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살인자. 28. 기상
28. 기상.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지 장철은 바로 확인했다.
폰을 보니 오후 2시다.
마취제덕분인지 잘 자고 일어난 기분이다. 이 부분이 조금 의아하다.
‘수면유도제 같은 걸로 마취했던 건가?’
프로포폴 같은 걸 사용한 모양이다. 기존의 마취제와 달리 부작용이 거의 없는 약물로 알고 있다. 때문에 오남용으로 중독자가 많아지고 있다. 유명인사 등이 이 약물을 불법투약 한 뉴스가 심심하면 나오는 이유다.
‘좋군.’
개운한 몸 상태를 느끼며 장철은 상처부위를 확인했다.
왼 어깨와 오른쪽 옆구리는 잘 처치돼 있다.
총탄이 박혀 있던 느낌도 사라졌다.
옆구리의 경우 장기에까지 미치지 못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대견하다.
‘계속해서 몸을 관리해온 덕분이야.’
새벽마다 뒷산으로 운동을 나갔다. 지난 세월 동안 언제나 그랬지만 한국에 돌아와서, 딸과 손녀와 함께 살면서는 더욱더 건강을 신경 썼다.
이 몸뚱이 하나뿐이니 건강해야 그 아이들을 돌볼 것이기 때문이다.
‘돈이 필요하다고 처음으로 느꼈어.’
딸과 손녀가 가족으로 찾아온 이후부터, 그 행복을 알게 된 때부터 돈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그전까지는 돈이란 것에 대해 의미를 두지 않았다.
한국을 떠날 때도 그랬고 다시 돌아올 때도 가지고 있던 돈은 없었다.
‘더 좋은 집으로 이사 가고 싶어 했는데……’
딸이 말은 안했지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손녀 장영이 클수록 더 좋은 환경에서 잘 키우고 싶은 마음인 거다.
그걸 해줘야 했는데 못해줬다.
그때까지는 전세로 살던 빌라를 사는 게 전부였다.
지니고 있던 달러에 돌아와 일해서 저축한 돈을 합쳐 힘겹게 마련했던 거다.
딸과 손녀를 안정된 환경에서 살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랬는데, 더 열심히 일해서 좋은 집으로 이사 가려 했는데, 딸은 병에 걸려버렸다.
“민지야……!”
딸을 부르며 고개 숙인 장철은 잠시 그 상태로 숨을 고른 뒤 일어섰다.
후끈거리는 감각으로 상태를 외치는 부상을 무시하고 옥탑방 밖으로 나갔다.
파란 하늘 아래 전철교각이 보인다.
때맞춰 전철이 지나간다.
‘여길 벗어나야 해.’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생각으로 장철은 현황을 더듬었다.
고초희에게 다가간 루트는 역으로 비수가 될 것이다.
세경과 온누리와 윤진, 그중의 누구든 전부이든 닥쳐올 것이다.
그 전에 흔적을 지우고 숨어야 한다.
‘고초희.’
그녀를 처단한 결과를 장철은 새삼 음미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제삼의 인물, 한진수를 통해 그년을 찾았다.
그년 눈을 보고 알았다.
손녀 장영을 해친 진정한 원수라는 걸, 그 눈동자에 든 지독한 악의를 봤다.
‘그년은……’
정상적인 인간의 눈빛이 아니었다. 장철 자신이 다른 누군가에게 이런 평가를 할 존재가 아니지만, 고초희는 살기와 악기로 뭉쳐진 년이었다.
어째서 그런 것인가를 헤아릴 일이 아니다. 그년이 가진 태생의 문제다.
‘살인을 해본, 그걸 즐기는.’
고초희의 얼굴과 하얗게 웃던 눈동자를 떠올리던 장철은 미간을 찌푸렸다.
‘왜지?’
응징해야 할 진짜 원수를 처결했다.
그런데 뭔지 모를 앙금 같은 게 가슴에 남아 있다.
고초희까지 세 년 놈을 전부 해결했는데 왜 이런지 모르겠다.
이건 남아 있는 것들까지 죽여 버리겠다는 의지 때문이 아니다.
‘거울만 깨뜨리고 만 것 같은 느낌.’
기이하게 그런 느낌이다.
볼일을 보고 뒤를 안 닦은 것 같은 느낌이 이런 거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고초희는 죽였다. 산시체로 만들었다.
이런 느낌을 갖는 이유는 부상으로 인한 피곤함, 나이를 먹어서가 맞을 거다.
“일어났구나.”
옥상으로 올라오는 조웅을 장철은 돌아봤다. 기름이 밴 누런 봉투를 들고 있다. 모양으로도 알겠지만 바람을 타고 날아온 냄새로 닭임을 알겠다.
“옛날통닭이다.”
평상에 앉은 조웅을 향해 장철은 다가갔다. 장작불로 구운 옛날 통닭이란 글자가 봉투에 보인다. 그걸 찢는 조웅의 손에 노릇한 닭다리가 잡혔다. 가차 없이 뜯어서 내민다. 받아들고 평상에 앉아 냄새를 맡았다.
“옛날 생각나지?”
크리스마스에 통닭이 나왔었다.
보육원에서 맞게 된 첫 번째 크리스마스였다.
그날 통닭을 온전히 먹을 수 있었던 이유는 봉사 나온 학생들 덕분이었다. 고등학생 RCY 형과 누나들이 통닭을 뜯어 아이들에게 나눠줬다.
“그때 먹은 통닭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었어.”
남은 닭다리를 입에 물기 전 조웅은 피식거렸다. 지난 시간을 회상해서고 그런 인생을 살아온 것에 대한 조소다. 힘차게 닭다리를 뜯는다.
“식기 전에 먹어. 너 피 많이 흘렸다.”
조웅의 권유와 먹는 모습에 장철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때 말이다. 봉사 나온 형누나들이 없었으면 우린 닭뼈나 빨았을 거야.”
조웅의 말이 맞다. 가동 놈들에게 전부 뺏겼을 거다. 물론 원장이 먼저 챙긴 후가 되겠지만, 어쨌든 형누나들이 함께 있던 덕분에 먹을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행복한 날이라는 걸 그날 처음으로 알았지.”
다시 피식거리는 조웅을 보며 장철은 닭다리를 씹었다. 입 안 가득 퍼지는 닭기름과 살의 맛이 황홀할 지경이다. 이 흔하고 하찮은 음식이 그때는 하늘이 내려주신 선물처럼 감사했다. 조웅처럼 그때생각이 난다.
‘우리 가족은……’
크리스마스를 한 번도 특별하게 여긴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날이 좋으면 바다에 나가셨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위해 밥을 지으셨다. 장철 자신만 할머니에게 칭얼대 받은 돈을 가지고 점방에 달려갈 뿐이었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하고 케익을 잘라먹고 함께 웃고, 그런 크리스마스를 딸과 손녀를 만나 보냈다.
살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만끽했었다.
이런 게 사는 거라고, 이래서 살아야 하는 거라고, 딸과 손녀를 보고 웃었었다.
“오늘 밤이 되기 전에 떠나자.”
다리뼈를 던지고 날개를 잡아 뜯은 조웅은 장철의 눈을 응시하며 뒷말을 냈다.
“계약 끝냈다. 이 건물 노리던 놈이 있었는데, 싸게 넘긴다니까 바로 물었다. 잔금까지 다 받았어. 특별히 이삿짐을 뺄 것도 없으니 몸만 가면 돼.”
장철은 조웅의 눈을 말없이 응시했다. 그 시선에 담긴 뜻을 조웅은 읽었다.
“헛소리 들을 생각 없다.”
조웅의 뜻은 확고하다.
장철 자신과 함께 하겠단 거다.
왜 그런지도 알겠다.
지나온 세월, 남은 시간, 모든 것을 더듬고 헤아려 나온 결론이다.
“죽을 거다.”
장철이 낸 한마디. 조웅은 또 피식 웃는다.
“네가 살려줄 거잖아. 옛날처럼.”
말없는 장철의 시선을 무시하고 조웅은 닭날개를 맛있게 뜯었다.
* * *
싸늘하게 식어버린 형 오동철의 시신 앞에서 오동진은 심장의 고통을 느꼈다. 벌떡거리며 뛰는 게 곧 터져버릴 것 같더니 이렇게 조여든다.
‘형……!’
세상에 하나뿐인 가족, 혈육이다. 그 형이 갔다. 이제 혼자 남았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어째서 형이 이렇게 됐을까, 형은 전사였는데 어째서.
“귀신.”
그 이름을 입 밖으로 소리 낸 오동진은 시선을 들었다. 관속에 누운 형 오동철은 다시 응시했다. 부러진 다리와 박살난 가슴을 눈에 박았다.
“기다려, 형 앞에 그놈을 끌고 올게.”
관을 덮은 오동진은 냉동보관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뒤로 물러나 새삼 실내를 돌아봤다.
온누리병원 내부에 있는 특별한 공간이다.
타운하우스 단지에서 고초희를 이곳으로 옮겨왔기 때문에 형도 여기 있게 됐다.
이제 형 오동철은 이곳에서 당분간 머물러야 한다. 귀신을 잡을 때까지다. 그전에는 장례를 치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곳으로 형을 옮겨온 세경 측의 행사가 나쁘지만은 않다. 그들에게 항의할 처지도 아니다.
‘윤회장은 이제 저런 역할을 하면 되는 거야.’
그는 지금 세경의 고종환회장 앞에 고갤 조아리고 있다. 그 옆엔 온누리그룹 총회장 한대건이 있을 거다. 윤종대가 뭐라고 하던 이제 그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다. 형 오동철의 복수가 최우선, 윤종대도 수단이다.
‘너희들에게서 정보를 얻는 게 가장 빠르겠지.’
세경과 온누리는 그 일을 하고 있다.
세경이야 워낙에 흑막에 싸여 있어서 잘 모르겠지만 온누리의 전략기획실은 알려진 비밀이다.
그들의 능력이면 아무리 귀신이라고 해도 꼬리가 잡힐 거다.
그 기회를 잡는 거다.
“흐읍.”
가슴과 아랫배가 가득 차게 숨을 들이마신 오동진은 숫자를 세며 느리게 뿜어냈다. 그렇게 심정을 다스리고 현황을 곱씹으며 밖으로 나갔다.
지하를 벗어나 병원 밖 푸른 하늘 아래 섰다. 하늘을 보는데 폰이 운다.
‘응?’
문자메시지 알림음, 확인한 내용은 예상치 못한 것이다.
[고초희가 남긴 귀신의 단서를 드리겠습니다.]
이게 뭐야 하는 반응으로 눈을 치뜬 오동진은 바로 이어진 문자를 확인했다.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한 내용, 혼자서 나와야 만나겠다고 한다.
눈썹을 있는 대로 세우고 가늘게 떨던 오동진은 주차장으로 걸었다. 지금 막 형 오동철의 시신을 보고 나온 자의 모습으로, 그걸 주시하고 있을 세경과 온누리의 시선을 모르는 것처럼, 비통을 흘리며 차를 출발했다.
* * *
온나라그룹 전략기획실이 뭐하는 곳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다. 온나라그룹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신사업을 설계하고 그에 필요한 모든 일을 추진하는 곳이다. 그게 겉모습이다.
“그동안 파악한 장철과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한 정보는 테이블에 놓인 파일에 들어 있습니다. 세경에서도 이미 파악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전략기획실장 최길준의 시선은 고종환회장의 곁에 선 김부장에게로 건너갔다. 하지만 그 눈길을 바로 고쳐 잡으며 앉아있는 인물들에게 말했다.
“장철은 과거 악명을 날렸던 ‘귀신’ 이란 존재입니다. 놈을 잡기 위해 검경합동수사본부를 설치했지만 기대할게 없는 상황입니다. 유일한 효용이라면 귀신의 정체를 밝혀낸 것 정도, 앞으로도 다를 건 없을 겁니다.”
근엄한 얼굴로 듣고 있던 고종환회장이 입을 열었다.
“사족은 걷어내지.”
그래서 너희가 지금 귀신을 잡기 위해 모슨 일을 어디까지 하고 있냐는 물음.
최길준은 한대건회장과 짧은 순간 눈을 맞추고 바로 입을 연다.
“귀신 장철의 능력을 고려한다면 대응할만한 전투력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 부분은 회장님이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미국에서 전문인력들을 불렀습니다. 적절하고 유효한 대응이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옅게 찌푸려지는 고종환의 얼굴을 보며 최길준은 빠르게 뒷말을 이어냈다.
“핵심은 전문인력들이 귀신을 타격하기 위한 준비과정, 그러한 환경 조성입니다만, 그렇게 때문에 귀신의 행동을 추적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최길준의 눈은 두루뭉술한 몸과 같은 시선을 흘리고 세경 김부장에게 돌아갔다.
“타운하우스 단지에 초희아가씨가 계시던 내용, 그러한 정보를 귀신이 취하게 된 이유가 있을 겁니다. 의도적인 탐지였든 우연한 누출이었든, 그 원점은 타운하우스라고 판단합니다. 그 부분에 대한 협조가 이뤄진다면 진행이 수월하고 빠를 겁니다. 세경은 이미 시작한 걸로 압니다.”
김부장은 여전히 속마음을 알길 없는 표정, 그 앞에 앉은 고종환이 말한다.
“필요한건 전부 공유하도록 해.”
김부장은 고종환의 뒷등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알겠습니다.”
허리를 편 김부장은 양복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최길준의 옆으로 걸어갔다. 눈길을 던지는 두 거인의 응시하며 새삼 이 자리, 이 공간을 절감했다. 온누리병원 vip룸이다. 자식을 잃은 두 회장의 눈이 칼날로 섰다.
“현재까지 알아낸 바에 의하면 최길준 전략기획실장의 판단과 같습니다. 아가씨의 거처가 타운하우스단지라는 정보는 그곳에서 새나갔습니다.”
상황을 인지하고 불과 반나절, 그 시간에 결과를 이뤄낸 세경의 능력을 최길준은 음미했다. 그렇기는 고종환회장과 앉은 한대건도 마찬가지다.
“그곳을 들고난 인원전부를 조사한 결과입니다. 경호인력들은 아닙니다. 단지관리를 위해 투입한 용역업체 인원들입니다. 특히 아가씨가 머물던 집에 출입하며 청소와 가사일을 하던 도우미들인 걸로 확인됐습니다.”
고종환회장의 눈이 파랗게 빛나는 가운데 김부장은 뒷말을 이어냈다.
“특기해야 할 부분은 그들이 아가씨의 신분을 알게 된 배경입니다. 백운레이크타운하우스단지가 세경의 소유라는 건 알려진 내용이 아닙니다. 아가씨의 신원은 더욱이나 기밀이었습니다. 그게 알려진 이유는 아가씨가 말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누군지를 자랑하듯이 말했다고 합니다.”
온누리 한대건회장의 눈은 황당함으로 커졌고 고종환회장은 신경질을 냈다.
“핵심만 말해!”
시종 변함없는 얼굴의 김부장은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고종환은 늙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테이블 위 파일을 움켜잡았다. 그 모습이 넓게 트인 창문 유리창에 비쳤다. 파란 하늘은 오후로 기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