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날.
한숨을 흘려낸 최재우는 슬슬 한계치에 다다르는 짜증을 억눌렀다. 아내가 알아채지 못하게 소리 없이 내쉬던 한숨이 이젠 귀에 들리는 터다.
그걸 분명히 알 텐데도 아내 유인주는 모르는 척 생선코너로 간다.
‘모처럼 쉬는 날……!’
새삼스럽게 짜증에 솟구친다. 경찰이란 직업이 늘 그렇지만 비번이라고 해도 제대로 쉬기기 힘들다. 그런데 오늘은 정말로 제대로 쉬어볼 참이었다. 하지만 이러고 있다. 아내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하고 마트에 왔다.
‘저 여우에게 홀린 내가 미친놈이지.’
아내 유인주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최재우는 거듭 한숨을 내쉬었다.
남들은 예쁘고 어린 색시를 맞았다고 칭찬도 하고 욕도 하지만 실상을 모른다.
마흔 둘의 최재우 자신보다 열 살이나 어린 아내, 조것은 불여우다.
‘서에 복귀하면 늘 나한테만 커피를 타주던……’
그게 다 수작이었고 계획이었다. 다른 동료가 커피한잔 타달라고 하면 성희롱에 남녀차별에 온갖 소리를 뱉어내며 열을 올리던 아내는 호랑이보다 무서운 존재였다. 그런데 유독 최재우 자신에게만 교태를 부렸다.
‘거기 홀린 내가 빙다리지. 하아.’
최재우를 부추긴 동료들도 마찬가지다. 하나같이 부러워 죽겠다고, 저렇게 노골적으로 신호를 보내는 데 모르는 척 하는 건 죄악이라고, 굴러들어온 행운을 거머쥐라고 부추겼다. 그런 속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왜 자꾸 한숨 쉬는데?”
홱 돌아보는 아내 유인주의 날선 눈초리, 최재우는 바로 표정을 바꿨다.
“아, 아냐, 어깨에 담이 좀 오는 것 같아서, 헤헤.”
바보 같은 웃음을 흘려야 아내는 기세를 바꾼다. 아니면 하루 종일 시달린다. 누구 때문에 경찰로서의 미래와 경력을 포기하고 전업주부가 됐는데 이럴 수가 있냐는 둥, 더 이상 사랑하지 않냐는 둥, 아아 지겹다.
“아귀 사, 아귀. 물 좋아 보이네.”
얼른 분위기를 전환하려 최재우는 생선코너를 가리켰다.
“아귀찜하라고? 내가 그게 별로라는 거 몰라서 그런 소리해? 일부러 그러는 거지?”
“아, 아냐, 그럼 고등어 사서 묵은지찜 해먹자.”
“고등어?”
“그래, 자기 좋아하잖아. 헤헤.”
바보 같은 웃음을 최재우는 다시 지었다. 아내 유인주의 얼굴이 스르르 풀리는 걸 확인하는데 옆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젊은 할머니가 웃는다.
“아유 보기 좋네, 부부가 장보러 오셨구랴? 어쩜, 남편이 훤칠하니 인물 좋네. 젊은 색시도 무지 이쁘네. 마트 안이 훤해지내 훤해져, 호호호.”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최재우는 아내 유인주의 반응을 바라봤다. 젊은 할머니와 같이 웃으며 수다를 떠는 단계로 들어간다. 정말 친화력 갑이다.
‘이쁘다고 해주니까 더 저러지.’
찡그린 미간을 아내가 볼세라 얼른 고개를 돌린 최재우는 아이를 봤다.
‘귀여운 아이네.’
너댓살 됐을까,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깜찍한 여자아이다. 낭랑한 웃음소리를 퍼트리며 뛰어다닌다. 그 뒤로 중년 남자가 따라가며 웃는다.
‘아버지?’
그렇게 보기엔 나이가 제법 든 것 같다. 오십은 돼 보인다. 야구모자를 썼는데 희끗해져가는 귀밑머리가 보인다. 저 정도면 아버진 무리 같다.
‘아니지, 요즘은 나이 많은 아버지도 많으니까.’
그래서 관계가 뭘까 궁금한데 여자아이가 돌아보며 남자를 부른다.
“할아버지! 얼렁 와!”
그렇군, 할아버지다. 그렇게 판단하기엔 반대로 젊은 모습인 남자, 아이를 따라가며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다. 눈에 넣어도 예쁜 손녀인 거다.
“뭐해?”
아내 유인주의 목소리에 최재우는 현실로 돌아왔다.
“어어, 암것도 아니야.”
미소 짓는 최재우, 그 얼굴을 보던 유인주의 시선이 돌아갔다.
방금 전까지 남편이 보던 아이를 본다.
할아버지라고 불린 중년남자가 안아들자 아이는 꺄르르 웃는다.
옥수슬 굴러가는 것 같은 소리, 유인주는 시무룩해진다.
“인주야, 우리 와인 사다 먹자. 스테이크 맛있게 구워서 근사하게, 응?”
최재우는 얼른 아내의 감정을 치고 들어갔다. 동시에 자신을 탓했다.
‘이그 모자란 놈아.’
결혼한 지 이년, 아직은 아이 걱정을 안 해도 되는 시기지만 아내는 걱정하고 있다. 서른둘의 젊은 여자가 임신을 못하는 이유가 뭘까 하고.
“자자, 고기 사러 가자.”
풀 죽은 아내 유인주를 밀며 최재우는 정육 코너로 이동했다. 그러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아이를 돌아봤다. 젊은 할아버지가 무동을 태웠다.
‘깨물어주고 싶게 예쁜 아이네.’
저런 아이가 있었으면, 최재우는 즉각 생각을 밀어내고 아내에게 집중했다. 이대로면 집에 가서 울 수도 있다. 그런 상황은 절대 막아야 한다.
“마님 쉰네가 오늘 기력이 넘칩니다요.”
“뭐래? 갑자기 개그 해?”
반응이 왔다.
최재우는 더 진지하게, 아니 음탕한 눈빛을 흘려냈다.
“오늘밤 마님을 행복하게 해드리겠습니다요.”
“어머, 이 짭새님이 왜 이러셔? 풋, 오빠 얼굴 지금 어떤지 알아?”
웃었다. 결과가 보인다.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
“쇤네에게 고기와 술을 내려주시면 기필코 보답하겠습니다요. 밤새도록요. 흐흐흐흐.”
유인주가 환한 웃음이 든 얼굴로 대꾸하려는 그 순간이었다.
“뭐야 씨발아!”
거친 욕설, 험악한 기세를 인지한 최재우는 고개를 바로 돌렸다.
유제품 코너다.
야구모자 쓴 중년남자, 깜찍한 여자아이의 할아버지가 멱살을 잡혔다. 민머리에 문신을 한 남자에게다. 한눈에 봐도 깍두기로 보인다.
“야이 씨벌놈아.”
진득한 침을 뱉듯이 욕을 뱉은 거구의 깍두기는 젊은 할아버지를 끌어당겨 으르렁거린다.
“사과를 하려면 확실하게 해야지? 아가리로 미안하다고만 하면 다냐?”
최재우는 자신보다 먼저 움직이는 유인주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무슨 상황인지 곁에서 수군거리는 아줌마들의 이야기로 알겠다.
“조폭 같지?”
“맞아, 아유 애가 카트 밀다 조금 부딪친 거 가지고 왜 저래?”
그런 상황인 거다. 귀여운 여자아이는 카트 옆에서 울고 있다.
“아니 뭐 저런 새끼가 있어?”
아내 유인주가 폭발하려는 걸 본 최재우는 먼저 나섰다. 그대로 두면 골치 아픈 결과가 될게 뻔해서다. 그런데 그 순간 깍두기놈이 손을 썼다.
“씨발새끼야!”
주먹을 날리는 깍두기놈, 그런데 켁 하고 주저앉는다.
‘어?’
최재우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주먹이 날아오는 순간 젊은 할아버지의 손이 움직였다. 그게 깍두기의 인후를 쑤셨다.
“뭐야! 씨발!”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놈, 역시 깍두기인 놈이 당황하다가 움직인다. 카트 옆에서 울고 있는 여자 아이 팔을 잡았다. 그 순간 할아버지 눈이 변했다.
‘위험해!’
강력계형사로서의 본능이 발동한 최재우는 튀어나가며 소리쳤다.
“경찰이다!”
최재우의 고함에 아이를 잡은 깍두기놈이 경직했고 젊은 할아버지도 움직이다 멈췄다.
그 순간 마트의 경비원들이 달려왔다.
아이 팔을 놓은 깍두기는 주저앉은 놈을 일으켜 세우더니 젊은 할아버지를 향해 말한다.
“없었던 일로 합시다.”
이쯤에서 그만하자는 소리, 깍두기놈은 최재우를 돌아본다. 정말로 경찰인지를 가늠하는 눈, 이내 확신을 품는다. 그래서 공손한 얼굴로 말한다.
“그냥 가도 될 것 같은데요. 가게 해 주시죠.”
최재우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젊은 할아버지가 돌아섰다. 아이를 데리고 가버린다. 문제 삼지 않겠단 거다. 아이만 무사하면 된다는 것 같다.
“가겠습니다.”
돌아서는 깍두기들을 최재우는 제지하지 않았다. 두 놈이 마트 경비원들을 험악하게 밀치고 가는 걸 바라만 봤다. 굳이 잡자면 못할 건 아니지만 이렇게 끝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쨌든 오늘은 쉬는 날인 거다.
‘폭력이라고 할 것도 없었으니까.’
아니 있었다.
젊은 할아버지가 깍두기놈을 주저앉힌 일격이다.
그걸 정확히 보지 못했다.
공격받던 순간에 그렇게 했다.
보통사람이 아니다.
“저 덩어리새끼들……”
두 놈을 보며 분노의 숨을 내쉬는 아내 유인주, 감정을 다스리고 현실을 본다.
“아니야, 이정도면 됐어. 자기야, 우리도 가자.”
아내 유인주가 팔짱을 끼자 최재우도 현실로 돌아왔다. 말한 대로 스테이크용 고기를 사고 와인도 샀다. 아내 유인주는 어느새 헤실헤실 웃는다.
“자기야, 밤에 말이야.”
“밤에?”
“아이, 와인 먹고 말이야.”
“어? 어어.”
“정말 밤새 할 수 있어?”
“뭐?”
“그런다며?”
배시시 웃는 아내를 보며 최재우는 본능적인 소름을 느꼈다.
“그, 그럼 당근이지.”
“우헤헤헤.”
웃는 아내의 근접거리 접촉에 떠오르는 두려움, 웃음으로 숨긴 최재우는 쇼핑을 이어갔다. 한숨만 나오는 장보기, 만족한 미소를 짓는 아내 유인주의 끝이란 말로서 마트를 나갔다. 주차장으로 카트를 밀고 갔다.
“이 주변엔 개발이 더 이뤄질 것 같지?”
아내의 말에 최재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명시의 신도시 개발은 이제 절반이 넘게 이뤄지고 있다. 기왕의 택지지구인 신읍지구과 신용지구의 중간이 이곳이다. 이 농협마트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대개 신읍지구다.
“주차장이 다른 대형마트처럼 돼 있으면 좋을 텐데.”
아쉬워하는 아내의 말대로다. 이곳 농협마트는 매장 앞에 개방된 주차장 형태다. 주차장은 넓지만 장본 걸 가지고 이렇게 야외로 나오는 거다.
“비가 오거나 할 때는 불편한데, 그걸 모를까?”
“사람들이 불편해 하면 지붕공사 같은 걸 하겠지. 그거 뭐라고 하더라. 파고라라고 하던가?”
“그러게, 그런 게 있으면 딱 좋겠네.”
둘은 이야기 하며 차로 향했다. 유인주가 리모컨을 작동해 차문을 열자 최재우는 장 본걸 카트에서 꺼내 트렁크에 실었다. 유인주는 운전석에 올랐다. 힐긋 본 최재우는 뭐라고 하려다가 말았다. 어쩔 수 없어서다.
‘초보가 저런 근자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야?’
아내 유인주는 정확히 장롱면허다. 서에 근무할 당시에도 운전대를 잡을 일이 거의 없었다. 그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것처럼 늘 저런 식이다. 처갓집에 가는 장거리를 제외하면 운전대 차지는 자기라고 주장한다.
‘아, 돌아가는 길도 무사히.’
한숨 쉬며 트렁크를 닫은 최재우는 조수석에 올랐다. 힘차게 시동을 건 유인주는 득의한 미소를 흘려내며 차를 출발했다. 좌로 우회하고 다시 우로 돌아나가는 마트 주차장 길을 능숙하게 나간다. 도로 앞에서 멈췄다.
“차 오는 거 잘보고 일차선으로 천천히 붙여.”
“또 잔소리.”
바로 반응하는 아내의 시선을 무시하고 최재우는 도로를 살폈다. 지금이 제일 중요해서다. 일차선으로 붙어서 좌회전 신호를 받아야 한다. 자동차전용도로로 올라가는 거다. 그걸 타면 집까지 3분밖에 안 걸린다.
“차 끊어졌네, 간다.”
흥겨운 목소리로 말하며 유인주는 도로로 차를 내밀었다.
그런데 그 순간 도로 왼편 저쪽에서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는 차가 있었다.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보자마자 지척으로 다가왔다.
최재우는 본능적으로 외쳤다.
“서!”
유인주는 경직하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바로 앞으로 차가 지나갔다. 황색신호가 막 들어온 교차로로 번개처럼 달려간다. 유인주는 버럭 욕했다.
“저 미친 새끼가!”
아내 유인주의 욕이 귀를 파고드는 순간 최재우는 다른 걸 봤다.
엄청난 속도로 지나간 차가 달려가는 곳, 아내와 자신이 좌회전 신호를 받으려던 교차로, 파란 불로 바뀌었다.
그 순간 횡단보도에서 누군가 나왔다.
최재우는 경직했다.
아니 얼어붙었다. 하늘로 떠오른 그림자가 도로에 뒹구는 걸 보고서다.
그게 누군지 알았다.
마트에서 본 깜찍한 여자아이다.
아이를 받아버린 차는 비명 같은 소릴 내며 멈췄다. 그런데 다시 간다.
‘저!’
뒤늦게 경직에서 깨어난 최재우는 차문을 박차고 나갔다.
사고지점을 향해 달려가는 데 그가 보인다.
아이의 할아버지, 중년남자가 아이를 향해 달려간다. 양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집어던지고서다. 아이를 안는다.
“자기야!”
곁으로 달려온 아내 유인주가 119에 신고하는 소릴 들으며 최재우는 그를 봤다. 이리저리 뒤틀린 인형처럼 늘어진 아이를 안고 부들거리는 남자를.
“영아……”
신음 같은 목소리로 아이 이름을 부른 중년 남자는 피를 토한다. 이미 숨이 끊어진 게 분명한 아이의 곁에 엎드려 도로를 움켜쥔다. 손톱이 부서지고 들리며 도로에 혈선을 그린다. 그 위로 남자는 머릴 박는다.
“으와아아!”
남자의 괴성을 들으며 최재우는 소름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