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살인자. 18. 복수의 맹세.
18. 복수의 맹세.
의료기계들이 연결된 아들의 모습은 정말 생경하다.
말 안 듣고 못되게 굴어도 그녀를 생각하면 화낼 수가 없는 놈, 그 아들놈이 죽었다.
원장이 한 말이 귀에 맴돌이친다.
숨을 쉬고 있지만 시체와 다를 바 없다고.
“진수야.”
아들의 이름을 나지막이 부른 한대건은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 미라처럼 전신에 붕대를 감고 누워 있는 아들을 다시 바라봤다.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던 놈인데 저렇게 침대에 누워만 있게 됐으니 얼마나 답답할까.
“네 엄마가 널 낳고 죽을 때 약속한 게 있다. 다른 여자를 다신 사랑하지 않겠다고 했지. 널 잘 키우겠다고도 맹세했다. 그걸 못한 것 같구나.”
흐릿해진 눈으로 한대건은 남은 말을 흘려냈다.
“아버지가 맹세하마. 널 이렇게 만든 놈을 찾겠다. 복수해 주마.”
아들에게 속삭이듯 그 말을 전한 한대건은 돌아섰다. 병실을 나갔다. 문을 열자마자 전략기획실장 최길준이 고개 숙인다. 해야 할 말을 한다.
“장철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서 정리했습니다.”
한대건은 vip병실로 들어갔다. 호텔과 다를 바 없이 꾸며진 병실 안 테이블 위엔 최길준이 말한 자료가 준비돼 있다. 말없이 검토를 시작했다.
‘원산도 간첩선사건?’
미간을 좁힌 한대건은 장철에 대한 정보를 읽어나갔다.
형제보육원, 그곳의 화재사고.
서울로 상경, 87년 이후부터의 행적이 묘연한 정황.
그 때문에 기무사에서 긴장하며 작성한 당시의 보고서, 그리고 97년이다.
‘서영나이트.’
기억이 난다, 당시에 세간이 떠들썩했던 사건이다. 장안동 일대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범서천파를 부산에서 상경한 용두동파가 공격한 사건이다.
그 사건에 장철이, 귀신이 개입했던 거다. 그리고 귀신처럼 사라졌다.
“장철의 가족에 대한 조사도 마쳤습니다.”
옆에 선 최길준실장에게 한대건은 물, 하고 짧게 말했다.
최길준은 즉각 돌아서서 생수를 컵에 따라왔다.
받아 마신 후 한대건은 미간을 좁혔다.
장철의 가족에 관한 조사내용, 장민지라는 여자가 자살한 내용이다.
‘투신.’
의정부의 병원이다. 윌슨병환자이고 유방암 말기였다. 딸 장영이 교통사고로 숨진걸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걸 알고 난후에 기어서 투신자살했다.
그래서다, 장철이란 놈이 윤완규를 죽이고 아들 한진수를 해친 이유.
‘복수냐?’
한대건은 조사보고서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그래, 이젠 주고받았구나. 그런데 내가 줄게 남았다. 네가 받아야할 내 복수다.’
손에 잡은 조사보고서가 떨리는 걸 한대건은 인지했다.
큰 숨을 들이마셔 감정을 억눌렀다.
해야 할 일을 앞두고 감정에 휘둘려선 그르친다는 걸 알고 있다.
오랜 세월에 걸친 경험, 온나라그룹을 이룬 근본이다.
‘네가 귀신이라면 나는 염라대왕이 될 거다.’
냉정하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한대건은 다시 보고서를 훑었다.
장철의 딸 장민지에 관한 내용, 스무 살에 임신해서 아이를 낳았다.
그때까지 함께 살지 않던 아버지 장철을 찾아갔다.
엄마 하은주는 그 전에 죽었다.
‘하은주.’
장철의 아내,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딸 장민지를 낳았을 뿐이지 부부라고 말할 순 없다. 장철과 하은주 사이에 합법적인 부부관계가 있지 않다.
둘이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 아직 모른다. 장민지로 연결됐을 뿐이다.
‘유방암으로 사망.’
그 병을 딸에게 물려준 것 같다.
하은주에 대한 조사내용엔 젊은 시절 유흥업소종사자로 살았다는 내용이 있다.
장철과 만난 건 이런 배경일 거다.
어릴 적 가정환경도 최악이었다.
재혼가정에서 살다 가출했다.
‘확인된 건 아니지만 의붓아버지와 의붓오빠의……’
미간을 찌푸린 한대건은 아이의 사진을 집었다. 대여섯살쯤 돼 보이는 여자아이다. 활짝 웃는 얼굴이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귀엽고 예쁘다.
‘이 아이가……’
장영, 장철의 손녀다.
3월 24일, 이 아이가 죽었다.
윤완규의 람보르기니 우르스에 치여 사망했다.
그 현장에 장철이 있었다.
손이 다시 떨린다.
사진을 뒤집어 테이블에 내린 한대건은 물었다.
“운전을 누가 한 거야?”
최길준은 어깨를 순간적으로 경직했다가 대답했다.
“확인할 수 없습니다.”
“확인할 수 없어?”
“윤완규는 자신이 운전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려던 모양입니다만, 혐의를 벗기 위해 그런 것일 수 있습니다. 막내아드님이 운전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해당 차량의 운전대에선 두 사람의 지문이 다 나왔습니다만, 당연한 일입니다. 차에 탄 막내아드님이 차 안 여기저기를 만져봤을 겁니다.”
기억이 난다, 아들 한진수가 수퍼카를 사도 되겠냐고 물었다. 그런 게 왜 필요하냐고 가볍게 나무라자 군소리 없이 돌아서던 모습이 떠오른다.
“언론에서는 진수가 진짜 운전자라고 떠들고 있잖아?”
그런 상황이다. 그 부분을 생각하니 한대건은 다시 숨이 뜨거워졌다.
아들이 귀신에게 당한 이유가 그래서라는 거다.
장영을 친 운전자가 한진수인데 윤완규에게 덮어 씌웠다는, 윤완규는 발설하려 했다는 이야기다.
“말하기 좋아하는 언론에서야 기사거리로 최고의 이야기입니다. 윤진전설의 사주 아들과 온나라그룹의 셋째아들이 마약에 취해 차를 몰다 어린 아이를 사망케 한 사건, 누구라도 귀를 세우고 눈에 힘을 줄 겁니다.”
그러니 무시해야 할 당연한 반응이란 소리, 중요한건 진실이 아니라 대응이란 거다. 그 대응을 최길준은 했다. 사건 당일에 한진수의 연락을 받고 조치했다. 신명시로 직원들을 보내 한진수를 데리고 온 것이다.
“말씀드리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자신이 반응해 입을 열기 전에 이어 나온 최길준의 말에 한대건은 미간을 좁혔다. 말하지 않은 부분, 아들 한진수와 관련한 다른 내용이다.
대강의 내용은 보고 받았었다. 사건이 발생한 그날이다. 마약이 개입돼 있는 일이었다. 무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건 그런 게 아니다.
“신명시 소재의 그 별장, 윤진건설 윤종대회장의 별장에서 막내아드님을 데려올 때 다른 사람도 함께 데려왔습니다. 세경 고회장님의 딸입니다.”
최길준의 이야기에 한대건은 눈썹을 확 세웠다.
“고회장의 딸?”
되물음을 뱉은 한대건은 지금 들은 이야기의 의미를 씹었다.
아들이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오던 그 장소에 고회장의 딸이 같이 있었다는 거다.
차에 같이 타고 있었다는 소리, 사고가 일어날 때에도 함께였다는 거다.
“고회장 따님이 원하는 장소에 내려줬습니다만……”
다시 입을 연 최길준은 송구한 얼굴로 뒷말을 이어냈다.
“바로 보고 드리지 못했습니다. 당시엔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보다는 막내아드님의 확실한 안전조치가 급선무라고 여겼습니다.”
안다, 최실장이 판단하고 조치한 일이다.
아들 한진수의 조치가 최우선이었던 거다.
그렇게 조치했다. 그런데 귀신이란 놈은 그걸 뛰어넘었다.
윤완규를 죽이면서 막내아들 한진수를 특정, 곧바로 공격해 복수했다.
‘귀신……!’
한대건은 새삼스럽게 그 별명을 이에 물었다. 현실적으로 결과를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다. 그래서 귀신이란 존재가 더 대단하게 여겨지지만, 그만큼 복수를 향한 결의도 커진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이고 말리라는.
“장철의 소재를 찾는 일은?”
숨을 억누르며 낸 한대건의 물음에 최길준은 눈동자를 빛내며 대답했다.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장철과 그 가족의 과거를 훑는 일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단서가 나올 거라고 확신합니다. 검경내부에서도 조력을 받고 있습니다. 놈을 찾게 되면 직원들이 가장 먼저 갈 겁니다.”
한대건은 가라앉은 한마디를 결론으로 뱉었다.
“그놈을 내 앞에 산채로 데려 와.”
* * *
“후우.”
꺼질 것 같은 한숨을 내쉬며 최재우는 영상을 다시 봤다. 창신동 골목길의 보안카메라 영상, 트레이닝 복 차림의 남자가 검정 비닐통부를 늘어뜨린 채 걷는다. 신발은 슬리퍼다. 누가 봐도 동네사람, 백수 같은 자다.
‘저 자야, 저렇게 경찰들 사이를 지나갔어.’
영상 속 남자가 장철이란 확신을 최재우는 의심치 않았다. 자신과 유지건이 반지하 창고로 들어갔을 때다. 관할서 경찰들이 몰려오던 순간이다. 장철은 그야말로 귀신처럼 빠져나갔다. 이후로는 찾을 수도 없다.
‘어디선가, 카메라가 없는 곳에서 또 허물을 갈고,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갔어.’
계속해서 꼬리만 더듬고 있는 상황, 최재우는 귀신이란 존재의 무게를 새삼 느꼈다. 정말로 대단하다, 저 트레이닝복은 분명히 옷 안에 미리 입었던 거다. 팔당대교 앞을 헤엄쳐 건널 때처럼 미리 준비를 한 것이다.
‘호텔 중식당에, 장철과 한 공간에 있었어.’
다시 한숨이 나온다. VIP룸에서 황태자클럽 놈들과 말하고 있을 때였다.
장철은 손님으로 가장하고 들어왔다. 바로 뒤를 지나고 머뭇거렸는데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한진수를 찾아냈고 잡았다. 마음먹은 대로다.
‘귀신이니까?’
반발처럼 곤두서는 자괴감에 최재우는 인상을 구겼다. 그 순간 호출이 왔다.
“과장님이 오랍니다.”
송치호의 눈치 보는 얼굴을 응시한 최재우는 바로 일어섰다. 과장실로 가는데 유지건과 송치호도 따라온다. 문 앞에 서니 블라인드 안이 보인다.
들어오라는 과장 이왕길의 손짓, 최재우는 문득 이름을 생각했다.
이왕길이란 이름 덕분에 순탄하게 잘 살고 있다고 하던 과장의 말이 기억난다.
말단 순경으로 시작해서 형사과장에까지 오른 건 이름 덕분이란다.
“부르셨습니까.”
의례적으로 인사하는 최재우, 그 뒤를 따라 들어선 송치호와 유지건, 세 사람을 향해 과장은 자리를 권한다. 간이 응접테이블에 모두 앉았다.
“검경합동수사본부가 설치될 거다.”
앉자마자 내놓은 과정의 말, 최재우는 예상했던 것이지만 눈썹을 세웠다.
‘윤진건설의 윤완규, 온누리그룹의 한진수가 당했으니까.’
그것도 다름 아닌 ‘귀신’ 에 의해서다. 존재했는지에 대해서까지 이야기 되는 살인자다. 그 자가 이십오년만에 다시 나타나 살인을 저지른 거다.
“너희팀 전부 소속될 거다. 홍형사가 완치되기 전에 사건이 해결되면 좋겠지만, 아마 그렇게 되긴 어려울 걸로 생각한다. 홍형사도 준비하라고 해.”
유지건과 송치호는 서로를 보며 눈을 깜박였고 최재우는 물음을 냈다.
“합수부가 결성된다면 빨리 해결하려는 건데, 과장님 말씀은 소용없다는 걸로 들립니다? 귀신이 무섭고 대단하다는 건 알겠습니다만 지금 말씀은……”
“합수부는 못 잡는다.”
툭, 실밥이 터져 내용물이 나오듯 나온 과장 이왕길의 말, 그것은 확언이었다. 단 일초의 갈등이나 머뭇거림도 없는 확신이다. 이유가 분명 있다.
“과장님?”
최재우의 반응, 응축한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고 이왕길은 입을 열었다.
“97년 서영나이트 사건 현장에 있었다.”
최재우와 유지건과 송치호는 경직했고 이왕길은 목소리를 이었다.
“귀신이 지옥을 연출한 그 현장, 형사가 돼서 투입된 첫 현장이었다. 무섭고 떨렸지. 그곳에 귀신이 남긴 건 칼 한 자루 뿐이었다. 귀신은 그것만 남기고 사라졌어. 이십오년간 그를 못 찾았지. 공소시효도 끝났어.”
세 형사의 눈을 응시하며 입을 닫았던 이왕길은 다시 목소릴 냈다.
“귀신의 정체를 확인하고도 기밀로 해뒀던 건 이유가 있다. 이십오년전 그 사건 현장의 일이지. 더 이상 그걸 잡고 있을 수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고 판단했다. 청에선 귀신이란 존재가 드러나기 전에 잡고 싶었겠지.”
그래서 봉했던 귀신의 정체를 이제 밝혔다. 더는 그럴 수 없어서다.
“내가 아는 귀신은, 아니 귀신을 겪어 본 경찰이라면 누구나 나와 같은 생각일 거다. 귀신은 못 잡는다. 그는 죽었으면 죽었지 잡히지 않을 거야.”
최재우는 참고 있던 입을 열었다.
“과장님, 장철은 쉰이 넘은 사람입니다. 이십오년 전 귀신이 아닙니다. 과거에 그를 잡을 수 없었다고 지금도 못 잡는다는 건 맞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 자체가 피해망상에 가깝습니다. 경찰이 제대로 하면 잡습니다.”
말해 놓고 최재우는 아차 했다. 이왕길을 포함한 과거의 경찰들이 제대로 못해서 라고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장은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기대하는 게 그거다. 최팀장 네 말대로 귀신은 나이를 먹었지. 지금의 경찰과 시스템은 과거와 달라. 너희가 귀신을 잡아주기를 바란다.”
진심을 말한 과장 이왕길의 표정에 깃든 그날을 최재우는 느꼈다.
‘과장님은……’
최재우의 생각을 밀어내며 이왕길 다시 입을 열었다.
“윤진건설에서 행동할 거다. 현진 써큐리티를 통해서 장철을 잡으려고 움직이고 있을 거야. 온누리그룹도 마찬가지다. 그들을 염려해야 한다.”
법 따위는 무시하는 자들,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 없다는 걸 모두 안다.
“혹시 하는 생각입니다만.”
최재우는 한진수 사건이후에 든 한 가지 가능성을 말했다.
“윤완규의 차에 다른 누가 더 타고 있었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이왕길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이 없는 이야긴 아니다. 그런데 차에서 나온 지문들이 한두 개가 아니고 수십 개다. 전부 윤완규가 교제하던 여자들 거지. 수십 개가.”
유지건이 드러나게 성질난 얼굴을 했고 송치호는 피식 웃었다.
“이제부터 죽었다고 생각하고 일들 해라.”
일어서는 과장을 따라 세 형사는 일어섰다. 밖으로 나가며 최재우는 TV에 눈을 던졌다. 한진수와 윤완규의 사건을 보도하는 뉴스가 쏟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