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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의 살인자-29화 (29/200)

황혼의 살인자. 29. 귀신의 그림자 1.

29. 귀신의 그림자 1.

강남역은 언제나 그렇듯이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대한민국의 부와 에너지가 집약된 곳이기에 당연하다고 여겨왔지만 오늘은 그게 짜증난다.

‘이런 곳에서……’

유명커피전문점 안으로 발을 들인 오동진은 창가의 자리로 앉았다. 문자를 보낸 상대가 누군지 모르기에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연락 받았다.

‘날 안단 말이지?’

상대는 오동진 자신의 얼굴을 알고 있다.

그것도 기분 나쁘지만 이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런데 어쩔 수 없는 처지다. 귀신에 대한 단서를 잡자면 응해야 한다.

만일 이게 수작이라면 모가지를 딸 것이다.

‘응?’

주머니 속 폰의 진동 몸부림을 느낀 오동진은 폰을 꺼냈다.

발신번호를 보니 윤종대회장이다.

고종환회장의 앞에서 조아린 결과가 궁금하다.

“말씀하십시오.”

나직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은 오동진은 윤종대의 거친 숨을 들었다.

-지금 어디야?

“강남역입니다.”

-강남역? 거긴 왜? 병원에 있는 게 아니고?

“하실 말씀이 있으면 빨리 해 주십시오, 중요한 사람을 만나기로 했습니다.”

-이 마당에 중요한 사람이 누구……

윤종대는 거기서 말을 멈췄다. 오동진의 현재 상황을 생각해서다.

하나뿐인 형 오동철이 귀신에게 죽은 마당이다.

당연히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된숨을 무겁게 내는 소리로 윤종대는 다시 목소릴 냈다.

-세경과 온누리는 우리를 배제하고 있어. 현황에 대한 중요한 이야기는 날 빼고 저희끼리만 하고 있단 말이지. 그래서 정확히 무슨 수작들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 내용이야 귀신을 잡으려는 게 뻔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들 곁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냉정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오동진은 이야기했다.

“세경과 온누리가 어떤 행동을 언제 어떻게 하는지 알아내야 합니다. 그래야만 기회가 생깁니다. 비굴하게 바짓가랑이를 잡더라도 그래야 합니다.”

-이봐, 그건 알지만 세경과 온누리가 나를 보는 눈빛은……

“만나야 할 상대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나중에 통화하시죠.”

오동진은 통화를 그렇게 끝냈다. 물론 만날 상대는 아직이다. 문자가 오지도 않았다. 윤종대회장과의 통화가 이어지면 참기 힘들 것 같아서다.

십년을 참아왔건만, 형과의 꿈을 위해 그랬건만, 그 모든 게 사라졌다.

뺨에 선명한 주름이 지게 이를 악물었던 오동진은 다시 폰을 잡았다. 단축번호를 터치했다. 신호가 다섯 번이 건너가자 상대방 목소리가 넘어왔다.

-여, 동진아. 우리 언제 뭉쳐야지? 내가 좋은데 알아놨거든?

또철이, 형 오동철의 부랄친구 문형철은 흥겨운 목소리다.

“형이 죽었어.”

문형철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다.

-누가 죽어? 형? 네 형 오동철이? 그래 어디서 뭐하다 죽었는데?

농담으로 받아 웃음기 담긴 문형철의 숨을 오동진은 확실하게 잘라버렸다.

“귀신한테 죽었어.”

경직하는 문형철의 얼굴이 눈앞에 있는 것 같은 느낌 속에서 오동진은 이어 말했다. 오동철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전부 이야기 했다.

-동철이가……

신음 같은 반응을 내는 문형철에게 오동진은 장소를 말했다.

“형은 지금 온누리병원에 있어.”

-너는? 너는 지금 거기 없는 거야? 어디서 뭘 하는데?

“강남역, 별다방.”

-거기서 뭐하는데?

“귀신의 단서를 주겠다는 문자를 받고 왔어. 누군가 내 번호로 그런 내용을 알렸어. 그게 누군지, 귀신의 단서가 정말 있는지 확인하러 왔어.”

오동철이 죽었다는 충격과 분노 속에서 문형철은 또 물었다.

-짐작 가는 데가 있는 거냐? 누가 네 번호를 알고 그런 것 같은데?

오동진은 폰 잡은 손에 자신도 모르게 힘을 실었다.

‘그래, 누가 내 번호를 알아서 문자를 던진 걸까?’

윤진건설 회장 윤종대 회장의 비서로서 사용하는, 업무용 폰 번호가 아니다.

이 폰 번호는 주변인들 외엔 모른다.

이걸 알려준 대상들은 다 기억한다.

가장 최근에 알려준 상대는 그녀다.

고초희, 그런데 그녀는 죽었다.

‘고초희가 죽자마자……’

그런 결과 후에 문자가 온 거다. 그래서 지금 기분이 상당히 기묘하다. 아니 복잡하고 뜨겁다. 형이 귀신에게 죽고 난 직후에 온 연락인 거다.

-위험한 건 아닌 거냐?

문형철의 목소리에 담긴 진심을 읽은 오동진은 이를 물며 대답했다.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지. 그리고 난, 오동진이야.”

문형철의 숨소리가 응축했다.

귀에 박힌 오동진이야 란 말의 의미를 새삼 깨달아서다.

싸움개 오동진.

어릴 적의 별명 그대로 오동진은 위험하다.

싸움을 시작하면 상대가 죽기 직전까지 절대로 멈추질 않는 거다.

그래서 오동진은 소년원에 가야했다.

홀로 계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였다. 오동철은 막 군에 입대했을 때였다.

그렇게 복싱을 시작했다. 소년원을 나와서는 유망주로 잘나갔다.

그러다 결국 사고를 쳤다.

승부를 조작한 관장을 때려눕힌 거다.

그 후엔 군에서 나온 오동철과 같이 오늘을 이뤘다.

오동진은 복싱만이 아니다. 이종격투기까지 익혔다.

오동철도 그랬지만 인간 흉기다. 그렇다는 걸 알지만 상대는 귀신이다.

-내가 뭐라고 말해도 마찬가지겠지만……

문형철은 깊은 숨을 내쉬고 뒷말을 냈다.

-형철이 보러 간다. 거기서 보자.

온누리병원으로 간다는 소리, 오동진도 볼일 마치고 오라는 이야기, 무사하게 보자는 거다.

“알았어.”

통화를 끝낸 오동진은 소리 없는 숨을 길게 흘려냈다. 그렇게 시선을 드니 누군가 보인다. 라떼 두 잔을 양손에 들고 다가오는 젊은 여자다.

“늦지 않았죠?”

생글 미소 짓는 여자, 라떼 하나를 내밀고 마주 앉는 아가씨는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고 선글라스도 벗었다. 그 얼굴을 오동진은 뚫어지게 바라봤다.

* * *

병원 내 매점과 카페는 손님들로 분주하다. 이젠 코로나가 종식됐다고 믿는 것인지 사람들은 거리낌이 없다. 저런 모습은 어디서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저따위 광경이 중요한 게 아니다.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다.

‘빌어먹을 것들이……!’

아메리카노 잔을 움켜쥐던 윤종대는 흠칫하며 손에 힘을 풀었다. 종이컵 속 뜨거운 커피를 조금만 더 늦게 인지했다면 다 쏟았을 것이다. 그만큼 지금 분노게이지가 상승해 있다. 세경과 온누리가 그렇게 만들었다.

‘나를, 윤진건설을 하찮게 본단 말이지……!’

부드득 소리가 나는 숨으로 윤종대는 분노를 삼켰다. 카페 원형테이블을 뒤집어엎고 싶은 심정을 가까스로 참았다. 애초에 이 모든 일이 왜 시작 됐는가를 생각하니 천불이 난다. 아들 윤완규는 희생자일 뿐이다.

‘세경, 흡혈귀 늙은이의 딸년하고 한대건의 아들새끼 때문에……!’

이젠 확실히 내막을 알았다.

귀신이란 놈의 손녀를 죽게 한건 그것들이다.

그날 차를 탄 건 아들 윤완규와 한진수와 고초히 이렇게 셋이다.

아들은 제가 운전하지도 않은 일을 뒤집어썼다.

년놈이 그렇게 만든 거다.

‘죽일 것들, 잘 뒈졌어. 그런 것들은 죽어야 해.’

뜨거운 숨을 뱉어내던 윤종대는 의문을 삼켰다.

이제 알게 된 내막을 전혀 몰랐다.

아들 윤완규가 고초희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진수에 대해서만 말했어.’

그 이유가 뭔지 모르겠어서 윤종대는 미간을 좁히고 꿈틀거렸다. 그러다 오동철이 죽어버린 현실을 새삼 절감하며 오동진을 떠올렸다. 그의 태도가 변한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비서가 아니다.

‘형이 죽었으니 그렇다고는 하지만……’

본래도 직함만 비서였지만 오동진은 이제 제어할 수 없는 자가 됐다.

‘건드리면 폭발할 폭탄처럼……’

오동진은 흘려내는 숨소리도 칼날처럼 변했다.

그게 아들 윤완규의 복수를 위해서 좋은 건지, 모든 이해득실을 따져 나쁜 건지도 모르겠다. 중요한건 윤종대 자신이 국외자처럼 된 현실이다.

이렇게 있을 순 없다.

-합수부가 설치된 강남경찰서엔 많은 취재진이 몰려들고 있습니다만……

카페의 벽걸이 tv에서 나오는 뉴스에 윤종대는 시선을 던졌다. 강남경찰서 앞에 선 기자의 모습, 말처럼 언론이 개떼처럼 몰려와 취재 중이다.

-귀신이란 존재에 대해 이렇다 할 단서를 잡지 못한 가운데……

귀신, 그 말을 이 사이에 물고 눈썹을 떤 윤종대는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

* * *

“귀신은 고초희에 대한 정보를 직업소개소 연합회를 통해 알아냈어요.”

라떼잔을 내려놓은 아가씨는 차분한 목소리를 이어낸다.

“백운레이크타운하우스 단지에 출입하는 일용직들의 눈과 귀를 통한 정보였죠. 그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걸 캐취한 능력, 그런 조건이 있었다고 봐야 할 일이죠. 아주 빨랐거든요. 물론 고초희가 의도한 거죠.”

의도했다는 말, 일부러 정보를 흘렸다는 거다.

그 부분을 오동진은 알고 있다. 고초희가 전화를 해 왔을 때 말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미끼로 함정을 파겠다는 소리였다.

그 결과가 고초희의 죽음, 형의 죽음이다.

“직업소개소 연합회에서 공지를 내렸던 거예요.”

다시 입을 연 미모의 아가씨, 이십대 초중반이 확실한 여자는 눈동자가 차갑다.

“정식 공지가 아닌 공지죠. 세경개발과 관련한 정보를 아는 사람에게는 정보료를 제공한다는 내용이었죠. 때맞춰 고초희는 자신이 누구며 머무는 장소가 어딘지를 흘렸고요. 그 아귀가 맞아 떨어져서 지금이 됐죠.”

마주 앉은 여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 의문을 밀어내고 오동진은 계속 들었다.

“지금 말한 루트를 역으로 추적하면 귀신에게 닿을 거예요. 세경과 온누리에선 이미 시작했어요. 타운하우스단지에 파견됐던 일용직들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중이죠. 연합회 사무실도 곧일 거예요. 부지런해야 하죠.”

그래야 원하는 걸 얻지 않겠냐는 여자의 미소, 그 안에 든 섬뜩할 만큼의 차가움을 오동진은 봤다. 그래서 여자의 정체에 더 강한 의문이 든다.

“가 볼게요.”

일어서려는 여자에게 오동진은 나지막이 말했다.

“앉아.”

여자는 여전히 옅은 미소를 품은 얼굴로 바라본다. 오동진의 흉포함이 꿈틀거리는 눈동자를 응시한다. 그 눈길은 테이블 아래로 스르르 내려간다.

오동진은 겨누고 있는 권총, 점퍼에 가려 있는 그 물건을 알아본다.

“나 같은 여자는 자신 있나 보군요.”

얼음처럼 가라앉은 표정 아래 화산 같은 분노를 품은 오동진, 그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는 여자의 눈동자엔 단 한치의 두려움과 위축이 없었다.

“그런 걸 가지고도 귀신에게 당한 거잖아요?”

배시시 웃는 여자, 오동진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제어하지 못할 뻔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의 분노 위로 찬물처럼 덮어 내리는 자각이 있다.

여자의 말대로다.

형과 삼총사는 총을 가지고도 귀신에게 당했다.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 것을 억지로 삼킨 얼굴로 오동진은 물었다.

“넌 누구야?”

여자는 다시 배시시 웃는다.

“그게 중요해요?”

테이블 아래 겨눈 권총을 갈무리 하며 오동진은 다시 물었다.

“누구야?”

여자는 작게 한숨을 쉰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초희 친구, 그렇게 알아 두면 될 거예요. 아, 왜 이런 만남이 이뤄졌냐고요? 초희가 부탁했어요. 자기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를 대비한 거죠.”

“실패한 상황인줄 어떻게 알고?”

“타운하우스단지 건너편, 호수 건너 펜션에 묵고 있었어요. 비상벨소리를 들었죠. 한방중인데 제법 요란했거든요. 앰뷸런스가 들고나는 것도 봤고요. 성공하면 초희에게 연락이 와야 했는데 없었죠. 그럼 플랜 b죠.”

이젠 할 말을 다했다는 듯, 여자는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

“내가 들어야 할 말이 그게 전부인가?”

오동진은 따라 일어섰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기세, 하지만 여자는 배시시 웃는다.

“하고 싶은 대로 해봐요.”

테이블 옆으로 성큼 나서는 오동진에게 여자는 남은 말을 던졌다.

“세경과 온누리에게 뺐기고 싶으면.”

여자는 돌아섰다. 섬뜩할만큼 차가운 눈빛을 남기고 밖으로 나간다.

바라보고 서 있던 오동진은 뛰듯이 따라 나갔다.

그렇지만 여자는 없다. 강남거리 어디로 사라진 건지 안 보인다.

오동진은 이를 물었다.

‘뺐기고 싶으면.’

여자가 남긴 말이 주는 현실로 오동진은 돌아봤다. 차를 향해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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