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살인자. 50. 악(惡).
50. 악(惡).
깊고 길고 가느다란 숨을 마무리하며 장철은 눈을 떴다.
깊은 곳으로부터의 이탈, 다시 현실로 돌아온 인지와 감각을 받아 들였다.
갑작스럽게 뒤따르는 소름을 털어내고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4시 40분이다.
‘저녁 먹기 전에.’
다리를 풀고 일어선 장철은 머물렀던 자리를 새삼 돌아봤다. 지친 몸을 매일 받아주는 매트리스, 깊은 곳으로의 문을 향해 떠나면 말없이 굽어보는 벽과 천장. 장철 자신과 인간세상을 보는 저 마음들이 궁금하다.
‘악한 세상. 악이 넘쳐나는 세상.’
인간은 원래부터 악한 존재일까.
왜 이렇게 악독한 일들이 가득하고 갈수록 더해가는 지 모르겠다.
아니다.
선한마음을 가진 이들도 많다.
마음이 따듯해지는 선행들은 정말 많다.
그런데 그런 일들은 악에 묻힌다.
‘나 같은 존재들이 숨 쉬고 있으니까.’
방바닥을 내려다보던 장철은 손을 펼쳐 응시했다.
공장에서 석재가공을 하던 손, 원래부터 피를 머금었던 이손에 다시 피를 묻혔다.
그렇게 한 걸 바늘 끝만큼도 후회하지 않는다.
복수를 이루고 지옥에 갈 것이다.
‘기다려라. 너희가 지쳐 한눈을 팔 때가 내가 가는 때다.’
가평을 머리에 그리며 장철은 방문을 열고 나갔다. 소파에 앉아 tv를 보던 조웅이 휘뜩 돌아본다. 긴장이 든 그 눈이 보던, 뉴스를 장철은 봤다.
-의정부시 가능역 배후지인 이곳 원룸촌에서 살인이 일어났습니다.
기자는 원룸건물을 배경으로 흥분했지만 차분한 어투로 말하고 있다.
-4층 건물의 3층 우측 집, 302호의 주인이 피살됐습니다. 사망추정시간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오전 중에 살해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살해당한 원룸 주인 N씨는 36세의 미혼남성으로 무직상태……
장철은 그 자리에 선 채로 뉴스에 의식을 집중했다.
-N씨는 귀신사건 연루자로 경찰의 조사를 받은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본 JKBC취재팀은 사건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고 깊이 있는 취재와 조사를 벌였습니다. N씨는 귀신 장철이 R병원에서 윤완규를 납치할 당시……
조웅은 중얼거리는 감탄을 흘려냈다.
“역시 JKBC네.”
장철은 공감했다.
경찰이, 합수부가 제대로 밝히지 않는 사건의 내면을 더듬어냈다.
남규덕이 R병원에서 추돌사건을 일으킨 인물이란 것, 현진써큐리에 선이 닿아 있다는 내용이다.
어쩌면 합수부도 모를 내용이다.
-N씨는 현진써큐리티의 임원 중 한명과 초중고 동창으로 친구 사이입니다. 현재 그 임원은 대표 오동철씨와 같이 행방이 묘연한 상태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에 대해 합수부는 추후 언론 브리핑을 하겠다는 반응……
조웅은 소파 팔걸이를 탁하고 쳤다.
“저런 내용까지 파악했으니 합수부 놈들 똥줄 타겠구만.”
시선을 돌린 조웅은 장철의 눈을 살피며 뒷말을 낸다.
“저것들이 원하지 않는 방향이야.”
원하지 않는 방향, 사건의 내용이 더 자세하고 강력하게 퍼지는 거다.
언론에서 저렇게 핏대를 세우고 달려드는 상황이다. 합수부도 온누리와 세경도 바라지 않는다. 그런데 저 살인은 장철 자신이 한 게 아니다.
‘보이지 않는 손.’
정체모를 여자가 있다.
백운호수사건과 상계직업소개소사건을 언론에 제보한 존재.
윤완규 사건 발생직후부터 그랬다는 걸 안다.
그런데 이번엔 언론에 제보한 수준이 아니다. 직접 손을 써서 살인을 저질렀다.
-용의자로 보이는 여인을 경찰이 추적중인 걸로 파악됐습니다. 사건이 발생한 원룸 앞에서 N씨와 이십대로 보이는 여자가 짧은 대화를 나누던 모습이 원룸 앞에 주차된 차량의 블랙박스에 찍힌 걸 취재진이 입수……
역시다, 경찰이 영상을 바로 내줬을 리가 없다. JKBC가 그렇게 파악한 것이다.
-경찰은 현재 살인용의자인 여자에 대해 아무런 단서도 갖지 못한 걸로 확실시 됩니다. 여자의 동선은 현장에서 두 블럭 떨어진 대형마트에서 끊어졌습니다.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조응은 다시 장철을 돌아봤다.
“그년 같은데.”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조웅의 눈을 장철은 마주 보지 않았다.
TV를 바라보며 현 상황의 의미를 곱씹었다.
어떤 의도가 숨어 있고 이 일은 누구에게 이득이 되며 누구에게 해가 되는 지다.
해로움은 알겠다.
‘조용히 날 해결하고 싶어 하는 것들에게는.’
수류탄을 한방 던져버린 것과 같은 일이다.
여자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자꾸 들쑤셔 불을 키우고 있다.
그렇다고 이게 장철 자신에게 유리한 것도 아니다.
오동진에게 길을 알려준 여자, 귀신도 타격대상인 것이다.
‘넌 누구냐, 뭘 하겠다는 거냐.’
TV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장철의 귀에 기자의 목소리가 다시 파고들었다.
-귀신사건으로 포함되지 않았던 이 살인사건은 언론의 취재가 시작되자 뒤늦게 사건을 합수부로 이관됐습니다. 상황대처에 미온적이라는 합수부에게 질타가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일각에선 합수부가 온누리그룹과 세경개발의 흥신소 노릇을 하는 것 아니냐는……
장철은 돌아섰다. 공원으로 운동을 하러 가기 위해 현관을 나섰다.
* * *
병원 옥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제법이다. 해가 기울어 가는 시간이라 바람이 제법 쌀쌀하지만 답답함은 조금 가신다. 하지만 상황은 여전히 막혀 있다. 그런데다 의정부에서 일어난 새로운 살인은 기름을 부었다.
“살해된 놈이 현진써큐리티와 선이 닿아 있던 놈이라고?”
뒤돌아보지 않고 던진 고종환의 물음, 김부장은 즉각 대답했다.
“냠규덕이란 놈입니다. 현진대표 오동철의 군 후배인 민중태와 죽마고우였던 놈입니다. 윤완규가 병원을 빠져나갈 당시에 추돌사고를 일으켜 경찰을 방해한 역할입니다. 딱 거기까지가 전부인 놈인데 살해됐습니다.”
의도나 배경을 짐작하기 힘들다는 김부장의 보고.
“그년 인데……”
미간을 찡그린 고종환은 목에 걸린 가시 같은 느낌 속에서 다시 물었다.
“이번엔 언론에 제보하지 않은 거지?”
“그럴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걸로 판단합니다만, 이번엔 그건 아닙니다. 공교롭게도 남규덕과 추돌사고가 났던 신명서의 형사가 현장에 왔습니다.”
“그래?”
“살인을 저지른 여자가 현장을 막 벗어나던 때입니다.”
“잡을 수도 있었구만.”
“타이밍이 맞았다면 그랬을 겁니다.”
하나마나한 소리를 했네 하는 시선으로 하늘을 더듬던 고종환은 다른 걸 물었다.
“한회장은 계속 거기서 기다린 다는 거지?”
거기, 가평이다.
“최실장과 통화했습니다만 변동은 없을 걸로 판단됩니다.”
미국에서 들어온 전문인력들을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계획, 그러나 그것도 귀신이 찾아와줘야 가능한 일이다. 오매불망 기다리고만 있는 거다.
“그래, 하루가 지났을 뿐이니까.”
독백처럼 하늘을 향해 말한 고종환은 미간을 강하게 찌푸렸다.
“그냥 손 놓고 보고만 있을 순 없지.”
뒷짐 지고 하늘을 바라보던 고종환은 느릿하게 돌아서 김부장을 응시했다. 그 눈길을 받은 김부장은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알아들을 것 같다.
“더 세게, 크게 한방 터트려야겠다.”
무슨 의미인자 김부장은 깨달았다.
짐작한 대로다.
귀신사건이 이렇게 뜨겁게 세간을 달구는 걸 식혀야 한다는, 아니 끊어내야 한다는 거다.
‘양석훈.’
온누리그룹에서 이미 터트린 사건, 아직 불씨가 남아 있는 그걸로 대형화재를 일으키라는 거다. 그것이 저 눈빛을 뿌리는 회장의 명령이다.
“알겠습니다.”
고개 숙이는 김부장을 지나 고종환은 걸음을 냈다. 딸의 병실을 향해.
* * *
위스키 잔에 든 얼음이 다 녹도록 한대건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남규덕이란 하찮은 놈을 죽인 배경이 뭔지, 그 여파는 어떠할지, 도대체 누가 죽인 건지, 강남역의 그년이라고 확신하지만 뭘 하겠다는 건지.
‘귀신이랑 한패도 아닌 년이…… 뭘 노리고 이러는 거야?’
다 떠나서 정체가 뭔지 궁금해 미칠 노릇이다.
잡아서 껍질을 벗겨버리고 싶다.
진짜 껍질이든 숨긴 얼굴이든 확 까버리고 싶은데 그러질 못하고 있다.
늘 마음먹은 대로 했었는데, 이번 일은 그렇게 되질 않는다.
“회장님.”
뒤로 다가온 최길준의 목소리에 한대건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창 앞에서 돌아서 최길준의 눈을 보고 알았다.
새로운 상황을 보고하려는 거다.
“세경 측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무슨 일인데?”
“자유겨레당 대표 양석훈, 그 재료를 가져다 쓰겠다고 합니다.”
예감으로 미간을 찌푸리는 한대건에게 최길준은 뒷말을 이어냈다.
“현 상황을 좌시하고 있을 수 없다는 고회장님의 결정이라고 합니다.”
한대건은 중얼거리듯 목소릴 흘려냈다.
“크게 터트리겠다는 소리군.”
시선을 바닥으로 내린 최길준은 재가를 청했다.
“자료를 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처음처럼 창으로 몸을 돌린 한대건은 명료하게 답했다.
“줘 버려.”
대답을 들은 최길준이 물러가려고 하는데 한대건의 목소리가 다시 나았다.
“흡혈귀영감, 왜 그렇게 부르는지 아나?”
멈칫한 그대로 최길준은 한대건의 등을 바라봤다. 그러며 자신이 아는 내용을 더듬었다. 지하금융의 제왕,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 같은 늙은이.
“정말로 피를 빨아먹었어.”
이어 나온 한대건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몰라 최길준은 미간을 좁혔다.
“아주 오래전에, 내가 온누리상사 하나로 일어서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때……”
노을이 번지기 시작한 하늘을 바라보며 한대건은 옛일을 말했다.
“그 영감에게 돈을 빌려 쓴 자가 돈을 못 갚았지. 그래, 그때는 지금처럼 구순의 늙은이는 아니었어. 환갑을 조금 넘겼을 때였던가 그랬을 걸?”
최길준은 한대건의 어깨가 경직하는 걸 봤다. 옛 기억 때문이 분명하다.
“돈 받아낼 길이 없자 그 영감이 피를 뽑아서 팔았지. 채무자와 그 가족의 혈액형이 희귀한 거였거든. 당장 급한 수요자를 찾아내서 판 거야.”
최길준은 황당한 눈을 했고 한대건은 계속 말했다.
“누구도 그렇게까지 할 거라곤 생각 못했지. 그런데 그 영감은 했어.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한 자신의 권리행사를 하듯이 했지. 물론 피를 뽑아 팔아먹기 전에 돈 되는 건 다 처분했고. 딸들은 유흥업소에 팔았지.”
창문에 어리는 노을의 붉은 빛 속에서 한대건은 이를 물며 말했다.
“그 영감이 한 짓들, 입에 담을 수도 없고 생각하기도 싫은 것들이지. 그 영감에게 걸리면 결국 피까지 뽑히고 죽는 거야. 그래서 나는 죽을힘을 다해 버텼다. 그 영감에게는 손 벌리지 않으려고, 안 먹히려고.”
잊었던 숨을 최길준이 내쉬는 데 한대건의 목소리가 다시 나왔다.
“이 세상엔 악이 있다. 그건 선의와 정의를 잡아먹으며 사는 보이지 않는 생물이야. 그걸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내가 살고 죽는 거지. 바로 그 악, 정화가 고종환이란 인간이다. 그 늙은이는 악마 중의 악마야.”
한대건의 목소리는 울림처럼 실내를 떠다녔다.
* * *
전기치료(電氣治療, Elektrotherapie)라고 검색해보면 나오는 건 단순하다.
전기를 응용한 치료법의 총칭이란 거다.
정신과 치료엔 전기경련효과 라는 게 있어서 우울증 치료 등에 사용한다고 한다.
이런 건 아니다.
‘정신과의 치료법과는 연관이 있을 것 같기도 한데.’
깊은 골을 미간에 그린 채 최재우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명지훈이 말한 형제보육원의 별관 특별치료라는 게 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분명 그건 비밀이 있다.
그곳에 드나든 미국인들의 정체도 그렇다.
“후우.”
최재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형제보육원과 관련한 자료라고 남아 있는 게 없다.
그야말로 맨땅에서 헤엄치기다. 어디서부터 뭘 알아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분명한건 귀신 장철의 존재와 관련 있단 예감이다.
‘예감이니까 분명하다곤 말 못하겠지만.’
다시 한숨을 내쉬는 최재우에게 박인수 경정이 다가왔다.
“현장 사진 봤지?”
최재우는 고개를 끄덕였고 박인수는 유지건의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러며 눈짓으로 둘은 어디 갔냐고 묻는다.
“아 예, 별다방에요. 캬라멜마끼야또 맛보겠다고.”
피식 웃은 박인수는 본론으로 돌아갔다.
“남규덕을 분해하고 전시해 놨어. 원룸을 캔버스와 전시장으로 삼은 거야.”
최재우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진저리가 났다.
“귀신만으로 벅찬데 아주 죽여주는 군.”
박인수는 한숨 섞인 목소리를 이어냈다.
“언론에 제보하는 걸로는 이제 성에 안차는 모양이야. 도대체 누군데 이러는 걸까? 사건 초기부터 전체 그림을 알고 보면서 손짓 하던 여자가 이젠 칼을 휘둘렀어. 누굴 위해선지, 자기만을 위해선지, 감이 안 잡혀.”
넋두리처럼 말한 박인수는 최재우의 눈을 응시하고 뒷말을 냈다.
“확실한건 악이라는 거야. 지독하고 끔찍한 악.”
최재우는 소름을 피워냈다. 귀에 맴돌이치는 악이란 말이 의미를 절감하면서.