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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의 살인자-15화 (15/200)

황혼의 살인자. 15. 귀신의 시간.

15. 귀신의 시간.

학동역과 논현역 사이, 지금 달려가는 도로는 언주로다.

이대로 계속 직진하면 도산공원을 지나 성수대교를 타게 된다.

그 전에 차를 바꾸는 게 좋다.

한진수의 이 벤츠는 호텔에서부터 노출돼서 계속 타기 위험하다.

‘지역이 강남.’

어디서 어떻게 차를 갈아타야 할지 장철은 치열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떠오르질 않는다. 강남지역에서 장철 자신이 쉽게 처리할 수 있는 구식차량을 찾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어디에나 카메라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결행을 후회하지 않는다.

한진수를 찾아온 걸음이었다.

놈을 찾았다. 찬스가 눈앞에 열린 거다.

이놈은 온나라그룹의 셋째아들, 현상황을 인지하고 있다.

언제 다시 잡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기회다.

‘행동엔 결과가 따르게 마련.’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마당에 닥칠 일을 두려워하는 건 웃기는 짓이다.

한 번도 그래 본 적 없다.

잡아야 할 놈을 잡았다.

헤쳐 나갈 뿐이다.

‘죽인다.’

그렇다, 이로 인해 어떤 일이 닥쳐도, 어떤 놈들과 싸우게 되도 그거다.

죽인다.

이미 시작했다. 복수하겠다고 맹세했다.

이젠 귀신의 시간이다.

‘백화점.’

내비에 떠오르는 압구정동의 백화점으로 장철은 목적지를 정했다. 도산대로 사거리에서 좌회전했다. 을지병원 사거리에 다다라 우회전, 그대로 직직해 압구정역 백화점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빈자리에 차를 박았다.

심호흡을 하며 주변을 살핀 장철은 목표를 찾아냈다. 백화점 쑈핑백을 양손에 들고 차로 다가오는 중년남자다. 리모컨 키를 지닌 차주가 다가가자 차가 알아서 빛을 내며 도어락을 푼다. 흰색의 볼보suv, 차가 크다.

차문을 열고 나간 장충은 볼보로 빠르게 다가갔다.

뒷자리에 쑈핑백을 넣는 남자의 뒤로 붙어 손끝을 등에 댔다.

움찔 반응하는 남자에게 말했다.

“얌전히 굴면 아무 일 없어.”

경직하는 볼보차주, 그의 등에 붙은 장철은 벤츠로 이동했다. 남자는 뒤돌아보지도 못하고 벤츠 조수석 문을 열었다. 그 순간 장철은 손을 썼다.

허수아비처럼 쓰러지는 남자를 조수석으로 밀어 넣은 장철은 차키를 찾았다. 뒷문을 열고 한진수를 끌어냈다. 놈의 폰을 차 안에 집어 던졌다.

한진수를 부축한 모습으로 장철은 볼보차량으로 이동, 뒷자리에 태우고 차를 출발했다. 들어 온지 십분도 지나지 않아 주차비 정산은 걱정 없다. 아니다, 그건 한진수의 벤츠다. 이 볼보는 어떨지 모르는 거다.

‘영수증.’

뒷자리의 쑈핑백 안에 영수증이 들어 있었다. 한진수를 뒷자리에 밀어 넣을 때 발견해서 손에 쥐고 있다. 이게 있으니 문제가 될 건 전혀 없다.

볼보는 힘차면서 조용하게 이동, 주차장 게이트 앞에 멈췄다. 창문 틈을 연 장철은 영수증을 내밀었다. 통과했다. 예상한대로 아무 문제없다.

도로에 들어선 장철은 속도를 냈다. 강남이라 역시 차가 많다. 논현로를 그대로 달려 동호대교를 넘어갔다. 3호선 옥수역과 금호역을 지났다.

‘경찰이 곧 따라 붙을 거야.’

뒷자리를 힐긋 돌아본 장철은 상황을 점검했다.

‘오늘 바로라고 계획하진 않았지만.’

한진수를 오늘 볼 거라곤 예상하지 안했다.

하지만 봤다, 호텔에서 과감하게 확보했다.

장철 자신의 입장에선 과감이지만 호텔과 경찰 측에선 충격적인 범죄가 발생한 거다.

형사들이 그곳에 있었으니 즉각 대응이다.

‘시간문제.’

벤츠를 백화점에서 찾아내고 이 차의 이동경로를 추적해 오는 건 금방일 거다. 그 전에 최대한 멀리 이동, 아니 그보단 안전지대를 찾는 거다.

“으……”

뒷자리에서 넘어온 신음소리에 장철은 생각을 멈췄다.

차를 도로변에 멈추고 비상등을 켰다.

차문을 열고 나가 뒷문을 열고 올라탔다.

괴로운 신음으로 깨어나는 한진수를 잠시 바라봤다. 그러다 주먹을 내리쳤다.

뻑하는 소리를 내며 한진수는 얼굴이 돌아갔다. 차바닥에 처박히듯이 엎어졌다. 더 이상 움직임도 신음도 없다. 하지만 죽지 않았다. 그 모습을 잠깐 본 장철은 다시 문을 열고 내렸다. 그리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어디가 좋을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장철은 기억과 경험이 있는 곳으로 정했다.

종로 창신동이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뉴스에서 가끔 본 그곳은 그대로였다.

주변에서 재개발이 이뤄지고 있지만 옛날 골목길이 존재하고 있다.

‘봉제골목.’

옛 기억을 더듬으며 악셀을 밟은 장철은 이동로를 확실히 확인하며 달렸다. 3호선과 6호선이 교차하는 약수역을 지나 청구역을 지나고 신당역과 동묘역도 지났다. 내비에 뜬 창신초교 앞 공용주차장에 들어갔다.

구석자리에 차를 댄 장철은 뒷자리로 넘어가 쑈핑백을 뒤집었다. 볼보차주가 쑈핑한 옷과 신발이 쏟아졌다. 봄을 맞아 옷을 새로 산 모양이다.

‘미안합니다.’

볼보차주에게 뒤늦은 사과를 한 장철은 행동했다. 서두르면서도 차분하게 한진수의 옷을 벗기고 새 옷을 입혔다. 자신도 점퍼를 갈아입었다.

가발을 벗고 안경도 던졌다. 룸미러로 확인한 뒤 한진수를 업고 내렸다.

기묘한 모습이지만 다시 보면 수긍이 가는, 낮부터 술에 취했거나 어디가 아픈 사람을 업고 가는 모습이다. 그런 행색으로 장철은 주차장을 나갔다. 빌라와 다세대와 주택들이 밀집한 창신동 안으로 거침없이 갔다.

‘다 왔어.’

목적한 봉제골목에 들어선 장철은 손톱만큼도 지친 빛 없이 계속 움직였다.

다세대나 빌라 지하 계단을 살폈다. 영세봉제공장들의 창고다.

드디어 한곳을 찾았다. 허술한 옛날 자물쇠로 잠겨 있다. 비틀어 뜯어냈다.

합판 문에 붙어 있던 자물쇠는 그대로 뜯어져 나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후 한진수를 던졌다. 재고의류 위로 구른 놈이 흘러내린다.

밖으로 나간 장철은 다세대 건물을 한 바퀴 돌며 다시 살폈다.

이미 본대로 창고를 사용 중인 봉제공장은 문을 닫았다.

일층은 그렇고 2층은 살림집이 모양인데 인기척이 없다.

누가 산다면 저녁시간에나 올 터다.

‘됐어.’

골목길의 보안카메라들 위치를 확인하며 장철은 다시 지하로 내려갔다. 시간이 정말 없다는 걸 상기하며 한진수에게 다가갔다. 놈의 뺨을 쳤다.

“으.”

고통 때문에 신음을 내며 한진수는 깨어났다.

피 흐르는 입을 부들거린다.

초점이 흐릿하던 눈은 점점 분명해진다.

그렇게 현실을 자각하며 눈을 부릅뜬다.

자신이 어떻게 된 건지를 기억하는 눈동자는 흔들린다.

“누, 누구야? 왜, 왜 나를……”

한진수의 얼굴엔 장철의 주먹이 다시 박혔다. 뒤에서 누가 잡아당긴 것처럼 한진수의 머리가 넘어갔다. 그 머릴 비닐에 든 재고의류가 받아줬다.

“알고 있을 텐데.”

코뼈가 주저앉은 한진수는 패닉에 물든 눈으로 장철을 다시 응시했다. 호텔에서 공격당하던 순간부터 가진 예감, 윤완규를 죽인 남자인 거다.

‘이……!’

인정할 수 없는 현실에 한진수는 치를 떨었다.

코와 입으로 숨을 쉬기가 힘들다.

어디를 어떻게 맞은 건지 몸에 힘이 없다.

이게 무슨 일일까? 무슨 날벼락일까?

왜 자신이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 지 알 수 없다.

아니 안다, 이 남자가 누군지 아는 것처럼 안다.

그런데 그렇다고 이런 일이 생겨?

재수가 없어서라고 말하기엔 닥친 일의 무게가 너무 크다.

‘날 죽일 거야!’

윤완규가 어떻게 죽었는지 안다.

사지가 토막 났고 배는 갈라졌다. 눈앞의 이 남자가 그렇게 한 거다.

황당하다, 남자는 보통체구다.

저 몸으로 보디가드들을 때려눕혔다. 특수부대를 제대한 격투기선수출신들이다.

‘그 아이의 할아버지……!’

차로 치어버린 여자아이, 그 애의 할아버지라고 했다.

윤완규를 토막 낸 살인범의 정체다.

뉴스에 나온 그이야길 듣고 너무 황당해 웃었었다.

틀딱충 꼰대에게 뒈진 윤완규, 그놈을 봐버리려던 생각까지 우스웠었다.

그런데 눈앞의 남자는 틀딱충이 아니다.

귀밑머리가 희끗하기는 하지만 할아버지 소릴 들은 나이가 아니다.

뉴스에서도 오십대라고 들은 것 같다.

그냥 오십대가 아닌 거다. 젊고 강한 놈들을 가볍게 박살내는 자다.

‘윤완규 그 새끼가 그렇게 뒈져버린 게……’

우연이 아닌 거다, 죽을 만한 자의 손에 죽은 거다.

그런 존재가 한진수 자신을 찾아왔다.

윤완규에게서 진실을 찾아내서다.

그 새끼가 그럴 것 같아서 미리 손을 쓰려고 했었는데 늦었다.

이 괴물은 귀신처럼 찾아왔다.

“장영이다.”

불현 듯 귀를 파고든 남자의 목소리에 한진수는 흠칫했다. 그 반응을 무겁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응시하는 이, 장철은 다시 이름 하나를 말했다.

“장민지다.”

한진수는 주저앉은 코를 움켜쥐고 떨리는 입을 열었다.

“도, 돈을 드리겠습니다, 원하는 금액이 얼마가 됐든……”

장철은 손을 뻗었다. 한진수의 턱을 잡았다. 바이스 같은 그 힘에 한진수는 얼어붙었고, 공포로 물든 놈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장철은 말했다.

“기억해라, 너로 인해 떠난 손녀와 딸의 이름이다.”

한진수의 얼굴 앞에 얼굴을 들이댄 장철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애들에게 맹세했다.”

틀어잡은 왼손에 장철은 힘을 줬다.

부드득하는 소릴 내며 한진수의 턱이 벌어졌다.

그 순간 한진수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장철의 오른손이 빨랐다, 목울대를 가격해 소리를 차단했다. 그리고 이빨을 훑어냈다.

“커어……”

비명도 못 지르는 가운데 한진수는 이빨을 뽑혔다. 앞니를 뽑히고 어금니도 뽑혔다. 그것들이 바닥에 떨어질 때마다 경련하듯 몸을 떨었다.

“사과 같은 건 바라지 않는다.”

무심하게 느껴져 오히려 더 무서운 목소리, 장철은 손을 뗐다. 피투성이가 된 한진수를 무심하게 바라본다. 그 눈길 속에 칼날이 꿈틀거린다.

“받은 대로 돌려줄 뿐이다.”

장철은 일어섰다.

뒤돌아 재고의류들 사이를 뒤졌다. 그렇게 찾아낸 것은 재단가위다.

잠자리 상표로 유명한 가위, 그걸 비틀어 양손에 쥐었다.

“사, 살려……”

한진수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어깨에 가위날이 박혀서다. 불꼬챙이를 쑤신 것 같은 그 감각에 경직했는데, 장철은 가위날을 아래로 그어 내린다.

간질병처럼 경련하는 한진수, 고통과 공포에 물든 그 얼굴을 장철은 바라봤다. 호수에 낚시를 나온 조사가 찌를 바라보듯, 수면을 바라보듯이.

가위날이 가슴 윗부분에 이르렀을 때 장철은 멈췄다.

한진수의 입술을 봤다.

목을 가격당해서고 고통이 극심해서 비명도 못 지르는 입이 말한다.

“내가 아니야……”

한진수는 피거품을 흘려내면서, 고통과 패닉에 먹힌 작은 목소리로 흘려냈다.

“그날…… 아이를 보고…… 운전대를…… 꺾었어……”

장철은 칼날처럼 곤두섰던 눈동자를 응축했다.

“그걸 못하게…… 잡은 년…… 고초희…… 세경그룹……”

등골에 용암이 흘러내리는 느낌, 장철은 알았다.

한진수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윤완규의 차에는 제삼의 인물이 타고 있었던 거다.

“웃고 있었어……”

이어 나온 한진수의 말에 장철은 피부에 돋는 소름을 느꼈다.

고초희라고 말한 제 삼의 인물이 그랬다는 거다.

손녀 장영을 일부러 받은 거다.

“왜 말하는 거냐?”

장철이 묻자 한진수는 부들거리는 얼굴에 처참한 미소를 그려낸다.

“씨발…… 나만 당할 순 없잖아……”

코가 주저앉고 턱이 비틀리고 이빨이 뽑힌 한진수, 그 눈에 든 광기를 장철은 읽었다. 태어나면서부터 길러온 광기, 온나라그룹아들의 광기다.

“알았다.”

고개를 끄덕인 장철은 한진수의 머릴 움켜잡았다.

한 가닥 희망이 빛이 든 놈의 눈동자를 외면했다. 아니 짓밟았다.

놈의 몸을 뒤집었다.

마지막 힘을 내는 다리를 밟아 부러뜨렸다. 늘어진 그 몸에 가위를 박았다.

콱, 콱, 두 개로 나뉜 가위날, 장철이 양손에 쥔 그것들은 한진수의 척추를 따라 들어갔다 나왔다는 반복했다. 그때마다 한진수는 꿈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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