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혼의 살인자-26화 (26/200)

황혼의 살인자. 26. 피의 대가.

26. 피의 대가.

부옇게 밝아오는 동녘을 바라보며 장철은 상처부위를 강하게 동여맸다. 왼쪽승모근과 오른쪽옆구리, 9mm 권총탄이 박혀 있다. 이걸 빼야 한다.

‘우선은 안전하게 벗어나서.’

등산용 윈드점퍼를 다시 걸친 장철은 숲을 빠져나갔다.

법정등산로를 향해 이동, 새벽산행을 하는 등산객들 사이로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청계산, 유명한 곳답게 산행객들이 많다.

하산 길로 유유자적하게 이동했다.

‘청계산입구역에서 강남역……’

이동루트를 그리며 장철은 산을 내려갔다. 동시에 지난밤을 되새겼다.

백운타운하우스단지에서 해야 할 일을 마무리 짓고 돌아선 길, 추적해오는 놈들을 떼 내고 밤을 새워 이곳 청계산까지 이동한 경로, 피곤하다.

‘피를 제법 흘렸어.’

총격에 당한 상처 때문에 운신이 쉽지 않았다. 배낭에 준비해 뒀던 생수를 마시며 수분을 보충해 주지 않았더라면 곤란했을 것이다. 물론 생수가 없다고 해도 산에는 물이 있으니 상관없지만, 어떠하든 힘이 들었다.

‘끝냈어.’

깊은 속에서부터 끌어낸 숨을 장철은 흘려냈다.

마침내 복수를 이뤘다.

윤완규에 이어 한진수, 그리고 고초희까지 응징했다.

딸이 원하던 복수를 했다.

손녀 영이가 비명에 숨진 원한을 풀었다.

그런데 끝이 아니다.

‘끝이 있을까?’

원한을 갚아야 할 대상들에게 설분했다. 그러니 복수는 끝난 거다.

그러나 피의 대가는 이렇게 끝나는 게 아니다.

손댄 것들에게는 가족들이 남아 있다.

장철 자신이 복수에 나선 것처럼 그들도 복수를 할 것이다.

‘날 죽이려고 덤벼들겠지.’

윤진과 온누리그룹, 세경개발이 그럴 거다.

어젯밤 고초희 곁엔 윤진건설의 칼들이 있었다.

그러한 것이다.

피로서 시작한 일은 피로서 끝나지 않는다.

완전한 피의 종말이 없는 한, 피는 계속해서 피를 요구한다.

‘그걸 깨닫는데 삼십년이 걸렸는데……’

그래서 돌아왔다. 손에서 칼을 놓고 피와 죽음으로부터 돌아섰다.

그러나 이미 악귀가 된 몸과 마음, 이 손과 몸뚱이에 젖어든 혈향은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그걸 알기에 지우려고 하지 않았다. 그냥 숨어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으로 돌아와 오년이 지난 그해, 딸이 찾아온 거다.

조웅에게 연락했던 결과, 잘못을 따지거나 화를 내거나, 그런 것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처음 본 딸이 안고 있는 아기를 본 순간 다 잊었다.

그날부터 삶의 목적이 생겼다.

영육에 밴 피냄새를 망각하고 살았다.

딸과 손녀를 위해 남은 삶을 살기로 했다.

하루하루가 즐겁고 행복했다.

태어나서 이런 날을 누리게 될 줄은, 입가에 미소를 품게 될 줄은 몰랐다.

“후우.”

걸음을 멈춘 장철은 딸과 손녀의 생각에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떨었다. 하산하던 등산객들이 힐긋 쳐다본다. 힘들어서라고 생각하며 지나친다.

생수병을 꺼내 물을 마신 장철은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현실을 직시하며 이후를 생각했다.

다시 칼을 잡았고 피를 묻혔다.

이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것은 장철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과의 싸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너희가 원한다면. 아니 애초에 내가 결정한 대로.’

그거다, 이미 지옥에 들어 있다.

빠져나갈 수 없는 지옥, 그 삶의 유일한 빛을 해친 것들을 모조리 죽이겠다고 맹세했다.

이제 시작했을 뿐이다.

‘끝까지.’

점점 열기가 더해지는 총상부위를 무시하며 장철은 부지런히 하산했다.

어느새 훤하게 아침이 밝았다. 등산로를 벗어나 지하철역에 이르렀다. 개찰구를 지나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로 모습을 확인하고 다시 나왔다.

승강장으로 이동하던 장철은 에스컬레이터를 뛰어내려오는 일단의 무리를 봤다.

추적하는 놈들, 현진이다.

청계산으로 뒤를 추적해 오던 놈들이 아니다.

장철 자신의 도주 방향을 예상, 차량으로 이동해 온 놈들이다.

그렇지만 덤불에서 바늘 찾기다.

등산객들로 북적거리는 지하철 역 안이다.

행사가 있는지 산행팀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로 가득 찼다.

장철 자신에게는 행운이다. 당황한 현진 놈들을 모르는 척 승강장으로 향했다.

때맞춰 들어오는 전철을 향해 장철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 * *

치 떨리는 숨을 연신 삼키며 오동진은 역을 바라봤다.

등산객들이 연신 드나드는 청계산입구역, 이곳까지 왔지만 결국 놈을 놓쳤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밤새워 산을 탄, 사방으로 뒤진 결과를 몸뚱이가 호소한다.

‘이곳으로 왔는지도 확실치 않아.’

귀신은 정말 귀신처럼 사라졌다. 바로 뒤를 쫓았건만 소용이 없는 결과다. 이곳일 가능성이 가장 커서 현진직원들을 차량으로 이동하게 했건만 그것도 늦었다. 아니 저러한 풍경 속에 스며든 귀신을 찾을 수 없다.

‘등산객들.’

중장년의 등산객들이 가득하다. 도대체 이 나라에 등산인구가 왜 이렇게 많아진 걸까, 나이 들면 산이라는 공식은 언제 어떻게 생긴 걸까, 저들 속에 장철이 마스크를 쓰고 스며들면 찾아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런 식의 도주를 사전에 준비했어.’

등산복과 배낭이다. 귀신은 그런 복장으로 산을 탔다.

방향은 여러 곳이었다.

출발지인 백운호수에서 그대로 동진했다면 바라산을 끼고 나가 성남 쪽으로 갈수 있다. 남쪽으론 광교산을 넘어가면 수원 경기대쪽이다.

그 방향들의 가능성을 추적하다 보니 놓쳤다.

우왕좌왕 하다 가장 확률이 높다고 판단한 이곳에서 닭 쫓던 개가 됐다.

밤은 지나갔고 귀신은 사라졌다.

청계산을 내려오는 동안 등산객들의 놀란 시선이 새삼스럽다.

‘귀신……!’

사진으로 본 장철의 얼굴을 떠올리며 오동진은 피눈물을 삼켰다.

형 오동철이 죽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돌아가지 않은 건 귀신을 반드시 잡아 죽이기 위해서다.

실패했다. 이젠 결과를 수습하고 다음을 준비해야 한다.

“윤회장이 계속 전화하고 있습니다.”

긴장으로 굳은 현진 직원, 형 오동철의 부하 얼굴을 돌아본 오동진은 폰을 꺼냈다. 지나가며 힐긋대는 등산객들의 시선 속에서 전화를 걸었다.

-이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고함부터 치는 윤종대를 죽여 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오동진은 이를 악물었다.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이어지는 흥분과 분노를 말없이 받았다.

-세경개발에서 전화가 왔어! 흡혈귀늙은이가 미쳐서 날뛰고 있단 말이야! 그 늙은이 딸이 귀신에게 당했다는데, 현진직원들이 죽었다는데 뭐가……

“형이 죽었습니다.”

오동진의 그 한마디에 윤종대회장은 흡 하고 숨을 멈췄다.

-그, 그게, 무슨……

오동진은 흥분과 분노 밑으로 가라앉힌 감정을 씹으며 이야기했다.

“세경 고초희에게서 전화가 왔었습니다……”

윤완규의 차에 고초희가 함께 타고 있었던 내용, 그녀가 만든 함정, 그것을 이용하기로 한 형제의 결정, 그렇게 이뤄진 결과를 오동진은 말했다.

-그런……!

다른 말을 더 하지 못하고 윤종대는 숨만 부들거렸다.

그 소리를 오동진은 확실히 들었다.

왜 아니랴, 믿고 있던 형 오동철이 죽었다.

예상치도 못한 세경의 딸 고초희가 연루됐다.

고종환회장의 분노가 곤두섰다.

-결국…… 놓친 거지?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윤종대에게 오동진은 말했다.

“잡을 겁니다. 내손으로 죽일 겁니다.”

* * *

수술실에서 막 나온 딸.

일인실의 특별중환자병실로 옮겨지는 고초희를 보며 고종환은 긴 숨을 토해냈다.

이게 무슨 일인지 황당하고 믿기지 않는다.

한진수처럼 당했다.

귀신이 딸 고초희의 머리에 칼을 박았다.

“회장님.”

곁으로 다가온 김부장을 고종환은 돌아보지 않았다.

같은 소리여서다.

온누리회장 한대건이 대면하길 원한다는 소리, 이병원이 그놈의 것이다. 이곳에 한진수도 누워 있다. 그놈 수술경험이 있는 이곳으로 온 거다.

“팔 다리는 어떻다는 거야?”

김부장은 고종환의 옆얼굴을 곤혹스럽게 응시하다 대답했다.

“이전처럼 되진 않을 거라고 합니다.”

잘라낸 팔다리를 다시 붙였다. 그렇지만 역시 이전처럼 되진 않는 단 거다. 또다시 치가 떨린다. 그놈은 딸 고초희를 짐승처럼 토막을 냈다.

“머리는?”

알면서도 묻는 고종환의 심정을 헤아리기에 김부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진수의 상태와 같습니다. 호전 될 가능성은…… 신에게 달렸다고 합니다.”

고종환은 입술을 비틀며 어금니를 물었다.

‘신 같은 소리……!’

딸은 죽었다.

숨이 붙어있지만 죽은 거다. 좌측두부를 뚫고 칼이 박혔다.

절명했어야 맞다.

그런데 숨만 붙어있는 산시체가 됐다.

귀신의 의도다.

“아버지.”

다가오는 중년남자를 향해 고종환은 시선을 돌렸다.

본처에게서 난 아들 고재춘, 심각하게 경직한 얼굴과 눈동자로 다가와 병실을 돌아본다.

이복동생 고초희를 보는 눈이 무겁다.

저 눈 속에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초희가 무리한 짓을 벌였습니다.”

아들의 입에서 목소리가 나오는 순간 고종환은 시선을 돌렸다. 아들이 돌아보는 눈길을 외면하고, 유리벽 너머로 누워 있는 딸을 응시했다.

“윤진건설에, 그 회사에 속한 현진써큐리티에 전화를 걸었다고 합니다.”

이미 아는 이야기, 김부장이 파악해 보고한 내용이다.

“윤종대회장이 아들 일로 귀신이란 놈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상황에, 불에 기름을 부은 겁니다. 초희 제가 미끼가 될 테니 와서 잡으라고 한 거죠. 제정신으로 할 짓이 아닙니다. 어려서부터 그러더니 결국……”

“누구 때문이냐?”

말을 자르고 튀어나온 물음, 부친 고종환회장의 반응에 고재춘은 미간을 좁혔다. 여전히 병실 안 고초희만을 바라보는 아버지, 다시 말한다.

“초희가 어려서부터 그랬다고? 그래, 유별난 성격을 가졌지. 울다가 웃다가 보이는 모든 걸 때려 부수다가, 얌전히 음악을 듣고 십자수를 놓고……”

의식 없는 고초희를 응시하는 고종환의 눈에 습기가 드리웠다.

“키우던 개를 죽이고 고양이 배를 갈랐을 때는 정말 놀랐었지.”

그때를 떠올린 건지 고종환회장은 입을 다물고 미간을 꿈틀거렸다.

“도대체 저 아이가 왜 저럴까, 엄마 없이 자라는 게 이렇게 어려운 건가. 정말로 몰랐다. 원인이 있다는 걸. 그게 바로 너라는 걸. 알지 못했어.”

고재춘의 안색은 창백하게 변했고 고종환은 이어 말했다.

“초희가 어려서부터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다. 그 전에, 초희가 태어나기 전에 한 짓도 알고 있지.”

고재춘은 이제 숨 쉬는 걸 잊었다.

“초희 엄마가 일기를 남겼다. 나도 몰랐다. 엄마를 그리워하던 초희가 유품 속에서 발견한 거다. 네가, 스무 살의 의붓아들이 음욕을 채우려고 덮친 일을 그녀는 일기에 적었지. 널 위해 내게는 알리지 않고 말이야.”

고종환은 아들 고재춘에게 느릿하게 시선을 돌렸다.

자신도 모르게 한발을 물러나는 아들을 말없이 바라봤다. 그러다 물음을 던졌다.

“젊은 새엄마에게 성공 못한 짓을 이복동생에게, 또 그 짓을 했어야 했냐?”

다시 또 한걸음을 물러나는 고재춘, 고종환은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초희가 저 지경이 된 건 너 때문이란 말이다!”

* * *

옥탑방에 들어앉은 장철을, 동여맨 총상부위를 풀어내는 귀신을 조웅은 황당하게 바라봤다. 저런 부상을 입고도 태연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정말로 등산이라도 다녀온 것 같은 모습, 귀신의 존재가 새삼스럽다.

“그대로 둬.”

장철에게 다 풀지 말 것은 경고한 조웅은 폰을 잡았다. 문자를 확인한다.

“다 왔어. 5분 정도 걸릴 거야.”

장철은 묵직한 시선으로 조웅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정말 괜찮은 건가?”

“믿으라니까 그러네. 입이 무겁고 신중한 친구야. 의료사고가 아니었다면 잘나가며 벤츠나 몰고 다닐 친구지. 뒤탈이 생길 염려는 붙들어 매.”

조웅은 벌써 준비를 시작했다. 현재의 거점을 버리고 숨는 일이다.

그건 여태 이뤄놓은 모든 걸 버리는 일, 하지만 장철은 미안하다고 더는 말하지 않았다.

조웅 역시 그런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이미 한 번 했다.

귀신은 사과 같은 걸 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했다.

세월이 바꿔놓은 것일까. 그것만으로도 놀랄 일이다.

상관없다. 중요한건 해야 할 일일뿐이란 거다. 이 끝이 어떻게 될지라도 시작했으니 끝까지 가는 거다.

“그런데 확실히 끝낸 거야?”

물어봐 놓고 조웅은 손을 흔들었다. 괜한 소리를 했다는 반응, 이 일은 끝이 정해져 있지 않은 일인 거다. 그래서 자신도 숨을 준비를 하는 거다. 게다가 귀신이 어설프게 했을 리가 없다. 저렇게 총까지 맞고 온 거다.

물음의 대답 대신 장철은 나지막이 다른 말을 한다.

“알아서 하겠지만 모든 일엔 구멍이 생길 수가 있어.”

의사를 부른 것에 대한 경고, 말해놓고 장철은 자신을 나무랐다.

애초에 이런 꼴로 돌아오지 않았으면 없었을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됐다. 총탄을 빼고 수습해야 한다. 그런 일에 하나마나한 소리인 거다.

“나한테 맡겨. 어, 왔네.”

폰 문자를 확인한 조웅은 옥탑방을 나갔다.

잠시 후에 한 남자와 같이 들어왔다.

필요한 의료물품들이 든 가방을 든 남자, 신중하게 들어온다.

상처를 드러내고 누운 장철은 음지의 의사에게 몸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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