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혼의 살인자-40화 (40/200)

황혼의 살인자. 40. 피의 대가.

40. 피의 대가.

과천도 이젠 예전 같지 않다. 이 나라 부동산은 어느 곳이나 그렇지만 투기광풍으로 본모습을 잃었다. 그래도 집주변은 한적하게 관리하고 있다.

“어서들 먹어라.”

연못의 잉어들에게 사료를 주며 고종환은 새삼 한숨을 내쉬었다.

씻고 옷을 갈아입기 왔다는 건 핑계다. 이렇게 연못 앞에 서서 숨을 돌리고 싶어서다. 도심을 벗어나 과천의 이 깨끗한 공기를 마시고 싶어서다.

‘아니, 초희를 보고 싶지 않아서야.’

가슴 속의 진실을 이 사이에 물고 고종환은 눈을 감았다. 연못과 정원을 비추는 수은등 불빛이 그 얼굴에 드리운 고뇌와 분노를 이끌어낸다.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나직한 중얼거림을 내며 다시 눈을 뜬 고종환은 연못을 응시했다. 이 늦은 밤에 돌아온 주인이 던져주는 사료를 먹기 위해 움직이는 생명들, 저 움직임이 산 것이다. 살아 있으면 저런 거다. 하지만 딸은 아니다.

‘다시는……’

움직이지 못한다. 살아 있는 시체다.

그건 산 게 아니다.

그렇게 살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건 딸에게도 고통이다.

고통을 줄 이유가 없다.

“초희야……”

딸의 이름을 부른 고종환은 그 위로 겹쳐지는 여인의 모습을 붙잡았다. 초희의 엄마, 딸마저 저렇게 불행하게 된 것을 알면 얼마나 비통할까.

“귀신, 죽일 놈……!”

주먹을 움켜쥔 고종환은 분노를 참을 수 없어 진저리를 쳤다.

구십 평생을 살아오면서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없다.

감당하기 힘든 분노와 수모다.

천하의 고종환이 당하다니, 딸을 잃은 고통보다 더 참기 힘들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네놈을 잡아서 가죽을 벗기고 말테다.”

맹세를 뜨거운 숨으로 뱉어낸 고종환은 김부장이 다가오는 걸 돌아봤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계집년의 신원을 알아 후속조치에 들어갔었다.

“뭐가 나왔나?”

물음을 던지는 고종환의 앞에 다가선 김부장은 바로 대답했다.

“인천역에서 모습이 포착됐습니다, 서울역에서 내렸습니다.”

그렇게만 대답하는 김부장을 향해 고종환은 날선 눈길을 던졌다.

“그리곤 없다는 거야?”

“죄송합니다. 계속 추적중입니다.”

고종환이 성난 숨을 토하기 전에 김부장은 바로 말을 이어냈다.

“연은수가 이용한 비밀대화방을 뒤지고 있습니다. 아가씨도 이용하신 고어방입니다. 이용자들에게 접근중입니다. 결과가 나올 걸로 판단합니다.”

시간이 걸릴 뿐이라는 김부장의 눈을 응시하던 고종환은 연못으로 눈길을 돌렸다. 분노를 다스리고 차분하고 냉정하게 눈앞의 일을 곱씹었다.

“초희가 죽던 날 백운호수에 왔던 년……”

그길로 인천으로 돌아갔고 편의점에서 마지막으로 포착됐다.

집을 비우고 사라진 거다.

그 행적을 인천역에서 다시 찾아냈고 서울역에 이른 걸 확인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거기까지다. 그년은 귀신처럼 꼬릴 잘랐다.

‘귀신이라니……!’

그 이름을 떠올리며 고종환은 분노를 다시 삼켰다.

귀신에게 당했는데 정체모를 년도 귀신처럼 굴고 있는 상황이 기분 더럽다.

그년을 잡아야 한다.

무얼 알고 있는지, 사건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뽑아내야 한다.

“방금 전에 온누리를 통해 합수부상황을 파악했습니다.”

다시 입을 연 김부장을 고종환은 돌아보지 않았고 김부장은 보고했다.

“조웅이란 이름이 밝혀진 귀신의 동료, 상계직업소개소를 운영하던 그놈이 도용한 신원을 합수부에서 조사했습니다. 동두천 탑동계곡 인근에 위치한 나눔자리 라는 장애인 시설입니다. 그곳에 명지환이란 장애인이 있습니다. 조웅이 사용해온 신분입니다. 그 신분 계좌에 건물 매매대금……”

이어지는 이야기를 고종환은 말없이 들었다.

조웅이 매매대금을 명지환의 계좌로 입금 받았다는 것, 그 돈은 이제 사용할 수 없다는 것, 그게 의도인지 실수인지 알 수 없다는 내용, 결론은 무관하다는 것이다.

“명지환과 조웅 간에 특별한 관계는 없는 걸로 합수부가 결론 냈습니다.”

그렇다는 거다, 단순히 조웅이 명지환이란 중증 장애인의 신원을 도용한 것뿐이란 거다. 그러니 명지환의 계좌로 돈이 들어간 건 실수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만 귀신과 그놈은 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실수일까?

“입금된 돈을 분산해서 처리한다든지 하려다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오동진의 접근이 워낙 빨랐고 온누리전략기획실이 바로 뒤를 이었지요.”

이어 나온 김부장의 짐작에 고종환은 느릿하게 눈길을 돌렸다. 자신이 무얼 생각하는지 꿰뚫고 있는 심복, 이 세상에 믿을 자라면 이자뿐이다.

“그래, 김부장 네 말대로 그런 대응을 하다가 기회를 놓친 것일 수 있겠지. 상관없다. 명지환이란 장애인이 조웅이란 놈과 정말로 관계가 있다고 해도 상관없어. 거기선 얻을게 없다. 그래서 그놈들도 달아난 거고.”

이번엔 김부장이 말없이 듣기만 했다.

“귀신을 잡는다. 어떻든 잡을 거야.”

네가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할 거잖아, 란 눈으로 고종환은 뒷말을 이어냈다.

“초희, 그 애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김부장은 의미를 파악했다. 그래서 입을 열려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 상태로 숨 쉬고 있는 건…… 의미가 없어.”

시선을 땅으로 내린 김부장은 뜨거워진 침을 삼켰다.

평생 모셔온 회장 고종환의 고뇌는 이것이다.

고초희를 이대로 연명케 해야 하느냐의 비통.

“뉴스는 어떻게 되고 있는 거냐?”

고종환은 화제를 전환하듯 물음을 던졌다. 그게 방금 전 고초희 문제를 말한 것과 완전히 다른 것이어서 김부장은 회장의 속내를 읽었다. 김부장 자신이 조언해줄 수 없는 문제라는 것, 회장의 결단이어야 한단 거다.

“자유겨레당 홈페이지가 다운 될 정도입니다. 온라인상에선 비난 여론이 비등하고 있고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성명이 쇄도하고 있습니다. 현재 자유겨레당 당사엔 전방송사와 신문사가 출동해 있는 상황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고종환은 중얼거림처럼 목소릴 흘려냈다.

“양석훈이, 저질렀으면 뒷마무리도 깔끔하게 해야지, 등신 같은 놈.”

김부장은 순간적으로 나오려던 말을 입술로 막았다.

‘안 그런 놈이 어디 있습니까. 이 나라에서 정치한다는 것들이야 다 같은 것들이죠. 똥을 선택하느냐 오줌을 선택하느냐 만 봐야 하는 국민들이 불쌍한 겁니다. 온누리에게 걸린 양석훈 그놈은 재수가 없는 것이고요.’

김부장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종환은 지시를 내렸다.

“서둘러서 그년을 잡도록 해라.”

고개 숙여 대답하는 김부장을 돌아보지 않고 고종환은 다시 중얼거렸다.

“종착지는 귀신 그놈이지. 내게서 피를 흘리게 한 놈, 그 대가를 받고 만다.”

처절한 의지가 실린 고종환의 목소리는 밤을 떨게 했다.

그래선지 바람이 분다.

깊어가는 밤을 관통하는 바람은 귀신처럼 울면서 지나갔다.

* * *

오른쪽 어깨에서 흘러나오던 피는 이제 멈췄다.

8층의 사무실에서 찾아낸 구급상자가 도움이 됐다.

상의를 벗고 상처부위를 소독한 후 붕대를 감았다.

상체의 압박에 탄탄한 긴장으로 감각을 더 선명하게 해줬다.

‘권총도 있겠지.’

산탄이 벌집으로 만드는 복도 벽을 응시하며 장철은 안쪽의 상황을 더듬었다.

엽총을 난사하는 자는 고함치고 있다.

그런데 윤종대회장의 목소리가 아니다.

방송으로 봤던 그자의 목소리완 다르다.

저건 다른 자다.

‘최소한 둘.’

회장실 안엔 윤종대와 다른 자가 있다.

더 있을 지도 모른다.

엽총 외에 다른 총기도 있다.

이제 마무리를 할 때다.

직전에 겪은 총기들은 소음기가 있었지만 저건 아니다.

반응이 올 거다. 그러니 진입해야 한다.

‘재장전 할 때.’

엽총이 멈추는 순간이 들어갈 때다. 그런데 그 순간엔 권총탄이 날아올 거다. 피해 들어가야 한다. 산탄처럼 퍼지지 않는 걸 이용해야 한다.

‘지금!’

사격이 멈춘 순간 장철은 움직였다.

회장실 문을 향해 비호처럼 달려가 안으로 몸을 던졌다.

바닥을 구르는 순간 총격이 날아왔다.

예상대로 권총사격, 커다란 책상 뒤에서 방아쇠를 당기는 양복인물은 윤종대다.

“죽여!”

소리치는 자는 잿빛머리카락을 덮은 벙거지 모자를 집어 던진다.

손에는 총신이 짧은 엽총을 들었다. 산탄을 장전중이다.

그를 버려두고 윤종대에게 쇄도했다. 권총탄이 얼굴을 스치는 걸 느끼며 몸을 또 던졌다.

윤진건설 회장의 커다란 책상, 그걸 타넘으며, 아니 미끄러지며 장철은 중도를 후렸다.

총구섬광을 내며 권총이 날아갔다. 윤종대의 손목을 달고서다.

경악한 얼굴로 물러나는 윤종대 앞에 떨어져 구르며 휘돌았다.

팽이처럼 휘도는 장철의 몸에서 같이 돌아 나온 칼날이 윤종대의 몸통을 갈랐다.

그 순간 산탄의 날아왔다.

책상과 창문을 벌집으로 만들었다.

쓰러지던 윤종대의 몸뚱이도 마찬가지다.

쓰러진 윤동대가 부들거린다.

피거품을 흘려내는 윤종대를 외면하고 장철은 책상을 돌았다.

원목에 박히는 산탄의 위력을 전신으로 느끼며 숨을 골랐다.

총격과 총격 사이의 짧은 간극, 그 때에 튀어나가며 중도를 던졌다. 세 번째로 몸을 던지며.

* * *

-양석훈 대표는 아직 공식적인 반응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자유겨레당 앞에 진을 진 취재진의 모습이 TV 화면을 차지했다.

밤늦은 시간이건만 뜨거운 열기다.

집에도 못 들어간 양석훈은 웅크리고 있다.

“예상대로 되는 거지?”

한대건의 물음을 받은 최길준은 서늘한 눈빛을 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양석훈의 성폭행사건이 다른 이슈들을 빨아들이고 있는 상황입니다. 귀신사건도 마찬가집니다. 세경개발과 온누리그룹이란 이름도 묻히고 있습니다. 당분간은 저 사건이 세간의 이목을 붙잡고 있을 겁니다.”

“그래야지. 그런데 시간을 버는 거뿐이야. 그 시간이 다하기 전에 결과를 내야 해. 그게 어렵다면 완전히 장막 뒤로 숨어서 마무리해야 하고.”

장막 뒤로 숨어서, 그 의미를 최길준은 안다.

귀신사건의 종결이다.

실제론 그렇지 못하다 해도 표면상으로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경찰의 발표가 그래야 하고 언론도 인정하는 순서다.

그런 작업 후에 잡는 거다.

“준비 중입니다.”

TV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 한대건은 다른 물음을 냈다.

“흡혈귀영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나?”

최길준은 미간을 좁혔다가 펴며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현실적인 고려를 하는 걸로 생각됩니다.”

현실적인 고려, 그것을 알기에 한대건은 묵직한 숨을 내쉬었다.

“맞아. 누구보다 딸을 아끼는 영감이지만 그만큼 다른 것도 아끼지. 이해득실에 대한 판단과 손익분기점이 어디인가를 따지는 덴 타의 추종을 불허해. 그런 것을 떠나서 고초희가 저런 지경으로 있는 게 싫은 거야.”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 그러한 처지인건 한진수도 같다.

“나역시 고민해야 할 현실이지.”

TV에 눈을 박은 한대건은 꼬냑이 든 잔을 들어 단번에 넘겼다.

* * *

“헉!”

번개처럼 날아온 칼을 받은 함진웅은 휘청거리며 물러났다.

본능적이고 반사적으로 반응한 덕에 칼은 뒤로 날아가 벽에 박혔다.

그런데 엽총이 불능상태다. 몸을 대신해서 칼을 받은 결과다.

이젠 도리가 없다.

“이새끼!”

벨트에 차고 있던 칼을 잡은 함진웅은 상대를 향해 마주 달려 나갔다.

어느새 코앞으로 닥쳐온 자, 귀신이라고 부르는 살인자다.

시퍼렇게 빛나는 눈이 선명히 보인다.

자신처럼 사람을 죽이는 자, 이젠 죽일 것이다.

‘죽어!’

온힘을 다해 함진웅은 칼을 내리쳤다. 상대의 머리를 향해, 실종자로 만들어 버린 것들의 머리를 후려칠 때처럼, 그 감각의 짜릿함을 기대하면서다.

‘어?’

감각이 없다.

내리친 칼이 빈 공간을 갈랐다. 그 궤적 안에 있어야 할 상대는 사라졌다.

정확히는 내려치는 칼날 바로 옆, 팔의 바깥쪽이다.

‘뭐!’

귀신의 시퍼런 눈이 빛을 낸다.

이 찰나의 순간에 깨달아지는 것은 죽음이다.

이미 겨드랑이를 파고 들어와 있는 칼날, 귀신의 중도가 뜨겁다.

흔들, 균형을 잃으며 함진웅은 무릎을 꿇었다.

엎어질 것 같은 몸을 지탱하며 고개를 들었다.

귀신, 그가 앞에 섰다.

남은 칼 하나를 들이민다.

“끄.”

목과 턱 사이로 밀고 들어온 칼날이 머리를 관통하고 정수리로 나가는 걸 함진웅은 느꼈다.

형용할 수 없는 그 감각 속에서 봤다.

자신을 향해 손을 뻗어내는 사람들을, 80년 광주에서, 안산에서 죽인 자들의 눈을.

함진웅은 엎어졌다.

그 죽음을 내려다보던 장철은 함진웅의 손에서 칼을 뺐다.

기다란 중식도처럼 생긴, 아니 작두날처럼 생긴 걸 들고 돌아섰다.

아직도 부들거리고 있는 자, 윤종대의 머리맡에 서서 내려다 봤다.

“네가 치러야 할 대가다.”

고저 없는 한마디를 던진 장철은 윤종대의 머리에 칼을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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