠는……엄마랑 나를 용병 생활에서 벗어나게 해줬잖아. 왜 우리를 노예로 안 쓰고 아내로 삼아준 거야? 장난감 삼으려고?”

난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마치 내 마음을 들킨 듯한 느낌이 들었기에 가슴은 더욱 더 두근거렸고 말은 더 빨라진다. 마음을 들킨 사람이 횡설수설하며 변명을 지껄이는 것처럼…….

“아냐, 그런 거 아냐. 난 너희를 장난감이나 노예로 삼을 생각은 없었어. 그 당시에는 납치당해 여러 가지 수모를 겪어 화가 났었지만……너희도 너희 나름대로의 사정과 고충(苦衷)이 있었으니까. 언제까지고 힘든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게 싫었으니까 그랬던 거야. 너희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어.”

솔직히 말해서……잘 모르겠다고 대답하는 게 옳았다. 장난감이나 노예로 다룰 생각이 없었다고? 정말? 단 한 번도?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을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는 놈이 ‘자지의 맹세’로 남을 조종하고 살인(+강도)까지 시켰어? 웃긴 놈. 이 와중에도 나는 자기 방어와 변호를 하고 있었다.

“아이라를 데려와준다고 했던 건……나랑 아이라를 만나게 해주고 싶었던 거야? 아니면 동생과 언니를 동시에 범하고 싶어서 그런 거야?”

촌철살인을 떠올리게 하는 질문이었다. 내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아이나가 말한 것과 동일했기에 가슴이 또 철렁거렸다.

“아, 아냐. 난 그 당시에 아이라를 아내로 맞이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그때 여러 가지로 힘들어하던 너를 도와주고 싶어서 그런 거지, 흑심(黑心)같은 건 전혀 없었어.”

과연 그럴까? 정말로? 아이나한테 잘 보이고 싶다는 마음이 1%도 없었을까? 아이나의 동생인 아이라를 데려와 두 명 모두 다 범하고 싶다는 마음이 0.001%도 없었어? 정말 그렇게 장담할 수 있을까?

내 마음은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다. 입과 행동으로는 아내들의 질문에 부정했지만 속으로는 이해하고 있었다. 무의식중에 그런 마음을 한 번 이상은 가졌을 거라고. 아무런 이득도 없이 좋은 일을 할 정도로 나는 호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른 아내들의 질문도 마찬가지였다. 대답할 때마다 가슴이 녹아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모든 진실을 꿰뚫어보는 사람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그럴 때마다 나는 더욱 초라해진다.

한 바탕 질문이 지나가자 나는 쓰러질 것만 같았다. 겨우 질문 몇 개에 대답하고 내 마음을 밝히는 게 이토록 힘들다니. 대답을 하면서도 나는 바닥만을 보고 있었다. 거짓말을 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아니면 아내들을 볼 용기가 없어서? 뭐가 됐든 찌질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조용했다. 날 바라보는 시선은 마음 깊숙한 곳까지 샅샅이 훑어보는 것 같았고, 거기에 닿을 때마다 내가 얼마나 비겁하고 더러운 인간인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용서를 빈다고? 용서한다고 뭐가 달라지냐? 이미 있었던 일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 이런 짓을 하다니. 그야말로 자기만족(自己滿足)의 극치였다.

“……세린.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볼게.”

혜린이의 눈을 본다. 너무 올곧은 눈이라 내가 정화(淨化)되지 않을까 싶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를 사랑해?”

생각할 가치도 없었다.

“사랑해. 사랑하니까 여기 와서 용서를 비는 거야.”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사랑하지 않았다면 오지도 않았다. 다른 곳에 가거나 야만족의 숲. 혹은 루인에서 살았겠지. 그녀들의 질문은 날카로우면서도 내가 어떤 인간인가를 확실히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나는 내가 저질렀던 일을 인정하면서도 최대한 나 자신을 보호하려 했다. 그건 참으로 꼴불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만……어느 질문이든 간에 내가 그녀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은 드러나 있었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대체 내가 뭐 하러 그녀들을 구하려 했을까?

난 그녀들을 구하고 싶었다. 적이 이 세상의 신이든 유린이든 카인이든 간에 구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가 지금까지 사랑했고 나를 누구보다 사랑해주던 아내들이 어디서 온 줄도 모르는 놈팽이 새끼한테 안겨 사랑을 속삭이는 게 싫었으니까.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내 손으로 구하고 싶다고 간절히 바랐으니까. 그러니까 구하러 간 거였다. 사랑했으니까.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래, 사랑했다. 누구보다 사랑했기에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다. 그녀들을 욕하고 저주하면서도 속으로는 ‘누군가 내 앞에 나타나 나를 말려줬으면 좋겠다, 안심시켜줬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바랐다. 이루어지지는 못했다만……그건 나나 그녀들의 책임이 아니었다. 유린의 책임이었지.

내가 울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원래부터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걸까? 혜린이는 나를 끌어안았다. 내가 사준 옷은 모두 사라진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대부분 은빛 비키니 아머를 입고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혜린이도 비키니 아머를 입고 있었고 그녀가 나를 끌어안자 따스한 온도가 전해져왔다.

“……그럼 됐잖아. 우리는 세린을 사랑하고 세린도 우리를 사랑해. 서로 솔직하지 못했던 것, 이해해주지 못 했던 것,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 모두 다 반성하고 있잖아.”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자식을 달래는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은 어떤 의미로는 맞는 말이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녀들은 모두 내 자식의 어머니였으니까. 내 아기를 가지고 있던 ‘어머니가 되었던 사람’들이었으니까.

“지금도 솔직히 화는 나. 우리한테 솔직하지 못했고, 우리 외에 누구든 간에 여자만 있으면 좋아했었으니까. 그치만……세린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했잖아. 우리를 지키려고 했고 구하려 했잖아. 세린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힘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견딜 수 없었던 것뿐. 나를 사랑해주던 사람들이 하루아침 만에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기꺼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이기심을 채우려 했을 뿐.

“우리도 어떤 의미로는 세린이랑 똑같아.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말을 안 했고,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을 늘 세린의 힘으로 해결하려 했지. 남편이니까, 나를 범했으니까 라는 이유를 들곤 했지만……우리를 도와줄 것인지 어떤지를 정하는 건 결국 세린이었으니까. 속으로는 계산하고 있었던 거야.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위험에 처하게 내버려둘 리가 없다. 우리를 탐한 세린은 틀림없이……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를 구해줄 거라고 말이야.”

그건 당연했다. 내가 그녀들을 탐하고 범했으면서 위험하다 싶으면 그녀들을 포기한다니. 그건 남자로서, 남편으로서,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짓이었다. 그녀들이 그 감정에 대해 죄책감을 느껴야 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세린. 사죄하고 싶다고 말했지? 그럼 말이야……우리 부탁을 들어줄래?”

부탁?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러겠다고 했다. 나한테는 더 이상 선택지가 없었다. 사죄를 받을 수만 있다면 목숨까지 바칠 생각이었는데 부탁을 못 들어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혜린이는 뒤를 돌아 아내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을 흘리던 사람은 눈가를 닦고 있었고 분노를 나타내던 아내들은 웃음을 띤 채 혜린이와 눈을 마주쳤다.

다시 뒤로 돌아 나를 본 혜린이는 조용하게. 하지만 감정을 담아 말했다.

“우리를 평생 사랑하고 지켜줘.”

심장이 잠시 멈춘 느낌이 들었다. 내가 들은 것은 그녀들의 부탁이었지만……내가 바라던 것, 하고 싶었던 일이었으니까.

“우린 사람이야. 완벽하지도 않고 완전하지도 않아. 숨기거나 거짓말하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야. 부부라고 해서 모든 걸 다 드러낼 수는 없는 법이지. 세린은 앞으로 뭔가를 숨기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을 거라 하지만……우리는 그런 말을 듣고 싶지도 않고 믿을 생각도 없어. 사람이 순수하게 진실만을 말하며 살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난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마음속으로 느끼고 있던 죄책감과 안타까움을 지적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던 건가. 지극히 일반론적이면서도 타당한 말이었기에 웃음이 나왔다. 마치 내가 변명할 것이라는 걸 알고 사전에 짜놓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숨겨도 돼. 거짓말도 하겠지. 사람이니까. 아주 심한 게 아니라면 우린 그걸 이해할 거야. 우리도 마찬가지니까. 하지만……사랑만큼은. 우리를 사랑한다는 마음만큼은 끝까지 지켜줘. 우리를 사랑하며 지켜줘. 괴물이 없어졌다고 해서 우리가 마냥 행복한 건 아냐. 왜라고 생각해?”

고개를 저었다. 괴물이 없어졌으니 행복하다고 느끼는 게 보통 아닌가? 난 행복하고 즐거웠는데. 괴물 걱정 없이 걸어가기만 하면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었으니까.

“세린이 없었으니까. 괴물이 있는 걸 바라는 건 아니지만……괴물이 존재한다 해도 세린만 있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했을 거야. 날 사랑해주고 지켜주려는 사람이 곁에 있는데 무서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어? 불안해할 요소를 가질 일도 없잖아.”

내 생각과는 너무나 다른 생각. 내가 생각했던 것과 유사했지만 그녀들의 생각은 질적으로 달랐다. 나는 가족의 행복과 평화만을 생각했다. 어떻게든 괴물을 없애고 평화와 행복만을 추구하려 했지만, 그녀들은 나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괴물이나 힘든 상황마저도 달갑게 받아들이려 했다.

“사실……지금 세린 배때지에 칼이라도 한 방 꽂아주고 싶은 심정이야. 생각해봐. 곁에서 나를 사랑해주고 지켜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절대 이길 수 없는 적한테 목숨과 존재까지 걸어가며 우리를 구하려 했던 남편이 돌아왔는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우리한테 용서해달라고 하다니. 그럼 우리는? 지배받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널 죽였던 우리는 단체로 자살이라도 하란 말이야?”

난 황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어떻게 하면 저런 끔찍한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난 그녀들한테 책임을 물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럴 것 같았으면 처음부터 살려내지도 않았겠지. 사랑하지도 않고 다시 만나고 싶지도 않은데 미쳤다고 힘까지 써가며 얘들을 살려냈을까?

“세린은 자기가 한 일을 너무 무겁게 보고 있어. 그렇게 따지자면 우리도 사과를 해야 해. 무슨 상황이든 간에 세린이 우리를 구하러 올 거라고 생각했었으니까. 남편이라는 이유 아래 세린이 도와주기만을 바랐었으니까. 아내니까 당연하다고?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잖아. 이유나 명분은 존재하지만 그걸 꼭 따를 의무는 없어. 카인이란 새끼를 봐. 신이라는 위치에 있었지만 이 세상을 사랑하지는 않았잖아.”

이상한 의미로 묘하게 들어맞았다. 유린은 이 세상의 신이었지만 이 세상을 발전시키려고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여기를 증오하며 이곳에서 빠져나가고자 했지. 아무리 육체가 없다지만 자기가 만든 곳을 그토록 싫어하다니…….

“그거랑 똑같아. 중요한 건 명분이나 이유가 아냐. 마음이지. 세린이 잘못했다고 생각하듯이 우리도 세린한테 잘못한 게 많아. 숨기고 싶은 사실이나 거짓말? 아, 얼마든지 가져. 거짓말을 해도 돼. 하지만……사랑만큼은. 우리를 사랑하고 지키고 싶다는 마음만큼은 잊지 말아줘. 우리 곁에서 떠나지 말아줘. 세린의 인생을……우리한테 줘. 이게 우리의 부탁이야.”

난 대답 대신 혜린이를 힘껏 끌어안았다. 부탁에 대한 대답? 왜 내가 그 부탁에 대답을 해야 할까? 그건 내가 그녀들을 안을 때부터, 내가 이 세상을 제2의 고향으로 결정했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마음인데.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던 것인데.

이제 와서 다시금 고민하거나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고 대답은 아내를 끌어안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혜린이의 팔이 나를 끌어안았고 앉아있던 다른 아내들도 내 곁으로 와 나를 끌어안았다.

곁에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기뻤다. 나를 이해해주고 아끼는 사람이 나를 받아들여주는 것만큼 기쁜 일이 있을까? 가슴이 벅찰 정도로 기뻤기에 다시금 혜린이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녀들은 나를 용서했다. 나한테는 그녀들을 용서할 권리나 자격 따윈 처음부터 없었다만……그녀들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용서해줄 생각이었다. 내가 있을 곳에서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한데, 그 외에 뭐가 또 필요하단 말인가?

없어진다. 그녀들을 향한 원망과 증오, 저주. 미안한 마음은 바람에 흩날리는 모래처럼 저 멀리로 사라져갔다. 남은 것은 그녀들을 향한 사랑과 진실된 마음. 앞으로 영원히 함께 살아가고 싶다는 희망과 소망뿐이었다. 더 이상 고민할 것도, 슬퍼할 것도 없었다.

“얘들아……사랑해. 정말 사랑해. 내 목숨 이상으로 너희를 사랑해…….”

입에서 나오는 그 말에 거짓은 없었다. 그녀들은 내 목숨 이상으로 소중한 이들이었다. 그녀들한테 죽었지만 다시 살아난 후에도 그녀들을 생각했다. 그녀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그녀들을 되찾고 싶다는 집착이 없었다면……나는 절대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안즈한테 납치됐을 때부터……. 정확히는 이 세상에 소환됐을 때부터 시작된 여행은 마침내 막을 내렸다. 길고 긴 여행은 유린이라는 신에 의해 정해진 것이었지만, 그 여정에서 피어난 마음과 사랑은 지금까지도 계속 되고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우리를 방해할 사람은 없었다. 누군가에 의해 다시 떨어질 필요도 없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매우 간단한 것이었다. 서로를 사랑하며 지켜주는 것. 그녀들이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나도 그녀들을 사랑하는 것.

지금까지 그녀들을 사랑했던 것처럼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녀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기뻤다. 초심으로 돌아간 거 같다는 생각을 하며 혜린이를 끌어안았던 손을 풀었다. 엉망진창이 된 얼굴을 닦으며 창문을 보았다. 창문을 통해 따사로운 햇살이 집무실을 비추고 있었고, 아내들은 내 주변에서 행복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날 향한 아내들의 사랑과 마음, 마침내 찾아온 행복과 평화를 마음속으로 받아들이며 웃었다. 어떤 사실을 감추기도 하고 숨기기도 하겠지. 거짓말을 영원히 안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그녀들을 사랑하며 옆에서 평생 지켜줄 거라는 것.

그 사실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고……그거면 충분했다.

유린이라는 신으로부터 벗어난 현재.

지금이야말로 진정한 「하렘 어드벤처」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누구나 하나둘 정도 숨기는 건 있습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죠. 바보 머저리가 아닌 이상 '얘들아~있잖아, 나 이런이런 일 겪었다! 존나 병신 같지? 등신 같지? ㅎㅎㅎ'라며 광고하거나 자랑하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는 사람도 세상엔 많지만 그런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한테는 숨기고 싶은 비밀이 한두 개 정도는 있기 마련입니다. 물론 범죄나 그에 준하는 일은 숨겨서는 안 됩니다만, 어찌 됐든 사람마다 숨기고 싶어 하는 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에 상극인 게 'ㅎㅎㅎ 쟤 사실 OO한 놈(년)이야!'라며 비밀이나 숨기고 싶은 일을 막 퍼트리는 사람입니다. 그야 뭐, 나쁜 사람이라면 지금까지 저질렀던 죄나 악행에 대해 벌을 받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범죄는 숨기면 안 되는 거니까요.

그치만 제가 말하는 건 아무런 죄도 아니고 딱히 지탄 받을 만한 것도 아닌데 여기저기 마구 퍼트리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의 비밀이나 프라이버시에 대해 아예 존중을 안 하는 거죠. 사실 존중을 했다면 아예 퍼트리지도 않았을 테니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한테 특히 국한되는 게 '다른 사람의 비밀이나 프라이버시는 까발려도 되지만 내 건 안 돼! 난 소중하니까♡'라는 병신 머저리 헛소리를 지껄입니다. 전형적인 내로남불 & 이중잣대. 인간이 왜 그렇게 생겨 먹은 거냐고 묻고 싶네요.

누구나 숨기고 싶은 게 있고 그걸 서로 존중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게 이 세상의 많은 법칙 중 하나입니다. 세린과 아내들도 여기에 포함됐습니다만, 이 상황이 되어서야 모든 것을 털어놓고 서로를 이해하게 됐네요.

건담에서 '상호이해'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만 실제로 상호이해는 매우 어려운 행위입니다. 내가 남을 이해하려고 해도 상대방이 나를 이해할 마음이 없으면 성립이 안 되거든요. 아무리 좋은 뜻을 지니고 다가가도 거부해서는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23-8. 거의 막바지에 와서 진정한 의미의 상호이해를 이루게 됐습니다만, 적어도 이루지 않은 것보다야 훨씬 더 나은 거라고 말하고 싶네요. 그러한 상호이해를 과연 현실에서도 이룰 수 있을지는 회의적인 시선으로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코멘트에 대한 답변입니다.

sckgjjjDrthcjfjdj님, 어설프나마 19금씬을 적기 시작했는데 끝을 19금으로 장식하게 되니 감개무량하네요. 물론 제가 동정이라는 것 따위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닙니다. 예? 동정이 허락되는 건 초등학생까지라고요? 정의의 레드썬! 독자님은 지금부터 안드로메다로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고양이새벽님, 세린이 유린한테 고통받는 걸 좋아하셨기에 사실상 썩 마음에 안 드는 전개일 겁니다.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만 '사실은 유린에 의해 모두 다 흡수됐고 세린은 유린을 물리친 환상을 보며 아헤가오 더블피스 아기출산을 하고 있습니다♡'라는 엔딩을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_=;

여러 모로 다양한 걸 시험한 첫 장편 연재라 주인공이 당하는(여러 가지 의미로) 씬을 적게 됐습니다만, 설마 그런 부분에서 호평을 받을 줄은 몰라 지금도 좀 어리둥절한 상황입니다. 마지막까지 즐겁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로리콤MK님, 주변에 감기 걸린 사람들이 보입니다. 훌쩍대며 콧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저 사람들도 고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회사는 그나마 난방이 괜찮지만 약간 추워도 좋으니 집에서 뒹굴거리고 싶습니다.

qndyd02님, 외전도 생각은 하고 있는데 조회수가 워낙 안 나와 사실상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주 인기 있는 글은 아니었지만 최근에는 조회수가 많이 떨어져 버렸습니다. 막말로 '하렘 어드벤처를 끝까지 읽는 사람들이 적으니 새로운 글로 새로운 독자들을 노리는 게 낫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입니다.

물론 이 소설로 떼돈 벌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습니다만, 줄어드는 조회수와 반응을 보니 슬슬 끝낼 때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더군요. 모든 걸 다 때려박은 후기를 마지막으로 하렘 어드벤처를 마무리할까 싶습니다.

이상입니다. 아침에 출근할 때마다 '아, 시발! 오늘도 존나 출근 시간 아슬아슬하게 올리네 썅!'하며 욕하고 있습니다만, 막상 그만두게 된다면 너무 아쉬울 거 같네요. 이번 주로 사실상 마지막까지 올라오는 하렘 어드벤처입니다만, 이렇게까지 즐겁고 아쉬울 줄은 진짜 생각도 못 했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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