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살인자. 21. 과거 2.
21. 과거 2.
옷장 안의 미군박스를 꺼낸 장철은 내용물을 꺼냈다.
길이가 오십센티 정도의 중도 두 자루다.
이걸 받을 당시 백제도라고 들었지만 실상 왜도다.
그 옆에 쿠크리 두 자루를 내려놨다. 그리고 플라잉 나이프다.
‘여섯 개.’
탄띠처럼 착용하게 돼 있는 벨트에 나이프들이 숨을 죽이고 있다.
하나씩 꺼내서 날 상태를 살폈다.
이십오 년이 지났건만 서슬이 퍼렇다.
사라졌을 거라고 여겼던 것들, 그동안 조웅이 손질을 해 둔 게 분명하다.
‘좋아.’
흡족함을 삼킨 장철은 중도 두 자루를 응시했다. 쓸 만한 무기지만 이젠 사용할 일이 없을 것 같다. 사용한 적도 거의 없다. 선생님이 가지고 계셨던 무기다. 장철 자신에게는 이것보다도 몸에 잘 맞는 게 있다.
‘단봉.’
50cm 길이의 파이팅스틱 두 개다. 박달나무를 오랜 시간 동안 정련하고 가공해서 쇠보다 단단하다.
‘무게도 그립감도 좋아.’
조웅에게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이걸 잡으니 짜릿한 감각과 함께 기억들이 밀려온다. 97년, 필리핀으로 밀항해 넘어 갔을 때 인연이 닿았다.
‘칼리 아르니스.’
필리핀의 전통무예, 무기술을 배웠다. 원래도 격투무술 쪽엔 기이할 정도로 습득력이 빨랐던 터라 배우는 건 어렵지 않았다. 궁합이 잘 맞았다.
‘지녀도 칼만큼 문제가 되진 않아.’
단봉 두 자루를 움켜쥔 장철은 밖으로 나갔다.
어둠이 들이친 옥상에 때마침 지나가는 전철의 불빛이 휘젓는다.
그 광경을 바라보다 움직였다.
양손에 단봉을 쥐고 격렬하게, 부드럽게, 소용돌이처럼 어둠을 때렸다.
“후.”
숨을 내쉬며 움직임을 멈춘 장철은 다시 옥탑방 안으로 들어갔다. 내용물에 비해 큰 미군박스를 말없이 응시하다 무기들을 다시 넣었다. 중도 두 자루와 쿠크리 두 자루와 플라잉나이트 띠, 전부 선생님의 것이다.
정확히 유품이다. 이 물건들을 넘겨주시며 선생님은 말했다.
[피를 묻히면 돌아갈 길이란 없다. 온전한 삶 따윈 없지. 그런데 넌 이미 피로 물든 놈, 네가 갈 길은 정해져 있는 거다. 너와 내가 만난 건 귀신의 농간이 분명한 것 같다. 그래, 난 이제 쉬련다, 죽을 준비다.]
87년, 서울이 최루탄 연기로 자욱하던 그때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 말대로 그건 귀신의 농간이었을지 모르겠다.
수유리 벌떼클럽, 그곳을 잊을 수가 없다.
중국집을 그만두고 웨이터로 취직했던 곳, 운명의 장소다.
‘모두를 그곳에서 만났지.’
그해 4월, 419기념탑까지 행진하는 대학생들과 전투경찰들의 전투 아닌 전투가 벌어졌었다. 저녁장사는 글렀다고 혀를 차던 지배인과 아가씨들의 한숨과 욕이 나올 때였다. 수유리장사파가 갑자기 들이닥쳤다.
씨름선수출신이 보스와 간부들인 수유리장사파는 당시 수유리일대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조직이었다. 시절이 시절이라 움츠리고 있던 때인데 그날은 달랐다. 룸에서 술 마시던 손님 하나를 죽이려고 몰려왔다.
‘그날 내가 돕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수십 명에게 공격당하던 인물, 바로 선생님이다.
그는 혼자서 수유리장사파 조폭들을 귀신처럼 때려눕혔다.
하지만 숫자엔 장사 없다고 위기가 닥쳐왔다.
그렇게 되자 선생님은 조폭 놈 중 하나를 잡아 방패로 삼았다.
‘조웅.’
선생님에게 잡힌 조폭, 그가 조웅이다.
형제보육원을 탈출해 사라진 놈.
그 덕분에 원장에게 남은 아이들이 모진 매를 맞아야 했다. 경비가 강화돼 탈출은 꿈도 못 꾸게 됐다. 바로 그 조웅이 장철 자신을 바라봤다.
‘네가 준 초코파이.’
그 순간 그게 기억났다. 보육원에 끌려가 말 안 듣는 다고 죽도록 매를 맞은 후 독방에 갇혔을 때, 조웅이 밤에 몰래와 초코파이를 줬었다.
그러다간 맞아 죽을 거라고, 약게 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깨달았다.
‘사는 방법, 살아남는 길.’
그 조웅이 조폭이 되어 있었다.
수유리장사파의 조직원으로 선생님을 공격했다.
선생님의 손에 잡혀 목에 칼날이 닿아 있다.
수유리장사파 간부 놈들은 소리쳤다. 상관없다고, 죽여 버리라고.
그 순간 튀어나갔다.
“후우.”
옛 기억이 주는 감정에 장철은 큰 숨을 내쉬었다. 더듬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피가 뜨거워지는 이유는 그날 그녀를 거기서 만났기 때문이다.
‘은주.’
그녀를 운명처럼 만났다.
한동안 나오지 않다가 다시 나왔다는 아가씨, 그녀가 두려움에 물든 눈으로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솔직히 그날 어떻게 그곳을 빠져나왔는지 모른다.
조웅과 선생님과 함께 도망쳤다.
나중에 선생님이 말하셨다. 갑자기 튀어나와 수유리장사파조폭들을 때려눕히던 장철 자신은 미친놈 같았다고, 그런데 아주 위험한 맹수 같았다고.
그날 이후 선생님과 살게 됐다.
그분이 하던 일을 배웠다.
조웅은 일의 밑바탕 작업을 했다.
그렇게 귀신으로 살게 됐다. 그리고 그녀를 다시 만났다.
작업 목표를 찾아갔던 업소에서 마주쳤다.
그녀는 연락처를 줬다.
‘불을 보고 뛰어드는 불나방이라고 했지.’
처음 안던 날 그녀는 속삭였다.
자신은 위험을 알아보고 그것에 달려드는 여자라고.
그래서 장철 자신에게 연락처를 준거라고.
재수 옴 붙은 여자니까 조심하라고.
자신을 품은 남자는 귀신에게 잡혀간다고.
그게 무슨 의미인지 나중에 알았다.
장철 자신을 사랑하면서도 잊지 못하는 남자가 있다는 거.
그 남자를 생각하면 밤이고 낮이고 운다는 거.
그 남자가 동해의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는 거.
하은주 때문이라는 거.
‘그녀의 불행을 안고 살아가고 싶었겠지만……’
끝내 그 불행의 크기에 짓눌려 버린 거다.
장철 자신도 다르지 않았다.
하은주란 여인을 누구보다 사랑했지만, 사랑하면 할수록 상처만 커진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떠났다. 언젠가는 그래야했다. 정해진 일이었다.
“은주, 미안하다.”
천근같은 숨으로 중얼거림을 흘려낸 장철은 시선을 들었다.
벽을 향해 강렬한 안광을 던지며 과거를 다시 더듬었다.
형제보육원, 자신이 귀신이 될 씨앗을 품게 된 곳, 별관의 밤이 주던 공포가 생생히 기억난다.
* * *
21세기 비즈니스클럽이란 이름의 술집은 화려한 조명으로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었다. 강북구청역 일대를 중심으로 한 수유리 유흥가의 핵심위치다. 이곳이 과거의 벌떼클럽, 세월이 지났어도 여전히 술과 유흥이다.
“여기 주인이 전도성 의원인데, 괜찮은 걸까요?”
옅은 조심스러움으로 말하는 유지건, 그 경계를 최재우는 공감하고 읽었다.
정확히 지금은 국회의원이 아니고 전직의원이다.
씨름선수 출신으로 국회에 입성한 인물, 재선까지 했지만 폭력조직 관련설로 하차했다.
“괜찮고 안 괜찮고가 어딨어.”
툭 대꾸를 던진 최재우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지하의 21세기 비즈니스클럽이 아니라 10층 꼭대기로 가는 거다.
그곳에 강북구 상공인연합회가 있고 회장 전도성이 있다.
다른 자가 아닌 그를 만나야 할 일이다.
‘삼십오년 전의 기억을 가진 인물.’
전도성은 의심의 여지없이 폭력조직 출신이다.
그 힘을 기반으로 사업가의 탈을 쓰고 국회에까지 입성했던 거다.
지금도 그 바탕은 사라지지 않았다.
35년 전 벌떼클럽에 관해, 하은주에 관해 알만한 단서가 이자다.
‘직접 알고 있는 게 있다면 좋겠지만, 최소한 당시 상황을 알 만한 사람이라도 연결해 준다면 헛걸음은 아니야. 여길 거쳐서 서산으로 간다.’
엘리베이터기 올라가는 데 꼬르륵 하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송치호가 머쓱한 미소를 짓는다. 생각해보니 셋 다 저녁도 거르고 이러고 있다.
“여기 일 마치고 저녁 먹자.”
유지건이 반색하며 침을 삼킬 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복도로 나선 최재우는 상공인연합회 사무실 앞으로 걸어갔다. 불투명 유리문 앞에 서서 깊은 숨을 들이마신 뒤 노크를 했다. 안쪽의 반응은 바로 나왔다.
“연락하신 경찰분들 이신가요? 어서 들어오세요.”
여직원이 분명한 아가씨가 미소로 맞아 준다. 목례하며 들어간 최재우와 두 형사는 작은 회의실 같은 곳으로 들어갔다. 여직원은 차를 내준다.
“회장님이 지금 협회이사님들하고 미팅중이세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협회이사님들, 미팅 중, 그 의미를 최재우는 곱씹었다. 그런데 바로 때가 왔다. 회의실 문이 열리고 건장한 초로의 남자가 웃으며 들어온다.
“아이고 바쁜 분들을 기다리시게 했습니다.”
적당히 거만하면서 적당히 예의를 갖춘 인사를 내는 자, 전도성이다. 사진과 영상으로 보던 것처럼 체격이 좋은 호인형, 역시 씨름선수출신이다.
‘수유리장사파.’
조폭조직의 계보를 더듬으며 최재우는 마주 인사했다.
“신명경찰서 소속 강력팀장 최재우라고 합니다. 현재는 합동수사본수에 속해 있습니다.”
명함을 받아든 전도성은 굵은 턱을 내리고 미간을 가득 좁힌다.
“합수부라…… 그 사건이로군요.”
모를 수가 없는 사건, 뉴스에서 연일 용암처럼 토해내고 있는 일이다.
“자, 나한테 무슨 용건이 있는지 들어봅시다.”
신분을 밝히고 방문하겠다고 했을 때처럼 전도성은 호쾌한 반응이다. 그렇지만 분명 사건에 대해 알고 있고 상황흐름을 인지하고 있는 눈빛이다.
‘그럴 수 있는 배경이라면 뭘까, 언론에 공개된 귀신이란 이름 때문이겠지.’
최재우는 확신했다. 암흑가의 공포였던 이름이 되살아 난거다.
“벌떼클럽이란 말을 들었을 때 조금 놀랐습니다.”
의자를 빼 앉으며 자연스레 테이블 상석에 위치한 전도성은 목소리를 이어냈다.
“삼십오 년 전 이름인데 역시 경찰이구나. 나하고 연관 지어 찾아오는 과정도 그런 거지, 하고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만, 본론이 뭘까는 궁금합니다.”
이제 용건을 까보라는 전도성의 눈길, 최재우는 바로 직행했다.
“삼십오년 전 벌떼클럽에서 일했던 ‘하은주’ 라는 여성에 대해 조사 중입니다. 본명으로 일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당시 일한 것은 확실합니다.”
최재우는 사진을 내밀었다. 장철의 집에서 찾아낸, 자살한 딸 장민지의 소지품 속에서 가져온 하은주의 젊은 시절 사진이다. 상당한 미인이다.
“하은주?”
좁힌 미간으로 테이블 위 사진을 끌어당긴 전도성은 흠칫했다.
그 반응을 최재우와 두 형사는 확실하게 캐치했다.
아는 얼굴, 분명히 그렇다.
‘확실히 알아. 삼십오년 전 얼굴인데 저렇게 단번에 기억할 정도.’
전도성은 자신이 표정으로 드러냈다는 걸 인지했다. 그래선지 순순히 말한다.
“가희로군.”
“가희요?”
“아름다울 가(佳)에 계집 희(嬉), 그 사진 속 여자를 그 이름으로 불렀소.”
“그렇습니까?”
업소에서 부른 이름이란 거다. 역시 전도성은 알고 있다. 알고 있을 만한 다른 누군가의 연결을 바랄 필요가 없다. 전도성이 알고 있는 거다.
“알고 왔겠지만 삼십오 년 전 당시 난 부지배인이었소, 주로 하는 일이 아가씨들 관리였지.”
어투마저 약간 달라진 전도성은 회상에 젖은 눈은 눈으로 묻는다.
“그 여자를 왜 찾는 건지 물어봐도 되겠소?”
어투에 어느 정도 긴장을 실은 전도성, 그 눈을 향해 최재우는 대답했다.
“귀신 사건입니다.”
전도성의 얼굴이 순간 경직했다. 아니 하얗게 탈색했다.
귀신이란 말이 전해준 결과, 세 형사는 오히려 당황했지만 당연한 반응이라고도 여겼다.
전도성은 수유리장사파에 근본을 둔 인물, 암흑가 인물에겐 그런 거다. 게다가 귀신연관사건임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런 직접성은 놀람인 거다.
“회장님이 하은주를 직접 기억하고 계신 건 예상 밖입니다만……”
입을 연 최재우는 눈빛으로 뒷말을 던졌다. 이런 저런 구차한 이야기와 사족을 걷어내고 핵심만을 말하자는 거다. 그래야 할 사안이란 거다.
“내가 삼십오 년 전에……”
최재우의 눈빛이 주는 의미를 받아들인 전도성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10시가 넘었는데 조웅이 올라왔다. 말없이 옥탑 방 안으로 들어와서 냉장고의 생수부터 꺼내 마신다. 그 모습을 장철은 아무런 반응 없이 바라봤다.
“알아낸 것 같다.”
장철은 눈동자를 번득였다.
자신이 조웅에게 부탁한 것, 고초희의 소재다.
역시 조웅이다.
선생님의 아래서 그림자로 사는 법을 배운 결과다.
귀신이 된 장철 자신의 그림자로 살며 해온 일, 그걸 거부한 적 있다.
‘날 팔아먹은.’
그날의 기억이 스며드는 걸 장철은 바로 밀어냈다.
“어디야?”
생수병을 싱크대 위에 내리고 돌아선 조웅은 강한 눈길을 던진다.
“꼭 해야겠냐?”
바위 같은 장철의 얼굴을 보며 조웅은 스르르 시선을 내렸다.
“해야겠지.”
지울 수 없는 기억이 떠오른다. 귀신의 그림자로 살기를 거부했던, 그림자의 삶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귀신을 팔아먹었다. 그 대가로 죽을 뻔했다. 그런데 귀신이 살려줬다. 죽이려던 놈들로부터 살렸다.
‘두 번, 아니 세 번.’
형제보육원에서 형들에게 당할 때 장철이 뛰어들었었다.
그런 장철을 버리고 혼자서 도망쳤다.
다시 만났을 때, 벌떼클럽에서 구해줬다.
그런데 자신은 또 버렸다.
여자 때문에, 멀리 도망가 살겠다고 장철을 팔았다.
“의왕이다.”
장철의 눈동자가 섬뜩하게 번지는 걸 응시하며 조웅은 남은 말을 뱉었다.
“세경개발 소유의 타운하우스단지가 있다. 거기 고초희가 있다.”
장철은 바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