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살인자. 43. 갈 길은 멀다.
43. 갈 길은 멀다.
도와주겠다는 조웅을 방으로 돌려보내고 장철은 약품상자를 열었다.
소독솜으로 상처부위를 깨끗하게 닦아냈다.
통증이 불로 지지는 것처럼 피어났지만 무시했다.
육신의 이런 고통은 가슴 속의 비통에 비할 수 없다.
‘반도 못 갔어.’
가야 할 길, 그 끝에 이르기 위해선 더 큰 육신의 상처와 고난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반드시 이루고 말 것이다. 이루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
‘절대로.’
이 악문 숨을 흘려낸 장철은 오른 어깨의 상처를 봉합했다.
중국살인자놈이 휘두른 이십사절곤에 당한 상처, 칼날이 찢은 근육을 세심하게 꿰맸다.
귀신으로 활동하던 시절 이런 부상은 늘 있었고 늘 치료했다.
‘그때처럼 흔적을 지울 필요 없어.’
지금은 그렇다. 경찰도 적들도 장철 자신이 누군지 다 알고 있다.
숨길 필요도 없다.
귀신이던 시절엔 정체를 숨기기 위해 혈흔 등의 흔적을 지웠었다.
대부분 그럴 필요도 없이 끝내긴 했지만 언제나 조심했었다.
‘지금도 조심하는 건 맞아.’
현장에 남을 범행의 흔적과 증거 따위가 아니다. 목표를 향해 접근 하고 이탈하는 때의 조심이다. 그 과정이 어긋나면 남은 일을 할 수가 없다.
‘혼자였다면 훨씬 힘들었겠지.’
오늘은 수월하게 현장을 벗어날 수 있었다.
윤진건설에서 다시 노인 복장으로 이동, 조웅이 파악해 준비해놓은 위치마다 껍질을 벗어냈다.
마지막엔 대기하던 차에 올라 이탈했다.
혼자가 아닌 둘이었기에 수월했다.
‘고맙다.’
조웅에게 입으로 내지 못한 말을 마음으로 한 장철은 상처를 여몄다. 그리곤 물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샤워를 할 수 없기에 꼼꼼하게 전신을 닦았다. 그렇게 나체가 돼 거울 앞에 섰다. 세월을 건너 뛴 몸이 보인다.
‘근력이 필요해.’
복싱선수의 몸처럼 필요 없는 근육이라곤 없는 강인한 육체, 그러나 보강이 필요하다는 걸 느낀다. 더 강한 파워를 내기 위한 근육의 보강이다.
‘필요한건 갖춰야지.’
거울에서 돌아선 장철은 다시 옷을 입었다.
피 묻은 솜 등을 정리해 비닐봉투에 담았다.
방문을 열고 나가니 조웅이 거실에서 소주를 마시고 있다.
말없이 시선 한번을 맞추고 쓰레기봉투에 비닐을 넣고 돌아섰다.
“한 잔 해라.”
조웅의 부름에 장철은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
키 낮은 거실 테이블 위에 놓인 소주잔을 물끄러미 응시하는데 조웅이 잔을 채운다.
손에 쥐고 잠시 더 보다가 잔을 넘겼다.
조웅이 다시 병을 내밀 때 잔을 뒤집었다.
“그러냐.”
무심한 한마디로 고개를 끄덕인 조웅은 자신의 잔에만 술을 채웠다.
“새벽술맛도 별미란 말이지.”
흡족한 얼굴로 김치를 집어 먹는 조웅, 맛있게 입맛을 다신 후 말한다.
“걱정 안 해도 된다.”
무슨 걱정을 말하는지 알기에 장철은 듣기만 했고 조웅은 이어 말했다.
“우리처럼 고아출신이다. 서른여섯이 되도록 시집 못 간 건 그래서지. 뭐 요즘은 만혼이 대세인 시대라 그닥 특별한 케이스는 아닐 거야. 게다가 미쓰리도 생각이 꼭 결혼을 해야 한다는 건 아니더라고. 겁나겠지.”
미쓰리, 그 말을 입에 담은 걸 우회하듯 조웅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겁날 거야, 누굴 만나서 결혼다다는 게, 그래서 아이를 낳고 산다는 게.”
소주잔을 휙 넘긴 조웅의 뒷말은 바로 튀어나왔다.
“제가 살아온 것처럼 되지 않을까 왜 안 겁나겠어? 행복하게 살고 싶지만 그렇게 살지를 못했는데, 경험해 본적이 없는데. 혼자 사는 것도 이렇게 힘들고 지겨운데 둘이 되고 셋이 돼서 더 힘들면 그때 어쩌라고?”
빈 잔에 다시 소주를 채운 조웅은 그걸 들고 노려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솔직히 미쓰리가 일을 당할 걸 알았지. 나야 폐업하고 사라지면 그만이지만 미쓰리야 그럴 수가 없잖아. 단순히 내 밑에서 근무하던 여직원에 불과하니까, 아는 게 없으니까 라지만, 그래도 무사하진 못했을 거야.”
그런 예상을 했었기에 미안한 거다. 그런데 미쓰리가 사무실로 다시 오는 바람에 이렇게 얽혔다. 이젠 놈들에게 잡히면 정말 죽을 지도 모른다.
“여긴 안전하지만 항구적인 건 아니야. 미쓰리가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곳을 찾아줘야 해. 지금과 다른 신분으로, 다른 걱정하지 않게 해줘야지.”
장철은 다른 물음을 내지 않았다. 조웅에게 그럴 능력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궁금하긴 하다. 생각보다 조웅의 경제력이 커서다.
“돈 걱정은 마라.”
잡고 있던 잔을 또 비운 조웅은 김치를 우적대며 말한다.
“이재에 눈을 떠서 제법 재미를 봤다. 뭐 엄밀히 말하자면 이 나라를 휩쓴 부동산광풍 덕분이지. 사고팔고 하면서 따블 따따블로 불어나는 데 나도 정신이 없더란 말이야. 다들 미쳐서 후대의 돈을 착취하는 거지.”
조웅은 장철을 돌아보며 시선을 맞췄다.
“그래, 그런 걱정이 아니라 미쓰리, 정말로 걱정 안 해도 된다. 오늘 본 것처럼 아무 일 없이 우릴 기다리잖아. 설마 내가 묶어놓고 나갔다고 생각하진 않았겠지? 맞아, 현실인식이 확실하고 빨라. 우리처럼 고아잖아.”
미쓰리가 그렇다는 이야기, 장철은 집을 나서기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조웅이 미쓰리가 있는 안방에 들어갔다 나왔다. 뭔가 조치를 했다고는 여겼지만 그게 조웅 말처럼 묶어놓는 따위는 아니었다고 생각했었다.
“불편해도 당분간은 이렇게 지내자.”
장철은 반응 없이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그렇게 눈에 넣은 것은 전면의 tv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미쓰리가 보던 뉴스가 떠오른다.
“갈 길이 멀다.”
고저 없는 목소리로 그 말을 낸 장철은 일어섰다. 현관 문 옆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조웅은 남은 소주를 비웠다.
* * *
아침이 훤하게 밝았지만 최재우는 가슴속의 어둠을 걷어내지 못했다. 감식반이 달려와 조사 중인 승진마켓을 바라보며 무거운 숨을 계속 쉬었다.
‘세 사람.’
냉장고 안에서 발견된 사체들, 신원을 파악 중이다.
필경 함진웅과 갈등관계에 있었거나 함진웅의 일에 장애가 되는 인물들이었을 것이다.
‘저렇게 육신이 훼손된 채 냉장고에 보관될 줄 꿈에서라도 생각해 본적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저렇게 되고 말았다.
함진웅이라는 개백정을 만나서다.
올해 육십삼세가 된 자, 80년 광주에서 시민들을 학살한 자다.
그때부터 오랜 세월에 걸쳐 사람을 잡아 죽인 괴물이다.
‘죄 없는 사람들을.’
주먹을 움켜쥔 최재우는 허공이라도 후려치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눌렀다.
그러며 떠올린 건 귀신이다.
장철, 그도 살인마다.
그런데 그의 살인은 다르다.
함진웅처럼 아무나 죽인 게 아니다.
죽어도 싼 놈들을 죽였다.
‘스물 한명.’
최재우는 다시 치를 떨었다.
함진웅의 사진이 떨어진 다이어리, 거기엔 놈이 저지른 살인의 기록이 있었다.
살인비망록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였고 사체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기록했다. 그러면서 음미한 것이다.
“개새끼……!”
이 가는 숨을 흘려내는 최재우의 품에서 폰이 울어댔다.
-함진웅이 다른 업장들 상황은 어떤 거야?
박인수 경정의 앞뒤 자른 현황파악 물음에 최재우는 바로 대답했다.
“도박장과 성매매업소를 비롯해서 안산시 소재의 관련 유흥업소들을 수색중입니다.”
-유형사와 송형사가 안산서 인원들과 움직이고 있는 거지?
“그렇습니다.”
-안산 서에 오금저린 새끼들이 많을 거야.
“그렇겠지요, 사전에 알고 대비하도록 할 시간 같은 건 없었으니까요.”
-그건 그렇고, 함진웅이 정확한 내력이 나왔다. 최팀장 말대로 80년 광주에 투입됐던 놈이었어. 그 뒤로 안산에 정착을 한 건데…… 하, 사십여년 동안 스물 한명을 죽인 거야. 이 새끼 한마디로 살인에 중독된 거다.
“개백정이죠.”
-응? 아 그거.
박인수 경정은 알아듣는다. 윤종대의 책상 위 메모장을 봤기 때문이다.
“귀신의 종적은 못 찾은 겁니까?”
최재우는 물었다. 정말 중요한 게 그거니까.
-음, 그래, 못 찾았다. 윤진건설 사옥을 벗어나서 두 곳에서 허물을 벗었어. 갤러리와 대형식당건물인데, 사전 정보가 없었다면 힘든 일이지. 귀신의 친구 조웅, 그자의 능력인 것 같아. 마지막엔 차도 바꿔 탔어.
최재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기묘한 안도 같은 것도 느꼈다. 귀신인데 흔적을 남길 일은 당연히 없다는 예상, 그 위로 번지는 감정이다.
‘내가 무슨?’
고개를 세차게 흔드는 최재우에게 박인수 경정의 목소리가 다시 건너왔다.
-세경과 온누리가 털을 바싹 세웠을 거다.
이젠 직속부하에게처럼 자연스럽게 박인수는 말했다.
-윤종대가 이렇게 죽을 거라곤 예상 못했겠지. 저희가 잡아 죽이려던 귀신의 반격, 장철이 최종에 노리는 건 저희란 걸 이제 확인한 거야.
당하기 전에 끝장을 내려하는 귀신의 의지, 이젠 드러났다.
-합수부의 모든 수사결과는 그들에게 보고된다고 봐야 한다. 그들은 한 발 앞서나갈 거야. 귀신이 쉽게 당할 거란 생각은 안 들지만, 그래서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두려운 거다. 무슨 일이 또 어떻게 생길지 말야.
그러니 그전에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거다. 귀신을 잡아야 한다.
-갈 길이 멀다. 그리고 험해. 그렇지만 우리가 해야 한다.
박인수경정의 뜨거운 숨소리에 반응하며 최재우는 대답했다.
“그렇게 될 겁니다.”
승진 마켓위로는 아침 해가 찬란하게 올라가고 있었다.
* * *
-함진웅은 스물한 명을 살해한 극악한 살인자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80년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출신인 함진웅은 안산시 암흑가의 황제로 암약해온 것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도박장과 유흥업소……
병원으로 가는 차안에서 고종환은 뉴스를 시청했다.
밤사이 일어난 윤진건설 사건으로 아침부터 불바다다.
양석훈이란 이름은 아예 사라졌다.
-귀신 장철은 상계동 직업소개소 사건에도 연루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언론에 드러나지 않았던 이 사건은 익명의 제보로 진실이 드러났으며……
고종환은 손을 움찔했다.
조수석 헤드레스트에 달린 액정tv를 치려던 분노를 가까스로 다스렸다.
또 저년인 거다.
저년을 잡아야 속이 시원하겠다. 그런데 그러질 못하고 있다.
김부장의 능력으로도 꼬리를 못 잡는다.
“빌어먹을……!”
고종환의 욕설에 반응하며 조수속의 김부장이 고갤 돌렸다. 하지만 다시 앞을 본다. 그사이 차는 병원에 다다랐다. 고종환은 딸 고초희의 병실로 직행했다. 유리벽 안 딸은 그대로다. 그런데 한대건이 곁에 왔다.
“미끼를 쓸 생각입니다.”
밑도 끝도 없는 한대건의 말에 미간 좁힌 고종환은 이내 눈썹을 세웠다. 무슨 의미인지, 한대건이 뭘 계획하는지 알아서다. 그래서 딸을 봤다.
“저 아이는 아니겠지?”
나지막한 고종환의 물음에 한대건은 역시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언론을 탄 건 제 아들이지요.”
고종환과 한대건, 두 사람은 유리벽 안 고초희를 응시하며 침묵을 씹었다.
* * *
된장찌개 냄새에 장철은 잠에서 깨어났다. 방문을 열고 나가니 식탁에 밥이 차려지고 있었다. 미쓰리, 이영숙이란 이름의 아가씨가 준비한 거다.
조웅은 밥솥에서 밥을 퍼서 식탁에 놓는다. 눈짓으로 앉으라고 한다.
의자를 빼 앉으며 장철은 시간을 확인했다.
정확히 열두시가 됐다.
점심 먹을 시간이다. 새벽에 돌아와 아침에 잠들었는데 장신 없이 잘 잤다. 어제 일의 피곤 때문이기도 하고, 해야 할 일을 위한 몸의 대비다.
“냄새 좋지.”
자리에 앉은 조웅은 웃는 얼굴로 된장찌개를 앞접시에 나눠 담았다. 장철의 앞에 놓아주고 조심스레 앉는 미쓰리의 앞에도 놓아준다. 그러며 미소 짓는 얼굴이 좋아 보인다. 지금 이 밥상의 평화와 기쁨을 담았다.
“자, 먹자고.”
조웅이 크게 밥을 떠서 입에 넣는 걸 보며 장철은 식사를 시작했다. 정말 오랜만의 제대로 된 식사, 다른 누군가와 마주 앉아 먹는 음식이다.
이런 시간을 다시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서 조웅와 미쓰리가 보인다.
‘이 두 사람……’
두 사람을 응시한 시선을 된장찌개로 돌린 장철은 수저를 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