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혼의 살인자-19화 (19/200)

황혼의 살인자. 19. 제 삼의 인물.

19. 제 삼의 인물.

도시락을 연 장철은 옛 생각을 떠올렸다. 지겹게도 생선반찬을 해 주던 어머니의 잔소리와 함께다. 진주소세지 좀 해달라고 투정 부리다 등짝만 맞았던 기억, 이젠 어머니의 얼굴도 목소리도 희미하게 잊혀 간다.

‘좋네.’

젓가락을 든 장철은 도시락을 먹었다. 돈가스와 어묵국이다. 이만하면 정말 훌륭한 한 끼라고 하겠다. 어린 시절 먹던 음식에 대면 수라상이다.

‘영이가 좋아하는 건데……’

돈가스 조각을 집던 장철은 가슴에서 치미는 것을 바로 눌렀다.

돈가스를 집어 입에 넣고 씹었다.

그래도 영이 얼굴이 눈앞에 아른 거려 국물을 마셨다.

쉬지 않고 한 번에 다 마셔버렸다.

맛은, 전혀 모르겠다.

‘고초희.’

그 이름을 떠올려 영이와 딸 민지의 얼굴을 밀어낸 장철은 생각을 집중했다.

‘세경그룹의 딸이란 것 외엔 아무런 정보도 찾을 수가 없어.’

고종환회장은 아들 하나가 더 있다.

고초희의 오빠가 되는 고재춘이다.

서초동이 본사인 세경개발의 사장이다.

회장은 아흔살 고령의 고종환, 그 나이에도 아들에게 경영을 맡기지 않았다.

보통 노인네가 아니다.

‘같은 배가 아니야.’

고초희와 오빠가 되는 고재춘이 다른 여자들의 소생임은 확인하지 않아도 알 일이다. 고재춘이 장철자신과 비슷한 오십대, 정확히 쉰일곱살이다. 고초희는 이십대일게 확실하다. 윤완규 한진수와 어울린 또래다.

‘한진수도 같은 경우.’

온나라그룹 회장 한대건의 이야기는 제법 알려진 것이다. 전처에게서 두 아들을 본 후 한진수의 모친을 만나 불같은 사랑을 했고 한진수를 낳았다. 그런데 여자는 난산으로 사망했다. 그 후 여자는 가까이 안한다.

‘다른 여자는 사랑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주간지와 정재계 가쉽을 다루는 월간지 등에 실린 이야기다.

재벌가 총수들의 여자편력은 새삼스러울 게 없는 이야기.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새 여자를 뒀다. 돈 있는 자들의 삶, 온나라도 세경도 그런 스토리다.

‘아버지는……’

새삼 아버지 생각이 나 장철은 도시락 먹던 젓가락질을 멈췄다.

열세 살이 되던 해 1월에 북한으로 배를 몰고 가버린 아버지, 기억이 흐릿하다.

유독 기억이 선명한건 엄마에게 호되게 당하던 날 저녁이다.

대천항에 새로 생긴 술집에서 술을 먹고 돌아오지 못해 외박하고 온 저녁, 하루 종일 어떻게 집에 들어올까 염탐하다가 엄마에게 잡혀 곤욕을 치렀다.

그날 아버지는 엄마에게 싹싹 빌었다. 다시는 외박 안 한다고.

‘그랬는데 아버지 당신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지요.’

최준혁 선생님, 학교 관사에서 살던 총각선생님, 엄마와 동네 사람들은 특별한 반찬을 만들면 반드시 가져다 드렸다. 젊은 선생님이 타지에 와서 고생한다면서, 아이들을 잘 가르쳐 주십사하고, 그 선생님이 간첩이었다.

‘아버지, 우리 집은 왜 이렇게 된 걸까요?’

얼굴도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 그 형상을 허공에 놓고 장철은 물었다.

정말로 모르겠다.

가난했지만 그런대로 행복하게 살던 집이다.

작은 배지만 아버지는 선장이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빨갱이가 됐다.

“아버지, 어머니도 할머니도 아버지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작은 소리로 중얼거림을 낸 장철은 바로 다시 목소릴 이어냈다.

“저는 보육원으로 끌려갔습니다.”

아버지 때문이 아니란 걸 안다.

지금은 안다.

그런데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엄마가 죽고 할머니도 죽고 장철 자신이 보육원으로 끌려간 게, 빨갱이 자식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게, 아버지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우리 가족은 죄인들이었던 걸까요? 그래서 벌을 받은 걸까요?”

평생을 가슴에 품은 것이다.

도대체 왜?

어째서 우리 집은 그렇게 된 것일까?

왜 아버지는 북으로 끌려갔고 엄마는 자살했으며 장철 자신은 지옥 같은 보육원에서 살아야 했던 걸까? 전생에 죄를 지었던 것일까?

“그런 거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내 뱉는 숨 속에 그 말을 던진 장철은 다시 젓가락을 놀렸다.

반 넘어 먹은 도시락을 말끔히 비웠다.

플라스틱용기를 씻어 분리수거용 쓰레기통에 넣었다.

양치질을 하고 차분한 신색으로 노트북 앞에 다시 앉았다.

노트북 전원을 넣은 장철은 서초동 세경개발 건물과 주변에 대한 정보를 취합해 나갔다. 현재 상태에서 알아낼 수 있는 것들, 인근 도로의 위치와 주거 밀집도 등, 이곳을 목표로 행동했을 때의 장애가 뭘지 가늠했다.

‘조웅, 네가 알아내야겠다.’

부탁하면서도 망설였다. 하지만 시간이 없다. 빠를수록 좋기에 부탁했다. 장철 자신이 혼자서 접근해 알아내고 액션을 취할 수도 있지만, 윤완규와 한진수로 인해 세경은 이제 경계하고 있을 거다. 제대로 해야 한다.

‘고초희가 어디에 있는지만, 최소한 그것만 알아내면.’

그럼 된다. 그러나 조웅에겐 전혀 다른 이야기다.

이번 일로 조웅은 잠적해야 할 거다.

자신이 귀신으로 활동하던 시절부터 해오던 직업소개소를 폐업해야 한다.

상대는 그래야 할 존재, 그렇게 하는 게 안전하다.

‘지하금융의 왕.’

고종환회장의 정체가 그것이다. 대한민국의 음지를 장악한 제왕 같은 존재인 거다. 암흑가의 폭력조직들은 다 고종환 회장의 말을 듣는다.

‘이십오년 전에도 그랬어.’

귀신이 되어 움직이던 그 시절에도 알고 있었다. 고종환이란 이름 석자를 확실히 알진 못했지만 모든 조직에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가 있다는 건 알았다. 그 존재가 세경개발이란 이름으로 양지에 고갤 내민 거다.

‘누가 됐든 죽인다.’

장철은 칼날 같은 눈빛을 뿜어냈다.

귀신의 눈, 목표를 정하면 그게 누구든 목을 따는 존재의 결의이고 맹세다.

목숨보다 소중한 딸과 손녀를 해친 이상 반드시 복수한다.

죽음보다도 더 처절한 고통을 안겨줄 것이다.

‘마지막이다. 한번만, 이번 한번만 일하고 너도 떠나라.’

조웅을 향해 장철은 그 마음을 전했다.

서울에서 다시 만난 보육원 친구, 귀신의 그림자로 살아왔던 그이지만 쉬게 하고 싶다.

장철 자신이 떠남으로서 찾은 그의 평온을 깨뜨리고 싶지 않다.

정말 쉬게 하고 싶다.

“미안하다.”

나직한 장철의 중얼거림은 좁은 옥탑방 벽에 이리저리 부딪쳤다.

* * *

연못 속의 비단잉어들은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다.

이젠 완연한 봄, 벚꽃 잎이 휘날리며 수면 위를 물들이고 있다.

아흔 번을 맞는 봄이지만 역시 봄은 좋다.

그런데 이제 남은 봄은 얼마나 될까. 이 좋은 봄이.

‘슬슬 갈 준비를 해야 하나.’

벤치의 등받이에 걸쳤던 오른 팔을 올린 고종환은 떨어지는 벚꽃 잎을 받았다. 찬란하게 피었다가 스러지는 운명, 사람의 일생도 이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고종환 자신도 이젠 스러져 갈 때인 거다. 자연의 이치다.

‘백년 시대라고 하지만 아흔이면 살만큼 살았지.’

피식 미소를 흘려낸 고종환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문제라면 아직도 이 몸뚱이가 쓸 만하다는 게 문제야.”

뒷짐을 지며 고종환은 일어섰다.

연못 앞에 놓인, 엉덩이를 걸쳤던 벤치를 새삼스럽게 내려다 봤다.

고종환 자신처럼 낡았지만 짱짱한 모습이다.

아직도 십년 이십년은 문제없이 쓸 것 같다. 칠만 새로 해야겠다.

“김부장.”

고종환이 부르자 중년인이 바로 다가온다. 김부장이란 호칭이 어울리는 모습의 사내다. 평범한 얼굴에 두루뭉술한 몸매, 양복차림의 안경잡이다. 어느 곳에서나 있을 법한, 어떤 회사에서도 김부장이라고 할 사내다.

“회장님, 준비는 마쳤습니다.”

무슨 준비를 마쳤는지 그렇게 했다는 김부장, 고종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묻는다.

“얌전히 있지?”

“예, 아가씨도 상황을 인지해서인지 별다른 반발은 없었습니다.”

연못으로 몸을 돌린 고종환은 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야지. 상황이 제법 좋지가 않아. 이런 때는 멀리 떠나서 시간을 흘려보내는 게 제일이지. 그러라고 미국에 집도 사고 땅도 사고 해놓은 거 아니냔 말이야. 음, 꼭 그래서 산건 아니지만, 어쨌든 잘 쉬면 되는 거야.”

“지당한 말씀입니다. 아가씨가 미국에서 휴식을 취하시는 동안 상황을 마무리될 겁니다. 윤진과 온나라그룹에서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미간을 미세하게 꿈틀거린 고종환은 비단잉어의 느린 유영을 보며 말했다.

“산다는 게 참 오묘한 구석이 있단 말이지. 헤아리고 대비한다는 게 무용한, 기묘한 부분이 있어.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면 그때야 알게 돼.”

무슨 소린가 의문이 들었지만 김부장은 고종환의 발치만 응시했다.

“초희가 온나라그룹 한대건회장의 아들놈과 어울린 게 그래. 그놈도 제 어미에 대한 상처를 가지고 있잖아? 초희가 그런 부분에 동질감을 느낀 것 같아. 내 생일에 하필 그놈 부자가 찾아와서 만난 것도 그렇고……”

무슨 말인지 김부장은 알았다.

회장 고종환의 금지옥엽 고초희가 한진수와 어울리게 된 계기다.

두해 전 회장의 생신잔치 때다.

그전까진 서로 모르던 사이다. 그런데 급속도로 가까워지면서 이런 일까지 생겼다.

“아가씨가 외로우셨던 모양입니다. 그렇지만 한진수와 아주 가깝게 지내진 않으셨습니다. 아가씨의 성향상 동병상련 같은 감정이 아니라 흥미를 느끼신 것 같습니다. 한진수 같은 부류와 어울리는 경험에 대해서요.”

성향, 그 단어가 나온 순간 고종환은 미간을 확실하게 꿈틀거렸다.

“그래, 초희의 성격이 특별하긴 하지. 김부장 말이 맞을 거야. 온누리그룹의 아들놈이 친한척하니까 몇 번 같이 어울려 준거지. 그런 결과인 거고.”

결과, 윤진건설의 사주 윤종대회장의 아들 윤완규가 죽었다.

개구리를 토막치듯이 죽였다.

온누리그룹회장 한대건의 막내아들 한진수는 산 시체다.

이 세상 모든 의료자원을 동원하고 억만금을 들여도 못 일어난다.

‘귀신.’

그런 결과를 만든 자가 그 존재다.

고종환 자신도 알고 있던 이름이다.

음지의 물을 먹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들어본 이름이다.

그래야 할 위치에 있는 자라면 겁을 먹어야 했던 이름이다.

이십오년 만에 나타났다.

“귀신이 초희를 특정했을 걸로 생각하나?”

입에 담고 싶지 않은 이름이지만 고종환은 물었다.

귀신이란 존재가 두려워서가 아니다.

지금 낸 물음처럼 딸 고초희를 찾아온다면 죽일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그런 것들은 백 명 천명이라도 없앨 수 있다.

다만 꺼림칙해서다.

길가의 개똥을 피하는 건 무서워서가 아니라 본능이다.

“가능성은 있습니다.”

대답한 김부장은 그날을 떠올렸다.

지난 3월 24일, 이 모든 사건의 시작이 된 날이다.

온누리그룹 전략기획실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고초희를 데리고 있다는 전화였다. 원하는 장소에 내려줄테니 데려가란 내용.

그렇게 그날의 전모를 알았다. 고초희가 직원들 눈을 피해 한진수를 만났다는 것, 윤완규를 포함한 셋이 호텔에서 마약을 복용했다는 내용, 그 상태에서 차를 몰아 신명시로 이동하던 와중에 아이를 치어 죽인 결과.

그날 사망한 아이가 귀신의 혈육이다. 젊은 딸이 낳은 손녀인 것이다.

귀신이 그렇게 살고 있었다는 것에 놀랄 겨를이 없었다.

귀신은 역시 귀신, 윤완규를 납치해 죽이더니 한진수를 바로 처리했다. 하루만이다.

“호텔에 아가씨가 계셨다는 흔적은 바로 없앴습니다. 그 부분은 문제 될게 없습니다만, 한진수가 귀신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가 문제가 되는 부분입니다. 윤완규는 한진수 이야기만 흘렸습니다. 아가씨를 언급했다면 지금쯤 언론에서 말이 나와야 맞습니다. 윤완규는 아무 말 안한 겁니다.”

고종환은 고개를 끄덕였고 김부장은 계속 말했다.

“현재 한진수의 상태로는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만, 만에 하나 한진수가 아가씨의 이름을 거론했다면 귀신은 반드시 움직일 겁니다. 아가씨와 상관없는 사고였다고 해도, 그 차에 함께 타고 있었다는 것만으로……”

“그렇게 생각하나?”

고종환은 김부장을 돌아봤다. 느릿한 그 움직임에 이어진 서늘한 시선에 김부장은 호흡을 멈췄다. 회장의 저 눈은 평생을 봐왔지만 한결같다.

먹이사슬의 최상위에 군림하는 포식자의 눈, 저 눈은 진정 그런 눈이다.

“제 생각엔…… 아가씨하곤 관련 없는 사고였다고 봅니다.”

대답하며 김부장은 고개를 숙였다. 가슴 속에서 곤두서는 다른 대답을 억누르면서다. 갓난아기 때부터 봐온 고초희, 그녀의 눈은 회장과 같다.

“그래, 그렇겠지. 윤완규와 한진수 두 놈 다 마약에 취해있었으니까.”

느릿하게 다시 연못을 보며 돌아선 고종환은 미간을 찡그렸다.

“문제는 귀신이란 그놈이 그걸 모른다는 게, 아니 무시한다는 게 문제인데, 굳이 찾아온다면야 멱을 따버리면 되겠지만 번거롭고 시끄러워.”

김부장은 다시 입을 열었다.

“염려하시지 않도록 준비하고 조치하겠습니다. 귀신은 윤진건설과 온누리그룹에서 해결할 겁니다. 검경합동수사본부도 설치될 겁니다. 그놈이 아무리 귀신같다고 해도 이십오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결국 죽을 겁니다.”

윤진에게든 온누리에게든. 그 말을 김부장은 하지 않았지만 고종환은 들었다.

“그래야지, 개명한 세상에 귀신나부랭이가 설쳐서야 되겠나.”

연못물을 더듬고 지나가는 바람은 고종환회장과 김부장의 숨결을 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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