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살인자. 46. 기다림의 시간.
46. 기다림의 시간.
가평의 산바람이 부는 4월은 아직도 겨울을 품고 있다.
시린 그 바람을 맞노라니 뼛속까지 시린 감각이다.
그러나 가슴 속의 시림에 비할 바 아니다.
아들을 눕혀놓고 그 곁을 지키고 있는 아비의 가슴은 찢어진다.
“귀신, 반드시 네놈의 껍질을 벗기고 말테다.”
어둠 속으로 맹세를 던진 한대건은 뒤로 다가오는 기척을 들었다.
최길준, 돌아보지 않아도 그임을 안다.
명료한 목소리로 현황을 보고 한다.
“경계시스템이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피터윤과 동료들은 언제라도 대응할 수 있는 준비 속에 들었습니다. 기다리는 일만 남았습니다.”
테라스 밖 가평산림의 어둠을 응시하던 한대건은 낮은 목소리로 반응했다.
“놈이 언제 올 것 같은가?”
최길준은 한대건의 등을 노려보듯 응시하다 대답을 냈다.
“예측하기 힘듭니다만, 지금까지 귀신이 움직인 사례에 대입해 본다면 오늘밤이라고 해도 무리는 없다고 판단합니다.”
한대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놈은 그랬지. 상대의 의표를 찌르듯이 해치웠어.”
아주 대담하고 빠르고 강력하게, 란 뒷말을 한대건은 속으로 삼켰다.
“귀신이 온다면 무덤으로 뛰어드는 결과가 될 겁니다.”
최길준 확신에 찬 목소리에 한대건은 강한 고갯짓을 냈다.
“그래야지, 반드시 그래야지. 아니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
한진수를 온누리병원에서 빼 이곳 가평으로 이동한 결과, 그것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아들과 한 대건 자신을 미끼로 귀신에게 손을 흔든 것이다.
“그놈은 우리가 잡아 죽이려는 걸 알아. 그래서 우릴 죽이려고 하는 거지.”
윤종대를 죽인 결과로 봐서 귀신은 한대건 자신도 목표로 삼고 있다.
‘이젠 의구심을 가질 일이 아니야.’
이건 피할 수 없는 업보다.
한쪽이 죽기 전에는 끝나지 않을 일이다.
그 결과를 이곳에서 만들 것이다.
귀신을 잡아 죽이기 위한 준비는 끝났다.
“그런데 말이야……”
문득 미간을 찌푸린 한대건은 최길준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귀신이 의심하진 않겠나?”
언론을 통해 자세한 상황이 보도되고 있다. 귀신이 이 현황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지 알 수 없다. 미끼를 물어주길 바라지만 상대는 귀신이다.
“의심한다고 해도 움직일 걸로 판단합니다.”
최길준의 분명한 대답, 한대건은 좁힌 미간을 더 선명하게 좁히며 된숨을 내쉬었다. 자신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불안하긴 하다.
“내가 진수를 데리고 여기 들어온 게 확실한 마당이니까, 취재진들이 실시간으로 보고하고 있으니까, 다른 곳으로 나간 정황은 전혀 없으니까……”
그러니 귀신이 찾아올 거란 생각이다. 함정이라고 해도 한대건 자신을 죽이기 위해서다. 백운호수에서 함정에 빠졌었지만 박살내고 다 죽였다.
그런 자가 귀신이다.
제 능력을 의심치 않는 자, 해야 할 일은 한다.
“고회장을 먼저 노리면 차질이 생기는 거긴 한데, 그 흡혈귀영감은 나처럼 확실한 소재를 드러내고 있질 않으니까 역시 내가 먼저가 되겠지.”
짐작을 확신으로 말한 한대건은 문득 인상을 확 구겼다.
“혹시……”
지금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현재의 상황을 귀신이 의도한 게 아니냐는 거다.
아들 한진수를 산 시체로 만든 것부터가 계획한 게 아니냔 의심이다.
이렇게 한대건 자신과 아들 한진수를 한자리에서 보려는.
“왜 그러십니까?”
최길준이 옅은 의구심과 긴장을 품고 물었지만 한대건은 반응하지 않았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의심을 곱씹고 더듬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윤완규는 그렇게 확실하게 죽였는데 아들 한진수는 왜인건가.
“진수를…… 일부러 저런 상태로 만든 거라고 생각 안 하나?”
쥐어짜내듯 목소리를 낸 한대건, 최길준은 좁힌 미간을 꿈틀 반응했다. 모시는 회장의 지금 생각과 마음을 읽었다. 그런데 전부 다는 아니다.
“고초희의 경우에도 그렇지만 의도한건 맞다고 판단합니다.”
살인전문가가 실수로 그렇게 했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남은 가족에게 고통을 가중시키려는 의도가 분명하다는 게 처음부터의 생각이다.
“그거 말고.”
시리게 튀어나온 한회장의 반응에 최길준은 미간을 가득 좁혔다.
‘그거 말고?’
무겁게 가라앉은 채 이글거리는 한대건의 눈을 보고 최길준은 비로소 이해했다.
‘현재 상황.’
한대건회장과 한진수가 한곳에 같이 있는 결과다. 그렇게 만들어 놓고 귀신이 다시 방문하는 거다. 완벽한 죽음과 복수를 선사하기 위해서다.
‘정말 그렇다면……!’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고 어깨를 경직한 최길준, 한대건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귀신이 어떤 의도를 가졌든 이제 놈의 시간은 없는 거다.”
다시 테라스 밖 어둠을 향해 돌아서며 한대건은 남은 말을 뱉었다.
“그렇게 만들어야 해.”
* * *
시간은 밤 10시, 옥상에 올라간 장철은 신도시의 야경을 눈에 넣고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신명시의 변모가 체감이 되는 순간이다. 야산과 논밭이던 곳이 저렇게 화려한 야경의 도시로 변했다. 빌딩과 아파트 숲이다.
‘우리 가족도 저 속에서 살 수 있었는데……’
딸 장민지와 손녀 장영의 얼굴을 떠올렸던 장철은 이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불로 지지는 것 같은 가슴의 고통을 밀어내고 해야 할 일만 생각했다.
이 고통을 준 자들에게 돌려줄 복수, 딸의 유언을 이루는 거다.
‘상처는……’
낮에 운동한 것 때문에 출혈이 있었다. 하지만 몸이 반응하는 걸 느낀다. 근력과 지구력을 기르려는 의지가 육체의 모든 곳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변화를 만들어 내는 원인, 깊은 곳으로부터의 선물이다.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지 알 수 없는.’
피부에 돋는 소름을 털어낸 장철은 준비해온 파워밴드를 난간에 걸었다.
고급자용의 두껍고 강력한 탄성의 고무밴드.
일반인들은 한번 당기는 것도 쉽지 않다.
양손으로 잡고 자세를 낮춘 후 미친 듯이 당겼다.
온 몸에 열이 후끈하게 올라오는 걸 느끼며 장철은 업어치기 동작으로 바꿨다.
왼쪽 오른쪽 번갈아 가며 쉬지 않고 동작을 반복했다.
한세트에 백번씩, 총 십세트를 하고서야 손을 놓았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다.
“후욱, 후욱.”
거친 숨을 몰아 내쉬며 장철은 단백질 쉐이크를 마셨다.
몸이 원하는 것, 의지가 원하는 것이다.
목적을 정하고 행동하는 결과는 육체의 반응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하루 만에 터무니없는 일이지만, 몸은 반응중이다.
‘깊은 곳의 선물.’
독배를 드는 것에 다름 아닌, 그러나 선택하고 결정한 것이기에 장철은 후회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예감하고 살아왔다.
특별치료를 시작하면서, 그것으로 인해 깊은 곳의 울림을 듣고부터다.
‘가루가 된다고 해도, 혼이 흩어진다고 해도 상관없어.’
어금니를 강하게 물었다 푼 장철은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푸쉬업과 스쿼트에 이어 버피를 하고, 몸과 마음이 풀어내는 손발의 춤사위를 그려냈다.
장철의 움직임은 어둠속에 풀어내는 귀신의 바람처럼 너울거렸다.
* * *
“오늘 할 수도 있겠지?”
여전히 변함없는 딸 고초희의 병실을 들여다보며 고종환은 물음을 던졌다. 등 뒤로 붙은 김부장은 유리벽 너머를 바라보다 얼른 대답을 냈다.
“귀신의 행적을 보면 가능한 일입니다. 무엇보다 한회장과 한진수의 소재가 명확하니까요. 이편이 준비할 시간 없이 해치우는 게 놈의 방식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 행동방식이 약점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놈도 압니다.”
“그래서? 안 할 수도 있다?”
“귀신의 마음을 알 순 없겠습니다만, 제가 귀신의 입장이라면 의심하겠습니다.”
“의심?”
“온누리 측의 대응이 그렇습니다. 이곳 온누리병원보다 한진수를 더 잘 돌볼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그런데 굳이 가평으로 이동한건 오버로 보이는 측면이 있습니다. 물론 한진수의 상태가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요점.”
고종환의 음성에 든 옅은 짜증을 인지한 김부장은 즉시 고개 숙이며 결론을 말했다.
“확률은 반반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십대 오십이다?”
“의심은 하면서도 기회를 놓치지 않겠단 귀신의 판단이면 할 겁니다.”
고종환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상황임을 자신도 읽는다.
온누리측의 대응에서 구린내가 풍긴다는 걸 귀신도 알 거다.
그렇지만 김부장의 말대로 그걸 기회로 판단한다면 하는 거다.
그런데 언제일지는 모른다.
“결과 예상은?”
“귀신이 한회장이 있는 곳에 발을 들인다면 죽을 겁니다.”
확고한 김부장의 대답에 고종환은 어깨를 미세하게 흔들었다.
“한회장이 미국에서 부른 용병들은 전문가 중의 전문갑니다. 그들이 마음 놓고 행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준 겁니다. 귀신이 아무리 강해도 그들을 당해내진 못할 겁니다. 한회장은 장담한대로 껍질을 벗길 수……”
김부장은 입을 다물었다. 고종환의 반응을 살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회장님께 한회장이 연락을 하게 될 겁니다.”
꼬장한 늙은이의 등만 보이고 선 고종환은 나직하게 한마디를 냈다.
“성공한다면.”
유리벽 안 딸 고초희를 바라보며 고종환은 다른 걸 물었다.
“한회장 큰아들과 작은 아들은 여전히 그대로고?”
“예. 그렇습니다. 전자회장과 자동차회장, 두 사람은 전혀 현재 상황에 반응하지 않고 있습니다. 병원에 찾아온 적이 한 번도 없으니 가평으로 갈 일도 없을 거라고 봅니다. 한회장도 그에 대해 무반응인 상황입니다.”
한대건의 가족사를 음미하며 고종환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라고 다를 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자신의 아들은 더 지독한 놈인 거다.
“그년은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심중의 분노와 감정을 끊어내려 고종환은 다시 물음을 던졌다. 강남역의 그년, 김부장이 힘써서 노력중인데도 전혀 꼬릴 못 잡고 있는 거다.
“송구합니다.”
고개 숙인 김부장을 돌아보지 않은 채 고종환은 나직이 말했다.
“자유겨레당하고 양석훈이 한테서 오는 연락이나 말끔히 잘라내.”
김부장은 고개 숙인 채 물러갔고 고종환은 병실 안 고초희만을 바라봤다.
* * *
밤바람이 제법 차갑다. 4월의 봄기운이 무색한 가평의 바람이다. 아내가 챙겨준 패딩을 가지고 오길 잘했다. 이곳은 아직 겨울 입김이 남아 있다.
“와, 계곡 때문인지 무쟈게 쌀쌀하네요.”
양팔로 몸을 안은 유지건의 호들갑에 송치호가 바로 반응한다.
“사방에 솟은 저 산들을 봐라. 안 춥게 생겼냐?”
“송선배 요새 뭐 안 좋은 일 있어요?
“뭐?”
“맨날 날 구박하잖아요?”
“뭐래 이쉐키가?”
“사사건건 그러잖습니까? 아까 고기짬봉 먹을 때도요? 이 지역 맛집 검색하라고 시켜서 거길 간 건데 왜 나한테 맛없다고 타박이에요? 맛있기만 하던데? 팀장님도 맛있게 드셨잖아요? 요새 욕구불만이 넘쳐요?
“아니 뭔 개소리를 하는 거야?”
둘이 그러고 있는 걸 보던 최재우는 차문을 열고 나갔다.
어둠속에 잠긴 계곡 너머를 바라보며, 저 안에 들어간 한대건회장과 그 아들을 생각하며 그를 떠올렸다.
귀신 장철, 그가 과연 이곳에 올 것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만들려고 준비한 걸 그가 알까?’
이곳은 요새다.
온누리그룹측의 경비원인에다 가평경찰서의 특별경비도 이뤄지고 있다.
거기에 최재우 자신들, 합수부까지 와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게 귀신을 확실하게 불러들이려는 수작이다.
그렇다는 걸 안다.
‘온다면……’
그러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삼킨 최재우는 눈을 감았다.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눈을 떠 계곡 건너를 응시했다.
부도가 나 방치됐다가 최근에 다시 지었다는 소형리조트 건물, 주변 조명들이 은은하다.
‘당신이 한다면 하는 거겠지.’
안전을 위해 취재진들에게 거리를 벌리고 물러가라고 한 상황이다. 리조트 쪽으로 넘어가는 계곡의 다리는 환한 조명으로 계곡을 비추고 있다.
여름이면 피서객들이 넘쳐날 가평의 계곡, 물소리가 호곡성처럼 들린다.
‘응?’
폰의 진동을 느낀 최재우는 바로 받았다. 박인수 경정이다.
“말씀하십시오.”
-고생 많고, 특이점이 드러나고 전화했다.
무슨 특이점을 말하는 가, 최재우는 미간 좁히고 귀 기울였다.
-나눔자리, 거기 있는 명지훈.
조웅이 신원을 도용했던 중증장애인이다.
-그가 형제보육원 출신이었다는 게 드러났다.
계곡 건너를 바라보던 최재우는 숨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