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혼의 살인자-13화 (13/200)

황혼의 살인자. 13. 시작은 호흡을 가다듬고.

13. 시작은 호흡을 가다듬고.

온나라그룹은 한마디로 거대괴물이다. 전자와 자동차를 주력사업으로 해서 계열사의 수를 다 세기 어려울 정도다. 직간접으로 온나라 그룹의 영향 하에 있는 기업들까지 친다면 대한민국 대장기업이라고 할 터다.

‘전자는 큰아들, 자동차는 둘째아들……’

노트북 화면에 뜬 인물의 사진을 장철은 뚫어지게 응시했다.

지난 동계올림픽 때의 사진이다.

IOC위원장과 서서 웃는 노인, 그룹총회장이다.

‘한대건.’

한진수를 셋째아들로 두고 있는 인물, 온나라그룹 총회장이다.

경영일선에서 이젠 물러났다고 하지만 여전히 그룹전체를 호령하는 인물이다.

그가 아들들에게 주력기업을 물려주고 들어앉은 곳은 정신병원이다.

‘인간의 정신세계 탐구를 생의 마지막 공부로 삼았다……’

기사 내용이 그렇다. 한대건 총회장이 칠순의 나이로 은퇴한 그림이 그런 거다. 아직 한참 더 일할 나이인데 안타깝다는 반응들이었다. 반면에 온나라그룹의 투자로 정신의학분야의 발전을 기대한다는 소리도 있다.

‘삼년 전.’

한대건 총회장이 용인에 들어앉은 때다. 온나라정신연구소라는 이름으로 정신병원은 바뀌었다. 거기서 뭘 하는지 모르겠지만 막내아들 일을 알고 있을 것이다. 첫째 둘째와는 배가 다른 셋째아들, 놈이 골칫덩이다.

‘사건사고를 달고 살았어.’

하지만 늘 소리 없이 처리됐다. 한진수가 일으킨 사건들은 보도가 됐다가도 이내 사라졌다. 온나라그룹의 힘이다. 그래서 놈은 뵈는 게 없다.

윤완규가 무서워 할 만 하다. 그 놈에겐 온나라그룹이란 보모가 있다.

‘널 찾으려면……’

한진수의 사진을 보며 장철은 뜨거운 숨을 삼켰다.

온나라그룹 창업기념식 때 촬영한 사진이다.

기사제목은 ‘온나라그룹의 용들’ 이라고 되어 있다.

한대건회장이 은퇴하던 삼년 전 사진이다. 그가 은퇴선언을 한 날이다.

‘한진수, 우리 나이로 27세, 미국국적자라 군면제자.’

그 부분에 대한 여론의 공방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여론은 잦아들고 꺼져 버렸다. 온나라그룹의 힘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윤완규와 어울린 놈, 아닌 윤완규를 꼬붕으로 데리고 논 놈.’

어금니를 악문 장철은 사건내용을 더듬었다.

3월 24일 람보르기니 우르스가 영이를 치어버린 날, 윤완규는 마약에 취해있었다.

당연히 함께 있던 놈인 한진수도 그런 거다.

이놈들이 원래부터 노는 장소가 있다.

‘마음 편하게 마약에 취하고 마약을 구하는.’

마우스를 놀린 장철은 사건 기사들을 다시 훑었다.

3월 24일 당시 윤완규의 행적에 대해 언급한 기사들이 있다.

차가 출발한 곳이 강남의 R호텔이라고 돼 있다.

윤완규가 R호텔에서 커피만 마셨을 거 같지 않다.

‘숙박기록도 없고.’

기사 내용은 그런 것까지 있다.

윤완규는 R호텔에서 숙박하거나 룸살롱 등에서 술을 마신 것이 아니다.

아침에 호텔에 들어와서 한 시간 후에 나갔다.

호텔에 머문 시간이 그 정도다. 그동안 어디서 뭘 했던 걸까.

사건 기사 내용에 유추할 만한 것들이 있다.

[R호텔 측은 더 이상의 자세한 내용은 공개할 수 없다며 취재를 거부했다. 윤완규가 호텔에 숙박하지 않았고, 사고차량 출입영상을 토대로 체류시간을 공개한 것으로 협력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윤완규가 한 시간 동안 호텔 내 어디서 무얼 했는지가 핵심이다.]

강건한 문체의 기사는 결론을 이렇게 냈다.

[윤완규는 R호텔에서 마약을 복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노트북에 지도를 띄운 장철은 R호텔의 위치를 확인하며 감정을 다스렸다.

윤완규가 자백한 진범, 한진수도 이곳에 있었던 거다.

정황상 한진수가 불렀고 윤완규는 냉큼 달려갔다. 두 놈은 같이 마약을 처먹었다.

‘그런 상태에서 차를 몰고……!’

부드득 소리가 입에서 나오는 걸 장철은 뒤늦게 인지했다.

큰 숨을 들이마셔 가슴을 제어하고 다시 생각을 이었다.

그날 두 놈은 신명시의 별장으로 가는 중이었다. 사고를 내고 도주한 곳이 거기, 한진수는 사라졌다.

‘별장에서 체포된 건 윤완규 혼자.’

한진수는 윤완규에게 이후에 할 일을 지시하고, 죄를 뒤집어쓰도록 하고 도망갔다.

그곳으로 한진수를 데리러 온 차가 있는 거다.

그 부분을 파는 건 영양가가 없는 걸로 판단된다. 그보다는 R호텔이 유력하다.

‘하던 짓을 끊어내는 건 어렵지.’

R호텔이 한진수가 마약을 복용하는 장소 중 하나라면, 희박한 가능성일지라도 걸어 볼만 하다. 그게 안 되면 놈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가서 잡는 거다. 그게 온나라그룹 사옥 안이든 그놈가족의 집이든 상관없다.

“바쁘냐?”

툭 들어온 목소리, 조웅이다. 열어놓은 옥탑방 문 안에 들어선다. 방안을 응시하곤 시선을 돌려 바닥을 본다. 아침에 갖다 준 도시락이 비었다.

“바로 시작할 모양이구나.”

조웅은 무감정한 음성으로 그 말을 했다.

시작, 무얼 하는 지 잘 안다.

복수다.

바로 시작할 거란 건 장철의 눈빛으로도 알지만 도시락을 비워서다.

‘네 버릇이지, 속이 비면 제대로 일할 수 없으니까.’

장철이 노트북을 덮는 걸 보고 조웅은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버리고 간 물건 내가 가지고 있다.”

장철은 어깨를 움찔했다. 느릿하게 눈길을 돌려 조웅을 바라본다.

“거기 옷장 안 바닥에 미군박스, 그 안에 들어 있다.”

조웅을 볼 때처럼 느릿하게 몸을 돌린 장철은 옷장을 열었다.

조웅의 말처럼 국방색의 미군박스가 있다.

잠금장치를 열고 뚜껑을 들어올렸다.

익숙한 냄새와 형상이 인지된다. 장철 자신이 사용하던 물건들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 건물 반은 네 거다.”

뒤에서 들려오는 조웅의 말에 장철은 반응하지 않았다.

“네가 번 돈으로 이룬 거다. 그래서 솔직히 이해가 안 된다. 아니 화가 난다.”

조웅이 무슨 소릴 하는지 장철은 알았다.

97년에 한국을 도망치듯 떠났다가 15년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혹시나 하고 걸어본 조웅의 업장번호는 그대로였다.

월곡동에서 하던 직업소개소 사무실을 옮기기만 했다.

나중에 조웅이 지나가는 말로 했다, 언젠가 장철 자신이 연락해올 것을 예상했다는 거다. 꼭 그래서 전화번호를 유지한건 아니라지만 그거다.

그러며 덧붙여 물은 건 어디서 뭐했냐? 왜 돈이 없냐는 소리였다.

경기북부의 신명시에 빌라 한 채 겨우 마련해 산다는 걸 알고 나서였다.

해외도피생활 십오 년이란 걸 생각하면서 이해하고 받아들인 부분이지만, 지금 조웅이 화가 난다고 하는 건 그게 아니다. 딸의 이야기다.

“네가 날 아무리 뭣 같은 놈이라고 생각해도 말은 할 수 있었지 않냐?”

다시 입을 연 조웅은 이왕 내친 김에란 얼굴로 소릴 질렀다.

“나 돈 있다고 새끼야!”

장철은 미국박스를 닫고 처음처럼 느릿하게 돌아섰다. 뜨겁게 꿈틀거리는 조웅의 눈을 말없이 바라본다.

“나 호텔에 갈 건데, 입을 만한 옷 좀 다오.”

무덤덤하게 나온 장철의 반응, 화낸 걸 머쓱하게 만드는 말에 조웅은 인상을 구겼다. 하지만 한숨을 쉬는 것으로 수습했다. 장철이 늘 저런 식이란 걸 새삼 깨닫는다. 조웅 자신에게 연락을 취한 걸로 답은 했다.

‘그때, 내가 널 팔아먹었을 때도 넌 그 얼굴이었지.’

장철을 바라보던 조웅은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조금만 기다려.”

장철은 조웅을 향해 재촉의 말을 던졌다.

“서둘러라. 예감이 그래야 할 것 같다.”

예감 같은 소리하고 있네, 하고 투덜거리며 조웅은 옥상 계단을 내려갔다.

* * *

1시, 처남이 알려준 대로 호텔중식당으로 올라갔다.

황태자클럽의 모임은 이미 시작됐다고 한다.

정해진 인원이 있는 건 아니지만 현재 다섯 명이 모였다.

그 중에 어느 놈이 윤완규과 엮인 놈인지는 아직 모른다.

‘오늘 모임엔 없을 수도 있고.’

이제 부딪칠 상황을 예상하며 최재우는 아랫배에 힘을 줬다.

그러는 자신을 조금은 한심하게 여기면서다.

황태자클럽이란 이름으로 모임을 갖는 놈들, 대한민국의 1% 속의 1%라고 할 놈들이다.

정말 잘해야 한다.

‘어차피 협조는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데 조심은 개뿔.’

어쨌든 와야 했던 곳이 이곳이다.

윤완규가 사건 당일 한시간 가량을 머물렀다.

호텔 내 어디서 뭘 했는지 조사해야 한다.

윤완규는 납치살해 당했다.

그냥 단순 교통사고였을 때와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 거다.

호텔 측엔 법원 영장을 흔들어 보였다.

이렇게 중식당으로 올라가는 걸 알지만 뭘 하려고, 누굴 대상으로 움직이는지 몰라 당황하고 있다.

반응이 생기기 전에 들이치는 거다.

황태자새끼들도 당황하게 해 주는 거다.

‘너희 중에 있다면……!’

뜨거워진 숨을 삼킨 최재우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유지건과 송치호를 좌우로 거느리고 중식당으로 들어갔다. 처남이 말해준 VIP룸, 중식당 안쪽으로 직행했다. 문 앞에 다가가니 건장한 보디가드들이 막아선다.

“무슨 일입니까?”

수틀리면 바로 주먹을 날릴 것 같은 보디가드에게 최재우는 신분증을 보였다.

“물러서.”

움찔한 보디가드, 그렇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유지건이 바로 소리친다.

“비키라고 새끼야!”

다른 보디가드가 험악한 얼굴로 대응한다.

“경찰이면 뭐든 맘대로 하는 게 아닐 텐데?”

송치호가 바로 법원 영장을 흔들었다.

“살인사건 수사다, 이게 뭔지는 알아보지? 영장이다, 적법한 절차를 밟고 있는 거야.”

거짓말이다. 영장은 윤완규의 행적을 파악하기 위한 호텔수사에 국한된 것이다. 황태자클럽과는 상관없다. 당연히 적법한 절차가 아니다. 하지만 보디가드들에겐 먹힌다. 두 놈이 서로를 돌아보고 당황한 얼굴이다.

“비켜!”

유지건이 보디가드들 사이를 헤쳤고 최재우는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문이 열렸다.

미간 좁힌 얼굴을 한 젊은 남자가 바라본다.

룸 안의 원형 테이블엔 비슷한 네 명의 남자가 앉아 있다.

1%클럽, 황태자 클럽이다.

“뭡니까?”

짜증을 참는 얼굴 속에 호기심도 들었다.

젊은 남자에게 최재우는 신분증을 다시 보였다.

“경찰입니다. 윤완규살인사건과 관련해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협조 부탁합니다.”

짜증이 든 미간을 확 좁히는 젊은 남자, 그가 한 발 물러섰다. 그 안으로 최재우는 들어갔다. 요리냄새가 가장 먼저 코를 찌른다. 테이블을 보니 최재우는 먹어 본적 없는 것들이다. 네 명의 남자는 젓가락을 놓았다.

“번거롭게 다시 신분과 목적을 밝히진 않겠습니다. 이미 말한바와 같이 윤완규 살인사건을 수사 중입니다. 귀한 시간에 사전 고지도 없이 찾아와 사과드립니다. 살인범 검거에 분초를 다투는 중임을 양해바랍니다.”

최재우를 바라보던 원형테이블의 젊은 남자 중 한명이 입을 열었다.

“살인범은 사고희생자 가족이라고 하던데요? 기사가 나왔던데?”

잘생긴 놈이다. 태생이 그래서 저런 얼굴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역시 귀공자다. 그런 놈의 바로 옆에서 바톤을 받아 말하는 놈도 그렇다.

“윤완규 살인사건하고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러는 겁니까?”

물음을 먼저 던진 놈은 차가운 조소로 뒷말을 던진다.

“우리가 누군지는 알고 이러는 거지요?”

최재우는 강한 눈빛을 내고 유지건과 송치호가 어깨를 꿈틀거릴 때였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화급히 달려온 중년남자, 호텔지배인이다.

“호텔고객들을 상대로 이러시면 어쩌자는 겁니까? 협조할 수 있는 한 협조한다고 말씀드렸는데,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이렇게 막 행동하시면……”

“막 행동?”

최재우는 험악하게 눈을 치떴다. 그 기세에 지배인이 흠칫했다.

“그런 행동을 한 적 없습니다. 호텔측에 고지한대로 윤완규의 행적을 조사 중입니다. 이곳에 계신 분들에게는 협조와 양해를 부탁드리던 참입니다.”

지배인이 다시 입을 열려는 데 최재우는 강한 목소리를 재차 뱉었다.

“살인사건입니다. 윤완규는 납치돼서 참혹하게 살해당했습니다.”

최재우는 날선 시선을 지배인에게서 황태자놈들에게 돌렸다.

“윤완규가 마약에 취한 상태로 어린 아이를 죽게 했습니다.”

황태자들의 눈동자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응시하며 최재우는 뒷말을 던졌다.

“사건 당일 윤완규는 이 호텔에 머물렀습니다. 약에 취해 나갔습니다. 경찰은 윤완규가 혼자가 아니었다고 판단합니다. 이 호텔에서 만난 누군가와 함께 마약을 복용했습니다. 함께 차를 타고 신명시로 달렸습니다.”

최재우는 권총이라도 뽑아들 기세로 마지막 말을 뱉어냈다.

“그 두 새끼가 어린 여자아이를 들이 받고 도망쳤습니다.”

VIP룸엔 최재우의 뜨거운 숨이 만든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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